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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6. 묵상글 ( 대림 제1주간 토요일. - 가엾은 마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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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6. 대림 제1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2.06 03:58
- 가엾은 마음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이 마을 저 마을로 복음 선포 여행하시는데,
가시는 곳마다 병자와 기가 꺾인 이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전합니다.
오늘은 이런 주님을 보며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나의 가엾은 마음은 어디까지인가?’ 하는 성찰을 했습니다.
저의 전 인생을 보고 수도 생활을 보면
스무 살 중반까지는 이 고통스럽고 악한 세상을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황하고 고뇌하며 답을 찾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이때까지의 저는 남의 고통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 때가 아니었고,
오히려 ‘누가 이 고통으로부터 나를 구해줄까?’ 구원자를 찾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 십 년 넘게 방황하고 고민하다가 구원자 주님을 새롭게 만난 뒤에는
가여운 사람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그들을 찾아서 온 세상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국내의 가난하고 병든 이들
그러니까 결핵 환자들, 쓰레기 줍는 이들, 야학으로 공부하는 이들,
공장 노동자들, 시골에서 문화 혜택이나 신앙의 돌봄 없이 사는 이들에게로,
그다음엔 북한으로 중국으로 러시아로 중앙아시아로 범위를 넓혀 찾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범위가 좁아 들어 주변 분들,
그러니까 찾아가지 않고 찾아오는 분들과 연민을 나누는 정도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외부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리된 것도 있지만
기가 꺾인 이들을 찾아가기엔 제 기운이 달려서 그리된 측면도 있고,
더 근본적으로 제 마음이 점차 ‘멀리’가 아니라 ‘가까이’로 달라졌습니다.
멀리 있는 이들의 고통이 눈에 보일 때는 가까운 이들의 고통을 보지 못했고,
심지어는 가까운 이들의 고통을 보기보다 불만스러운 것들을 더 많이 보았습니다.
이것이 가까운 사랑에 실패한 이유 곧
멀리 있는 사람은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은 미워하는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려면 그의 고통이 보여야 합니다.
그의 단점과 잘못과 죄와 악이 보이면,
다시 말해서 그의 단점과 잘못과 죄와 악이 가여워 보이지 않고,
불만스럽게 보이기 시작하면 사랑은 이미 저만큼 물 건너 간 것입니다.
어쨌거나 저는 주님처럼 이 마을 저 마을로 찾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께도 고통 중에 있는 분들에게도 무척 많이 죄송하지만 사랑일지라도
욕심부리지 않고 겸손하게 가까운 고통들에 대해 가엾은 마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가엾은 마음,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듯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 가엾은 마음만은 사라지거나 졸아들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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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6.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거져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스승이자 치유자이신 연민의 하느님 배워 닮기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시편147,3)
우리가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은 “연민(compassion)”의 하느님이십니다. 바다처럼 끝없이 깊고 넓은 연민의 사랑입니다. 측은히 여기는 사랑, 가엾이 여기는 사랑, 불쌍히 여기는 사랑, 바로 한없이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사랑이라는 면에서 불가의 사랑과 일맥상통합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배워 닮아야 할 바, 이런 하느님의 자비심입니다. 이래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자비송이 한없이 고맙고 좋습니다.
어제 대림1주 금요일 교황청 전담 설교 사제 파솔리니는 레오 교황은 물론 모든 고위 성직자들을 가득 채운 바오로 6세 홀에서 성탄을 앞둔 세차례의 설교중 첫째 시간을 가졌고 그 끝부분입니다.
“대림은 교회가 희망을 재점화하는(rekindles) 시간입니다. 주님의 첫째 오심을 관상할뿐 아니라, 무엇보다 그분의 마지막 오심도 관상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기다리도록 동시에, 고요하고 능동적인 깨어 있음중에 주님의 오심을 재촉하도록 불림받았습니다.”
첫 대림 설교 시간 맨 앞자리 중앙에 앉아 겸손히 경청하는 레오 교황의 모습도 경건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대림의 설렘의 기쁨과 더불어 배워 닮아야 할 하느님의 연민입니다. 바로 제1독서 이사야서에서 <스승이자 치유자>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잘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연민의 사랑은 가르침과 치유를 통해 잘 드러납니다.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그리고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 길이니 이리로 가거라.’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에 이어 하느님의 치유하시는 모습이 은혜로이 소개됩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 하리라.”
낮과 밤이 빛으로 하나된 치유의 현실이 그대로 이뤄지는 대림시기입니다. 오실 주님께서 이미 활동하시니 바로 오늘 복음입니다. 하느님의 연민의 사랑, 자비는 예수님을 통해 고스란히 실현됩니다. 복음 서두에서부터 보다시피 스승이자 치유자로서 예수님의 활동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니 이 또한 하느님의 가이없는 사랑, 연민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인간 무지의 현실입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답은 스승이자 치유자이신 예수님뿐임을 절감합니다. 참 스승이신 예수님께 배워야 하고, 참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치유받아야 합니다. 인공지능(AI)의 역할이 아무리 강조되도 예수님의 역할을 결코 대체할 수 없습니다. 목자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자 역부족한 현실에 제자들에게 주인이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라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이어 주님은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이들을 당신 추수밭의 일꾼으로 파견하십니다. 당신 스승의 역할과 치유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어 파견하십니다.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 하기에 앞서 내가 그 일꾼이 되도록 불림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게 하십니다.
대림시기, 이사야의 예언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기르침과 치유활동을 통해 실현되며, 똑같은 주님께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통해 또 실현됩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1.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2.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3.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4.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여기 넷에 해당되지 않는 건강하고 자유로운 이는 아마도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넷에 포함될 것입니다. 죄가 많으니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병마와 싸우는 병든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갖가지 병으로 앓는 이들은 얼마나 많으며, 영적으로 양심적으로 죽거나 죽어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으며, 영적 나병환자들은 얼마나 많으며, 세상 다양한 마귀들에 종이 되어 사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지요? 자유롭고 자연스런, 건강한 주체적인 사람들을 참 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한마디로 참 스승이자 참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떠나 스스로 자초한 자업자득의 결과입니다. 자유롭고 자연스런, 온전한 참 사람이 되는 길은 예수님과의 평생 우정뿐입니다.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우리의 배움도 날로 깊어지고 더불어 온전한 치유도 일어날 것입니다.
날마다 스승이자 치유자이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가르치시며 치유해주십니다. 배움의 일상화, 치유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주님의 미사 은총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 모두!”(이사30,18ㄷ).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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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6.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 전례>는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 30,19)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는 노래합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시네.”(시 147,3)
<복음>에서는 ‘선한 목자’가 지닌 자비의 마음, 곧 “가엾은 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사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온갖 고통과 질병과 가난과 근심에 시달리는 이들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한 일자리를 못 얻어 거리에서 기가 꺾여 방황하는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가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있는 이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곁에 있는 형제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또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
그것은 ‘가엾이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지니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곧 타인의 처지에 마음을 아파하지 않음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처지를 보고 슬퍼지는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같이 지니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를 우리는 “하느님의 연민”, 곧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제1독서>와 <화답송>에서 보여주듯이,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는 마음’입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태중의 아기와 분리되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을 말합니다. 엄마의 숨으로 두 몸이 함께 숨 쉬는 것을 말합니다. 곧 타인을 ‘자신의 일부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일부’로 여기십니다. 그러니 지체가 아프면 온몸이 함께 아프게 됩니다. 우리도 그분의 이 마음을 품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립 2,5).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주님!
어디를 가더라도 저의 길동무가 되어 주시고,
저의 길이 되어 주소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의 파트너가 되어 주시고,
저의 언어가 되어 주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저의 동료가 되어 주시고,
저의 일이 되어 주소서!
제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며,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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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6.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의 언론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회장, 삼정의 이재용 회장, 현대의 정의선 회장이 강남의 한 치킨집에서 만나는 장면입니다. 세 사람은 ‘치맥’을 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엔비디아의 ‘GPU’는 인공지능 시대의 ‘쌀’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삼성의 반도체는 인공지능 시대의 ‘밭’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현대의 자동차는 인공지능 시대의 ‘몸체’와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쌀과 밭과 몸이 만나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겠다고 합니다. 인공지능 분야의 대표들이 한국을 찾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한국은 자체 플랫폼이 있는 나라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한국은 네이버, 다음과 같은 검색엔진이 있습니다. 한국은 산업용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는 제조업이 발달한 나라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한국은 인공지능을 이용할 엔지니어들이 풍부한 나라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한국은 인공지능에 필요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이 네 가지를 모두 갖춘 나라는 한국과 중국이 있다고 합니다. 인공지능 분야의 대표들은 중국보다는 한국을 택한 것 같습니다.
뉴턴의 운동 법칙은 근대 물리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뉴턴은 3가지의 법칙으로 우주의 질서를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입니다. 근대 물리학은 뉴턴의 운동 법칙이라는 뿌리에서 줄기를 뻗었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주의 힘은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300년 동안 우주의 힘은 뉴턴의 법칙으로 설명하게 되었고,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의 질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뉴턴의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미시 세계에서는 뉴턴의 법칙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새롭게 상대성 이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변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빛의 속도에서는 시간이 변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양자역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생명공학, 양자컴퓨터의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틀’을 벗어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만들 때 감독은 ‘예고편’을 만듭니다. 관객은 예고편을 보면서 본 편의 내용을 기대하게 됩니다. 드라마도 한 회가 끝날 즈음에 다음 회의 내용을 조금 알려줍니다. 그러면 시청자는 다음 회를 기다리게 됩니다. 요즘 우리는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묵상합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마치 예고편과 같습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곧 다가올 절정을 알려주는 드라마와 같습니다. 이사야 예언서가 예고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고통이 없습니다. 미움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이 없습니다. 생과 사의 고리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 없습니다. 소유에서 존재의 삶으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자아 때문에 생기는 고통이 없습니다. 본래의 자아를 만나기 때문입니다. 요즘 복음은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가 현실이 되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과학혁명의 구조와는 다른 패러다임의 전환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는 것은 뉴턴의 운동 법칙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상관이 없습니다. 천동설과 지동설도 상관이 없습니다. 말씀이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말씀이 시간과 공간의 ‘틀’까지도 바꿀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신앙의 신비로 받아들입니다. 신앙의 신비에는 4가지의 힘이 있습니다. 천주존재, 상선벌악, 삼위일체, 강생구속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 별들의 수를 정하시고, 낱낱이 그 이름 지어 주시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고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 없네. 주님은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말씀으로 권한을 주셨습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신앙의 신비로 믿고 따른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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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6. 대림 제1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사랑에 '예'로 응답하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2월 5일 금요일- 마흔아홉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성모님과 "예"의 힘!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창조되었고, 사랑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으로부터 우리의 모든 행동이 흘러나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신부는 하느님과의 친밀함을 ‘사랑으로 드리는 예, 곧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응답’으로 설명합니다.
신앙의 깊은 자리로 들어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 안에 깃들어 있는 현존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가득한 ‘예’이며,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이를 성령이라 부릅니다. 성령은 곧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하느님, 우리의 가장 깊고 참된 자아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바로 우리 존재의 근원이십니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이 현존을 ‘나 자신보다 더 가까운 분’, ‘나보다 더 참된 나’라고 표현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를 토머스 머튼처럼 참된 자아라 부릅니다. 그러나 이 현존은 깨어나고 선택되어야 합니다. 성령은 모든 이에게 완전히, 그리고 동일하게 주어지지만,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현존은 인식되고 존중되며, 의지될 때 비로소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현존이 됩니다.
더 넓고 깊은 내적 자리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공감하며, 용서하고,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창조되었고, 사랑을 위해 존재하며, 사랑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바로 이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내 안에 있는 깊은 ‘예’는 곧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드러내며, 이미 나를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1]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고자, 영적 지도자 콜렛 라피아는 친구인 수도자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서 나를 더 사랑하시도록 내어 맡길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이미 여러분을 무한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보다 더 사랑하실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당신은 [하느님의] 그 사랑을 더 의식하고, 그 현존 안에 머무르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새소리를 듣는 것과 같습니다. 귀 기울이고 기뻐할 때, 그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형제의 지혜를 마음에 새기며, 저는 제 안과 주위에 펼쳐진 사랑의 풍경에 더 깊이 열려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미 제가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 안에 있음을 깨달았고, 여러 또한 그러합니다.
하느님과 더 깊고 영속적인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우리 안의 장벽들을 마주하고 이해함으로써 성장합니다. 동시에, 느끼고 보고 직관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의 빛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내적 앎과 은총, 그리고 저항의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 맡길 때,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더 충만한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와 기도의 삶에서 수용성은 근본적인 토대가 됩니다. 사랑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수용성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움직임에 귀 기울이고, 하느님과의 친교 안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며, 그분의 사랑 안에 더 깊이 머물도록 이끕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여러분을 더 사랑하실 수 없습니다. 이미 무한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느님께, 이웃에게, 그리고 삶 전체에 마음으로 응답할 수 있으며, 그 마음은 모든 이를 향한 자비의 근원이 됩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체제의 가장자리에서 "권력과 맞서려는 노력"은 저항과 반발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사랑은 부정적인 것을 흡수하고, 선과 악 모두를 비추며, 기도와 행동으로 그것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때로는 혼란스럽고 불편할 수 있지만, 끝까지 머무르는 이들에게는 참되고 일치된 변화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현상 유지를 흔드는 것처럼 보일 때 성령께서 어디로 이끄시는지 알기 어렵지만, 성령께서는 당신 뜻대로 우리를 이끄시며, 권세가 선을 위해 변화될 때 적의 미소 속에서도 그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Jane S.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Silent Compassion: Finding God in Contemplation (Franciscan Media, 2014), 46, 47.
[2] Colette Lafia, The Divine Heart: Seven Ways to Live in God’s Love (Monkfish, 2021), 22, 2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ranish Shrestha,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앞으로 무엇이 닥쳐올지 알지 못하면서도 ‘예’라고 응답하는 것은, 단순한 현실을 넘어서는 용기입니다. 이는 마치 성모께서 어두운 밤 한가운데서 자신의 작은 ‘예’의 빛을 굳게 붙들고 계신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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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6. 대림 제1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9,35)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헐뜯는 자들의 무딘 마음을 벌주기를 삼가셨을 뿐 아니라, 꾸짖지도 않으셨습니다. 이는 그분의 온유함을 알려 주는 또 다른 증거이며. 그들의 악의적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이루어질 표징들과 더욱 명확하게 전개될 논박으로 당신의 영광에 관한 더 많은 증거될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온 고을과 마을과 회당을 두루 다니시며, 당신을 공격하는 이들에게 똑같은 욕설로 대하지 말고 더 자비롭게 대하라고 모든 이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동료들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도 그에게 선을 행하십시오. 그들이 어떤 짓을 하든, 그들에게 선을 행하기를플 그치지 마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더욱 큰 상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욕을 먹고 선을 행하기를 그만 둔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바랐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은 오직 선올 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두루 다니셨습니다. 그분은 병자들이 당신께 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복음과 그들의 병 치유라는 두 가지축복을 가지고 몸소 서둘러 그들에게 가셨습니다. 그것을 주시기 위해, 아무리 작은 마을도 지나치지 않고 온갖 곳을두루 다니셨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5 우리의 신성
이것을 위해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고 하셨다(사도 1,4).
영혼 안에 피조물들의 차이가 있는 한, 영혼에게는 근심이 될 것입니다. 자주 말씀드렸듯이, 영혼이 자신의 존재, 곧 자연 그대로 지어진 존재만을 가진 곳에서는 어떠한 진리도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영혼의 지어진 본성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많은 성직자들은 하느넘과 관련된 아무개, 곧 하느넘과 하나인 아무개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과는 공통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어진 것은 모두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과 지어진 만물은 그 아무개와는 거리가 멀고 낯설 따르입니다. 그것은 자기 바깥에서 아무것도 흡수하지 않는 하나 그 자체입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빛보다 높은 하늘, 모든 이해와 모든 파악을 넘어서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빛을 넘어서는 사람들은 일치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불사불멸하시고 가까이할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도다”(1티모 6,16). 사람이 도달하기 어려운 이 빛은 순수한 일치 그 자체 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죽어야 하고, 철저히 죽어야 하며, 스스로 아무것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비슷한 것일랑 모두 여의고, 그 누구와도 비슷해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할 때만 우리는 실로 하느님처럼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와도 똑같지 않고, 그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게 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우리도 하느님 자신인 일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아멘.(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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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 이웃 종교의 날✝️
6. 교황 프란치스코의 찬미받으소서 220-221항
220. 이러한 회개에는 여러 가지 태도가 필요한데, 이러한 태도들이 서로 어우러져 관대하고 부드러움이 넘치는 환경 보호의 정신을 촉진하는 것입니다. 먼저 감사와 무상성의 태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세상올 사랑으로 선물하셨기에 우리도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포기하고 누가 보거나 인정하지 않더라도 관대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게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3-4). 또한 이러한 회개는 우리가 다른 피조물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세상의 다른 존재를과 더불어 커다란 보편적 친교를 이루고 있다는 사랑에 넘치는 인식을 포합합니다. 신자들은 세상을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바라보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모든 존재와 결합시켜 주신 유대를 깨닫습니다. 생태적 회개는 하느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고유한 능력을 증진시켜 주어, 창의력을 전개하고 열정을 북돋우게 하며,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마 12.1)로 봉헌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탁월함을 개인적 영광이나 무책임한 지배의 근거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서 비롯된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하는 특별한 능력으로 이해합니다.
221. 이 회칙의 서두에서 제시한 우리 신앙에 대한 여러 확신들이 그러한 회개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 줍니다. 여기에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모습을 어느 모로 반영하며 우리를 가르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또는 그리스도께서 이 물질세계에 몸소 오시고 이제 부활하시어 모든 존재의 내면에 현존하시며 사랑으로 감싸 주시고 당신 빛으로 밝혀 주신다는 확신이 포함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며 그 안에 인간이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질서와 역통성을 새겨 주셨다는 인식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참새들에 대하여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루카 12.6)라고 하신 말씀을 읽고서도, 새들을 소훌히 대하거나 해칠 수 있습니까?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회개의 이 차원을 분명히 드러내어, 우리가 받은 은총의 힘과 빛이 다른 피조물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도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그토록 훌륭하게 실천하신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숭고한 형제애의 증진에 이바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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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6. 대림 제1주간 토요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주님의 ‘가엾은 마음’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자비의 감정,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 안으로 들어가 움직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이 마음이 바로 치유와 기적의 근원이었습니다.
주님은 단지 병을 고치고 굶주림을 해결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람의 상처를 알아보시고, 그 안에 숨은 고통을 껴안으신 분입니다. 주님의 기적은 단순히 초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분의 가엾은 마음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난 사랑의 결과였습니다. 병자들이 일어나고, 귀신 들린 이들이 해방되며, 죄인들이 용서받는 모든 일의 출발점에는 언제나 자비로 가득 찬 주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가엾은 마음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그분의 마음을 이어받아 세상 곳곳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도들이 됩니다. 주님의 자비는 그분 안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에게 흘러와 세상으로 흘러가야 하는 생명의 강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여전히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마음이 병든 이들, 절망 속에서 방향을 잃은 이들, 외로움과 불안에 짓눌린 이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재물이 아니라 주님의 가엾은 마음을 닮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바로 이 자비의 마음으로 세상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 진심으로 “괜찮아요, 당신은 사랑받는 존재입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용서하고 품어줄 때, 그 순간 하느님의 은총은 다시금 이 세상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적으로 드러납니다.
주님의 가엾은 마음은 2천 년 전 갈릴래아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은 현재까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손길과 말, 그리고 기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슴앓이
⭐가수 양하영 님의 ‘가슴앓이’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옵니다.
아~ 어쩌란 말이냐 흩어진 이 마음을~~~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가끔, 혹은 자주…. 흩어져 있는 마음 때문에 혼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또 가끔, 혹은 자주…. 아픔 마음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고,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만나는 순간…. 어떤 답도 찾을 수 없는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한마디는 위의 가사와 같을 것입니다.
아~~ 어쩌란 말이냐~~~
아~~ 어쩌란 말이냐~~~
이렇게 목 놓아 ‘어쩌란 말이냐~~’라고 외치다 보면
그래도 뭔가…. 마음 한편에 시원한 바람이 찰랑거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해보세요. 아~~ 어쩌란 말이냐~~~ 아~~ 어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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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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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6.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정혜윤 작가의 ‘책을 덮고 삶을 열다’라는 책에 소개된 울산에 사는 경비원 이야기가 감동적입니다. 이분은 경비 일을 하면서 수십 년간 꾸준히 기부했고, 국무총리상까지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부를 오랫동안 하게 된 것은 장모님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었는데,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 승낙을 위해 이 여자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사랑하는 여자의 어머니께서 다리 저는 자기 모습을 보고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가? 내가 이제부터 자네의 어머니가 되겠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때부터 고마움을 잊지 않고 사랑을 나누기로 마음먹어서 정기적으로 기부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리를 전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장모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받을 사랑만 생각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하나 먼저 받아야 나도 하나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하나를 주면 상대도 당연히 하나 이상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나의 사랑이 전달되어 비록 내게 되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이 커질 때 진짜 사랑이 됩니다. 그때 사랑이 넘쳐나는 곳, 그래야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갑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군중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다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은 단순히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아닌 깊은 아픔과 연민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지 못함에 대한 아픔과 연민입니다. 그래서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구원의 길에 우리 모두 들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6)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신 것은 구원을 위한 어떤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십니다.
길 잃은 양들과 같이 소외되고 아픔 속에 있는 사람을 향해 ‘가엾은 마음’을 느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따른다면,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가엾은 마음’을 느끼고 그들을 향한 우리의 손길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받을 것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모든 이의 구원보다 나만의 구원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가엾은 마음을 간직하면서, 기도하고 동시에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 사이의 신뢰는 쉽게 깨질 수 있지만, 충직한 동물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콘라드 로렌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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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6. 대림 제1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예수님은 우리 안에 이미 하느님의 선물과 가능성이 있음을 보셨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라디오 광고 같은 것을 들으면 세상이 끝나는 듯한 긴박감과 흥분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언어를 이해하고 나면, 사실은 이미 가지고 있는 세면도구나 집을 어지럽히는 잡동사니, 혹은 살을 빼준다는 음식에 관한 광고일 뿐임을 알게 됩니다.
광고는 진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끌며, 언어와 인간의 감정을 값싸게 만들어 버립니다. 세상에는 정말 긴급하고 비극적이며 놀라운 일들이 많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이미 광고 산업에 의해 소모되어 버렸습니다.
집이 불타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쪽이야! 이쪽이야!”라고 외치며 안내하지만, 그들이 가리키는 곳은 화재 현장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빗자루 벽장이나 다락방 같은 엉뚱한 곳입니다. 문제는 길잡이가 없다는 게 아니라, 길잡이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우리를 돌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광고는 우리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미래에야 충족될 수 있다고 믿게 만듭니다. 지금의 삶에 대한 불만을 자극해, 미래에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가 우리를 만족시켜 줄 것처럼 속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미래의 충족”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 약속입니다. 광고는 이 거짓된 희망을 반복하며 세대마다 계속 살아남습니다. 진정한 충족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단순한 것들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현재를 거부하고 미래의 약속만 좇는다면, 그것은 곧 삶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며, 어떤 상품도 이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을 “겨(chaff)”라고 불렀습니다. 겨는 곡식에서 떨어져 나간 껍질로, 쓸모없고 버려지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을 겨가 아니라 풍성한 곡식의 이삭으로 보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다”라는 말씀은 인간 안에 이미 주어진 선물과 가능성을 인정하는 선언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다가올 분이 겨를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울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오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태울 겨로 보지 않고 풍성한 추수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 안에 이미 있는 하느님의 선물과 가치를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이기에 생명을 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종종 사람들을 성과, 지위, 외모로 평가하며 “쓸모없다”는 낙인을 찍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안에 이미 하느님의 선물과 가능성이 있음을 보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를 부족한 존재로 여기기보다, 이미 풍성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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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6. 대림 제1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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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6. 대림 제1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면서도
혼자서 그 모든 사람을 감당하시기에는
일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나누어 주십니다.
이제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시고는 당신께서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하늘 나라를 선포하게 파견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권한을 거저 제자들에게 주신 이유는
제자들이 그것을 거저 사람들에게 주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흐름이 생깁니다.
하느님에게서 시작한 선의는
몇몇 사람에게 전달되고
그들은 그것을 옆 사람에게 전합니다.
그러면서 하늘 나라의 복음도 같이 선포됩니다.
즉 하느님의 선의가 전달되는 과정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는 과정과 같으며
그렇게 하늘 나라는 확장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그 무엇이든
그것을 우리는 하느님께 받았습니다.
우리의 필요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또한 우리는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받은 것을 나눌 때
우리는 앞에서 말한 하나의 흐름에 속하게 되고
그렇게 우리도 하늘 나라를 확장하는 데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그 무엇이든 상관 없습니다.
그것은 물질이 될 수도 있고
마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서로를 위한 마음에 기도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못할 수 있고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만
내가 가진 것을 주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는 그리 넓지 않고
우리가 해야하는 범위는
그리 넓지 않아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한 사람 한 사람 건너가다보면
어느새 이 세상 모든 곳에 하늘 나라가 전해질 것입니다.
우선 내 옆의 사람에게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가진 것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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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6. 대림 제1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9,35-10,1.6-8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어제 복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참된 ‘믿음’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오늘 복음은 우리가 마음 속에 지녀야 할 진정한 ‘희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희망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우리가 마음 속에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이지요. 그 희망은 언젠가 일어날 일을 막연히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내가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상황 속에서, 내가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분께서 필요로 하시고 원하시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준비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세상에 ‘파견’하시는 것도 그것을 위해서이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은’ 현실을 안타까워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하시는 은총의 선물은 참으로 다양하고 풍성한데, 그것을 알아보는 지혜가 너무나 얕고, 그것을 싸고 있는 고통이라는 포장을 감당하려는 의지는 너무나 약한 우리의 마음가짐을 안타까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나약한 마음은 자기가 이미 받은 것, 지금 누리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통해 또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웃에게 거저 베풀고 나누는 태도를 통해 강해집니다. 그리고 작고 약한 이들, 슬픔과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가엾이 여기며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깊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삶의 현장’으로 파견하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말씀을 듣는 내가 어떤 처지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청하는 나는 수확할 밭의 ‘주인’이 아닙니다. 나 역시 ‘수확’이라는 소명을 받은 주님의 일꾼일 뿐이지요. 그러므로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는 것은 나는 그 일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처럼 멀뚱멀뚱 서 있으면서 내 대신 일할 사람을 보내달라고 청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뜻을 전할 ‘예언자’로 누구를 보낼지 고민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청했던 이사야 예언자처럼, 나 자신을 도움이 필요한 곳에 당신의 일꾼으로 보내달라고 적극적으로 청하라는 뜻입니다. 그 거룩한 파견이 나 자신과 내가 만날 사람들 모두를 구원과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인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당신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거룩한 권한과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니 ‘능력이 없어서 못한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지요.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작은 희생과 양보, 배려로 삶을 살맛나게 만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고된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것은 내가 가진 재물, 시간, 능력을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나누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 두려움과 걱정으로 힘겨워하는 이웃에게 하느님 나라라는 참된 희망을 전하는 것은 하느님 뜻을 따르기 위해 손해나 희생도 기꺼이 감수하며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외치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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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6. 대림 제1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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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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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6. 대림 제1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김건태 신부님_기쁨의 증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남긴 명언 가운데 ‘슬픈 성인은 거룩하게 슬픈 사람일 뿐이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격언으로 자리한 이 말씀은 사실 복음이 말하는 지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뿌리 깊은 기쁨 속에 살며, 당신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 될 것을 권유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신 제자들에게 맡기신 메시지는 슬프거나 불행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사명, 표징을 동반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부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표징들은 슬픔에 대한 기쁨의 승리,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 죄에 대한 하느님 자비의 승리를 가르킵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제자들의 기쁨은 물리적인 단순한 차원을 뛰어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고 체험하는데 뿌리를 두고 있는 참 기쁨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강렬하게 의식하며, 성령의 이끄심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오래 슬픔 속에 머물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의 삶을 하나하나 새겨나가는 힘든 여정의 한가운데서도, 이 사람은 이 힘든 여정을 앞서서 그리고 대신 헤쳐 나가시는 분을 늘 바라보며 그 뒤를 따라가고자 힘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인 기쁨이라 하더라도, 이 기쁨 속에 잠재우고자 애쓰는 슬픔으로 슬픈 이 세상에 살면서도, 제자들은 무한한 사랑을 기초로 한 기쁨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제자들의 뒤를 이어 우리는, 사적으로 또는 공동체적으로, 생명과 희망의 표징들을 싹틔울 사명 앞에 섭니다. 모두 다 함께 또는 개별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아직도 존재하는 악의 세력들을 어떻게 쫓아내야 하는지, 이 세력의 종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어떻게 자유의 맛을 되돌려 주어야 하는지, 더는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 축제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리거나 마다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지를 고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구원에 협력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주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구원받을 사람이라는 희망과 신념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변모시킬 수 있는 기쁜 소식의 선포자이며 전달자입니다. 신앙의 새로운 한 해에 접어들어, 더욱 열정적인 기도와 온전한 사랑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힘차게 선포하는 신앙인의 삶을 되새기고 다짐하는, 값진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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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29
12월6일 [대림 제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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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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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천승녕 가브리엘(신사베드로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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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결핍 때문에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
업무상 기가 꺾인 형제자매들을 자주 만납니다. 너무 그렇게 생각하시지 말래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크게 후회하고 가슴을 칩니다. 지난 인생을 부끄러워하고 슬퍼합니다.
그런 분들 바라보며 드는 생각입니다. 너무 괴로워하고 슬퍼할 일 아니라고. 우리의 하느님은 기가 크게 꺾인 사람들, 의기소침한 사람들, 약점과 결핍투성이인 우리를 위해 육화강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오늘도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주님께서는 ‘기가 꺾인’ 우리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지니십니다. 세상의 냉혹함 앞에 기가 꺾인 우리, 세상의 강자들의 폭력에 기가 꺾인 우리, 자신의 거듭되는 죄와 악습 앞에 기가 꺾인 우리를 보시고 가엾어 하십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우리의 고통 앞에 눈물 흘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면, 가장 큰 배경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선행을 많이 쌓아서? 보속을 열심히 해서? 세상을 위한 큰 업적을 쌓아서? 기도를 많이 해서?
물론 그런 노력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부분들입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인간 구원의 배경이 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없이 나약한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심, 측은지심, 연민의 마음, 가엾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 측의 큰 결핍, 한없는 부족함, 우리 인간이 흘리는 끝도 없는 눈물, 고통과 절규는 주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주님의 측은지심을 불러옵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 인간의 고통과 슬픔이 곧 주님 구원의 손길을 불러오는 원동력입니다.
오늘 우리가 큰 슬픔 속에 머물러 있다면, 오늘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강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다면, 그것은 그리 나쁜 표시가 아닙니다. 주님 구원의 손길이 그리 멀지 않다는 표시입니다. 주님 사랑의 손길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아이들 집을 방문할 때 마다 느끼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 무럭무럭 성장해서 자신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그저 대견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마음이 든든해지고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더 눈길이 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덜 자란 아이들, 아직도 누군가의 손길을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상처많은 아이들입니다. 형들에게 구박받는 아이들, 애정 결핍으로 힘겨워하는 아이들에게 한번 더 손길이 갑니다.
우리 인간을 바라보는 주님의 시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기 극복을 못해 힘겨워하는 사람들, 늘 다람쥐 챗바퀴 돌듯이 악습을 거듭하는 사람들, 부족한 자신을 용납할 수 없어 슬퍼하는 사람들, 작은 것에 의기소침해지고 낙담하는 우리들을 향한 하느님 자비의 눈길은, 더욱 애틋하고 각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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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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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망치는 순교자 콤플렉스>
7세기 이전, 북아프리카 교회는 성 아우구스티노와 키프리아노 같은 위대한 교부들을 배출한 가톨릭 신학의 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곳의 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모스크만 남았습니다. 왜 그 찬란했던 교회는 멸망했을까요? 치명적인 실수는 바로 '독점'이었습니다.
당시 교회 지도층은 로마에서 온 라틴어 사용자들끼리만 사제직을 독점했고, 현지인인 베르베르족을 사제로 키우는 데 인색했습니다. "저들은 무식해서 안 돼"라는 엘리트 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슬람 군대가 쳐들어와 라틴 사제들을 추방하자, 목자를 잃은 양들은 순식간에 이슬람으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반면 토착민 사제를 열심히 키웠던 이집트 콥트 교회는 지금까지 살아남았습니다. 후계자를 키우지 않는 엘리트주의는 멸망의 지름길입니다.
이러한 비극은 세속 역사에서도 반복됩니다. 세계를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은 33세에 요절하며 "제국을 누구에게 물려주겠느냐?"는 질문에 "가장 강한 자에게"라는 무책임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정복자였을지 몰라도, 백성을 책임지는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권력을 나눌 2인자를 키우지 않았기에, 제국은 그의 죽음과 동시에 장군들의 내전으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독점욕은 결국 자신이 쌓은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우리는 흔히 "본당에 봉사자가 없다,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순교자 콤플렉스(Martyr Complex)'라는 용어를 씁니다. 입으로는 "나만 고생한다, 힘들어 죽겠다"고 불평하지만, 막상 누군가 도와주려 하면 "당신은 이 일을 몰라"라며 거절하고 일을 움켜쥐는 심리입니다. 이들은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나 없으면 조직이 안 돌아간다'는 그 비장미를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그 자리를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전능하시지만 혼자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당신이 가진 '마귀를 쫓고 병을 고치는 권한'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나만 할 수 있어"가 아니라 "너희도 가서 하라"며 파견하셨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제자가 자신을 넘어서기를 바라고, 참된 목자는 양 떼 속에서 또 다른 목자가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 내 자리를 대신할까 봐 두려워하거나 후배 양성에 소홀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라 경쟁자를 죽였던 헤로데의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그는 기술자가 아니었지만 당대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여기, 자신보다 더 우수한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았던 사람이 눕다." 그는 일꾼을 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들이 자신보다 뛰어난 것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다 해야 한다는 욕심을 버리고 더 나은 일꾼을 세울 때, 하느님의 사업은 더욱 번창합니다.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도 한때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는 저 혼자만 남았습니다" 라고 하느님께 불평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열정이 아니라 영웅주의적 고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아직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이 있다. 가서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후계자로 세워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해결책은 엘리야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짐을 나누어 질 후계자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짊어지고 가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중세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의사들이 다 죽거나 도망쳐 치료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교황 클레멘스 6세는 일반인들도 임종을 지키고 고해를 들을 수 있도록 파격적으로 허락했습니다. 밭이 썩어가고 영혼들이 죽어가는데 "자격증이 있느냐"를 따지며 기득권을 지킬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성소자 가뭄이라는 흑사병을 앓고 있습니다. "사제가 없다, 수녀가 없다"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성소 발굴을 위해 뛰고 평신도 리더들을 키워내야 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 주님께서는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일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나 혼자 영광을 독점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진심으로 내 짐을 나누어 질 형제를 보내 달라고 기도합시다.
후계자가 끊긴 제단에는 잡초만 자랄 뿐이지만, 일꾼을 키우는 교회에는 영원한 생명이 자라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제자들을 뽑으셨던 예수님의 모습대로 자신의 일을 이일 일꾼을 만드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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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의 언론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회장, 삼정의 이재용 회장, 현대의 정의선 회장이 강남의 한 치킨집에서 만나는 장면입니다. 세 사람은 ‘치맥’을 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엔비디아의 ‘GPU’는 인공지능 시대의 ‘쌀’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삼성의 반도체는 인공지능 시대의 ‘밭’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현대의 자동차는 인공지능 시대의 ‘몸체’와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쌀과 밭과 몸이 만나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겠다고 합니다. 인공지능 분야의 대표들이 한국을 찾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한국은 자체 플랫폼이 있는 나라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한국은 네이버, 다음과 같은 검색엔진이 있습니다. 한국은 산업용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는 제조업이 발달한 나라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한국은 인공지능을 이용할 엔지니어들이 풍부한 나라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한국은 인공지능에 필요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이 네 가지를 모두 갖춘 나라는 한국과 중국이 있다고 합니다. 인공지능 분야의 대표들은 중국보다는 한국을 택한 것 같습니다.
뉴턴의 운동 법칙은 근대 물리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뉴턴은 3가지의 법칙으로 우주의 질서를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입니다. 근대 물리학은 뉴턴의 운동 법칙이라는 뿌리에서 줄기를 뻗었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주의 힘은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300년 동안 우주의 힘은 뉴턴의 법칙으로 설명하게 되었고,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의 질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뉴턴의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미시 세계에서는 뉴턴의 법칙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새롭게 상대성 이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변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빛의 속도에서는 시간이 변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양자역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생명공학, 양자컴퓨터의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틀’을 벗어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만들 때 감독은 ‘예고편’을 만듭니다. 관객은 예고편을 보면서 본 편의 내용을 기대하게 됩니다. 드라마도 한 회가 끝날 즈음에 다음 회의 내용을 조금 알려줍니다. 그러면 시청자는 다음 회를 기다리게 됩니다. 요즘 우리는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묵상합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마치 예고편과 같습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곧 다가올 절정을 알려주는 드라마와 같습니다. 이사야 예언서가 예고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고통이 없습니다. 미움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이 없습니다. 생과 사의 고리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 없습니다. 소유에서 존재의 삶으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자아 때문에 생기는 고통이 없습니다. 본래의 자아를 만나기 때문입니다. 요즘 복음은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가 현실이 되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과학혁명의 구조와는 다른 패러다임의 전환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는 것은 뉴턴의 운동 법칙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상관이 없습니다. 천동설과 지동설도 상관이 없습니다. 말씀이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말씀이 시간과 공간의 ‘틀’까지도 바꿀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신앙의 신비로 받아들입니다. 신앙의 신비에는 4가지의 힘이 있습니다. 천주존재, 상선벌악, 삼위일체, 강생구속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 별들의 수를 정하시고, 낱낱이 그 이름 지어 주시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고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 없네. 주님은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말씀으로 권한을 주셨습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신앙의 신비로 믿고 따른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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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복음서는 여러 곳에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감정을 묘사하는데, 연민, 곧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기적의 대부분을 설명하는 열쇠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라는 표현은 그리스 말로 ‘창자가 움직이다.’라고 표현됩니다. ‘뱃속, 창자’는 구약의 전통에서 어머니의 마음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우리말에서도 ‘마음’을 뜻하지요. 창자를 뜻하는 옛말 ‘애’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을 가리키면서 ‘애가 탄다.’, ‘애간장이 녹는다.’ 등으로 간절함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그저 상대를 가엾이 여기시는 감정에 그치시지 않고 시달리고 기가 꺾인 이들을 위하여 행동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느끼시는 연민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시작입니다. 삶 전체를 내주는 헌신으로 이어지는 연민이지요.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을 볼 때 연민을 느끼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하거나 부담스러워서 그냥 눈을 감아 버리지는 않나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듯이 우리에게도 당신의 일을 함께 하자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로 성령의 힘과 권한을 주셨고, 성체성사로 당신과 일치하는 가운데 그 힘을 새롭게 하십니다. 수확을 위한 일꾼을 꼭 사제 성소자나 축성 생활 성소자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헌신하려면 지치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이 먼저 필요합니다. 거저 받은 주님의 연민과 사랑에 힘입어 주님의 일을 함께할 준비가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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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35-10,1.6-8: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자비로움과, 그분이 제자들을 선택하고 파견하시는 장면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9,36절) 그들을 가엾게 여기셨다. 주님의 마음은 언제나 고통받는 이들에게 기울어 있으며, 바로 그 연민에서 사도의 소명이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9,37절)고 말씀하시며, 하느님께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권능을 주어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며, 마귀를 쫓아내게 하신다.
오리게네스는 이 본문을 주해하며 “추수할 것은 많다.” 말씀을 인류의 영혼들에 대한 주님의 갈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일꾼이 부족한 것은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으로 영혼을 돌볼 준비가 된 목자가 부족함을 의미한다고 했다.(Comment. in Matth. X,17) 성 그레고리오 교황은 목자의 사명을 이렇게 설명한다. “참된 목자는 양들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삼는다.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그가 가진 어떠한 가르침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Regula Pastoralis II,5) 아우구스티노는 제자들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는 말씀을 주해하며, 참된 사도의 삶은 사적인 이익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Sermo 100,1). 교리서는 복음 선포와 자비의 행위를 떼어낼 수 없는 사명으로 제시한다. 즉, 말씀을 전하는 것과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동일한 소명이다.(2447항) 선교 교령은 선교를 “그리스도의 명령을 이어받은 교회의 본질적 임무”(5항)로 설명하며, 모든 신자가 그 사명 안에 참여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오늘도 군중을 바라보시며 가엾이 여기신다. 세상은 여전히 영적 굶주림과 상처로 가득 차 있으며, 주님은 우리를 그 치유와 추수의 일꾼으로 부르신다. 주님의 부르심은 특별한 소수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세례받은 모든 이는 주님의 제자이며, 파견받은 선교사다. 우리가 가진 은총은 거저 받은 것이기에, 거저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사명을 수행하는 힘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권능에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 가운데 배반자 유다조차도 권능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약함과 불충 속에서도 주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보여 준다. 대림 시기를 지내며,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 속으로 파견하시어, 그분의 자비를 드러내는 일꾼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신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각자의 삶 자리에서 주님께 받은 은총을 거저 나누며, 이 시대의 추수꾼이 되어야 한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파견하시도록 기도하며, 양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그분의 마음을 닮아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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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네님>
마태오 9,35─10,1.5ㄱ.6-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열 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네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마태 10,1)
스스로
나일 수 없는
내가
되어주시는
우리네님께서
나를 너에게
보내시니
스스로
너일 수 없는
네가
되어주시려는
우리네님을
내가 너에게
모셔다드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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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가엾게 여기신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9,35-10,1)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6-8)
1) 예수님께서 가엾게 여기신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신 나의 목자’이신 분입니다.
‘내가’ 성탄절을 잘 맞이하려고 이렇게 대림시기를 지내는 것은, 성탄절이 ‘나를’ 위해서 ‘하느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이 세상에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즉 구세주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허약한 이’ 라는 것과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 라는 것과 ‘길 잃은 양’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가엾게 여겨야 한다는 말만 한다면, 또 “나는 지금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 라는 자만심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교만하고 어리석은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아무도 자기 자신을 남보다 ‘위에’ 둘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 앞에서 똑같은 처지에 있는 ‘구원의 대상’일 뿐입니다.
복음 선포도, 사랑 실천도, ‘같은 처지’에 있는 ‘같은 죄인’으로서 ‘함께’ 가기 위해 노력하는 일입니다. 남들보다 조금 먼저 복음을 듣거나 조금 늦게 듣거나, 조금 먼저 믿거나 조금 늦게 믿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그 ‘먼저’ 라는 것이 ‘위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남보다 더 나을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람들과 성직자들, 수도자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입니다.>
2)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의 표현만 보면, 예수님께서 군중의 처지를 모르고 계시다가 군중을 보신 다음에야 가엾은 마음이 드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셨고, 그래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인류는 그곳으로 되돌아갈 길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었는데, 메시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그 길’을 알려 주셨고, ‘그곳’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앞장서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이라는 말은, ‘목자가 있는데도 마치 목자가 없는 양들처럼’이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목자를 떠났거나 잊어버린 사람도 있고, 목자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든 목자가 없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다.” 라는 말은, ‘구원의 길’을 모르는 채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고,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전체 인류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3)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이 적다.”라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그 일꾼이 아니라,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자녀는 아버지의 일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 건설 사업에 동참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라는 말씀은, “더 많은 사람이 믿고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청하여라.’, 즉 ‘기도하여라.’입니다. 복음 선포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에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해야 하고, 그래서 ‘기도하면서’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4)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라는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에게 먼저 가라.” 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하늘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이고, 이 말씀은 사실상 “회개하여라.”입니다.
제자들이 병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한 것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일을 한 것입니다. <치유의 은총을 받는 사람들은 그 은총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이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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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을 줄이면 줄어들고 일을 늘리면 늘어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줄이고 또 어떤 일을 늘려야 하는가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주님의 일을 늘리고 내 일을 줄여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주님의 일은 줄이고 내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잘 챙기는 사람은 내 일에도 충실하게 되지만 내 일에 매이면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9,37). 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돌봐줘야 할 사람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말씀입니다. 더더욱 잘 돌볼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 없으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
주님의 일꾼은 바로 우리 자신이고, 일꾼의 역할을 잘하려면 그만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졌을 때 꼭 내 것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혹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그런 일꾼을 보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탈랜트는 다양하고 소중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마음껏 써야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관리자라는 자각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을 잠시 무상으로 사용하다가 떠나야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한 일인지요! 관리를 잘해야 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일깨울 협력자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할 일을 다른 이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일꾼이 되어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하시며 걱정하시는 주님의 근심을 덜어드려야 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매 순간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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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가엾은 마음’을 지니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9,35)라고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그런 존재입니다. 외면하거나 잊을 수 없으며,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아주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 대림 시기는 우리 모두를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셔서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 30,19)라는 말씀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하십니다.(마태 10,6 참조)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말씀 전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10,5). 예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이나 사마리아인들보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먼저 선택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들이 ‘다른 민족들’과 ‘사마리아인들’보다 하느님의 구원에서 멀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아주 익숙하면서도 그분께 가는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 ‘가엾은 마음’을 지니신 예수님께서는 이들까지도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에서 소외되지 않습니다. 그분께 단 한 순간도 잊힌 적이 없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십시오.
“모두 고쳐 주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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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연민과 용서의 대상인 이스라엘 백성의 번영을 서술합니다.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이제는 숨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강생의 위대한 기적입니다.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는 날들이 지나가고 이제는 축복과 행복과 풍요의 시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죄악으로 고통받는 군중,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고 흩어진 군중을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양들과 수확의 표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목의 절박함을 보여 주십니다. 곧 열두 제자에게 복음화의 내용(“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과 표징(“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과 무상성(“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에 근거한 주님의 분부에 따라 사도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명과 권한을 제자들, 곧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에게 주십니다.
예수님 사명에 비추어 세상에서 교회의 사명,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 받은 모든 이의 사명을 이해해야 합니다. 복음화로 구체화되는 사명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인간적인 해방의 표징을 통한 메시지의 보증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전하고 증언해야 하는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고 믿음으로 초대하시며, 새로운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따라감으로써 이웃들과 참된 형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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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루카 2,6-7ㄱ)
<우리도 주님을 낳아드리자!>
12월의 첫 토요일인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 미사에 대한 강론'입니다.
오늘 복음(루카2,1-14)은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고 있는 때이다 보니,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칭호들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 메시아(기름부음받은이), 주님, 하느님의 어린 양, 하느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사람이 되신 말씀.'(로고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탄생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태어나심이 참으로 특별합니다. 보잘 것 없는 나자렛 처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태어날 자리가 초라한 구유입니다. 또한 그분의 탄생 소식이 밤에 양 떼를 지키는 보잘 것 없는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집니다.
많은 것을 깨닫게 하고,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가 지금 기다리고 있는 하느님, 메시아요 우리의 구세주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누구를 위해 오시는 분이시고, 그리고 그분의 탄생 자리가 어디인지에 대한 깊은 묵상을 하게 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에게 보내신 첫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들이 됩니다. 표양을 보여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행실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게 됩니다."(1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10절)
내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청소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림시기의 본질이며,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잘 준비합시다! 그래서 주님의 성탄이 나에게 큰 기쁨이 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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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정서가 바로
연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이 땅에
내려오십니다.
우리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연민의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연민의 마음은
하느님의
가장 빛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의 길로
되돌려 놓으시는
구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연민은
멀리서 바라보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있음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연민은
생명에 대한
공감이며
함께하는
돌봄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있는 그대로
품어 살리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무지와
어리석음,
외로움과
두려움을
알아보십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아픔을
지나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연민은
바라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사랑으로 다가가
치유하는 적극적인
힘입니다.
연민은
우리 삶의
가장 아름다운
존재방식입니다.
그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서로를 살리고,
세상은 조금 더
성탄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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