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이현세가 그린 ‘공포의 외인구단’… 어떤 작품일지 나도 궁금”
AI 프로젝트 나선 이현세 화백
44년 창작 만화 4174권 학습시켜… 과거 모방 넘어 미래 그림체 예측
“만화 AI는 선택의 문제 아냐… 작가 도전정신으로 뛰어넘어야”
몽당연필을 종이로 말아 손에 쥔 이현세 화백. 그는 “이미 웹툰 시장엔 거대 자본이 투자돼 수십 명이 참가하는 기획 웹툰이 많다. 만화가가 반대한다고 해서 기업이 인공지능(AI)을 만화에 활용하지 않을 리 없다. AI가 할 수 없는 작가만의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뒤에 보이는 작품은 AI가 학습 중인 이 화백의 대표작 ‘만화 삼국지’. 신원건 기자
“만화에서 인공지능(AI)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AI가 생각해내지 못하는 작가만의 오리지낼리티(예술의 독창성과 신선함)가 필요한 때죠.”
‘공포의 외인구단’(1983년) ‘아마게돈’(1988년) 등으로 한국 만화계를 이끈 이현세 화백(67)은 19일 서울 강남구 작업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근 AI가 창작의 세계마저 잠식하고 있다는 만화계의 우려를 넘어서기 위해선 AI를 활용하거나 맞설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웹툰이 등장했을 때 종이만화 시장이 줄어들 것을 예측하지 못한 만화가는 다 사라졌다”며 “소비자가 마트에서 로봇이 재배한 농산물을 사 먹듯, 독자는 재미만 있다면 AI가 그린 웹툰을 찾아 읽을 것”이라고 했다.
이 화백은 옛 작업 방식을 고수하는 정통 만화가다. 이날 방문한 그의 작업실엔 컴퓨터 대신 커다란 나무 작업대가 있었다. 책상엔 붓, 펜, 가위처럼 손으로 만화를 그리기 위한 화구(畫具)가 가득했다. 연필통엔 종이로 몽당 연필 뒷부분을 감아 잡기 편하게 한 연필 수십 자루가 꽂혀 있었다. 가난한 시절 연필값을 아끼기 위해 들인 습관이 남은 탓이다. 그는 “요즘 웬만한 만화가들은 컴퓨터로 그리고 채색한다. 하지만 난 섬세한 그림체를 지키기 위해 손으로만 그린다”고 말했다.
이런 이 화백이 AI와는 이미 손을 잡았다. 지난해 10월 만화기획사 재담미디어를 통해 그가 44년 동안 창작한 만화책 4174권을 컴퓨터에 학습시켜 자신의 그림체를 구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철완아톰’(우주소년 아톰)으로 유명한 일본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1928∼1989)의 신작 ‘파이돈’이 사후 31년 만인 2020년 발표되는 등 해외에선 이미 AI와의 협업이 시도됐지만, 한국 만화가로선 첫 도전이다. 이른바 ‘AI 이현세’ 프로젝트다.
그가 AI에 끌린 건 창작욕 때문이다. 그는 “과거 작품을 보니 내 그림체가 10년 단위로 바뀌었다”며 “젊은 시절 나의 힘 있는 선으로 최근 작품을, 현재 나의 원숙한 그림체로 초창기 작품을 그리면 어떨지 욕심이 났다”고 했다.
‘AI 이현세’가 만든 ‘공포의 외인구단’은 이르면 올가을 공개된다. 아직 정확한 모습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성공적으로 완성된다면 주인공인 까치 오혜성이 투구하는 모습과 표정을 60대 이 화백의 그림체로 볼 수 있다. 이 화백이 몇 년에 걸쳐 하나씩 내던 작품을 1년에 여러 편 내는 식의 다작도 가능하다. 최근작인 ‘늑대처럼 홀로’를 이 화백의 젊은 시절 화풍으로 제작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건 AI가 과거를 모방하는 걸 넘어 미래의 이 화백이 어떻게 그릴지 예측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200세가 된 이 화백의 시각과 그림체를 담아 새로운 ‘공포의 외인구단’이 탄생하는 식이다.
“제가 200세가 돼서 그림을 그리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궁금했죠. 죽어서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 호기심이 제 발길을 이끌었습니다. AI에 내 그림을 학습시키면 ‘불멸’ ‘영생’ 할 수 있는 셈입니다.”
다만 미완성본에서 AI는 까치의 팔을 세 개로 그리는 등 오류를 낸다. 학습량과 시간에 따라 AI 이현세의 성공 여부가 갈릴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성공한 만화가인데, 왜 다른 만화가가 주저하는 일에 도전했냐고 묻자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만화를 그리면서 한 번도 기존 이야기를 이어가는 후속편을 낸 적이 없었습니다. AI의 학습력을 뛰어넘을 만화가의 경쟁력도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도전정신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습니다.”
이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