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제가 소유한 책과 아케치님이 운영하는 할미의 야망과 하이텔, 나우누리 신장의 야망카페에서 나온글을 모아 정리해서 올립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오랜만에 올리는 글이라... 빨리 유럽의 진형에 대해서도 끝내야 되는데...휴~~~
이친구는 나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습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가요? 우지사토와 비슷한 나이인 그였고, 기질도 비슷한 지라.. 훗날 이에야스의 경쟁자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호리 히데마사(堀秀政) (1553~1590)
어릴적 이름은 기쿠치요(菊千代), 쿠타로(久太郞), 관직은 사에몬노(左衛門督), 종5위하(從五位下) 시종(侍從). 히데시게(秀重)의 아들.
처음에 미노(美濃) 사이토(齊藤)씨를 섬겼고, 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따른다. 에치젠(越前) 잇코잇키(一向一揆)와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 토벌에서 전공을 세우는 한편, 藏入地; 다이묘의 직할지)의 부교오(奉行; 지금의 행정관)를 맡는 등 노부나가(信長)의 측근으로서 두각을 나타낸다.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향응역(饗應役)도 맡아 문무양쪽에서 재주를 발휘했다.
텐쇼오(天正) 9년(1581),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성주가 된다. 이듬해 와사카의 다케다(武田)씨를 공격하고 뒤이어 주고쿠(中國)에 출진중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의 증원부대로 출진하는 동시에 히데요시의 감시역을 맡았다.
혼노사의 변(本能寺の變) 후, 히데요시에게 신종(臣從)하여 후에 히데요시로부터 일문중(一門衆;일족)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전투에서도 명인(名人)이란 칭호로 불리울 정도로 능숙한 맹장이었다. 히데요시(秀吉)와 함께 야마자키(山崎) 전투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를 토벌했다. 이후, 시즈가타케(賤ヶ岳)의 싸움, 고마키(小牧)∙나가쿠테(長久手)의 싸움, 기슈(紀州)공격, 큐슈(九州) 공격에 참가했다.
덴쇼오(天正) 13년, 오미(近江)의 사와야마성에서부터 에치젠(越前) 기타노쇼(北庄)에 이르는 18만 800석의 영주가 되어 호쿠고쿠(北國) 지배의 중심이 된다. 덴쇼오(天正) 18년, 오다와라(小田原) 공격시 진중(陣中)에서 병사. 법명 高岳道哲東樹院. 기타노쇼(北庄) 죠케이지(長慶寺)에 묻혔으나, 후에 가스가야마(春日山) 린센지(林泉寺)로 이장되었다.
◆만약 호리 히데마사(堀秀政)가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급사(急死)하지 않고, 도요토미(豊臣) 정권의 지주가 되었다면, 아마도 백만석급의 대 다이묘(大名)로까지 출세, 종국에는 5 다이로(大老)의 반열에까지 오르지 않았을까?
고마키(小牧)∙나가쿠테(長久手)의 싸움에서는 유일하게 도쿠가와(德川)군을 격파했고, 무엇보다도 그 노부나가의 측근으로 임명되어 중용되었던 것만으로도 대단한 자였다고 생각된다.
그 후의 귀추까지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는없지만, 이 역시 노부나가의 마음에 들었던 가모우 우지사토(蒲生氏鄕)와 나이도 비슷하고, 출세의 속도도 비슷비슷했다. 우지사토(氏鄕)쪽은, 아이즈(會津) 92만 석까지 올랐다.
그 히데마사를, 세간에선「명인 쿠타로(久太郞)」라던지「명인 사에몬左衛門」등으로 불렀다. 뭔가 잘 다룬다는 이미지라도 있었을까. 특히「사람을 다루는」데 특기가 있었다고 한다.
전장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이면, 히데마사는 부하에게 경계를 엄중히 하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엿다. 히데마사(秀政)「이런 밤에는 도적이 무구나 병량을 빼앗으러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적따위에게 빼앗긴다면 아까울터, 오늘 밤에, 내가 도둑질을 할 터이니 그리 알거라」주군에게 도둑질 당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대실책.
호리(堀)가의 가신들은 비상할 정도의 경계태세를 취했기에, 밤도둑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타가의 진중에서는 모두들 피해를 입었다 한다. 히데마사의 좌우명은「방심油斷」이었다. 이 두 글자를 액자에 넣어 걸어두고는, 날마다 스스로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이런 호리(堀)가였기에, 인재활용에도 나름대로의 교육체계가 존재한다. 우선, 사관해서 1개월 동안은 주종간의 친밀을 깊게 한다. 조석으로 상대하면서, 히데마사는 상대의 언동을 계속 관찰하는 것이다. 다음 1개월은, 奏者(일종의 심부름꾼의 역할)를 시킨다. 이 때 일하는 모습에 대한 평가가 지행에 반영된다. 소위 말하는 초임급(初任給)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떨어져 나가는 자도 나온다. 개중에는 성급한 다이묘(大名)도 있어,「奉公構え」를 한다던지 하는데, 이렇게 되면, 출분한 자는 재사관을 할 수 없게 된다.
구로다(黑田)가에서 출분한 고토 마타베에(後藤又兵衛) 등은 이「奉公構え」를 당했기 때문에, 의탁하고 있던 호소카와(細川)가에도 사관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오오자카(大坂)성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히데마사秀政는 타가에 사관하는 것은 자유다라며 의복과 노잣돈을 주어 전송하였다. 그 때문에, 타가에 사관한 자들 중에서도 히데마사(秀政)에게 마음이 기우는 자들이 많았다 한다.
그렇다 해도 남들의 질투가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히데마사의 성하마을에「호리 사에몬님의 악행의 조목堀左衛門殿惡しき條條」이라 크게 써붙인 푯말을 세운 자가 있었다. 전부 33개 조나 되었다. 가신들은 놀라서「범인을 잡아 처벌해 버립시다」라 히데마사에게 말했다. 그러나, 히데마사는 예의 푯말의 사본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다.
히데마사「아니, 그럴 필요 없다. 이런 간언을 내게 해준 자는 달리 없었다. 하늘이 내리신 것이라 할만 하달까. 고맙고 고마운 일이야」이렇게 말하며, 히데마사는 비단 주머니에 그 문구를 적어, 상자에 넣고는 소중히 여기며, 자기 행위의 계율로 삼았다 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크레임 대처라고나 할까.
히데마사의 가신 중에 항상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있었다. 눈동자는 언제나 촉촉하게 젖어있고, 눈썹도 찌푸려져 있다. 동료들은 왠지 어두운 분위기가 나기에, 히데마사에게「추방해 버리시는 것이...暇を出させては」라 진언했다. 그런 자가 있어서야 다른 가문에게 웃음을 사고 말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히데마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히데마사「너희들은 갑자기 울라고 명령하면 울 수 있겠느냐? 그사내는 法事나 장례식의 사자로 쓰면 딱 적임이 아니겠느냐」일설에는 히데요시는, 호오죠씨를 멸한 후, 간토오(關東) 8주를 히데마사에게 맡길 셈이었다고 한다. 히데마사의 죽음은 귀천을 불문하고 애석해 마지 않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