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5일 [연중 제28주일]
마태오 22,1-14
걸음마를 멈춘다는 말은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다는 말과 같다
세례를 받고 보통 1년 정도 뒤에 견진성사를 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며
견진성사를 미루기도 합니다. 세례와 견진을 마치 별개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받으면 견진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 예식에 이미 이마에 기름을 바르는 견진성사 예식이 들어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것을 설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아드님의 혼인 잔치에 아무나 초대합니다.
처음 초대했던 이들은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려 하지 않고 그분을 죽였습니다.
이에 이방인들이 초대받게 됩니다.
그러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세례를 받은 이들 가운데서도 쫓겨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혼인 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입니다.
혼인하는 날 잠옷 바람으로 왔다면 그것이 혼인 준비가 안 된 것을 증명해줍니다.
옷은 그 자리에 합당한 준비와 노력을 했음을 알려주는 표징입니다.
혼인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성체성사를 의미합니다.
그 성체성사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은 세례받은 이들입니다.
세례받은 이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몸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도 하나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면 자신도 뛰어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이 혼인 예식에 참여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어 다니는 아기가 자기도 부모처럼 두 발로 걸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바로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과의 오랜 싸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견진의 과정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는 세례를 받고 40년의 견진을 거칩니다.
그들은 이전의 파라오를 섬기기 위해 노예살이했던 본성인 소유욕, 성욕, 지배욕을 포기하고 청빈과 정결과 겸손의 열매를 맺는 자신과의 싸움을 평생 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하지 않는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의 신부를 찾으라고 종을 하란 땅에 보낸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부르심에 응답한 여인이 레베카입니다. 레베카는 착한 여인이었고 그래서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지만, 또한 종이 주는 옷과 장신구로 몸을 꾸며야 했습니다.
이사악은 레베카의 얼굴을 몰랐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이 준 옷과 예물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자기 처소로 맞아들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종이 선물한 옷과 장신구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는데 피는 세례를 주며 물은 견진을 상징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죄를 끊을 결심을 하고 견진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에 합당한 옷을 입습니다.
이 과정 안에서 수없는 넘어짐이 발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뱀에 물렸습니다.
파라오의 종살이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하느님께 불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들에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방법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상징하는 구리뱀을 장대에 달아 그들이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들도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덴젤 워싱턴은 “앞으로 넘어지라”라고 말합니다. 대학에서 퇴학당하고 군대에 들어가려고 생각하며 어머니 미장원에서 앉아 있을 때 한 손님이 종이에 이런 말을 적어줍니다.
“소년이여, 넌 세계를 돌아다닐 거야. 그리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거야.”
덴젤 워싱턴은 이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이루어질 때까지 수없이 넘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끝을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세례와 같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견진의 과정을 거치며 자신이 세례받은 사람임을 증명합니다.
그 다음은 자신에게 그러한 믿음을 준 이와 결국 하나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입니다.
같은 죄로 수천 번 고해성사하십시오.
이것이 세례받았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혼인 예복을 만들어 입는 견진성사를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걸음마를 멈춘 아기는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5일 [연중 제28주일]
마태오 22,1-14
인간이 위대한 이유!
고단한 하루 일과를 끝낸 어느 저녁,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 안에서 빅터 플랭클이 겪었던 체험입니다.
죽도록 피곤한 몸으로 막사에 돌아온 수인들은 막사 바닥에 앉아 영양가라곤 기대할 것이 전혀 없는 멀건 수프 한 그릇씩 받아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뒤늦게 막사 안으로 들어온 동료 한 사람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빨리들 먹고 운동장으로 나가보세요. 지금 석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동료의 말에 다들 먹던 스프 그릇을 옆으로 밀쳐두고 운동장으로 나갔습니다.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조금씩 소멸되어 가는 태양의 장엄함 앞에 다들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적대자가 육체를 가두어도 영혼의 소유자인 인간을 그 어떤 열악한 환경 안에서라도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도 왕자처럼 누릴 것 다 누리고 행복하게 살아온 빅터 플랭클의 삶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극복하고 초월해서 하느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몸은 비록 부스러지기 쉬운 흙덩이처럼 나약하지만, 정신이나 영혼을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고 언젠가 하느님과 충만하게 합일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는 것,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 그래서 마침내 하느님 가까이 다가서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이런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십니다.
친히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한 상’ 잘 차려놓으셨습니다.
잔치를 손수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길거리로 나가셔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초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때로 두려워서, 때로 부끄러워서, 때로 얼굴을 들 수 없어서 어둡고 깊은 동굴 안으로 꼭꼭 들어가 숨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조차 다가오십니다.
애써 찾아오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애야, 괜찮다. 빨리 나오거라. 음식 다 식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영원한 생명의 잔칫상을 거나하게 잘 차리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당신이 총애하시고 애지중지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하느님 측의 열렬한 초대 앞에 이스라엘 백성 측의 반응은 냉랭합니다.
정면으로 대놓고 거부한 것입니다.
거절의 이유가 너무나 허무맹랑해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맨날 반복되는 밭일, 장사였습니다.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제1차로 선택받은 민족, 민족들의 으뜸이자 장자였던 이스라엘의 운명은
끝장나버렸습니다.
하느님 초대에 대한 거듭된 거절의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리는 이민족들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잘 차려진 잔치의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면면은 우리 인간들의 상상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100퍼센트 거기 앉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대사제들, 율법의 전문가들, 바리사이들은 단 한 명도 앉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정통 신앙인으로 자처했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이신 포도나무의 원줄기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포도나무에는 이교 민족의 가지가 접목되어 기대하지도 않았던 포도 열매가 왕성히 열리게 된 것입니다.
먼저 불림받은 사람들,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 정말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월감 갖지 말고, 내가 1등이라는 의식도 갖지 말고 늘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할 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0.15.연중 제28주일."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 22, 9)
하느님은
우리의 약속이며
하느님은
우리의
잔치입니다.
하느님께로
가고 있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가장 좋은
약속과 잔치를
알면서도
집착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거들떠보지 않는
우리들 삶입니다.
지켜야 할
약속은
참된
만남이며
혼인 잔치는
새로운
사랑의
예복입니다.
그러나
늘 하느님의
사랑을 새까맣게
잊고 그 사랑을
거절하며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거절할 사유와
그럴듯한 이유가
늘 준비된
우리들 입입니다.
세상사는
알아들어도
하느님의 초대는
모르고 삽니다.
동문서답의
삶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이른 약속
늦은 약속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대체 무엇이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우리 식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자녀로
살기 때문입니다.
아낌없는
구원의 때를
놓치지 않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고마운 초대에
기쁘게 응답하고
기쁘게 감사하는
주님의 날이길
바랍니다.
혼인 잔치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순명의
잔치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잔치가 있고
서로를 비추는
만남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잔치
어리석은 초대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