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야화> 폐비 윤씨 (상)
성종 첫번째 부인 공혜왕후 자식 없이 19세 나이로 사망
윤씨, 정숙·신실·근면·검소 왕실 어른들에게 인정받아 왕비로서 화려한 출발
성종에게 사약(賜藥)을 받고,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둔 왕비. 바로 폐비 윤씨의 이야기다.
그녀는 연산군의 생모다.
연산군은 왕이 된 후 광적인 복수극을 펼쳤는데 바로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다.
명품 드라마 <왕과 비>에서 인수대비(채시라 분)가 “사사(賜死)하세요”라고 표독스럽게 말하며,
폐비 윤씨(김성령 분)에게 사약을 내리던 장면이 지금도 뇌리에 맴돈다.
폐비 윤씨는 함안 윤씨 윤기견(尹起 )과 어머니 고령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종과 첫번째 왕비인 공혜왕후 한씨 사이에서 자식이 없자 대비 정희왕후의 주도하에 2명의 후궁을 간택했다.
1473년 3월 폐비 윤씨에 이어 6월에는 윤호의 딸(후의 정현왕후)이 입궁해 숙의(淑儀)가 됐다.
1474년(성종 5년) 4월 공혜왕후가 19세로 소생 없이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새로운 왕비 선택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제까지 세자빈은 외부 간택을 원칙으로 했으나 왕비의 간택은 상황에 따라 달랐다.
고민 끝에 후궁 중에서 왕비를 뽑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성종의 후궁 중 행실이 정숙하고 신실하며 근면·검소하다는 평가를 받은 숙의 윤씨(윤기견의 딸)가 왕비가 된 것.
성종의 자식(후의 연산군)을 임신하고 있던 것도 왕비 선발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후궁 시절 윤씨는 훗날 시어머니가 되는 인수대비에게도 깊은 신임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인수대비는 의지(懿旨·대비의 교지)에서
“곤위(坤 )가 오랫동안 비어 있으니 내가 위호(位號)를 정하여 위로는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는 국모를 삼으려고 하는데,
숙의 윤씨는 주상께서 중히 여기는 바이며 나의 의사도 또한 그가 적당하다고 여겨진다”고 했다.
윤씨에 대한 확실한 지지를 표명한 것이다.
의지엔 이어서
“윤씨가 평소에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일마다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으니 대사를 위촉할 만하다”고 적었다.
당시 왕의 어머니인 인수대비 입장은 왕비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까지만 해도 시어머니인 인수대비가 며느리인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게 될 줄을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1476년(성종 7년) 8월9일 숙의 윤씨는 왕실의 지원 속에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왕비로 책봉을 받던 상황을 <성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이 인정전에 나아갔다.
(중략)
숙의 윤씨를 중궁으로 봉(封)하였다.
그 교명에 이르기를,
‘예전의 현명한 임금이 국사를 다스림에 있어서 반드시 내치를 먼저 함은 그 근본을 바르게 한 것이다.
아! 내가 어린 몸으로 대통을 이어받아 영구히 부하(負荷)해야 할 중한 책임을 생각건대
반드시 내좌(內佐)하는 현명한 사람의 도움에 힘입어야 하는데, 중궁(中宮·왕비)의 자리가 빈 지 여러해가 되었다.
(중략)
그대 윤씨는 일찍이 덕행으로 간선(揀選)되어 오랫동안 궁궐에 거처하면서,
정숙하고 신실하며 근면하고 검소한 데다 몸가짐에 있어서는 겸손하고 공경하였으므로,
삼궁(三宮·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에게 총애를 받았다.
이에 예법을 거행하여 왕비(王妃)로 책봉한다.”
정숙·신실·근면·검소한 데다가 성종의 아이까지 임신하고 있던 윤씨는
왕실의 여성 어른 3명 모두에게 인정을 받으며 왕비로서 화려한 출발을 하게 됐다.
그러나 그녀의 추락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일어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