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338)/ 이탈리아 마테라의 동굴 주거지와 암석 교회 (The Sassi and the Park of the Rupestrian Churches of Matera; 1993)
[투어코리아] 너무나 매력적인 이탈리아 남부 소도시 여행. 연중 지중해의 따뜻한 햇살과 코발트 빛깔 바다,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 등 엽서 속 그림 같은 풍경은 전 세계 여행객들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남부하면 나폴리, 소렌토, 아말피, 포지타노 등의 여행지를 먼저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탈리아 남부의 숨겨진 보석은 따로 있다.
2000년 이상 세월의 흔적을 이어오며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 곳, 오랜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그 자체로 오롯이 빛을 바라는 곳, 바로 선사시대부터 이어온 '마테라(Matera)의 동굴 주거지 사씨(Sassi)'다.
시간이 멈춰버린 마테라의 동굴 주거지 '사씨' 마테라는 바실리카타 주(Region of Basilicata) 남부 지방에 있는 곳으로, 이 곳엔 가파른 협곡에 터전을 일구고 동굴을 파서 군락을 이룬 채 2천년 이상 지속적으로 삶을 이어온 동굴거주지 '사씨(Sassi)'가 자리하고 있다.
사씨는 이탈리아에서 인류가 최초로 정착한 자연 동굴 주거 형톈, 점차 발전하며 암반을 뚫고 집과 교회가 들어서게 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마을. 지금까지도 동굴 거주기가 그대로 유지돼 있고 그 곳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한다.
오랜 세월 속 이 마을은 역사의 흐름 속 때론 번영하고 쇠락의 길을 걷기도 했다. 실제 9세기경 종교 박해를 피해온 수도사들이 숨어 살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를 반영하듯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Christ)' 촬영지로 마테라 사쏘마을이 등장했으며, 영화에서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힘겨워했던 장면과 못 박히는 장면 등이 연출됐다.
또 마을이 점점 성장하면서 언덕 쪽으로 올라가면서 더 많은 집을 짓거나 동굴 주거지를 파기도 했다. 12세기에는 '웅장하고 화려하다'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점차 쇠락, 19세기 중반 까지는 약 3,000여개 정도의 사씨에 사람들이 살았으나 대부분 빈민층들이 모여서 힘겹게 살았고, 다른 지역에 비해 외면 받으며 관심 속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석회암을 파서 만든 지중해 연안의 거주지, 협곡 등 주변 지형과 생태계와 조화를 이룬 건축물, 오랜 역사와 삶이 보존돼 있는 인류 역사상 중요한 유산이라는 거치를 인정받아 '마테라의 동굴 주거지와 암석교회'는 1993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이름을 올렸다. 선사시대에 인류의 집단 거주, 게다가 동굴 형태의 집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사씨'는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발길을 '마 테라'로 옮겼다. 지도 한 장 들고 '사씨' 탐방에 나서다 마테라 사씨를 찾아 나서던 날, 묵직한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고, 빗줄기가 바람에 휘어지며 쏟아져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렇다고 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바리-스컬로역에서 '마테라행 사철(FAL;Ferroivie Appulo Lucane)에 몸을 실었다. 열차가 마테라중앙역에 도착했을 때는 다행히 비가 그쳤다. 그러나 하늘은 회색 구름이 드리워져 있어 우중충했다. 이미 예약해 놓은 사씨(Sassi;돌 이라는 뜻의 동굴 주거지)지구에 가까운 마테라 시내에 예약한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지도 한 장 들고 본격적인 탐방에 나섰다. 화석화 돼 멈춰 버린 마을 풍경에 넋을 잃다! 마테라의 사씨는 마을의 중심 요새인 '시비타'를 중심으로 '사쏘 바리사노(Sasso Barisano)'와 '사쏘 카베오소(Sasso Caveoso)' 2개로 나뉜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마테라 시내의 가장 중심지인 '비토리아 베네토 광장(Piazza Vittoria Veneto)'. 광장에 도착해 보니 관광지라기 보다는 차분한 마을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게다가 비 온 뒤라서 그런지 몇몇 행인들이 우산을 들고 주변 상가를 기웃거리는 등 더욱 조용했다.
광장의 중심부에는 원형의 분수대가 있고 근처에는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지하 동굴 입구가 보였다. 근처에는 아치 기둥 너머로 사씨 마을을 파노라마로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데, 이 곳에서 마을 전체를 바라보는 순간 '아~~'하는 신음소리가 나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사쏘(Sasso; Sassi의 복수형)마을은 화석화 돼 시간이 멈춰버린 듯 했다. 그 광경에 순간 넋을 잃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사씨 지구는 오랫동안 인류가 힘들게 살아왔던 삶의 흔적'이라는 생각도 스쳤다.
그래서 일까. 그 어떤 곳에서도 만나보지 못했던 독특한 사쏘마을 전경은 아름답게 다가오진 않았다. 때마침 낮게 내려앉은 구름 때문인지 오랜 세월을 힘들게 견뎌온 지친 모습처럼 보여 쓸쓸했다. 퇴색돼 우중충한 낡은 모습의 동굴주거지가 켜켜이 쌓여 수백 년을 이어왔다는 그 자체가 경이롭기 그지없었다
[투어코리아] 너무나 매력적인 이탈리아 남부 소도시 여행. 연중 지중해의 따뜻한 햇살과 코발트 빛깔 바다,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 등 엽서 속 그림 같은 풍경은 전 세계 여행객들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남부하면 나폴리, 소렌토, 아말피, 포지타노 등의 여행지를 먼저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탈리아 남부의 숨겨진 보석은 따로 있다.
2000년 이상 세월의 흔적을 이어오며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 곳, 오랜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그 자체로 오롯이 빛을 바라는 곳, 바로 선사시대부터 이어온 '마테라(Matera)의 동굴 주거지 사씨(Sassi)'다.
시간이 멈춰버린 마테라의 동굴 주거지 '사씨' 마테라는 바실리카타 주(Region of Basilicata) 남부 지방에 있는 곳으로, 이 곳엔 가파른 협곡에 터전을 일구고 동굴을 파서 군락을 이룬 채 2천년 이상 지속적으로 삶을 이어온 동굴거주지 '사씨(Sassi)'가 자리하고 있다.
사씨는 이탈리아에서 인류가 최초로 정착한 자연 동굴 주거 형톈, 점차 발전하며 암반을 뚫고 집과 교회가 들어서게 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마을. 지금까지도 동굴 거주기가 그대로 유지돼 있고 그 곳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한다.
오랜 세월 속 이 마을은 역사의 흐름 속 때론 번영하고 쇠락의 길을 걷기도 했다. 실제 9세기경 종교 박해를 피해온 수도사들이 숨어 살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를 반영하듯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Christ)' 촬영지로 마테라 사쏘마을이 등장했으며, 영화에서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힘겨워했던 장면과 못 박히는 장면 등이 연출됐다.
또 마을이 점점 성장하면서 언덕 쪽으로 올라가면서 더 많은 집을 짓거나 동굴 주거지를 파기도 했다. 12세기에는 '웅장하고 화려하다'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점차 쇠락, 19세기 중반 까지는 약 3,000여개 정도의 사씨에 사람들이 살았으나 대부분 빈민층들이 모여서 힘겹게 살았고, 다른 지역에 비해 외면 받으며 관심 속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석회암을 파서 만든 지중해 연안의 거주지, 협곡 등 주변 지형과 생태계와 조화를 이룬 건축물, 오랜 역사와 삶이 보존돼 있는 인류 역사상 중요한 유산이라는 거치를 인정받아 '마테라의 동굴 주거지와 암석교회'는 1993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이름을 올렸다. 선사시대에 인류의 집단 거주, 게다가 동굴 형태의 집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사씨'는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발길을 '마 테라'로 옮겼다. 지도 한 장 들고 '사씨' 탐방에 나서다 마테라 사씨를 찾아 나서던 날, 묵직한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고, 빗줄기가 바람에 휘어지며 쏟아져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렇다고 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바리-스컬로역에서 '마테라행 사철(FAL;Ferroivie Appulo Lucane)에 몸을 실었다. 열차가 마테라중앙역에 도착했을 때는 다행히 비가 그쳤다. 그러나 하늘은 회색 구름이 드리워져 있어 우중충했다. 이미 예약해 놓은 사씨(Sassi;돌 이라는 뜻의 동굴 주거지)지구에 가까운 마테라 시내에 예약한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지도 한 장 들고 본격적인 탐방에 나섰다. 화석화 돼 멈춰 버린 마을 풍경에 넋을 잃다! 마테라의 사씨는 마을의 중심 요새인 '시비타'를 중심으로 '사쏘 바리사노(Sasso Barisano)'와 '사쏘 카베오소(Sasso Caveoso)' 2개로 나뉜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마테라 시내의 가장 중심지인 '비토리아 베네토 광장(Piazza Vittoria Veneto)'. 광장에 도착해 보니 관광지라기 보다는 차분한 마을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게다가 비 온 뒤라서 그런지 몇몇 행인들이 우산을 들고 주변 상가를 기웃거리는 등 더욱 조용했다.
광장의 중심부에는 원형의 분수대가 있고 근처에는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지하 동굴 입구가 보였다. 근처에는 아치 기둥 너머로 사씨 마을을 파노라마로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데, 이 곳에서 마을 전체를 바라보는 순간 '아~~'하는 신음소리가 나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사쏘(Sasso; Sassi의 복수형)마을은 화석화 돼 시간이 멈춰버린 듯 했다. 그 광경에 순간 넋을 잃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사씨 지구는 오랫동안 인류가 힘들게 살아왔던 삶의 흔적'이라는 생각도 스쳤다.
그래서 일까. 그 어떤 곳에서도 만나보지 못했던 독특한 사쏘마을 전경은 아름답게 다가오진 않았다. 때마침 낮게 내려앉은 구름 때문인지 오랜 세월을 힘들게 견뎌온 지친 모습처럼 보여 쓸쓸했다. 퇴색돼 우중충한 낡은 모습의 동굴주거지가 켜켜이 쌓여 수백 년을 이어왔다는 그 자체가 경이롭기 그지없었다
마테라의 동굴 주거지와 암석교회는 바위를 파서 만든 거주지로 지형적 조건과 생태계에 완벽하게 적응하여 2,000년 이상 지속적으로 보존된 보기 드문 유산이다. 전통적인 인간의 거주 형태를 보여 주는 마을과 정원은, 토지를 사용한 흔적으로 미루어 진보된 문화가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주변 자연 환경과 오랫동안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마테라 지역에는 초기 구석기 시대부터 인간이 살았다. 마지막 빙하 시대를 지나고 농업에 의존하기 시작하면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영구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거주지를 형성하였다. 삼림이 없는 지역은 심각한 침식 작용과 물 관리 문제로 곤란을 겪었다. 정착 농민들은 들판에 지중해성 기후대의 대표적인 가리그(Garrigue, 低木郡林)인 마키(Maquis, 코르시카 섬의 관목림)가 무성해지자,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는 방목으로 바뀌어갔다. 마테라는 특별한 지형적인 조건으로 인해 발달하게 되었다. 계곡의 하단부 350m~400m 지대에는 부드러운 탄산석회의 침전 지대가 있는데 이곳에 자연 침하되어 파진 곳(grabialioni) 두 곳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거주지가 형성되게 되었다. 위쪽의 점토질 고원은 농경과 목축용으로 이용되었다. 금석병용시대(金石倂用時代, Metal Ages, Chalcolithic,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는 과도기)를 맞아 도구가 발달하면서 계곡에 노출된 부드러운 석회암을 보다 쉽게 파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시스턴(cistern, 지하저수조)과 무덤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이 두 곳은 중앙 공간(jazzi)을 향해 밖으로 나오도록 되어 있는 독특한 주거형태이다. 발굴된 석회 벽돌은 담벼락이나 탑의 건축자재로 사용되었다. 석회화되어 약해진 지층이 노출된 계곡 측면에 이 벽돌을 사용하면 효과적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그리스 식민 통치 시기에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을 받아 앞선 기술과 정치적 구조를 도입하였다. 식민지 초기에 부족의 형태에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도시 중심 국가 형태로 기반을 잡으면서 마을 형태는 확산되었다. 이 지역민들은 황량한 환경 탓에 굳건한 독립심을 기르게 되었고, 덕분에 계속되는 비잔틴 인들의 침략에 강인하게 맞설 수 있었다. 또한 이 지역 공동체는 금욕적이고 이상향적인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형학적 특성을 바탕으로 발달한 마테라는 18세기까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19세기, 20세기에 이루어진 정착지에 대한 개입이나 확장은 점토지역인 고원지대에서 물을 공급 및 배수했던 고대인의 토지 관리법을 그대로 적용하지 않았다. 최초의 집은 동굴입구를 블록 벽으로 닫아 놓은 단순한 석회암 동굴이었다. 그러나 이 형태는 점차 개방 공간이 있는 아치형 공간(lamione)의 형태로 발달하였고, 이곳은 나중에 개조하거나 증축할 수 있었다. 둥근 공동 마당을 두고 집단으로 거주한 이곳 사람들은 저수조와 같은 시설을 공유하는 사회적 구조(vicinato)로 발전하였다. 2개의 사씨(Sassi, 동굴주거) 사이, 대성당이 자리한 마을에는 마을의 중심 요새인 시비타(cività)도 건설되었다. 작업장과 곡물 저장고는 주로 시비타 외곽에 있으며, 이곳은 좁은 길과 계단을 통해 사씨와 연결되도록 되어 있다. 물의 공급은 상당히 조직화되어 있었다. 높은 지대의 고원에서 물을 받아두었다가 이를 중력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 보내 마을 공동체에 분배되도록 하였다. 마을이 점점 성장하면서 언덕 쪽으로 올라가면서 더 많은 집을 짓거나 동굴 주거지를 팠다. 어떤 집의 지붕은 위쪽에 새로 생긴 집의 길이 되기도 했다. 집은 점점 규모가 커졌고, 르네상스 시기에는 정원 형태 테라스를 집 외부에 증축했다. 12세기의 지리학자인 엘 이드리시(El Idrisi)는 마테라를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찬양했지만 마테라는 점차 쇠락해 갔다. 소설가 카를로 레비(Carlo Levi)는 유명한 소설 『예수는 에볼리에서 멈추었다(Cristo si B fermato ad Eboli, Christ stopped at Eboli)』(1945년)에서 마테라를 남부 이탈리아 농민의 비참한 생활의 상징인 것처럼 묘사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탈리아 정부는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1952년 통과된 법안에 의해 1950년대에 옛 구역의 주민들을 새로운 건물로 이주시키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