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장 1 - 5절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미국 남부 도시에 살던 한 여성 분이 장성한 네 아들을 두고서 임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어머니는 아들들이 침대 가장자리에 둘러서 있는 것을 보고 한명씩 부르며 엄마에게 키스로 작별 인사를 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첫째, 둘째, 셋째 아들에게는 차례로 “얘야, 엄마에게 굿 나잇 키스를 해 다오.” 이렇게 요청을 했는데 이상하게 네 번째 아들 앤디에게는 “앤디야, 엄마에게 굿 바이 키스를 해 다오.” 이렇게 요청을 하더랍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넷 째 아들은 어머니에게 물어 봤습니다. “어머니, 왜 형들은 굿 나잇 키스를 하게하고 저에게는 굿 바이 키스를 하라고 하세요.” 그러자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서 막내 아들에게 “앤디야, 너의 형들은 이제 머지않아 저 영광스러운 천국에서 다시 엄마와 만나지만 너와는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 같구나.” 이러시는 것이었습니다. 잘 이해가 가지 않은 막내 아들 앤디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재차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그건 엄마가 네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여러 번 간곡히 전도를 했지만 끝내 너는 네 고집대로 세상 길로 가버렸기 때문에 엄마는 너를 다시 만날 수가 없어. 그래서 형들과는 굿 나잇으로 작별을 했지만 너와는 굿 바이를 하는 거란다. 하지만 이제라도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면 형들과 같이 다시 천국에서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거야.” 이 말은 들은 앤디는 눈물을 터뜨리면서 “어머니, 저도 굿 나잇 인사를 하겠어요.” 이렇게 말을 하며 자신의 젖은 뺨을 운명하는 어머니의 불에 비벼댔다고 합니다.
복음은 진실해야 하고 하나님의 중심이 되어야지 거짓되거나 사람 중심이 되면 그 복음은 변질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 의미 없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어떻게 하든 위로해서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 유언을 했더라면 그 말은 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진실한 복음의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 동안 강퍅해서 듣지 않았던 마음도 녹아져서 마지막에 영접을 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당시에는 기독교는 전혀 생소한 종교였기 때문에 사실 ‘복음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몇 사람이나 듣겠는가?’ 이런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느 곳에 가든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아주 원색적인 복음만을 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누가 듣겠어?”였지만 바울이 전한 그 원색적인 복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전도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중요한 원칙 한 가지만 제대로 붙들고 있으면 우리도 바울처럼 살아가는데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 원칙이 뭐냐면 4절에 보면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이 원칙 하나만 제대로 붙들고 있으면 우리도 바울처럼 어디를 가든지 제대로 된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뿐만 아니라 행동 또한 동일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행동을 하고 말을 하게 되면 그 자체가 복음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하루 종일 살아가면서 이 원칙을 붙들고 흔들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삶을 우리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 한 가지 질문만 꾸준히 던지면서 살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말과 행동이 매우 복음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보면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고 사는지 모릅니다. 그런 말들 중에 대표적인 말이 바로 ‘아첨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첨은 남의 환심을 사거나 잘 보이려고 알랑거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중심이 되어서 아첨의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언어의 습관은 절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처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 것인가 판단해 봐라.”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적당하게 타협을 하고 절충을 해서 말하는 언어들은 복음의 능력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탐심의 탈을 쓰면 안 됩니다. 탈은 가면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복면가왕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보지만 가면을 쓰면 그 사람의 정체를 쉽게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가리는 것이기 때문에 가면은 그 자체가 속임수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그런 가면을 쓰냐면 탐심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아닌 척, 모르는 척, 잘난 척…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경우들이 많은데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무리 말을 잘 해도 그 말에 신빙성이 결여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말하는 진리는 절대 진리로 들려지지를 않습니다.
아첨의 말과 탐심의 탈을 쓰고 다니면 누가 그런 사람들을 신뢰하고 그런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우려 주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항상 버려야 할 잘못된 습관들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첨의 말, 탐심의 탈을 쓰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할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멀리하면서 살아가야 오늘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복음, 기쁨의 소식을 듣고서 하나님께로 다가와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늘도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는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 아첨의 말과 탐심의 탈을 벗어버리고 정직하게, 순결하게,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고 우리의 모습이나 말 때문에 오늘도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깨닫게 되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