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스피어와 학생선교지원운동
스피어는 여러 대에 걸쳐 개혁주의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11 스피어의 부친은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출신 변호사이며 정치가였다. 꾸준히 성경을 읽는 장로였다. 교회에서 성경반을 가르치며, 아침저녁으로 가정예배를 드렸다.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을 암송했다.
스피어는 뉴잉글랜드의 필립스아카데미에 재학하는 동안 그 지역에 있는 앤도버신학교의 ‘자유주의적 복음주의’를 접했다. 스피어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좋아했다. 프린스턴의 뉴저지칼리지에서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그곳의 가르침이 뉴잉글랜드에서 보고 느낀 것과 사뭇 다르다고 말했다. “여기서 듣는 설교는 아마도 옛날 장로교인들의 눈에는 좀더 정통적이겠지만 우리가 앤도버에서 들었던 것만큼 훌륭하지 않다”12고 불평했다. 스피어는 프린스톤신학교의 ‘스콜라주의적 정통신학’보다 19세기 중엽의 ‘자유주의적 복음주의’를 선호했다.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은 자신들을 ‘자유주의적 복음주의자’라고 간주한다.
스피어는 프린스톤신학교 재학 중에 어느 전천년주의자의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며, 참된 신앙을 고백했다.13 무디 부흥운동의 결과로 태동한 학생선교지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복음주의자 무디의 경건과 개방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스피어는 이 학생신앙운동 단체의 ‘세계의 복음화’라는 강령에 감동을 받고 선교에 가졌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 단체의 간사로 일했다. 선교사로 지원할 대학생을 모집했다. 그가 프린스톤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선교에 대한 준비를 하기 위한 것이었고, 선교부 총무가 된 것은 선교 분야의 재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스피어는 탁월한 연설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을 대규모로 끌어 모으는 동원력을 지니고 있었다. 선교사로 가거나 선교활동을 하겠다고 지원하는 1,100명의 대학생들을 모집했다. 그 일을 위해 110개의 대학들을 순방할 정도로 왕성한 기동력을 가지고 있었다.14 미국장로교 외국선교부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선교단체가 된 배후에는 스피어의 재능과 열성이 있었다.
스피어는 미국북장로교회 선교부 총무였지만 그 교단의 선교활동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규모의 통합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초교파 학생선교운동에 뿌리를 둔 스피어의 활동경험은 범교파 선교사역과 에큐메니칼 활동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가 다양한 교리와 전통을 수용하는 에큐메니스트가 된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나는 장로교단에 속해 있는 사람이지만 장로교단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야 한다고 하는 데는 전혀 열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15고 말했다. 제도, 교리, 신학을 뛰어넘는 초교파 선교활동을 이상(理想)으로 삼고 있었다.
스피어는 학생선교지원운동을 지속적으로 후원했다. 1910년에 에딘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와 1928년에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선교대회를 주도했다. 선교통일, 교회통합, 일치운동에 큰 가치를 두었다. 미국 교회협의회(NCC)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칼빈주의 교리체계는 스피어의 교회연합과 일치활동의 걸림돌이었다. 학생선교지원운동 모임에서 행한 연설에서, 그는 우리가 진리체계를 설교할 것이 아니라 구원자를 설교해야 하고, 교리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가 요구하는 것은 많은 진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격이라고 역설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임하였다 하였도다. 죄인 중의 내가 괴수니라.” 학생 동지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진리의 어떤 체계를 설교하지 마십시오. 진리체계가 어떤 면에서든지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구원을 설교하지 마십시오. 구속을 설교하지 마십시오. 구세주, 구원자를 설교하십시오. 전 세계적으로 기대되는 것은 교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격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교리가 아닙니다. 신성한 생명의 도래입니다. 크고, 구체적이며, 잘 연결된 [교리]체계를 설명하면 우리는 확실히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주 실패하는 것같이 보이더라도 우리가 단순하고 전지전능하며 저항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16
스피어는 신조를 앞세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고, 체계적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는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칼빈주의 전통을 경시했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정통주의자도 아니었다. 칼빈주의자는 더욱 아니었다. 교회일치운동과 선교활동이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도록 그 방향을 이끌었다. 신학논쟁이 불붙었을 때에 그는 자신을 ‘자유주의적 복음주의자’로 여겼다. 그의 사회관은 절친한 친구인 자유주의 신학자 헨리 코핀의 것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