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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하시는 하나님
창 5: 21–24
에녹이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에녹이 하나
님과 동행 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오늘 말씀은 에녹에 관한 말씀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반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도 300년 동안이나 말입니다. 본문은 에녹이 300년을 하나님과 동반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중요한 메시지로 전하고 있습니다. 에녹에 관한 말씀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비교도 되지 않는 4절밖에 안되는 짧은 내용이지만 그 기록 내용에는 많은 메시지와 역사가 들어 있고 많은 신학이 들어 있습니다.
인생의 동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이웃을 주셨습니다. 좋은 배우자를 주셨고 부모를 주셨고 형제와 친구를 주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들에게 소중한 동반자들입니다. 인생은 늘 누군가와 함께 하고 동행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동반자와 반려자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 강아지를 반려동물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남편이나 자식들보다 이 동물을 훨씬 더 가까이 대합니다. 사람과 동반하지 못하니까 동물에게 대신 집착하는 것입니다. 대상이 잘못된 것입니다. 좋은 동반자를 만들지 못하였거나 좋은 동반자가 못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동반자가 있다는 것은 분명 복입니다. 좋은 부모가 얼마나 든든한 존재이고 큰 배경이고 있음만으로도 소중한 동반자입니까? 좋은 아내와 좋은 남편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좋은 친구는 또 얼마나 좋은 동반자입니까?
그런데 오늘은 이 좋아야 하는 동반자가 한계를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부모들도 많이 변하였습니다. 옛날 같지가 않습니다. 부부와 자식 그리고 친구들이 좋은 동반자인데 배반하고 배신합니다. 오늘은 부부도 위기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오늘 많은 아내들이 남편 정년 때가 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남자들은 대책을 세우고 연금관리, 퇴직금관리를 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영국 찰스 킹슬리라는 목사는 전쟁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고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목숨이 걸린 전쟁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라고 하였고 역시 목숨이 걸린 항해를 할 때도 두 번 기도하라고 하였는데 그런데 결혼 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결혼 그리고 부부생활은 어쩌면 전쟁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결혼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싱글벙글하며 결혼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가 셋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판단력이 부족하거나 인내력이 부족해서거나 이혼하고 기억력이 흐려져서 다시 재혼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인생에는 좋은 동반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좋은 동반자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좋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영원한 동반자 하나님
인생을 함께 할 동반자 뿐 아니고 우리에게는 또 영원한 동반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입니다. 신앙이 미성숙할 때는 이 중요성을 잘 모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의 소중함이나 형제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또 이기적인 사람은 친구의 소중함이나 이웃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신앙이 미숙하면 하나님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를 모릅니다. 하나님은 인생에서 영원한 동반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내 영원한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은 에녹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녹이 65세에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기 동행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할라크” 라는 말인데 그 뜻은 산책하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거닐었다”는 말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좋은 동행자였고 동반자였고 대화상대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에녹을 죽지 않은 채 데려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같은 사실을 히브리서 11:5에서 부연설명하기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녹의 믿음을 설명하기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에녹은 아주 좋은 하나님의 동반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에녹에 대해서 어떻게 다가오셨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에녹을 죽지 않은 채 데려가신 것입니다.
내게 좋은 친구가 있음은 축복입니다. 여러분 좋은 친구가 있습니까? 오래 간직하십시오. 하찮은 것 때문에 잃어버리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좋은 동반자는 하늘이 준 복입니다. 좋은 가족, 좋은 배우자, 좋은 부모 모두 하늘이 준 복입니다. 오래오래 좋은 가족으로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축복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영원한 동반자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고의 동반자이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흥분하시게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 대해서 언급하시면서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욥도 하나님을 흥분하게 만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욥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욥 1;1)”라고 평하셨습니다. 에녹은 300년간이나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 그 말은 300년간이나 하나님과 거닐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에녹에 대해서 흥분하신 것입니다. 나에게 좋은 동반자가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중 최고의 동반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영원한 동반자로 삼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자주 만남
좋은 이웃, 좋은 친구, 좋은 부모가 있으면 자주 만나십시오. 만나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만남이 없으면 남이 되어버립니다. 부부도 장시간 떨어져 있으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할 수 있으면 떨어져 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오래 떨어져 살면 시험이 올 수도 있습니다. 부모도 자주 찾아 만나야 합니다. 형제도 이웃도 자주 만나야 합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만나서 가까이 동반한 것이 300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300년도 “하루같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하루같이” 라는 말은 그 삶이 행복하다는 뜻이고 즐겁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서 머슴살이를 하는데 7년을 며칠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7년을 일해야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7년이 하루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에녹이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그 300년이 하루 같았습니다. 하루는 그런 의미입니다. 자주 만나야 합니다. 오늘 부모들이 가장 슬퍼하는 일은 자식들이 멀리 떨어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외면합니다. 그래서 오늘 노부모들이 애완동물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먼 산을 쳐다보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거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이 문제이고 관심이 문제입니다.
어느 아버지는 아들이 집에 자주 오게 하려고 오기만 하면 용돈을 주었습니다. 아들이 용돈을 받아가는 재미로 부모 집에 자주 들렀습니다. 어느 시점이 되어 아버지는 이제는 안줘도 오겠지 하고 일년 분을 한꺼번에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식이 일년에 한번 용돈 타려고 오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매주 한번씩으로 바꾸었더니 매주 오더라고 합니다. 우리는 재산을 요령껏 사용해야 합니다. 이 다음 임종이 가까왔을 때 허겁지겁 상속하느라 야단 떨지 말고 평소에 자식들이 올 때마다 용돈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경쟁하면서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하나님도 이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매일매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는데도 일주일분을 주신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매일매일 양식을 구하러 나가야 했습니다. 기도도 한꺼번에 다 하는 것이 아니고 매일매일 새벽에 나아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연결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것이 단절되었기에 문제입니다. 어느 노부부가 50주년 결혼 기념일 날이 되어가는데 자식들이 온다는 말이 없습니다. 늙은 아내가 서운해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이런 방법을 쓰는 것은 좋은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없다” 하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큰 딸에게 전화를 걸어 “야 네 어머니와 이혼하게 되었다 너만 알아라” 그리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늙은 아내에게 “잠시만 기다려 봐요 싹 모여들을꺼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자식들이 여기저기서 황급히 몰려 왔습니다. 아이들이 부모 이혼이 무서워서 모여들은 것이 아니고 노부모가 이혼하시면 부모를 맡아야 할테니까 말리려고 달려온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에녹이 300년을 하루같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에녹이 하나님을 매일매일 의존하였다는 말이고 의탁하고 하나님을 만났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하루같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에녹을 죽지 않은 채 불러가신 것입니다.
나의 즐거움과 행복
내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내가 즐겁고 기쁨이 된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든든한 삶입니까. 요한복음 15:7을 보면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했습니다. 또 4절을 보면 “내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동행입니다. 세상에 이런 삶도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누리는 삶입니다.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하나님과의 동행은 나의 행복이고 기쁨이고 축복의 삶입니다. 에녹은 그런 이치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을 “하루같이”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그 자체가 즐거운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들의 즐거움입니다.
어느 목사 가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아이가 집에 들어오더니 “오늘 참 감사한 일이 있었어요,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셔요, 오늘 집에 오는 길에 차 사고가 나서 차가 일곱 바퀴나 굴렀어요. 그런데 상처 한곳 없어요.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셔요“. 아이는 너무 신기하다는 듯이 흥분하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나는 너보다 훨씬 더 감사하단다”, “아니, 아버지는 더 큰 사고 났어요?”, “아니 나는 한바퀴도 구르지 않았거든.” 여러분 이것이 동행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오늘 우리는 세상을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생활의 즐거움과 기쁨과 행복함과 든든함을 아는 사람만이 동행의 삶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즐거움과 행복
이것이 어찌 나만의 행복이고 기쁨이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하나님이 흥분하시는 삶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옵니다. 그때 탕자 아버지를 보십시오. 그 탕자 아버지가 흥분하십니다. 동네 사람들 보기 부끄럼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것 상관도 안합니다. 돌아온 아들을 위해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합니다. 형은 서운하다고 투덜댔지만 아버지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흥분하십니다. 그래서 아들을 목욕시키라고 반지를 끼워주라고 합니다. 그 말은 아버지가 흥분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흥분하십니다. 언제 흥분하시는가 하면 하나님과 동행할 때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흥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흥분하셨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24절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 말은 하나님이 에녹을 죽지 않은 채 불러 가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흥분하시게 하십시오. 부모님이 자식에게 흥분하면 자식을 향하여 주저할 일이 없습니다. 매사 흔쾌하실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흥분하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러니까 에녹을 그냥 불러가신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에녹에게 흔쾌하셨다는 말이고 흥분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자들에게는 이런 복이 주어집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에녹입니다.
또 다른 모습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은 다윗입니다. 3천년 전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칩니다. 골리앗은 키가 210cm이고 그가 입었던 청동 갑옷이 45kg입니다. 중무장한 장수입니다. 당시 싸움은 근접결투 방식이었습니다. 양측 장수끼리 가까이서 싸워 이기는 편이 다 가져가는 싸움입니다. 골리앗이 다윗에게 이 방안을 제안했지만 다윗은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노련한 물맷돌질로 골리앗 이마에 총알같은 돌을 날려 기절 시키고 쫒아가 목을 벰으로 상황을 끝냈습니다. 숙련된 투석병이 30m에서 던진 돌은 시속 122km로 날아간다고 합니다. 이 속도는 기관총 속도와 맞먹는 속도라고 합니다. 다윗은 이 전법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골리앗은 다윗의 이 전법을 몰랐습니다. 전통적인 방법밖에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르니까 구태의연한 방법에 만족해 있다가 당한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몸집이 크다고 반드시 이기는 세계가 아닙니다. 군대가 많다고 100% 승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면서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승리가 다윗이 승리한 것입니까? 내가 했습니까? 내 힘으로 했습니까? 그것을 내가 했다고 내 힘으로 했다고 했다면 다윗은 그 날로 끝났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 승리의 요인을 늘 하나님과 동행했던 그 동행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고백합니다. 다윗은 겁 없이 골리앗 앞에 서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너는 창과 칼을 가지고 내게로 오지만 나는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다윗이 그렇게 선언하였을 때 하나님은 흥분하셨을 것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몹시 흥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싸움에서 패배할 리가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감동시키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흥분하시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다윗은 그 하나님에 대해서 시편 18편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 이시로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하니 하나님이 흥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흥분하시니 그 다음 일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에녹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고 욥이 그랬고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이제는 여러분도 하나님을 흥분하시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흥분하십니까.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은 흥분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에녹이 증명해 주었고 다윗이 증명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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