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에 마음 담아.
이현자
장마가 끝날 무렵의 후덥지근한 무더위는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한다. 셋째 첩마저 멀리한다는 이 삼복염천(三伏炎天)한 중간을, 뚝 잘라내어 소한(小寒)과 맞바꾸고 싶은 심정이다. 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수 없으니 선풍기를 켜고 냉수에 미숫가루와 얼음을 넣고 휘휘 저어 마셔보지만 영 마뜩찮다
오늘따라 아파트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청소하는 아주머니의 인기척은 들리지 않고 무엇이 그리 바쁜지, 냅다 달리는 차 소리가 매미 소리 마냥 간간이 귓전을 스친다. 미숫가루 탄 물에 얼음을 띄우고 커다란 대접에 담아, 쟁반에 조심스레 받쳐 들고 아예 찾아 나선다. 14층부터 내려가는 계단은 주전자에 덜 풀어진 미숫가루 물 한가득 담고, 들판에서 일하시는 부모님을 찾아 동구 밖을 향하던 길처럼 느껴져 발걸음이 빨라진다. 한참을 내려가다가 3층에서 더위에 얼굴이 발개진 아주머니를 만났다. 서로 반가워하며 바닥에 같이 주저앉아 새참 막걸리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더위도 조금 사그라진다. 그녀가 말할 적마다, 태어날 때부터 보이지 않았다던 한쪽 눈이 추임새처럼 찡긋대는 것을 보니, 요즘 따라 하릴없이 드는 잡념의 열기까지 식혀준다.
무심결에 생각이 나서 찾아 나섰건만, 함박꽃처럼 활짝 마음을 열고, 젊어서 남편 여의고 홀로 자식들 키우며 살아온 고달픈 인생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며 가며 인사만 나누었는데 그것도 알게 모르게 든 정이었나 보다. 이렇게 한잔의 음료라도 주는 이의 작은 마음이 얹어지고, 받는 이가 조금이라도 성의를 알게 된다면 어느 명품 차가 좋다 한들 이것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꼭 사람과 나누지 않아도 자연에 은둔했던 선인들은, 손수 가꾸고 만들어 즐기던 청허한 차에 절창(絕唱)의 시를 떠올리며 마음이 촉촉해졌으리라. 달빛 아래서 한 잔의 술은 쓸쓸했을지라도, 자연을 벗 삼아 즐기는 차는 풍류를 떠나서 심신을 수양하는 또 다른 삶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혼자 마시는 차는 고독을 달래며 아취(雅趣)를 더하지만, 둘이 나누는 차는 그윽한 차향 속에 스스럼없는 담소로 서로의 경계를 없애준다. 그녀와 따듯한 대화가 이어지면서 저절로 맑고 향기로운 차처럼 마음이 유순해진다. 한쪽 눈으로 살아온 세상을 원망도 없이, 속내를 찬찬히 풀어내고 웃음 지어주던 모습이 더위만 탓하던 나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그녀는 다른 한쪽 눈도 시력을 잃고 있어서 다음 달에 수술 날짜를 잡아놓고, 이젠 이 일을 할 수 없다며 주머니에서 꺼내 손에 쥐여 주는, 눅진한 사탕 때문인지 가슴 한편이 서늘해진다.
그윽한 차의 성품도 좋지만, 거칠고 구수한 미숫가루 물을 젓고 있노라면 숭얼숭얼 피어나는 정 같아 누구라도 찾아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별생각 없이 나섰지만 짧은 시간에 한 사람의 삶을 대하며 늘어진 정신과 나태해진 생각을 다시금 추스른다. 아주머니는 어렵사리 장가간 장남에게 짐이 될까 봐 걱정은 깃들어 있지만, 일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마중 온다는 아들의 살가운 전화 목소리에, 보이지 않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얼굴이 환해진다. 오히려 은은한 차 한 잔에 마음 담아 받은 듯, 괜한 동정심은 사라지고 어느새 가슴이 훈훈해져 온다.
그녀는 삶의 격정을 이겨내고 찻상 앞에 돌아와 앉은 어머니 모습이다. 나는 멀리서 아니면 책속에서 나름대로 가치 있는 삶의 방법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주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동안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명예와 이익을 따지느라 마음의 눈을 한쪽만 뜨고 세상을 바라본 것 같다. 살아오면서 늘 가까이 있는 것에 익숙해져 소중한 줄도 모르고 지나쳐 온 건 아닌지, 비워진 대접 안쪽을 살피는 것처럼 나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