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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Jean-Paul
Sartre1905.6.21~1980.4.15)는 실존주의 철학자입니다.
- 박정자 교수 (서울대) -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자이다. 흔히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하이데거, 사르트르등을 실존주의자로 꼽고 있지만, 20세기의 지적 풍토에 열풍을
몰고온 유행 사조로서의 실존주의는 전적으로 사르트르의 것이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의 창시자였고, 교황이었다. 1940년대와 50년대에 실존주의는
단순히 철학이 아니라 그 시대를 지배하던 생활방식이며 사유양식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를 강타한 실존주의는 지적
무대만이 아니라 대중의 삶 속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1945년 10월에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강연을 했을 때
청중이 너무 많이 몰려 졸도하는 사람이 속출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파리의 생-제르멩-데-프레가의 지하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던 샹송가수 줄리에뜨
그레꼬의 검은 옷에서, 그리고 반항적이며 자유분방한 소녀 작가 프랑스와스 사강의 가벼운 문체에서 실존주의를 발견했다. 60년대에 구조주의의 도전을 받기까지 실존주의는 실로 20여년간 막강한 지배 사조였으며, 사르트르는 거의
교황에 맞먹는 영향력을 누렸다. 난해하기 그지없는 철학사조가 이처럼 폭발적인 대중의 인기를 누린 현상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것이다.
실존주의가 이처럼 성공을 거둔 것은 한 시대와 인물의 절묘한 만남 때문이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새로운 세대들은
전쟁전의 사상에 조종을 고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아카데믹한 개념들을 멀리 했다. 그때 그들이 발견한 것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였다. 실존주의에서 특히 그들을 매혹시켰던 것은 인간의 우연성이라는 개념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 우연히 던져졌다는 것, 따라서 우리의 삶은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다는 것이 실존주의의 출발점이다.
이처럼 실존주의에는 니체적인 절망감의 분위기가 들어 있다. 이 비장한 절망감이 전후 폐허 속의 젊은이들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아무런 목표도, 의미도, 가치도 없는 삶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구축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는 문제이다. 마치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듯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자기가
만들어 간다. 이것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핵심인 절대적 자유의
개념이다. 그는 <존재와 무>에서 "우리는 자유에 처단되었다", 또는 "우리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만을 제외하고는
완벽하게 자유롭다"고 썼다. 내 인생을 가지고 내가 하는 일, 그것은 순전히 나 혼자서 하는
일이며, 다른 누구를 원망할수도 없고, 변명이나 책임 회피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수도 없는 일이다.
내던져진
존재라는 실존의 우연성이 전후 젊은이들의 감성과 맞아 떨어졌다면, 실존주의적 자유가 제시하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은 그들에게 벅찬 희망을 안겨
주었다. 당시 10대이던 사람들에게 사르트르는 청량제이며, 경직된 강단 철학에서의 도피처였다. 철학자 들뢰즈는 이렇게 회고한적이
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사르트르가 있었다. 후덥지근한 좁은 방에 갇혀 있던 우리들에게 그는 신선한 공기였으며, 시원한 뒷마당의 상큼한
바람이었다."
사르트르는 강단 철학에 타격을 가하고 프랑스 문화계에 헤겔, 훗설, 하이데거등 독일 사상을 도입했다.
현실참여적인 사회운동의 측면에서는 자유에 대한 필사적인 추구와 모든 소외에 대항하는 자세가 청년 마르크스와
비슷하다. 그러나 청년 마르크스를 배척하고 유물론의 엄격한 과학성을 주장한 알튀세르의 구조주의가 60년대에 새로운 유행사조로 등장했고, 지금은
알튀세르의 과학주의마저 구시대의 사조로 밀려나간지 오래 되었다. 현재 프랑스의 고등학교 문학반에서 사르트르를 가르치고 있고,
철학교수 자격시험 준비반에서 <존재와 무>가 교과과정으로 채택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지도적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20세기의 한
부분을 장식했던 강렬한 사조로서의 역사적 위치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행동하는 지성이었다. 그것이 물론 언제나
성공한것도 아니었고, 언제나 옳은것도 아니었다. 1948년에는 장 주네의 사면을 위해 장 콕토와 함께 청원 운동을 벌여 오리올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을 받아냈다. 1952년 인도차이나 전쟁 반대로 5년형을 선고받은 젊은 수병 앙리 마르텡 사건에서는 그의 청원이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했다.
1950년 한국전 당시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미국과 남한에 의한 북침설'을 그대로 믿어 친구인 메를로-퐁티와 결별했으며, 1954년에는
소련 여행에서 돌아와 그곳에 `완전한 비판의 자유'가 있다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1956년 헝가리 사태가 일어나자 소련을 비난하고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같은해에 이스라엘-프랑스-영국의 수에즈 운하 개입을 반대했다.
1958년에는
말로, 마르탱 뒤가르, 모리악등과 함께 알제리전에서의 고문 행위를 비난하는 공개장을 정부에 보냈고, 드골을 비난하는 기사를 여러편 썼다. 그해
9월 드골의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격렬하게 반 -드골 켐페인을 벌였으나 프랑스 국민들은 드골을 선택했다. 1959년에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과 비밀의 관계를 맺고 있던 프랑시스 장송과 인터뷰를 했다. 마침내 문화상 말로는 사르트르의 나치 부역을 의심하는 듯안
어조로 그를 비난했다. 1960년 10월에는 제대군인들이 샹젤리제에 모여 "사르트르를 총살하라"라는 구호를 외쳤고, <파리 마치>는
사설에서 <사르트르 : 내란을 일으키는 모략꾼>이라고 썼으며, <현대>지가 압수되기도 했다. 그해 11월에는 지식인들의
121 서명사건이 일어났으나, 드골의 명령으로 사르트르는 기소되지 않았다. 드골은 이때 "지식인들은 그냥 내버려 두어라... 볼테르를 체포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다음해인 1961년에도 국민투표 반대 켐페인을 벌였고, OAS와 알제리전 반대 시위를 했다.
그의 아파트가 두 번째로 피습된 1962년 4월에는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는 외삼촌
알버트 슈바이처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왔다. "핵전쟁 반대 투쟁자의 명단에서 네 이름을 볼때마다 나는 너에게
친근감을 느낀다." 그해 7월에는 `전면 무장 해제와 평화를 위한 세계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1963년에
다시 `국제작가동맹 창설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재차 방문했다.
그의 정치활동은 군중 데모, 항의 시위, 공개장
서명과 신문 잡지 기고문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1968년 5월 혁명때는 르노 자동차 공장에 직접 나가 드럼통 위에 서서 노동자들에게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이미 병이 깊이 든 노인으로서 아랍 이민 노동자를 위한 반-인종주의 활동, 혹은 수감자 인권운동에 참여하여 미셸
푸코와 만나기도 했다. 좌파 신문인 <인민의 대의>지와 <리베라시옹>의 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죽기 1년전인 1979년에는
앙드레 글뤽스만의 중개로 베트남의 보트 피플을 구하기 위해 평생의 숙적이었던 고등사범 동창 레이몽 아롱과 만나 마지막 화해를 하기도 했다.
11년 전인 1968년에 욕설을 퍼부으며 결별했던 아롱과 사르트르는 나란히 지스카르 데스텡 대통령을 만나러 갔다. 별다른 성과는 없었지만 평생
좌익 투쟁만을 해오던 사르트르가 그 반대편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의 인생은 글과 말 그리고 행동으로 사회 문제에 뛰어든, 진정 행동하는 지성이었다.
사르트르는 행동하는 지성인이었습니다.
사르트르의 현실참여론은 지식인론과 맞물려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지식이 있다고 곧 지식인이 아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의사, 변호사, 학자, 엔지니어, 교수등은 실용 지식의
전문가일뿐이다. 이 실용지식의 전문가는 보편성을 다루는 기능인이다. 예를 들면 암세포를 치료하는 의사의 의술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암세포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을 가리지 않으며, 그 치료방법 역시 특권층이나 소외계층에 달리 적용되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높은 수가(酬價)에 의해, 그리고 의사들의 편향성에 의해 의학이라는 보편성은 특수계층에 봉사하고 있다. 법률도 마찬가지이다. 힘없는 서민들에게
가혹하게 적용되는 법이 돈많은 재벌들에게는 한없이 느슨하게 적용되는 예를 우리는 가끔 보고 있다. 이와같은 실용지식의 전문가가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보편적 작업이 실은 특수계층에 봉사한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때, 이 불편한 의식이 바로 지식인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은 보편과 특수 사이의 갈등을 인식하고, 가짜 보편성이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를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사람이다.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순순히 받아들여 자신의 보편적 작업을 특수에 봉사하게 하는 사람은
사르트르에 의하면 한갓 기술자에 불과하다.
자신이 추구하는 실용적 진리와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의 대립을 의식할때 비로소 그는 지식인이 된다. 그러니까 실용적 지식의 전문가가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는
민중적인 관점, 소외된 계층의 관점을 채택해야만 한다.
사르트르의 지식인론은 물론 마르크시즘에 바탕을 두고 있고,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이 그렇게 단순 명료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될수도 있다. 그러나 마르크시즘에 동의하건 안 하건간에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그의 지식인론은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사르트르의 현대적 의미
그를 좋아하건 싫어하건, 혹은 비판하건 옹호하건간에 우리는 사르트르 없는 20세기를 상상할수 없다. 철학자, 소설가,
극작가, 문학비평가, 시사평론가, 에세이스트, 참여 지식인, 정치선동가, 거리의 투사등 말 그대로 전방위적 스타 지식인이었다.
그는 도처에 있었다. 대학에, 서점에 있었을뿐만 아니라 신문, 라디오, 극장, 그리고 거리와 카페에도 있었다. 바리케이드
위에도 있었고, 공장 노동자들 앞에도 있었다. 2차대전 종전 직후 실존주의를 들고 나와 기존의 철학을 부정하며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고, 이어서
독특한 참여론(앙가주망)으로 마르크시즘의 투사가 되었다. 금년 4월은 그가 죽은지 20주기가 되는 달이다.
실존주의와 현실참여(앙가주망)는 사르트르가 고안해낸 2대 발명품이다. 후설, 하이데거, 헤겔등을 정독하고난 후 써낸
<존재와 무>는 실존주의의 경전이 되었다. 그의
<존재와 무>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능가하는 철학적 업적이라 할수 없고, 학문적으로는 메를로-퐁티가 더 인정을
받고 있지만, 여하튼 그는 어려운 존재론을 거리에 끌고 내려와 대중화시켰고, 20세기 최고의 '사상의 지도자'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실존주의는 무엇일까? "누가 뭐래도 나는 나야!"라는 젊은이들의 사고야말로 가장 실존주의적이다. 인간을 규정하는 그 어떤
객관적, 보편적 정의나 개념은 없다. 체제 혹은 체계 보다 개인이 우선한다.
개인이 중요할뿐 인류 공통의 보편적 성질이나 기존의 가치 체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무런 모델이나
전범이 없이 개인은 완벽한 자유 속에서 순전히 자신의 선택에 의해 자기 인생을 결정하고 구축해 간다. 자신의 본질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자신의 인생을 이러저러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사르트르의 그 유명한 명제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주체의 철학이고, 자유의 철학이다. 실존은 또한 우연성이고 무상성(無償性)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순전히 우연한 사건이다. 거리에 나딩구는 하찮은 돌맹이처럼 나의 출생 또한 우연의 산물이다. 내 존재를 이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누가 비싼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공짜로 이 세상에 왔다. 그것이 무상성(無償性)이다. 공짜 물건은 가치가 없다.
따라서 나의 존재 또한 아무런 가치가 없다. 우연성, 무상성인 나의 존재는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잉여적 존재, 여분의 존재일뿐이다.
이런 잉여적 존재에 가치와 목적을
부여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일뿐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절대적인 자유를 가지고 어떤 인생을 구축할것인가는 순전히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 실존주의는 이처럼 개인에게 절대적인 책임을 묻는
철학이다. 그리고 모든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일체의 권리개념을 파괴한 전복적 사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실존주의는 그 어두운 외관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재즈처럼 경쾌하고 유연한 철학이었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50년대에 들어와 마르크시즘에 경도되면서 그의 젊고 쾌활하던
실존주의는 경직되고 모순적인 것으로 변했다. 노동계층과 민중을 위한다는 마르크시즘의 대의에 경직되어 소련, 중국, 쿠바의 전체주의적 범죄를
묵인하거나 옹호하는 역사적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사망 20주기를 맞은 프랑스의 언론들도 대체적으로 그의 정치적 오류를 냉정하게 평가하는
쪽이다. 극심한 경쟁 체제의 현대 사회에서 각 개인이 좀더 직접적으로 자신의
책임과 자유와 근원적인 존재론적 불안감과 맞닥뜨려야 하는 오늘날 어쩌면 실존주의적 감수성은 젊은이들에게 호소력이 있을법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은 실존주의가 자극적이고 반항적이며 논쟁적이고 유쾌하게 이의를 제기했던 2차대전
직후의 상황과 전혀 다르다. 시대에 대한 불안감은 낭만적이며 무정부주의적인 반항만으로 해결할수 없다는 것을 요즘의 젊은이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오류와 모순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는 자기 쇄신성이라든가, 혜택받지 못한 계층에 봉사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라는 사르트르의 지식인론은 영원히
우리에게 기억될 것이다.
朴貞子 교수
<출처 : http://blog.naver.com/cghn/7000639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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