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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성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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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GA 스타 렉시 톰슨이 US여자오픈 대회를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올해 말 은퇴하겠다고 했다. 톰슨은 1995년생으로 아직 20대다. 김효주, 고진영 등과 동갑이며 올해 LPGA 투어 신인인 임진희(26)와는 2살 차이에 불과하다. 은퇴하기엔 너무 젊은 나이여서 다들 놀랐다. 톰슨은 “정신적 고통을 겪지 않은 골프 선수는 없다. 그걸 얼마나 잘 감추느냐의 문제이고 그래서 매우 슬프다”며 울었다.
렉시 톰슨이 2011년 나비스타 클래식 우승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톰슨은 16세 때 첫 LPGA 투어 우승을 차지했다. AP=연합뉴스
남자 투어에서 통할 유일한 여성
톰슨은 어릴 때부터 오빠들과 경쟁을 했다. 오빠 둘 다 PGA 투어에 갈 정도로 뛰어났는데 막내인 렉시도 만만치 않았다. 둘째 오빠인 커티스는 “연습하면서 내기를 했는데 렉시가 질 때가 많지는 않았다”고 했다. 렉시 톰슨은 12세에 US여자오픈 예선을 통과해 출전권을 땄다. 당시 역대 가장 어린 선수였다.
톰슨은 지난해 남자대회인 PGA 투어 슈라이너스 오픈에 나가 평균 301야드를 쳤다. 컷을 통과하지는 못했지만 여자 선수 중 유일하게 남자와 겨룰 수 있는 선수로 꼽혔다. 안니카 소렌스탐이나 미셸 위보다 낫다는 평가였다. 톰슨은 LPGA 투어에서 올해를 제외하고 평균 드라이브샷 거리가 한 번도 270야드 아래로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여자 선수 중 톰슨보다 멀리 치는 선수가 없지는 않았지만, 실전에 쓸 수 있는 안정적인 대포를 보유한 톰슨이 LPGA 최고 장타자라고 다들 인정했다.
너무 일찍 전쟁터에 간 소녀
톰슨은 15세에 프로로 전향했다. 그의 가족들은 직후 LPGA 투어에 회원이 되게 해달라고 졸랐다. LPGA 투어는 만 18세가 되어야 회원이 될 수 있다며 거절했다. 톰슨은 만 16세에 최연소 LPGA 우승을 차지해 기어이 17세에 LPGA 회원이 될 수 있었다.
프로 골프 투어는 전쟁터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버디를 하면 찬사를 받지만 보기를 하면 조롱을 듣는다. 골프는 승자는 한 명이고 100여 명이 패자가 된다. 다른 스포츠는 감독 작전이나, 동료, 상대 반칙, 심판 등에게 핑계를 댈 수 있지만 골프는 자기 자신 뿐이다. 컷 탈락한 후 호텔방에 혼자 있을 때의 외로움을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한다. 10대인 톰슨이 그런 전쟁터에서 싸울 만큼 마음이 여물었는지는 알 수 없다.
2018년 JTBC 챔피언십에서 경기하는 박인비와 렉시 톰슨. AFP=연합뉴스
프로 전향 후 톰슨은 박인비, 리디아 고 등과 겨뤄야 했다. 압도적인 장타로 무장한 톰슨이 쉽게 이기지 못했다. 화려한 장타는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독이 될 때도 많다.
밥 로텔라는 『골프 완벽한 게임은 없다』에서 “선수의 잠재력은 게임을 대하는 태도와 웨지·퍼트 능력, 현명함”이라며 “핀 120야드 밖에서는 아무리 멀리 쳐도 경기에 별 영향이 없다”고 했다.
주홍글씨
톰슨을 짓누르는 악몽은 또 있었다. 2012년 톰슨의 가족은 미국 골프채널을 통해 가족사를 공개했다. 톰슨의 어머니인 주디는 남편 스콧 톰슨과 결혼하기 전 스콧의 형인 커트와 결혼했다. 형인 커트는 1983년 스키 사고로 사망했는데 동생 스콧이 형의 가족을 뒷바라지하다 형수와 사랑에 빠졌고 2년 뒤 결혼했다.
주디와 스콧 사이에서 아들 커티스와 딸 렉시가 태어났다. 부부는 세 자녀를 모두 골프 선수로 키웠다. 골프 투어는 소문이 많은 곳이다. 누군가 잘되면 누군가 밀려난다. 예쁘고 재능이 넘치는 렉시 톰슨이 LPGA에서 활약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주디 톰슨은 “우리 가족에 대해 사실과 다른 소문들이 있다”고 했다. 누군가 나쁜 소문을 퍼뜨렸던 것 같다.
10대 때 톰슨은 두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골프가 재밌기만 하던, 그래서 승승장구하던 천재 소녀는 20대가 되면서 골프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된 듯하다. 그러다 대형 사고가 또 터졌다.
렉시 톰슨이 2017년 ANA 인스퍼레이션 연장전에서 패한 후 걸어오고 있다. 승자인 유소연은 캐디와 포옹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2017년 메이저대회인 ANA 인스퍼레이션 4벌타 사건이다. 톰슨은 우승을 눈앞에 뒀다가 전날 그린에서 오소플레이를 한 게 시청자 제보로 알려져 4벌타를 받고 유소연에게 연장 끝에 패했다. 처음엔 너무 심한 판정이라는 동정론이 많았다.
그러나 4벌타 사건은 그린에서 유리한 위치로 공을 옮겨 놓는 이른바 ‘동전치기’로 인한 것이었다. 동전치기는 볼을 홀 가까운 쪽으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톰슨처럼 경사와 그린 상태가 퍼트하기에 유리한 옆쪽으로 옮기는 일도 가끔 나온다.
골프 관계자들은 이전에도 톰슨이 이런 일을 했기 때문에 이 버릇을 아는 투어의 누군가가 TV 화면을 유심히 보고 제보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톰슨은 이후에도 드롭 위치 논란, 움직일 수 없는 장애물을 치운 사건, 옆 홀 페어웨이에 떨어진 볼을 닦은 사건 등 룰 문제가 터졌다. 양심을 중시하는 골프에서 선수들의 룰 위반은 일종의 주홍글씨다.
렉시 톰슨이 지난해 US오픈에서 팬들과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마음 착한 소녀
인간은 다면적이다. 톰슨은 LPGA 투어에서 팬들과 스폰서에게 가장 친절한 선수로 꼽힌다. 스테이시 루이스는 “톰슨은 팬들의 사인 요구를 거절할 때가 없었다”고 말했다. 모건 프레셀은 “톰슨이 (선수들이 귀찮아 하는) 프로암에 거의 빠지지 않았으며 스폰서에게 자필로 일일이 감사의 편지를 쓰는 선수”라고 했다.
톰슨은 성실하고 마음이 따뜻하다는 말이다. 적어도 철면피형은 아니다. 톰슨은 여성 골프의 홍보대사라는 부담도 갖고 있었다. 이런 선수가 규칙 위반과 가족사라는 두 개의 주홍글씨를 달고 다닌 격이다.
톰슨은 2018년 여름 한 동안 쉬다 나와 속마음을 털어놨다.
다섯 살부터 골프에 내 자신을 쏟아 부었다. 연습하고 훈련만 했다. 내가 성장하면서 아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내가 누구인지, 골프 말고 나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고 싶었다. 나는 로봇이 아니고 인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4벌타 사건 이후) 지난 일 년 반 동안 감정적으로 아주 힘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겉으로는 나는 괜찮고 골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지난해 어떻게 경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올해 그 고통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톰슨은 조모의 사망과 어머니의 암투병도 지켜봤다.
퍼트 입스
톰슨은 2012년부터 13시즌 동안 LPGA 투어 라운드 평균 퍼트 수 통계에서 톰슨은 평균 109위다. 92위 이내에 든 건 두 번뿐이고 100위 밖으로 나간 건 8번이다. 140위를 하기도 했다. 퍼트에 스트레스가 많았다. 4벌타 사건도 퍼트에 대한 부담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경기 중 눈을 감고 퍼트하기도 하고, 벼루처럼 큰 퍼터를 가지고 나오기도 했다. 2017년 최종전 60㎝ 퍼트를 넣지 못한 게 가장 유명하지만 홀 10㎝ 옆에 있는 볼을 헛스윙해 넣지 못한 적도 있다. 톰슨은 롱게임 능력으로 퍼트 손해를 근근이 메웠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그린에서 괴로워했다. 퍼트 입스 증세다.
2021년 US여자오픈에서 역전패한 후 렉시 톰슨이 사소 유카와 주먹 인사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US오픈 대역전패
톰슨은 2019년 숍라이트 클래식에서 우승했다. 2021년 US오픈에선 우승 바로 앞까지 갔다. 최종 라운드 선두로 출발했고 10번 홀까지 5타 차 선두였다. 그러나 11번 홀 페어웨이에서 뒤땅이 나온 후 표정이 굳어졌다. 톰슨은 이후 그린과 5m 떨어진 자리에서도 웨지 대신 퍼터를 썼다. 짧은 퍼트도 자주 놓쳤다.
박지은 SBS 골프 해설위원은 “뒤땅 때문에 부담이 생겨 웨지를 잡지 못한 거로 보이고, 퍼트도 폴로 스루가 전혀 없는 자신 없는 스트로크”라고 했다. 톰슨은 11번 홀 이후 5타를 잃었다. 특히 마지막 두 홀을 모두 보기를 하면서 결국 한 타 차로 연장전에 가지 못했다.
톰슨은 잘나가다가 한 번 실수가 나오면 무너졌다. 평소에는 괜찮지만 중요한 대회 중요한 순간엔 곤두박질쳤다. 그해 가을 펠리칸 여자 챔피언십에서는 연장전 끝에 넬리 코다에게 패했다. 연장전 통산 4전 전패다. 2021년 톰슨은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넌 것으로 보인다.
은퇴 선언은 지난 달 PGA 투어 선수 그레이슨 머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에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톰슨이 소셜 미디어에 쓴 글이다.
12살 때부터 골퍼로서의 내 삶은 끊임없는 관심과 면밀한 조사, 압박의 소용돌이였다. 카메라는 항상 켜져 있어 골프장 안팎의 내 모든 순간을 포착했다. 소셜 미디어는 잠들지 않으며 전 세계에서 댓글과 비판이 넘친다. 내면의 어려움과 씨름하면서 겉으로는 미소를 유지하는 데 지쳤다
톰슨은 15세 때 프로가 됐다. 내년이면 30세가 되니 14년여 프로 생활을 하게 된다. 프로로 활동한 기간은 충분하다. 너무 일찍 전쟁터로 나왔을 뿐이다.
밥 로텔라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훌륭한 잠재력이 있다고 말하고 항상 모든 경기에서 이기기를 기대한다면 당신은 자신의 잠재력을 거부하고 혐오하며 그것을 부담스럽게 여길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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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골프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