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야화> 폐비 윤씨 (하)
원자 출산으로 지위 공고했지만 독약 소지·음해 등 악행 발각돼 폐출…1482년 사약 받고 사망
王 오른 연산군, 母 무덤 ‘릉’ 승격 그도 잠시…다시 ‘회묘’로 격하
후궁에서 왕비의 자리에 오른 윤씨는 원자(훗날 연산군)까지 출산하면서 그 지위를 공고히 한 듯했다.
그러나 성종은 여러명의 후궁을 둬 왕비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성격이 강한 왕비는 남편의 탈선(?)을 방조하지 않았고, 비상을 소지하면서 후궁들의 제거에 나서게 됐다.
결국 성종은 1479년 6월 공식적으로 왕비의 폐출을 발표하게 된다.
성종이 왕비를 폐출한 이유는 <성종실록>에 잘 나타나 있다.
“몰래 독약을 품고 사람을 해치고자 하여, 건시와 비상을 주머니에 같이 넣어 두었는데,
이것이 나에게 먹이고자 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이어
“무자(無子)하게 하는 일, 반신불수가 되게 하는 일,
무릇 사람을 해치는 방법을 작은 책에 써서 상자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발각된 것”과
“나의 후궁인 엄씨 집과 정씨 집이 윤씨를 해치려고 모의한 내용의 언문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이들에게 해가 미치게 하고자 한 것”도 폐출 이유로 명시했다.
또한
“상참(常參)으로 조회를 받는 날 왕비가 먼저 일어나야 마땅함에도 조회를 받고 돌아온 뒤에 일어나
부인의 도리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과
“궁중에 있을 때에 대신들의 가사(家事)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했다는 것”도 폐출 이유가 됐다.
여기에다 인수대비도 한몫을 거들었다.
“주상이 안심하고 음식을 들 때가 없게 하였다”거나
“가르치기를 곡진하게 해도 그 허물을 고칠 가망이 없었다”면서 윤씨 공격에 적극 나섰다.
원자의 생모인 점을 감안, 폐비시키지 말자는 논의도 있었으나 성종과 인수대비의 강한 의지로 윤씨는 끝내 사가로 폐출됐다.
사가로 쫓겨난 윤씨는 1482년 성종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죽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연려실기술>에는 “윤씨는 폐위되자 밤낮으로 울어 끝내는 피눈물을 흘렸는데 궁중을 훼방하고 중상함이 날로 더하였다.
임금이 내시를 보내어 염탐하게 하였더니, 인수대비가 그 내시를 시켜 ‘윤씨가 머리를 빗고 낯을 씻어 예쁘게 단장하고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이 없다’고 대답하게 했다.
왕은 드디어 그 참소를 믿고 죄를 더 주었던 것이다”고 기록돼 있다.
사망 후 폐비 윤씨의 무덤은 경기 장단에 조성됐는데, 1489년 성종은 세자(연산군)를 생각해 ‘윤씨지묘’라는 이름을 내리게 했다.
1496년에는 연산군의 지시로 무덤을 현재의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학교 의료원 쪽으로 이장, 회묘(懷墓)라 했다.
지금도 이곳을 ‘회기동’으로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회묘라고 불렸던 그녀의 무덤은 연산군이 회릉(懷陵)으로 승격했다.
사후에 ‘제헌왕후’로서 왕비의 위상을 잠깐 찾았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된 것이다.
오랜 기간 동대문구에 위치했던 회묘는 1969년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서삼릉(西三) 경내로 다시 옮겨졌다.
인수대비는 여성들이 지켜야 할 성리학 윤리서인 <내훈(內訓)>을 직접 저술하는 등
여성들이 모범적으로 성리학의 이념을 실천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인수대비에게 왕인 남편의 행동을 투기하고 손찌검까지 하는 며느리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극심한 갈등은 조선 왕실 최초로 왕비의 폐출과 사사(賜死)라는 선례를 남기게 됐다.
마치 우연의 일치처럼 윤씨가 사사되기 2년 전인 1480년 민간에서는 어을우동(於乙宇同)이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당시에도 교형은 가혹하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성종은 이를 강행했다.
어을우동과 폐비 윤씨는 성리학 이념의 강화라는 시대 상황의 희생양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