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살려고 1급 부왜파 박시춘 기념관 짓겠다”는 박일호 밀양시장.. 그것도 약산 김원봉 생가 터 의열기념관 근처에..
1. 탁월한 부왜행각, 박시춘
"무명지(약지) 깨물어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 그려 놓고 성수만세(일왕의 만수무강 기원) 부르고 한 글자 두 글자 쓰는 사연 나라님의 병정 되길 소원합니다."
경남 밀양 출신 부왜파 작곡가 박시춘이 1943년 만든 '혈서지원'이라는 노래 가사 중 일부다. 총 5절로 된 이 노래는 한 청년이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고 '나라님의 병정 되기를 소원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청년들에게 일본의 침략전쟁에 나가라고 독려하는 노래..
박시춘은 이 노래뿐 아니라 1945년 8월 광복 직전까지 '아들의 혈서', '즐거운 상처', '결사대의 아내' 등 일본의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참가를 호소하는 곡을 만들었다. <친일인명사전>에 대중 음악가로서는 유일하게 '1등급 부왜파'로 등재된 인물이다.
2. 해방후 부귀영화, 승승장구..
1938년, '애수의 소야곡' 빅히트 후 숱한 부왜매국 작곡을 하던 박시춘은 해방후 단죄되기는커녕, 인기가수 남인수와 '은방울 쇼'를 만들어 '가거라 삼팔선', '신라의 달밤'으로 전국을 풍미했다. 그 후 가수 현인과 콤비를 이뤄 '고향 만 리', '럭키 서울', '비 내리는 고모령', '전우여 잘 자거라', '굳세어라 금순아'를 발표했다. 다카키의 쿠데타 이후 기존의 연예 조직을 재편한 '한국연예협회'에서 4·5·6·7대 회장을 연임했다. 1973년 회갑기념 '가요 작곡 40년'이라는 공연을 열었으며, 1982년 광주학살자 전두환으로부터 '문화훈장보관장'을 받았다. 최근 KBS<불후의 명곡> '대한민국 100년 겨레와 함께 노래하다' 편에서 부왜파 박시춘의 '비 내리는 고모령'이 방송돼 논란이 되기도 했다. 84세로 천수를 누리고 간 그는 생전에 단 한 번도 자신의 부왜행각을 사과하지 않았다.
3. 먹고사니즘을 위해 부왜에 혈세 쏟겠다는 밀양시장
최근 밀양시가 박시춘을 비롯해 밀양 출신 유명 작곡가들의 행적을 모아 '(가칭)가요박물관(이하 박시춘 기념관)을 건립하겠다'라고 밝혔다. 밀양시민들은 '밀양가요박물관저지시민연합'을 만들고 "독립운동의 성지 밀양에 어떻게 부왜파 기념관을 짓느냐"라면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박일호 밀양시장 "밀양을 먹여 살릴 성장 동력.. 시민과 향우, 문화계, 가요계 인사들의 가요 콘텐츠 요구가 많아 가요박물관을 계획했다. 박시춘이 뛰어나기 때문에 이렇게 더 논란이 되는 것 같다"
밀양시의 박시춘 기념관 건립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중심에는 손정태 밀양문화원장이 있다. 당시 밀양문화원 이사였던 손정태씨는 지난 2015년 <밀양신문>에 '박시춘을 일으키자!' 칼럼 4편을 연속 기고하면서 '박시춘 논란'에 불을 지폈다.
-손정태 "밀양인과 박시춘 선생을 가슴 아프게 만든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라는 것이 일제강점기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부왜파 딱지를 그들의 기준으로 마음대로 갖다 붙였다. 정치적인 이유로 욕보인 것으로, 대단히 잘못된 일.. 박시춘의 친일곡은 '목단강 편지',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아내', '혈서지원' 등 겨우 네 곡이었다. 목숨의 위협을 받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오선지를 채워 나가지 않았겠는가? 후손들을 직접 만나 기타와 아코디언, 의상 등을 협조받았다."
손정태 원장은 밀양문화원 본연의 역할인 우수한 밀양문화를 알리기보다는 2015년부터 4년 동안 꾸준히 부왜 선양에 앞장서고 있다. 손정태 사퇴만이 민족 앞에 속죄하는 최선의 방법.. 이미 밀양 최고의 관광지 영남루 입구에 1급 부왜파 박시춘의 옛집터가 그의 흉상, 비석과 함께 조성된 상황인데도 30억(애초 100억)을 들여 가요박물관 추가 건설?? 밀양시가 왜 이렇게까지 1급 부왜파를 기념하는 가요박물관을 짓기 위해 애를 쓰는지 알 수 없다.
3. 왜 굳이 독립운동가 김원봉·윤세주 생가터 주변에?
밀양시는 박시춘 기념관의 최초 위치를 밀양시 해천변에 위치한 항일독립운동테마거리에 잡으려 했다. 그러다 밀양시민들의 반발로 본래 계획이 변경됐다. 항일테마거리는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과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 불리는 석정 윤세주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해천변 중심에 자리한 김원봉 생가터에는 이미 지난해 3월 '의열기념관'이 건립돼 자리하고 있다. 또 의열기념관 건너편에는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80여 명의 위패가 걸려 있을 정도로 밀양시 해천변은 대한민국 항일운동의 중심지로 인정받고 있다.
약산 김원봉 장군과 석정 윤세주 열사가 주도한 의열단 창단이 올해로 100주년.. 밀양은 독립운동의 성지인데, 그것도 약산 김원봉 장군과 석정 윤세주 선생의 생가가 위치한 해천변에 부왜파 기념관을 만들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일.. 이번 일을 기회로 영남루 입구에 들어선 1급 친일파 박시춘의 집터와 흉상, 노래비 등 부끄러운 우리의 지역 문화유산을 바로 알리고 철거해야 한다
박시춘 기념관이 세워질 장소는 밀양읍성 동문 우측으로, 해천 항일테마거리와 걸어서 10분 거리.. 독립운동가들의 항일거리 인근에 부왜파 기념관이 만들어지는 것.. 관광객 동선을 고려한 것이란다. http://www.amn.kr/sub_read.html…
4. 콜라보 vs 레지스탕스, 백년전쟁 중..
일제의 사냥개로 독립투사들을 고문하고 때려잡던 악질 왜놈 순사 노덕술이 이승만과 부왜파 덕에 해방후에도 경찰 요직을 맡으며, 임정 마지막 국무위원을 지낸 조선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체포해다 모진 고문을 가하며 말할 수 없는 수모를 주었다. 부왜 장택상이 부리는 반민족경찰로부터 끊임없는 목숨위협을 당하던 차, 김구와 함께 평양방문 후, 돌아오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은 김원봉 가족을 모조리 살육했고, 김원봉에 독립운동자금 대던 밀양의열단 감영생 선생을 비롯한 2300명 마산형무소 수감자들을 빨갱이로 몰아 모조리 돌덩이를 달아 마산 앞바다에 단체 수장했다. 감영생은 종갓집 하나밖에 없는 외동아들이었는데, 그의 모친과 아내는 매일 밥상을 살강 위에 떠놓고 기다리시다 돌아가셨다.
노덕술은 해방후 충무무공훈장 받고 2014년 '자랑스러운 울산인' 후보에 올랐다.
우리는 "김원봉,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는 나베 발언을 통해, 2019년 판 왜놈순사 노덕술의 부활을 보고 있다. '반공' 발언은 대한민국 32% 천만 반공민중으로부터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무조건 환호와 박수를 받는다. 자유당이 온갖 부패와 패륜, 살육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이유다.
당신 주변의 반북 친척, 반공 친구들을 돌아보라... 콜라보 vs 레지스탕스, 백년전쟁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