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열차(國際列車)는 타자기(打字機)처럼
김경린
오늘도 성난 타자기처럼
질주하는 국제열차에
나의
젊음은 실려 가고
보랏빛
애정을 날리며
경사진 가로(街路)에서
또다시
태양에 젓어 돌아오는 벗들을 본다.
옛날
나의 조상들이
뿌리고 산 설화(說話)가
아직도 남아 거리와 거리에
불안(不安)과
예절(禮節)과 그리고
공포(恐怖)만이 거품 일어
꽃과 태양을 등지고
가는 나에게
어둠은 빗발처럼 내려온다.
또다시
먼 앞날에
추락(墜落)하는 애정(愛情)이
나의 가슴을 찌르면
거울처럼
그리운 사람아
흐르는 기류(氣流)를 안고
투명(透明)한 아침을 가져오리.
(9인 시집 『현대의 온도』, 1957)
[작품해설]
김경린은 1949년 박인환·김수영·임호권·양병식과 함께 시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펴냄으로써 ‘후기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시킨 시인이다. 그는 이미 일본에서 모더니즘 동인회 ‘바우(VOU)’등에 동인으로 참여한 바 있으며, 귀국해서는 조선일보에 『차창(車窓)』 등을 발표하여 김기림의 직계 제자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또한 청록파로 대표되는 전통적 서정 세계에 반발하여 1950년 ‘후반기’ 동인회를 결성하고 도시적 감수성, 현대의식, 전위적 기법 추구 등 다양한 노력을 통해 전쟁 직후의 혼란상을 노래하면서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1960년대 말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가 1980년부터 재개한 그는 ‘한국적인 전통’에서 ‘세계적인 전통’으로 우리 시가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정열적인 창작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 시는 일찍이 그라 『모더니즘』 선언에서 밝힌 바 있는 모더니즘 세계성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국제 사회 속에서 겪는 자식인 화자의 절망과 좌절을 현대 문명의 한 표상인 ‘타자기’로 포착하여 현대인들의 정신 풍토를 그리고 있따. 발표 당시 ‘국제열차’ · ‘타자기’ 같은 시어는 대단히 생경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시인은 이 광물성 이미지의 시어들을 통하여 현대 도시 문명이 지닌 메카니즘을 보여 주고 있다.
화자는 마치 ‘성난 타자기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질주하는 국제열차’처럼 빠르게 변화해 가는 국제 사회에 동승하지 못하고 ‘조상들이 / 뿌리고 간 설화가 / 아직도 남은’ 전통적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우수와 병리를 진단한다. 그것은 바로 6.25의 비극적 체험과 상처로 인한 삶의 의미에 대해 회의, 가치의 전도와 혼란, 도시화에 따른 비인간화 현상의 심화 등, 급속도로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젊은 지식인들의 ‘불안’과 ‘공포’이며, ‘예절’로 대표되는 전통 문화가 파괴되는 현실을 무심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고통이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빠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불안과 고통을 겼고 있지만, 세계적 ‘기류’에 편승하여 언젠가 ‘투명한 아침을 가져올’ ‘앞날’을 기다리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작가소개]
김경린(金璟麟)
1918년 함경북도 경성 출신
일본 와세다대학 토목과 졸업
1949년 공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
1986년 제5회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문학상 수상
1988년 제3회 상화 시인상 수상
『신시론』, 『후반기』, 『DIAL』 동인
시집 :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공저, 1949), 『현재의 온도』(공저, 1957), 『태양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서울』(1985), 『서울은 야생마처럼』(1987), 『그 내일에도 당신은 서울의 불새』(1988), 『화요일이면 뜨거워지는 그 사람』(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