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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8. 묵상글 (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 창조 안에 이미 구원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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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8.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2.08 04:38
- 창조 안에 이미 구원이
잘 아시다시피 오늘 축일은 마리아가 주님을 원죄 없이 잉태하신 축일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원죄 없이 주님을 잉태하셨다는 것도 사실이고 기릴만한 것이지만
오늘 축일은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축일이고 그것을 기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님 성탄이나 주님 잉태처럼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며
그러기에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지만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마리아도 모르고,
부모라고 하는 요아킴과 안나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모를 뿐 아니라 마리아도 부모도 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아무런 공로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무 공로가 없다니 은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은 인간의 구원역사상 가장 엄청난 은총에 대한 기념입니다.
우리가 보통 체험하는 은총은 우리가 뭘 하려고 했지만
별로 한 것이 없는데도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체험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은총에는 나의 원의라도 있었거나
원의 실현을 위해 조금이라도 내가 한 것이 있지만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의 경우에는 잉태될 때
그럴 원의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의 경우는
태어나기 전 아예 존재조차 없을 때 받은 은총이며,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획되고 정해진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창조계획 안에 이미 구원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계획이 그만큼 더 대단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계획이 완전한 사랑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도 2세 출산을 계획할 때 그를 키울 계획까지 합니다.
무책임한 사랑의 경우 애를 낳고는 키울 수 없어 내버리기도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 사랑으로 애를 낳을 땐 애를 키울 계획까지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사랑의 경우엔 창조 안에 구원이 더욱 완벽하게 있지 않았겠습니까?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구원에서 제외되도록 버려둘 리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의 계획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 후에야 계획된 것이 아니라
창조 때의 계획이자 창조 이전부터의 계획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창조와 구원도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생긴 계획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를 십자가 위에서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보다도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더 대단하고 소중합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유한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도록 창조하신 것이며
우리의 창조 안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계획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 엄청난 하느님의 사랑과 창조와 구원을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축일에 기념하고 감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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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8.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마리아 성모님께 배우는 세가지 가르침
“제자리, 성소, 순종”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대림시기 성모님께 귀한 진리를 배울 수 있는 참 경사스런 날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구세주를 낳을 몸으로 예비되었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원죄없이 태어나는 특은을 받았다’는 교리입니다. 초기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을 1854년 12월8일 교황 비오 9세가 발표한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 회칙을 통해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는 확정적으로 선포되고 믿을 교리가 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 은총과 특권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
한국교회는 이미 1838년 교황청에 서한을 보내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리아’를 조선교구의 수호자로 정해줄 것을 청하였고,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이 요청을 허락함으로 명실공히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성모님은 한국교회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비단 한국교회뿐 아니라 대한민국-한반도의 수호성녀 마리아 성모님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외치는 “성모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기도입니다.
“어머니!”란 호칭보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가까운 호칭도 없을 것입니다. 노년에 쓸쓸히 요양원에서 병고중에 특히 치매로 말년을 보내다 죽음을 맞이하는 많은 어머니들을 대하면 참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저에게는 네분의 어머니가 계십니다.
마리아 성모님, 어머니인 교회, 이미 타계하신 육신의 어머니, 그리고 구암리카페로 변한 고향집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는 저절로 고향집을 찾게 됩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찾았습니다. 영원한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 다음 고향집과 더불어 육신의 어머니를 잊지 못합니다. 선종 3개월중 써놨던 <어머니를 그리며> 글 후반부입니다.
“흔들림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오신 내 어머니
내 수도원 들어올 때도 극구 만류하셨다
‘왜 이제 살만하게 되었는데 또 고생길에 접어드냐고’고
그러다 하루 지나 내 방에 들어오셔서,
‘얘, 수철아! 네가 좋아하면 수도원 들어가라’고 허락하셨다
사실 어머니는
은연중 막내인 나와 살고 싶어 하셨다
지금은 극도로 쇠약해지셔서 온종일 방에 누워계신 어머니,
정신은 여전히 맑으시고 마음도 평온하시다
그냥 계시기만 하셔도 좋은 어머니, ‘신마리아!’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나도 이제 나이 들어 철이 났나 보다.”<2005.3. >
이제는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오로지 어머니인 교회 사랑으로, 마리아 성모님 사랑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특히 말씀을 바탕으로 신망애의 모범인 영원한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께 배우는 세 가르침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제자리에 충실하라!”
오늘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의 실패를 일거에 만회하는 마리아 성모님의 활약이 참 통쾌합니다. 하느님이 아담에게 묻던, “너 어디 있느냐?”는 물음은 화두처럼 우리의 제자리를 확인하게 합니다. 죄를 지음으로 제자리를 상실한 아담은 두려워 숨습니다. 제자리에 충실한 무죄한 삶이었다면 “예, 여기 있습니다!”응답하고 나왔을 것입니다. 책임을 전가하는 비겁한 아담이요 하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완전히 분열된, 파괴된, 회복불능의 관계들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실패를 만회한, 제자리의 정주에 충실했던 나자렛 시골의 마리아 성모님이였습니다. 겸손한 하느님 아버지의 인내가 놀랍습니다. 아담과 하와이후로 얼마나 장구한 세월을 기다렸겠는지요! 마침내 눈밝은 하느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 마리아를 찾아 만나게 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제자리의 정주생활에 충실했던 마리아를 발견한 기쁨에 환호하는 하느님의 모습이 약여합니다. 새삼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 몫의 사명에 묵묵히 충실할 때 찾아 축복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배웁니다.
둘째, “성소에 충실하라!”
마리아 성모님은 물론 우리 믿는 이들 하나하나가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불림받은 유일무이한 고유한 성소자들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맞습니다. 이래야 존재감 충만한 자존감 높은 삶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의 하느님 찬가가 참 깊고 아름다우며 은혜롭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매주 월요일 저녁기도때 마다 바치는 찬미가입니다. 오늘 전례에서는 일부 생략됐지만 3절에서 14절까지 한문장으로 단숨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노래하는 찬미가입니다. 이 찬미가에서 하느님은 모든 동사의 주어로 나옵니다. 마리아 성모님은 물론 우리의 복된 신원이, 성소가 그대로 환히 계시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주어로 내 삶의 성경을 렉시오디비나 할 때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섭리요 우리의 성소입니다.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신의 한 수>와도 같은 섭리적 존재임을 확인한다면 도저히 함부로, 되는대로, 생각없이, 영혼없이 막살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 성모님은 물론 우리에게 넘치는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성소에 충실할 때 진짜 참나를 사는 참기쁨에 참행복의 삶일 것입니다.
이번 주간은 사회교리주간입니다. 사회교리를 잘 배워 인권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께 불림받은 고귀한 유일무이한 성소에 충실하는 것이 우선적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셋째, “순종의 여정에 충실하라!”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요, 순종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아드님처럼 평생 비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 순종의 여정에 충실했던 <예스맨> 성모님이셨습니다. 침묵과 경청, 관상과 렉시오디비나의 대가! 마리아 성모님을 하느님은 얼마나 신뢰하셨는지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그 속내를 다 밝히는 하느님입니다. 마침내 마리아 성모님의 순종의 응답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응답이 나오기전 산천초목이 침묵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석합니다. 하느님도 얼마나 조마조마 초조했겠는지요! 마리아의 응답에 인류구원의 역사가 달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혼자서의 일방적 노력이 아니라 인간의 협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믿음의 순종에 주님의 천사는 마리아를 떠났고, 후에 마리아가 영원한 영적도반 엘리사벳을 찾았을 때 엘리사벳의 칭송을 받습니다. 이렇게 그의 순종이 응답이 옳았음을 확인받았을 때 마리아 성모님은 하늘을 나르듯 자유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라고 믿으신 분!”
탓할 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부족입니다. 순종의 삶으로 검증되는 믿음이요 순종과 더불어 깊어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순종의 여정, 믿음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좋은 도움을 주시며 신신당부하십니다.
“1.제자리에 충실하라!
2.성소에 충실하라!
3.순종의 여정에 충실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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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8.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한국교회의 수호자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엄청 기쁜 날입니다. 우리는 <입당송>에서,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화답송>에서도,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 환호송>에서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하고, 기쁨을 노래하였습니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본기도>에서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
한편, 19세기의 저명한 학자이며 교부전문가인 헨리 뉴먼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에 관한 가장 오래된 초기부터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그녀가 바로 두 번째 하와라는 것이다.”
또한, 초대교부들은 하와가 인류의 타락에 고유한 역할을 했듯이, 마리아도 인류의 구원에 고유한 역할을 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와는 뱀의 말에 속아서 불순종과 죽음을 가져왔다. 그러나 동정 마리아는 믿음과 기쁨을 가져왔다.”(유스티누스). “하와를 통해서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통해서 생명이 왔습니다.”(히에로니무스). “사람을 속이기 위해 여인을 통해서 독약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은총 속에 다시 태어나게 하려고 여인으로부터 구원이 쏟아졌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사실 <창세기>에 따르면, 원죄를 짓기 전에는 ‘여인’으로 불렸고 범죄 후에 ‘하와’로 불리어집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가나안의 혼인잔치’와 ‘십자가 아래에서 마리아에게 요한을 맡기실 때’ 마리아를 “여인이여”라고 부르심은 마리아를 죄 없으신 ‘두 번째(새) 하와’로 부르심을 말해줍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마리아가 “새로운 하와”임을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창세기> 3장 15절의 ‘원 복음’을 다루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전승은 이 대목(창세 3,15)을 “새로운 아담”의 예고라고 본다. 그분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리 2,8) 아담의 불순종을 넘치게 보상한다. 한편, 많은 교부들과 교회학자들은 ‘원복음’에서 예고된 ‘여인’을 “새로운 하와”인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로 생각한다. 마리아는 최초로 그리고 특별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죄에 대한 승리의 은혜를 입은 분이다. 그분은 원죄에 전혀 물들지 않았고, 지상 생애 동안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그 어떤 죄도 범하지 않으셨다.”(411항)
이처럼, 예수님과 마리아를 ‘새 아담’과 ‘새 하와’로 여기는 것은 마리아가 죄 없이 잉태되셨고, 죄 없이 사셨다는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마리아의 부모님이 죄가 없었다는 것도 아니며, 아들에게 죄스런 본성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죄를 씻은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님께서 죄를 이기신 승리에서 흘러나온 ‘특별한 은총’으로 죄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를, 곧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교종 비오 9세는 1854년 12월 8일, 믿을 교리로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처럼, “새 하와”인 마리아는 죄 없이 창조되어, 새 창조의 의로운 삶을 가리키는 ‘살아있는 표징’이 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가정을 되돌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2코린 5,17)이 되게 하셨습니다. 곧 성모님으로 하여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 열리기 된 것입니다. 이 새로운 창조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여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단지 죄를 용서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본래의 죄 없는 에덴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죽음이 없는 상태로 건너감이며,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해줍니다.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 5,21)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하늘에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히브12,23)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묵시록>에서는 말합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새로움으로 태어난 피조물로 축복을 입게 되었으니, 한없는 기쁨으로 “성모님의 노래”인 오늘 입당송을 다시 불러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입당송)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놀라운 일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기쁘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그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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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8.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집에 가서 앨범을 정리했습니다. 1982년 신학교에 입학하고부터 앨범을 만들었습니다. 앨범이 13권 있었습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카톡과 텔레그램에 사진을 저장하면서 아날로그 감성인 앨범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앨범에는 아날로그 감성이 담겨 있었고, 추억과 기억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입학 때의 풋풋함, 군대에 있을 때의 강인함, 나환자 마을 봉사하였을 때의 열정, 부제와 사제 서품식 때의 엄숙함이 있었습니다. 사진은 독사진도 좋지만, 누군가와 함께했던 사진이 더 기억에 남았습니다.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에서는 보좌 신부로 있었기에 주로 청년들과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적성, 시흥5동에서는 본당 신부로 있었기에 주로 사목 위원과 구역장, 반장들과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취미활동으로 스키와 스킨스쿠버를 하였기에 그와 관련된 사진도 많았습니다. 복음화 학교 지도 신부를 하면서 성지순례를 함께했기에 성지순례 사진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사진은 거짓 없이 저의 43년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건강 주셨고, 좋은 인연을 주셨고, 무엇보다 사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앨범에는 시흥5동에서 찍은 사진이 많았습니다. 제가 사진을 좋아하기도 했고, 홍보분과에서 저의 사진을 인화해서 주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1년은 보좌 신부님이 없어서 아이들과 함께한 사진이 많았습니다. 보좌 신부님이 온 이후에는 봉사자들과 함께한 사진이 많았습니다. 적성 성당과 자매결연 맺은 사진도 있었습니다. 절두산, 수리산으로 도보 성지순례 간 사진도 있었습니다. 안면도로 가족 수련회 갔던 사진도 있었습니다. 배론으로 기차 성지순례 갔던 사진도 있었습니다. 추억의 사진을 만들어 주었던 홍보분과 봉사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앨범 정리하면서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의 삶이 하느님 나라에 앨범으로 정리되고 있겠구나!” 좋은 사진을 앨범에 정리하였듯이, 나의 부족한 삶과 나의 거짓된 삶은 고백성사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신학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 신앙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점에서 참된 신앙인의 모델이라고 하겠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성모님은 어려움이 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의 응답은 배우자인 요셉과의 관계 회복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했지만, 약혼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며,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멀리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체험하였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하였습니다.
우리는 ‘잘되면 내 탓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시대를 탓하고, 가정을 탓하고, 이웃을 탓하고, 친구를 탓하면 진정한 자신을 보기 어렵습니다. 삶의 기준이 성공과 권력 그리고 재물이라면 우리는 누군가를 탓하기 마련입니다. 작은 꽃은 절벽에 피어도, 길가에 피어도, 비를 맞아도 탓하지 않습니다.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도 그렇습니다. 150억 년의 우주가 나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존재의 감사요, 창조의 경이로움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로 불리시지만, 그 모든 영광은 ‘결과’입니다. 근원은 바로 순명과 신뢰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라는 말 속에는 세상의 논리보다 하느님의 뜻을 선택한 지혜가 있습니다. 신앙은 논리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순명으로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성모님의 삶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한 사랑의 앨범이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매일 한 장씩 채워지는 신앙의 사진첩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처럼 탓하지 않고, 순명으로 하느님께 응답하며, 기억을 감사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제 삶의 앨범 속에서 당신의 얼굴이 드러나게 하소서. 제 기억이 감사로, 제 순명이 사랑으로, 제 관계가 평화로 이어지게 하소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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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8.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알 수 없는 길을 신뢰하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2월 7일 일요일- 쉰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은총의 은밀한 업적
참된 변화는 우리의 의식적인 통제 너머에서, 성령의 은총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불확실함과 겉으로는 어둠처럼 보이는 시간 속에서도 어떻게 하느님을 신뢰하게 되었는지를 증언합니다:
저는 1970년에 신학교를 마치며, 제 사명은 모든 질문에 답을 갖추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깨달은 것은, 알지 못함과 때로는 알 필요조차 없음이 오히려 더 깊은 앎이며, 더 깊은 자비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주의자들이 ‘죽음’이라 부르며 수많은 은유로 설명하는 본질적 전환일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사랑보다도 믿음을 더 크게 찬미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고, 십자가의 성 요한이 믿음을 '빛나는 어둠'이라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물론 사랑은 최종 목적이지만, 어둠 속에서 더욱 깊이 신뢰하는 길이 바로 그 사랑에 이르는 참된 여정입니다. [1]
제 절친한 친구 제럴드 메이(Gerald May)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한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새롭게 밝혀주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서 은밀히, 그리고 어둠 속에서 일하셔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신비와 하느님, 은총께서 결국 우리에게 요구하실 것을 온전히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 과정을 스스로 주도하려 하거나 아예 멈추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메이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록 그것이 거짓 자아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듯,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보지 않을 때, 즉 우리가 완전히 통제하지 못할 때 은밀히 우리의 환상을 허물어 가십니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러나 시간과 은총의 고요한 역사 안에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깊은 곳이 깊은 곳을 부른다. (너울이 너울을 부른다.)"(시편 42,8)라는 말씀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과 깊은 공명을 이루시며 친밀히 다가오십니다. 끝없는 하느님의 '예'가 우리 안에서 더욱 깊은 '예'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3]
CAC의 핵심 교수진 중 한 사람인 제임스 핀리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비주의자는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보라!"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비주의자는 오히려 "사랑이 나에게 무엇을 이루었는지 보라! 이제 남은 것은 하느님의 친밀한 사랑이 나 자신 안에서 나 자신으로서 자신을 내어주시는 것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난의 복됨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이 녹아 없어질 때, 우리는 마침내 우리가 이미 하느님처럼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우리 존재 자체로 선물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4]
우리 공동체 이야기
남반구에서는 사람들이 성탄과 여름 휴가를 준비하느라 분주합니다. 그 속에서 저는 짜증이 나고, 마음이 멀어진 듯하며, 조금은 질투심도 느끼곤 합니다. 저는 전통적인 휴가 기간에도 계속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림 시기의 묵상들을 읽으면서 제 안에 생명의 샘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머물러라’(요한 15,4) 하신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그 말씀이 저의 짜증과 질투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해주었습니다. 묵상은 저에게 결코 하느님과 단절되지 않았음을 일깨워줍니다. 때로는 단절된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휴가 기간에 여러분 모두 평화를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Sarah B.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Things Hidden: Scripture as Spirituality, rev. ed. (Franciscan Media, 2022), 38.
[2] Gerald G. May, The Dark Night of the Soul: A Psychiatrist Explores the Connection Between Darkness and Spiritual Growth (HarperOne, 2004), 4–5.
[3] Adapted from Richard Rohr, Falling Upward: A Spirituality for the Two Halves of Life, rev. ed. (Jossey-Bass, 2024), 32.
[4] James Finley, Intimacy: The Divine Ambush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13).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Laura Barbato, untitled (detail), 2020, photo, Italy,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창문에 서린 안개를 닦아내는 작은 몸짓은 곧 ‘영혼의 어두운 밤’ 속에 있다는 우리의 작은 표징이 됩니다. 그것은 ‘나는 여기 있습니다’라는 육화된 응답으로, 알 수 없음 속에서도 선명함을 향해 나아가려는 몸짓입니다. 그 옆에서 작고 한결같이 타오르는 촛불은, 겉으로는 계절이 환히 빛나더라도 우리의 내면이 그렇지 않을 때에도 성령께서 여전히 부드럽게 타오르고 계심을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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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8.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8-29)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
거룩하신 마리아, 복되신 마리아, 동정 어머니, 아이를 낳기 전에도 처녀시요, 낳은 뒤에도 처녀이시도다! 저로서는 어떻게 처녀가 아들을 낳고 아들을 낳은 어머니가 그대로 처녀일 수 있는지 놀랄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시고, 그분께서 태어나신 뒤에도 어머니가 어떻게 여전히 처녀인지 알고 싶습니까?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요한 20,19),
이 기록에 대하여는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잠긴 문으로 들어오신 분은 유령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었습니다. 진짜 몸을 가진 진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분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24,39), 그분에게는 분명 살과 뼈가 있었고,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어떻게 살과 뼈가 잠긴 문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일까요? 문이 닫혀 있는데 그분께서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분은 어디에서 어떻게 들어오셨나요? 사방이 닫혀 있어서 그분께서 들어오실 만한 곳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튼 그분은 들어와 안에 계시고, 그분께서 어떻게 들어오셨는지는 분명히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분께서 어떻게 들어오셨는지를 모르며 그것은 하느님의 능력에 속한 일이라 여깁니다.
그런즉 주님께서 처녀 품에서 태어나신 것과 그 어머님이 아들을 낳은 뒤에도 처녀인 것 또한 하느님의 능력에 속한 일로 여기십시오.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5 우리의 신성
이것을 위해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고 하셨다(사도 1,4),
본 설교에서 엑카르트는 성육신의 목적에 대하여 묻는다. 하느님은 왜 사람이 되었는가? 엑카르트는 타락-중심의 영성신학이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서양에 유포시켰던 상투적인 답변을 하지 않는다. 그는 원죄의 말소가 성육신의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엑카르트는 이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나를 똑같은 하느님으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위대한 예언자인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우리의 신성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구원과 치유가 자리한다 — 엑카르트는 그리스도를 일컬어 “의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로, 엑카르트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을 일러주기 위해서라고 따르는 통속적이고 피상적인 설교를 거부한다. 그렇게 설교하는 이들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 — 이것은 참이 아니다라고 엑카르트는 잘라 말한다. 엑카르트가 말하는 요점은 요한 복음 15장에 나오는 약속이다.
“나는 그대들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종은 주인의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대들을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요한 15,15).(520)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2티모 2,14-26
신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설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경고하십시오. 그런 짓은 아무런 이득 없이, 듣는 이들에게 해를 끼칠 따름입니다.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속된 망언을 피하십시오. 그것은 사람들을 점점 더 큰 불경에 빠지게 합니다.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처럼 사방을 파먹어 들어갈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히메내오스와 필레토스가 있습니다.
이자들은 진리에서 빗나가,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말하면서 몇몇 사람의 믿음을 망쳐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놓으신 튼튼한 기초는 그대로 서 있으며, 거기에는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아신다.”, 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사람은 모두 불의를 멀리해야 한다.”는 말씀이 봉인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만이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어떤 것은 귀하게 쓰이고 어떤 것은 천하게 쓰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러한 것들에서 자신을 깨끗이 씻어 버리면, 귀하게 쓰이는 그릇, 곧 거룩하게 되어 주인에게 요긴하게 쓰이고 또 온갖 좋은 일에 쓰이도록 갖추어진 그릇이 될 것입니다. 청춘의 욕망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과 함께 의로움과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십시오.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물리치십시오. 알다시피 그것은 싸움을 일으킬 뿐입니다.
주님의 종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잘 가르치며 참을성이 있어야 하고,
반대자들을 온유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회개시키시어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또 악마에게 붙잡혀 그의 뜻을 따르던 그들이 정신을 차려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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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8.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짧은 대답 속에 마리아의 위대함이 드러납니다.
마리아는 세상의 어떤 조건이나 계산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긴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분이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교회의 믿음은, 바로 이 완전한 믿음과 순종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계획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한국교회는 마리아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로 모시며 수호자로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마리아께서 언제나 우리 교회의 길을 인도하시고, 믿음의 여정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초기 신앙의 박해 속에서도, 한국의 순교자들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뜻이 제 안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마리아의 ‘예’는 단 한순간의 용기가 아니라, 평생의 신뢰였습니다. 우리도 삶의 매 순간, 하느님의 뜻을 믿고 받아들이는 ‘작은 예’를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마리아처럼 우리 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시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 안에 하느님의 구원이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수호자이신 성모 마리아께 이렇게 기도합시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을 인도하소서.”
⭐그렇게 될지니
친구 둘이 걸으며 농담합니다.
친구1 요즘 꽃미남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
특히 보이그룹에 속한 아이돌들은 너무 예쁘고 잘생긴 것
같다니까….
친구2 그러게….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나도 꽃미남이었는데….
친구1 (친구2를 어이없이 바라보다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꽃미남 아니야.
넌 곧미남이야.
영원히 곧미남.
될 거야. 미남.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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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8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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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8.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여성들은 자기 얼굴이 아름답다고 생각할까? 2013년 어떤 비누 광고에서 화장기 없는 자기 얼굴을 촬영하려고 할 때 고개를 돌리거나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여성들의 모습을 포착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의 모습을 어떤 모습을 어떤 모습이든 간에 개의치 않고 환한 미소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어린아이들의 모습과 대비시키면서 이런 문구를 내보냈습니다.
“언제부터 자신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저 역시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제 머리카락은 워낙 억세서 조금만 길어도 붕 뜨면서 지저분해집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에 왁스를 발라서 지저분함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왁스를 바르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할까요? 모자를 씁니다. 모자 없이 밖에 나가지 않고, 또 모자를 절대로 벗지 않습니다. 우연히 어렸을 때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다 붕 떠 있습니다. 지금보다도 더 뻣뻣한 머리였는데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남의 시선에 너무 신경 쓰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느님의 시선에는 무감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죄를 범하면서도 합리화하며 하느님을 무시합니다. 남의 시선에 신경 쓰는 것 절반만 하느님께 신경 쓰면 어떨까요?
우리는 오늘 하느님의 시선에만 집중하고 있는 분의 대축일을 보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께서 머무실 거처를 거룩하게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준비를 받아들인 성모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 하느님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예수님 잉태 소식도 “예”라고 응답하셨고, 이로써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고, 질문하고, 마침내 순종하십니다. 대천사의 말처럼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말씀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하십니다. 세상의 시선을 보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만 보고 계신 성모님의 굳은 믿음에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너무 쉽게 세상의 시선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면서 하느님의 시선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에서 가장 걷기 어려운 길은, 평범한 하루의 끝없는 반복이다. 그 반복에서 섬세한 차이가 시작하고, 가장 높은 곳으로 점프할 수 있는 지점을 만날 수 있다(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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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8.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은총이 가득한 이여!"
오늘의 복음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전한 천사의 방문(루카 1,8-20)과 매우 흡사해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사건은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즈카르야는 민족의 중심 성소 한가운데 서 있었고, "온 백성이 밖에서 기도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마리아는 "세상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이름 없는 작은 이"로 등장합니다.
마리아의 태도 또한 즈카르야와 대조됩니다. 즈카르야는 논쟁하듯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지만, 마리아는 그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믿음의 모범으로 드러납니다. 물론 그녀도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질문에는 여러 가지 ‘왜’와 ‘어떻게’가 있습니다. 즈카르야의 질문은 "내가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는 확인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마리아의 질문은 단순히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라는 신뢰 속의 물음이었습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설교 중에 우리가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그는 학문적 신학자로서 수많은 '왜'를 묻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왜'에도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려는 '닫힌 왜'가 있는가 하면, 설명되지 않아도 더 깊이 들어가려는 '열린 왜'가 있습니다. 마리아의 '왜'는 바로 그 두 번째, 열린 물음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완전한 빛 속에 나타나지만, 그녀가 받을 큰 은총은 그녀의 덕행으로 얻은 보상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천사의 인사말이 이를 드러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kecharitomene: 케카리토메네). 마리아에게 다가오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이지, 덕행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성경 본문에서 주어진 은총은 바로 예수께서 그녀의 태중에 잉태되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마리아 자신의 삶의 시작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물론 그녀의 잉태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축일은 바로 그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기리는 날이기에, 전례는 오늘의 복음 말씀을 대신하여 봉독합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인 제자직의 모범입니다. 성모님의 이야기를 단지 특별한 특권의 이야기로만 제시한다면, 그 본래의 역할을 빼앗는 것이 됩니다. 성모님과 우리의 차이점만을 강조한다면, 우리는 은연중에 성모님을 멀리 밀어내는 셈이 됩니다. 마리아 신심에는 여러 가지 잘못된 형태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언제나 참된 전통에 가까이 머물러 있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이 예수님처럼 우리 중 한 사람이었다는 사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만 그분에게 주님의 은총이 늘 충만하게 머물렀다는 것을 성모님은 특별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 우리의 경우와 다른 점일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주님의 은총이 특별하게 부여되고 있음을 믿는다면 성모님이 받으신 그 특별한 사랑이 우리에게도 머물지 않겠습니까?!!
사실 '나'의 상황이 어떻든 하느님께서 부여해 주시는 그 특별한 은총과 사랑은 늘 한결같습니다!!!
성 암브로시오(†397)는 이 구절에 대해 빛나는 해석을 남겼습니다. "믿은 모든 영혼은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고 낳으며, 그분의 업적을 알아봅니다. 마리아의 영혼이 여러분 안에 있어 주님을 찬미하게 하십시오. 마리아의 정신이 여러분 안에 있어 그리스도를 기뻐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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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8.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생명]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대축일 - 은총이 가득한 이
(Week 02. 심장이 뛰는 시간 / 임신 5–8주 / 대림 2주)
은총이 가득한 이
#Fiat #온전한응답 #본래의아름다움 #만삭낙태법반대
임신 5-6주, 태아는 겨우 4-6mm 크기다.
쌀알만 하다. 참깨씨만 하다.
그러나 이 작은 존재 안에는
어떤 죄도, 어떤 왜곡도, 어떤 더러움도 없다.
그저 순수한 생명만이 있다. 완전한 생명이 있다.
크기가 작다고 덜 소중한 것이 아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다고 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작은 심장의 박동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창조의 기적이며,
이 작은 생명은 그 자체로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다.
태아는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지 묻지 않는다.
그저 자라난다.
하느님께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 그 순간부터, 그 안에는 "은총이 가득"하다.
같은 시기, 태아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분당 100-120회. 빠르지만 안정적이다.
이 작은 심장은 아직 두려움으로 뛰어본 적이 없고,
분노로 빨라진 적도 없고,
슬픔으로 무거워진 적도 없다.
그저 순수한 생명의 리듬만이 있다. 하느님께서 새기신 박동 그대로.
이 박동 하나하나가 외친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사랑받을 존재다. 나는 하느님의 작품이다."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축일이다.
마리아께서도 바로 이렇게,
죄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으로 이 세상에 잉태되셨다.
복음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루카 1,28)
천사는 마리아를 이름이 아닌 "은총이 가득한 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마리아의 진정한 정체성이다.
하느님께서 처음 의도하신 그대로의 온전한 존재
마리아도 두려움이 있었고, 의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 안에는 원죄가 없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적이 없었다.
그녀의 심장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뛰고 있었다.
마리아는 대답한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Fiat" -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
마리아의 "예"는 생명을 향한 "예"였다.
아직 보이지 않는 생명, 아직 형태도 없는 생명에 대한 온전한 "예".
그녀는 묻지 않았다.
"이 아기가 얼마나 클까요?"
"이 아기가 건강할까요?"
"이 아기 때문에 내 삶이 어떻게 될까요?"
그녀는 그저 생명 자체에 "예"라고 했다.
크기와 무관하게, 상황과 무관하게, 결과와 무관하게.
생명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원죄 없는 영혼의 응답이다. 왜곡되지 않은 심장의 박동이다.
태아의 심장도 그렇게 뛴다.
망설이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는 모두 마리아처럼 시작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원죄 안에서 태어났고, 세상의 상처를 받으며 자랐고, 관계의 왜곡 속에서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박동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에게도 "본래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2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축일 삼종기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원죄(peccato originale)에 대해 말을 많이 합니다만,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본연의 은총(grazia originaria)도 받았습니다." (출처: 바티칸 뉴스)
원죄보다 먼저 있었던 것은 은총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불어넣으신 생명의 숨이 먼저다.
회개는 바로 이것을 다시 찾는 일이다.
죄로 왜곡된 모습을 벗고, 하느님께서 처음 의도하신 나를 되찾는 것.
대림 시기, 우리는 마리아를 바라본다.
마리아는 우리가 "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은총이 가득한 존재, 하느님께 온전히 열린 심장, 왜곡되지 않은 응답.
태아가 심장 박동을 시작하듯, 우리의 영혼도 다시 뛰기 시작할 수 있다.
불완전해도, 아직 온전하지 않아도,
하느님을 향해 먼저 뛰기 시작할 수 있다.
"은총이 가득한이여."
이것은 마리아만을 위한 이름이 아니다. 이것은 세례 받은 우리 모두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이다.
죄 많은 우리를 향해, "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녀"라고 부르시는 그 목소리.
오늘, 우리는 두 가지를 기억한다.
하나는 내 안의 본래의 아름다움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 의도하셨던 순수함.
다른 하나는 모든 생명의 소중함이다.
크기와 무관하게, 보이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작품이며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마리아처럼, 우리도 생명을 향해 "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자.
내 심장이 다시 하느님을 향해 뛰도록.
모든 생명이 온전히 보호받을 수 있도록.
작은 이의 기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
당신의 순수한 "예"를 본받게 하소서.
제 안에도 하느님께서 처음 불어넣으신 본래의 아름다움이 있음을
믿게 하소서.
죄로 왜곡된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하느님을 향해 다시 뛰는 심장을 주소서.
태아가 처음 박동을 시작하듯
제 영혼도 순수하게 당신을 향해 뛰기 시작하게 하소서.
모든 생명이 크기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중받고 보호받게 하소서.
아멘.
Today’s Word
"은총이 죄보다 먼저다. 본래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라."
by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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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8.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 인사합니다.
그러면서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아기의 이름은 예수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의 탄생으로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생각을 갖고 계심이
드러납니다.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에서 천사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고
그렇게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도 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을지라도
그 거리를 좁히는 것은
하느님께 문제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시켜 마리아의 생각을 물으십니다.
마리아의 응답이 있은 다음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갑니다.
마리아의 응답
마리아의 협력을
하느님께서는 기다리십니다.
멀어진 거리를 좁히기 위해
하느님께서 다가오시지만
그 하느님께 다가가거나
그 하느님께 방향을 틀지 않으면
하느님의 노력은 헛된 일이 됩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인간이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것은
당신이 직접 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스스로 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인간은 당신 뜻에 좌우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과 대등한 존재로
우리의 생각을 존중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구원을 주려고 하시는데
그 구원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절대 강요하지 않으시며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움으로 바라보시면서 기다리실 뿐입니다.
하느님의 기다림은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대등한 동반자로 생각하시면서
우리를 존중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존중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 사랑과 존중에 힘입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미움과 무시에도 좌절하지 않고
우리를 지지해 주시는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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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8.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26-38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실 동정 마리아께서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특별한 은총에 힘 입어 원죄,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부족함과 약함으로 인해 자꾸만 죄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경향성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받으셨음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이는 십계명이나 주님의 가르침만큼 중요한 건 아니지만, 이 내용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신앙의 진리로 믿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유익하기에, 가톨릭 교회에서는 “무염시태”라고도 부르는 이 내용을 “믿을 교리”로 선포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염시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방법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받은 특별한 은총을 믿음과 순명으로 완성시킨 성모님의 마음가짐과 삶을 본받는 일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가 없다’는 점은 어떤 모습에서 드러날까요? 가브리엘 대천사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신 수용과 순명에서 드러납니다. 이는 오늘 제1독서인 창세기에 나오는 하와와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하와는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는 하느님의 질문에 뱀이 달콤한 감언이설로 자기를 꾀어서 어쩔 수 없이 그랬노라고 핑계를 대지요. 하느님께서 하와에게 그런 질문을 하신 뜻은 그녀가 하느님 말씀을 어기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인데, 벌 받을 게 두려워서,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하느님 뜻을 저버린 겁니다. 그리고 그녀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녀의 후손인 인류에게 ‘죽음’이라는 운명이 닥치게 되었지요.
반면 성모 마리아께서는 아직 어리고 약한 소녀로써 감당하기 버거운 하느님의 뜻을 밀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힘은 ‘묵상’에서 나왔지요. 가브리엘 대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 말씀을 들은 후, 바로 ‘좋고 싫음’을 따지며 반응하지 않고 일단 그 말씀을 마음 속에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하느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 나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나를 어디로 이끌고자 하시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며 깊이 묵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묵상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시며 가장 좋은 길로 이끄신다는 믿음을 지니게 되었지요. 그랬기에 하느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씀의 힘으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마음에서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순명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이지요.
우리가 매 해마다 무염시태 축일을 지내는 것은 우리 역시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 말씀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순명함으로써,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활동하시도록 해드려야 할 중요한 소명을 지니고 있음을 되새기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은 불가능을 모르시는 전능하신 분이지만 반드시 우리의 응답과 협력을 통해 당신 뜻을 이루십니다. 또한 우리는 그 응답과 순명을 통해 원죄에 물들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끝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은총들은 우리의 꾸준하고 열심한 노력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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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8.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big-llight]
■
X X X X X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박윤식”님을 찿아 들어 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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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8.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김건태 신부님_은총이 가득하신 분
[말씀]
■ 제1독서(창세 3,9-15.20)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악에 대해 묵상하면서, 히브리인 저자들은 원죄에 관한 기사를 통해서 인간의 근본적인 모순을 기술합니다. 그러나 이 저자들은 또한 이 악이 정복될 때를 내다보면서, 그 반전의 때를 매우 비유적인 필체로 묘사합니다. 이때는 역설적으로 남자(아담)가 잘못의 책임을 짊어지게 한 바로 그 여자(하와) 덕분에 다가올 것입니다.
■ 제2독서(에페 1,3-6.11-12)
시초부터 하느님의 계획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은총은 악에 의해 파괴된 부분을 서서히 재건하며, 성부에 대한 성자의 진정한 관계를 재정립하면서 인간실존의 변화를 이루실 예수님께로 인간을 인도합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을 다시 온전히 일으켜 세우는 하느님 사랑의 흐름 속에 자신을 내맡겨야 하며,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되던 순간 그러했던 것과 같습니다.
■ 복음(루카 1,26-38)
하느님은 인간의 기대나 관점을 초월하여 신묘한 방법으로 당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시며 현존하십니다. 비천한 한 여인, 그러나 당신의 말씀에 온전히 열려 있던 신심 깊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하느님은 몸소 당신의 ‘성전’을 마련하십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할 새 이스라엘의 백성의 참된 성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새김]
인간은 근본적인 모순 속에 잠겨 있는 실존입니다. 사랑이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하느님을 만나 뵙도록 초대되었으면서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온갖 시련들을 거부하면서 스스로 하느님인 양 처신하는 우를 범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창세 3,5) 하는 유혹 앞에 늘 서 있는 존재, 바로 이것이 교회가 원죄(原罪)라는 이름을 부여한 현실입니다.
마리아의 모든 삶은 “하느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욕망과 정반대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그분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으로 선언하고 찬미합니다. 시초부터 하느님의 은총은 마리아의 실존과 함께하고 그분을 이끌어 갔으며, 잉태 순간부터 그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분, 곧 주님의 광채로 휩싸이신 분입니다. 그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으로 새로워진 창조가, 곧 새로운 세상이 열리며 다져지기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님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위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가득히 받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 모두 원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특은을 받았지만, 특별히 주님 오심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이 대림시기, 주님을 모시기 위해서 이 특은의 상태를 끊임없이 유지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께 전구하여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기쁨과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하며 기다리는, 거룩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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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31
12월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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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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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미리내 천주성삼 성직수도회 가경웅 제르마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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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마리아는 단 한 번도 당신의 시선을 창조주로부터 뗀 적이 없습니다!>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교회 전례력 여러 축일 중에서 이름이 제일 긴 축일인 듯 합니다.
과거에는 성모 무염시태 대축일이라고 했습니다. 무염시태(無染始胎)! 우리 말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없을 무자에 물들 염자입니다. 비로소 시자에 아이밸 태자입니다.
그럼 한번 연결해볼까요? 성모님께서 ‘시태!’ 잉태되셨는데, 어떻게 잉태되셨습니까? 무염 상태, 즉 오염되지 않은 상태로 잉태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물들지 않은 상태? 원죄에 물들지 않은 상태로 잉태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모님께서는 아무런 흠 없이 무죄한 상태로 잉태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모 무염시태’라는 용어 대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라는 말로 대체되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에 대한 교리는 오랜 연구와 반박, 옹호가 거듭되어 왔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한 대한 초기 교부들의 표현이 참 아름답습니다.
“요아킴과 안나의 거룩한 딸인 마리아는 성령의 신방에서 티 없이 살았기에 하느님의 신부가 되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강생을 위해 마리아의 영혼을 준비시키셨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무죄한 몸이 거처하실 수 있도록 가꾸어진 순결한 나무입니다. 순결하며 거룩한 영혼과 육신의 소유자 마리아는 가시덤불 속에 핀 한 송이 백합화 같습니다.”
성모님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성모님에 대한 탁월한 신심의 소유자였던 8세기 수도자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류는 모두 죄인이 되어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서 흘러나오는 큰 선물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선물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육체와 영혼의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욕정과 무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마리아만이 은총이 가득하며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자유롭습니다. 마리아는 단 한 번도 당신의 시선을 창조주로부터 뗀 적이 없습니다.”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교리를 장엄하게 선포하였습다.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었다.”
무염시태 교리는 성경에 직접적 근거를 지니지 않습니다. 비오 9세 교황님께서는 무염시태 교리가 초대 교회 교부들로부터 전수된 거룩한 선물이며, 거룩한 인장으로 날인되어 계시된 교리로서, 교회 안에 항상 보전되어 왔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전수되어 내려온 일종의 전승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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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마리아는 단 한 번도 당신의 시선을 창조주로부터 뗀 적이 없습니다!>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교회 전례력 여러 축일 중에서 이름이 제일 긴 축일인 듯 합니다.
과거에는 성모 무염시태 대축일이라고 했습니다. 무염시태(無染始胎)! 우리 말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없을 무자에 물들 염자입니다. 비로소 시자에 아이밸 태자입니다.
그럼 한번 연결해볼까요? 성모님께서 ‘시태!’ 잉태되셨는데, 어떻게 잉태되셨습니까? 무염 상태, 즉 오염되지 않은 상태로 잉태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물들지 않은 상태? 원죄에 물들지 않은 상태로 잉태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모님께서는 아무런 흠 없이 무죄한 상태로 잉태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모 무염시태’라는 용어 대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라는 말로 대체되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에 대한 교리는 오랜 연구와 반박, 옹호가 거듭되어 왔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한 대한 초기 교부들의 표현이 참 아름답습니다.
“요아킴과 안나의 거룩한 딸인 마리아는 성령의 신방에서 티 없이 살았기에 하느님의 신부가 되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강생을 위해 마리아의 영혼을 준비시키셨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무죄한 몸이 거처하실 수 있도록 가꾸어진 순결한 나무입니다. 순결하며 거룩한 영혼과 육신의 소유자 마리아는 가시덤불 속에 핀 한 송이 백합화 같습니다.”
성모님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성모님에 대한 탁월한 신심의 소유자였던 8세기 수도자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류는 모두 죄인이 되어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서 흘러나오는 큰 선물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선물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육체와 영혼의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욕정과 무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마리아만이 은총이 가득하며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자유롭습니다. 마리아는 단 한 번도 당신의 시선을 창조주로부터 뗀 적이 없습니다.”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교리를 장엄하게 선포하였습다.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었다.”
무염시태 교리는 성경에 직접적 근거를 지니지 않습니다. 비오 9세 교황님께서는 무염시태 교리가 초대 교회 교부들로부터 전수된 거룩한 선물이며, 거룩한 인장으로 날인되어 계시된 교리로서, 교회 안에 항상 보전되어 왔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전수되어 내려온 일종의 전승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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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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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께서 원죄 없음을 믿지 않으셨으면, 예수님을 잉태하실 수 없으셨다 >
[도입] 야수는 미녀의 방에 들어갈 수 없다 (양심의 장벽)
우리가 잘 아는 동화 『미녀와 야수』에는 아주 상징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흉측한 야수는 아름다운 벨을 사랑하지만, 그녀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단순히 거절당할까 봐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벨 앞에 서면,
짐승 같은 자신의 추악함이 극명하게 비교되어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야수는 괴로워하며 어둠 속으로 숨습니다. "당신은 너무 빛나고 나는 너무 더럽소. 야수는 미녀의 방에 들어갈 수 없소." 이것이 바로 '양심'의 작용입니다. 더러운 것은 본능적으로 깨끗한 것을 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더럽다고 느끼는 한, 거룩한 분이 내게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받아들이고 싶어도 내 양심이 "너는 자격이 없어!"라고 소리치며 문을 걸어 잠그기 때문입니다.
[전개 1] 거룩함 앞에서 뒷걸음질 치는 인간
성경을 보십시오.
하느님의 거룩함을 체험한 인간의 첫 반응은 언제나 '뒷걸음질'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기적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를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라고 탄식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순간, 거룩하신 하느님을 밀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이 하느님을 품는다는 것은 불에 타죽는 것과 같은 공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신학적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을 자신의 태중에 모시겠다고 '예'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까?"
만약 마리아가 자신의 영혼에 아주 작은 죄의 얼룩이라도 있다고 생각했다면, 혹은 자신을 그저 평범한 죄인이라고 여겼다면, 베드로처럼 이렇게 외쳤어야 마땅합니다. "주님, 저를 떠나십시오! 감히 누추한 제 몸에 지극히 거룩하신 분을 모실 수 없습니다. 이는 신성모독입니다!"
[전개 2] 믿음은 "내가 누구인가?"에 답하는 것
하지만 마리아는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Fiat)"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마리아가 교만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통해 자신의 '원죄 없음'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여(Kecharitomene)"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너는 죄가 하나도 없이 은총으로만 꽉 차 있다"라는 하느님의 선언입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였다"고 전합니다. 이 침묵의 시간 동안 마리아의 내면에서는 치열한 식별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나는 연약한 인간인데, 하느님께서 나를 완전한 은총 덩어리라고 부르시는구나. 죄가 없다고 하시는구나.'
마리아는 자신의 감정이나 인간적인 판단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더 신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깨끗하다고 하시면, 나는 깨끗한 것이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마리아는 양심의 가책이나 두려움 없이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며 거룩하신 분을 자신의 태중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믿음은 하느님이 바라보시는 대로 '내가 누구인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자신이 '원죄 없는 깨끗한 그릇'임을 믿으셨기에, 예수님을 담아내는 구원의 도구가 되셨습니다. 자신이 깨끗함을 믿지 못하면, 결코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전개 3] 향심기도: 나를 규정하는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연습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체성사를 통해 매일 예수님을 모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죄인', '부족한 사람', '상처받은 사람'이라고 규정하며 살아갑니다. 내 안의 죄의식(야수)이 하느님(미녀)을 온전히 모시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의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를 선택하는 훈련, 바로 '향심기도(Centering Prayer)'입니다. 향심기도는 우리가 성모님처럼 "나는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다"라는 믿음을 연습하는 가장 좋은 기도입니다.
방법은 단순합니다.
첫째, 하느님 안에서의 내 정체성을 담은 '거룩한 단어'를 하나 정하십시오. '예수', '사랑', '거룩함', '현존' 등입니다. 이 단어는 "나는 당신을 담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라는 내 믿음의 동의입니다.
둘째, 기도를 시작하면 온갖 잡념과 부정적인 생각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너는 죄인이야.", "너는 이기적이야.", "네가 무슨 기도를 해." 이런 생각들이 뱀처럼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때 그 생각들과 싸우거나 대화하지 마십시오.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셋째, 그저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십시오.
생각을 끊고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는 행위는 이런 고백과 같습니다. "아니야, 내 느낌은 중요하지 않아.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했어. 하느님이 내 안에 사신다고 했어. 나는 주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야." 이것이 성모님이 천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신 과정과 같습니다. 수많은 인간적인 두려움을 뒤로하고, 천사가 전해준 '은총이 가득한 이'라는 정체성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결론] 내가 믿는 대로 주님을 모시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신을 더러운 그릇이라 믿는 사람은 평생 주님을 문밖에 세워둘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이 주님을 담기에 합당한(물론 은총으로)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님을 잉태하고 낳게 됩니다.
우리가 향심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의 현존으로 돌아가는 노력은, 단순히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 당신께서 저를 깨끗하다고 하시니, 저는 깨끗합니다. 그러니 제 안에 오십시오."라고 고백하며 문을 여는 행위입니다.
오늘 원죄 없으신 성모님을 바라보며, 우리도 헛된 겸손으로 뒷걸음질 치지 맙시다. 대신 하느님이 주신 거룩한 존엄성을 믿고, 내 안의 가장 깊은 방을 활짝 열어젖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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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집에 가서 앨범을 정리했습니다. 1982년 신학교에 입학하고부터 앨범을 만들었습니다. 앨범이 13권 있었습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카톡과 텔레그램에 사진을 저장하면서 아날로그 감성인 앨범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앨범에는 아날로그 감성이 담겨 있었고, 추억과 기억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입학 때의 풋풋함, 군대에 있을 때의 강인함, 나환자 마을 봉사하였을 때의 열정, 부제와 사제 서품식 때의 엄숙함이 있었습니다. 사진은 독사진도 좋지만, 누군가와 함께했던 사진이 더 기억에 남았습니다.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에서는 보좌 신부로 있었기에 주로 청년들과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적성, 시흥5동에서는 본당 신부로 있었기에 주로 사목 위원과 구역장, 반장들과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취미활동으로 스키와 스킨스쿠버를 하였기에 그와 관련된 사진도 많았습니다. 복음화 학교 지도 신부를 하면서 성지순례를 함께했기에 성지순례 사진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사진은 거짓 없이 저의 43년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건강 주셨고, 좋은 인연을 주셨고, 무엇보다 사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앨범에는 시흥5동에서 찍은 사진이 많았습니다. 제가 사진을 좋아하기도 했고, 홍보분과에서 저의 사진을 인화해서 주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1년은 보좌 신부님이 없어서 아이들과 함께한 사진이 많았습니다. 보좌 신부님이 온 이후에는 봉사자들과 함께한 사진이 많았습니다. 적성 성당과 자매결연 맺은 사진도 있었습니다. 절두산, 수리산으로 도보 성지순례 간 사진도 있었습니다. 안면도로 가족 수련회 갔던 사진도 있었습니다. 배론으로 기차 성지순례 갔던 사진도 있었습니다. 추억의 사진을 만들어 주었던 홍보분과 봉사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앨범 정리하면서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의 삶이 하느님 나라에 앨범으로 정리되고 있겠구나!” 좋은 사진을 앨범에 정리하였듯이, 나의 부족한 삶과 나의 거짓된 삶은 고백성사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신학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 신앙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점에서 참된 신앙인의 모델이라고 하겠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성모님은 어려움이 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의 응답은 배우자인 요셉과의 관계 회복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했지만, 약혼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며,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멀리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체험하였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하였습니다.
우리는 ‘잘되면 내 탓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시대를 탓하고, 가정을 탓하고, 이웃을 탓하고, 친구를 탓하면 진정한 자신을 보기 어렵습니다. 삶의 기준이 성공과 권력 그리고 재물이라면 우리는 누군가를 탓하기 마련입니다. 작은 꽃은 절벽에 피어도, 길가에 피어도, 비를 맞아도 탓하지 않습니다.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도 그렇습니다. 150억 년의 우주가 나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존재의 감사요, 창조의 경이로움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로 불리시지만, 그 모든 영광은 ‘결과’입니다. 근원은 바로 순명과 신뢰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라는 말 속에는 세상의 논리보다 하느님의 뜻을 선택한 지혜가 있습니다. 신앙은 논리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순명으로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성모님의 삶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한 사랑의 앨범이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매일 한 장씩 채워지는 신앙의 사진첩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처럼 탓하지 않고, 순명으로 하느님께 응답하며, 기억을 감사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제 삶의 앨범 속에서 당신의 얼굴이 드러나게 하소서. 제 기억이 감사로, 제 순명이 사랑으로, 제 관계가 평화로 이어지게 하소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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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기리는 교회는 전통적으로 “온전히 아름다우신 마리아”라는 제목의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릅니다. 성모 마리아 안에서 티 없는 깨끗함을 넘어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지요. 마리아께서 원죄를 면제받으셨다는 것은 개인의 특권이기 전에, 우리를 위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선물입니다.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백치』에서 미시킨 공작의 입을 빌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과연 어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까요? 작가는 ‘세상을 구원하는 아름다움은 고통을 나누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아름다움은 바로 자신을 내주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이는 정확히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모님의 아름다움을 딸, 아내, 어머니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묵상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먼저 떠올립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려고 자기 자신을 버리는 아름다움, 자신을 잊으시고 가장 작고 연약한 이를 돌보시는 아름다움으로 나타나십니다.’(2024년 12월 8일 강론 참조)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서는 신화나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아름다운 삶의 실제이시며, 은총 안에서 우리의 인간성이 완전히 실현된 본보기이십니다.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때, 우리 안에서도 그 아름다움이 시작됩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자기를 내주는 사랑으로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선물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마리아와 함께 “기뻐하여라.”(루카 1,28)라는 천사의 초대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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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12월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복음: 루카 1,26-38: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1. 축일의 의미와 교리의 확립
오늘 교회는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음을 기리는 대축일을 지낸다. 이는 하느님께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실 마리아를 구속 사업의 처음부터 특별히 준비하시어, 그분 안에 죄의 흔적조차 닿지 못하게 하신 은총의 신비를 드러낸다. 교황 비오 9세께서는 1854년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Ineffabilis Deus” 교황 회칙을 통하여, 이 믿음을 신앙의 교리로 선포하셨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잉태의 첫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전을 받아,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미리 받아 누리셨기에, 원죄의 모든 얼룩에서 완전히 보존되셨다.”
교회는 이 교리를 통해 마리아 안에서 이미 구원의 완성을 미리 보여주셨음을 선포한다. 성모님께서는 “전적으로 거룩하고 흠 없으신 분”(에페 1,4 참조)으로, 교회가 걸어가야 할 성화 길의 표징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를 이렇게 요약한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자와 특별히 깊이 결합되셨으므로, 교회의 신앙과 사랑과 완전한 일치 안에서 모범이 되신다.”(교회 63항).
2. 인간의 자유와 순종을 통한 구원
복음(루카 1,26-38)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마리아의 자유로운 응답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아무리 하느님의 계획이 크고 완전하더라도, 인간의 자유와 협력이 빠져서는 완성될 수 없다. 처음 인간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으로 인해 죄와 죽음을 세상에 불러들였듯이, 마리아는 “순종의 길”을 택하여 구원을 열었다.
성 이레네오는 이를 “순명의 새로운 길”이라 부르며 이렇게 설명한다. “하와가 불순종으로 인해 결박한 매듭을, 마리아는 순종으로 풀어주었다.”(Adversus Haereses III,22,4). 이처럼 하와의 불순종이 죽음을 가져왔듯, 마리아의 순종은 생명을 가져왔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셨다. 태중에 그분을 모시기 이전에, 마음속의 믿음을 통해 이미 그리스도를 품으셨다.”(Sermo 215,4).
3.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신앙의 구체적 고백
“보십시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마리아의 응답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내어 맡긴 구체적 신앙의 고백이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강조한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인간적인 계산이나 의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곧바로 자신을 봉헌하였다. 그녀의 믿음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여, 하느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맡겨졌다.”(Homiliae in Matthaeum V).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이란 추상적인 사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선택임을 배운다. 예수님의 탄생, 수난, 죽음, 부활이 모두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일상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4.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의 적용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신 순간, 그분은 단순히 하느님의 뜻을 내면적으로 동의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삶 전체를 내어놓으셨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이웃에게 봉사의 삶으로 드러난다.
교회 56항은 이렇게 가르친다. “마리아는 아담의 후손 가운데서 구원 사업을 위하여 아드님의 협력자가 되셨으며, 믿음과 순종으로 죄와 죽음을 물리치신다.” 그러므로 성모님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뜻에 응답하는 인간의 참된 자유를 발견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질문이 던져진다. 지금 내 삶에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가정에서, 공동체 안에서, 직장에서, 작은 일상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내고, 기쁘게 실천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길이다.
5. 결론: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
마리아의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고백은 단지 성모님의 고백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고백이다. 우리도 매일의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살고 세상 안에 드러내야 한다.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은총은, 우리도 최종적으로 죄와 죽음을 넘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교부들의 말처럼, “마리아 안에서 이미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났다.”(성 암브로시오). 그러므로 오늘 이 대축일에, 우리도 성모님과 함께 고백하자.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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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루카 1,26-38 (예수님의 탄생 예고)
그때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불가능한 믿음이
우리에게는 없기에
우리는 늘 믿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불가능한 희망이
우리에게는 없기에
우리는 늘 희망합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불가능한 사랑이
우리에게는 없기에
우리는 늘 사랑합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불가능한 기쁨이
우리에게는 없기에
우리는 늘 기뻐합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불가능한 어울림이
우리에게는 없기에
우리는 늘 어울립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불가능한 돌봄이
우리에게는 없기에
우리는 늘 돌봅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불가능한 섬김이
우리에게는 없기에
우리는 늘 섬깁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불가능한 살림이
우리에게는 없기에
우리는 늘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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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성모님의 ‘응답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26-38)
1)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에페 1,3-6)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은, 그리고 우리가 선택된 일도,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세워져 있었고, 그때부터 이미 시작된 일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연히 일어난 일’이나 ‘우발적인 일’은 없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도 어쩌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일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도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일이고,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실현된 일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인간의 지식이나 논리로 증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원죄에 물들지 않게 지켜 주신 것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실 성자의 어머니”로 당신이 직접 선택하신 분이기 때문이라고, 또 ‘죄를 없애시는 분’이 ‘죄 없으신 분’에게서 태어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 일을, ‘믿을 교리’로 선포했습니다. <‘믿을 교리’ 라는 말은, 단순하게 표현하면 “우리가 그냥 그렇다고 믿는 신앙의 진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2)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성모님 자신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고, 성모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니, 적어도 그 일 자체에 대해서는 성모님을 본받자는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본받아야 하는 것은, 성모님의 ‘응답의 삶’입니다.
복음 말씀의 기록만 놓고 보면, 성모님께서는 자신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음을 알게 된 것은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입니다. 따라서 메시아의 어머니로서 ‘응답의 삶’을 사신 것은 그때부터 시작된 일인데,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모범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신 것은, ‘어린 시절부터’ 라고 교회의 전승은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고, 원죄 없이 잉태되시고 태어나셨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평생 죄에서 보호를 받은 것은 아니고, 성모님 쪽에서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셨고, 하느님과 함께 사셨기 때문에, ‘죄 없으신 분’이 되셨습니다.>
3) 바오로 사도가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모두 ‘세상 창조 이전에’ 선택되었지만, 성모님처럼 원죄 없이 잉태되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원죄에 물든 채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도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 라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에페 1,7)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죄인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로 창조하셨고, 또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자유인’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는 큰 은총이면서, 동시에 ‘덫’으로도 작용할 수 있는 숙제입니다. 충실한 신앙인은 자유의지 ‘덕분에’ 구원을 받게 되지만, 자유의지 ‘때문에’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하고 탈락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선택은 각자 자신이 하는 것이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각자에게 있습니다.(로마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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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세상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또 돈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돈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하느님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돈이 하느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돈이 하느님을 만나는데 결정적으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 재물을 따르기보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겠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에 대한 대답은 감당하는 책임과 희생이 들어있습니다. 그 바탕에 다시 ‘아기를 잉태’ 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더군다나 천사는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하며 명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늙은 나이에 임신한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을 전하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고 말했습니다. 마리아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마리아는 ‘곰곰이 생각한 후’ 자유의지로 응답하였습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처녀가 임신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결국, 구세주의 잉태는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잉태되고 또 태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응답을 통하여 세상에 구세주를 낳아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의 응답과 협력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훌륭한 연장입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습니다. 우리의 몫이 그만큼 소중합니다.
마리아가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를 굴려 계산하고 앞으로 닥칠 일을 고민했더라면 아마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응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배가 불러온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아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믿어주기나 할까요?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쫓겨나든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에게 이루어 주소서’ 한 것은 곧 자신의 모두를 바친 것을 의미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봉헌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을 차지’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그래도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순명의 모범을 보이시고 실제로 구원을 이루셨으니 우리도 일상 안에서 성모님의 마음과 하나 되어 단호한 결단과 더불어 온전한 봉헌의 삶으로 한 발 나아가야겠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겸손과 순명으로 하느님을 잉태 하셨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으니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시며, 또한 마리아를 통하여 다시 오실 것이므로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의 구원이 성취될 것입니다.”(성 루도비꼬)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먼저 겸손과 순명의 어머니 마리아께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예수님을 위하여 어머니께로!
어떤 사업가가 신부님께 와서 물었답니다.
“신부님, 제가 1억 원을 봉헌하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신부님께서 대답하셨답니다.
“그거 한번 시험해 봅시다!”
봉헌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나의 이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봉헌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떤 기대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재물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예물이 아니라 뇌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결코, 뇌물을 즐기지 않으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희망하였고 우리 모두를 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 참된 봉헌을 통해 우리에게 구세주를 낳아주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봉헌의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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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님]
<겸손하신 어머니>
노예와 종은 둘 다 부정적인 의미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누군가에 의한 종속상태냐 아니면 스스로 낮춤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달리 나타납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노예는 여러 가지 이름, 형태로 있어 왔습니다. 아주 심할 때는 모든 자유가 주인에게 속해 있어서, 심지어는 ‘죽는 것도 주인 맘이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모습은 달라도 요즘도 노예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동현장 체험을 하신 어느 분은,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하는데 심지어는 점심밥도 서서 먹게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이주노동자가 하소연을 하길래 기숙사에 가 보니, 아주 작은 단칸방에 세 명씩 밀어넣은 것을 보고 ‘교도소보다도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누군가에 의한 종속, 예속상태는 하루 빨리 벗어날수록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낮춤을 표현하는 ‘종’의 자세는 누구나가 가져야 할 겸손의 모습입니다.
동방교회와 로마교회가 우위권을 놓고 논쟁을 하던 시기의 일입니다. 동방교회에서 로마교회의 우위권과 맞먹는 우위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당시 교황이신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 ‘나는 종들의 종일 따름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그의 겸손이 존경을 뒤따르게 하였습니다.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는 세상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을 택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마땅히 ‘하느님의 어머니’로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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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놀외방전교회 하유설 요셉 신부님]
<사랑한다>
신학생 때 마더 데레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이 내 손을 잡을 때 강한 힘과 친절함을 느꼈지만 무엇보다 크게 다가온 것은 그분의 눈빛이었다. 그 순간에 그분과 나밖에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곧 축복의 눈길을 경험했다고 본다.
인도에서 마더 데레사 품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 눈빛을 보고 자신이 소중한 사람임을 느끼며 축복 속에 죽어갔다는 말을 실감했다.
축복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곧 성숙한 여성과 남성의 특성이라 본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축복」이라는 책에서 여러 형태의 축복을 배우게 되었다.
눈으로 바라보기
먼저 우리의 오감을 사용하는 축복이다. 마더 데레사와 만났던 경험처럼 눈으로 바라보기.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눈길은 아이의 정체성을 불러일으키는 소중한 축복이다.
손잡기
육체적인 접촉은 아이의 성장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노인에게도 아주 필요하다.
말하기
예수님은 축복하시며 이 모든 방법을 사용하셨다. 부자 청년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시고, 아픈 사람을 어루만지시고, 많은 이에게 축복의 말씀을 하셨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능성을 믿기 다음 단계는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의 가능성을 믿기인데, 이는 그 사람들에게 특별한 미래가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축복이다. 또한 적극적으로 그의 미래를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축복이다.
예수님은 이 모든 축복 방법을 사용하셨는데 제자들 각자의 소중함을 보고, 그들의 가능성을 믿고 당신의 목숨까지 바쳐 달성하기까지 축복하셨음을 볼 수 있다.
이번 대림절에 누가 나에게 이러한 축복을 주었는지, 받은 축복의 경험을 돌이켜보자. 또 나는 누구에게 이러한 축복을 주었는지, 부모로서 자녀에게 이렇게 하고 있는지, 배우자에게 이렇게 하였는지?
몇 년 전부터 여동생이 가족끼리 전화할 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로 제안했다. 그래서 이제는 모두가 실천하고 있는데, 동생이나 어머니에게 이러한 표현을 함으로써 더 가까워지고 사랑스럽고 축복을 주고받는 느낌을 받았음을 체험한다.
가족이나 수도 공동체는 축복이 넘쳐흐르는 곳이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와 천사,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대화는 축복을 주고받는 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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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결국 정답은 순명, 또 순명>
오늘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의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죄 없이 어머니 안나에게 잉태된 마리아를 기념하는 오늘, 제 1독서는 창세기에 나타난 하와의 죄를 조명합니다.
오늘 제 1독서의 배경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시점입니다. 어찌하여 먹지 말라고 명령한 열매를 따먹었느냐는 하느님의 질문에 하와는 뱀의 꾀임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니 새겨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그리스도교 전승은 여기에서 언급된 뱀의 후손을 사탄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후손, 즉 사탄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는 인물은 유혹에 굴하지 않고 죄와 죽음을 쳐 이기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게 됩니다. 결국, 이 구절 안에 드러나는 여자는 당연히 성모 마리아가 되는 것입니다.
이미 하와는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 굴복한 상태이므로 뱀의 머리에 상처를 입힐 수 없다는 점, 요한복음 2장 3절에서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인이시여”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그 근거가 발견됩니다.
그리하여 성모 마리아는, 사탄의 말을 믿음으로써 죄를 저지른 하와와 완벽하게 대비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직접적으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을 만나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되리라는 예언을 마주합니다.
이에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이야기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에 순명합니다.
이 지점에서 하와와 마리아의 절대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하와는 뱀의 말을 믿었지만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믿었습니다.
하와는 뱀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 불순종했고 그로인해 죽음과 죄가 인간에게 주어졌지만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함으로써 세상에 생명을 가져오게 되고 죄의 용서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레네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동정녀 하와가 자신의 불신앙으로 묶어 놓은 매듭은 동정녀 마리아의 믿음으로 풀어졌다. 그리하여 성모님은 당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구원의 원인이 되셨다.”
결국 이러한 마리아의 공로를 통해 우리는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이 얼마나 올바르고 아름다운 일인가에 대해 말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들이 우리의 목을 조여 옵니다. 바이러스도, 마음 속의 미움도, 변화된 일상생활 모두가 우리에게 여러 가지 희생을 강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수록 하느님의 가르침과 마리아의 모범을 상기하며 더욱 더 세상의 질서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러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이며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실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천사가 마리아에게 인사하였듯 말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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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마리아는 죄 없이 창조되어 새 창조의 의로운 삶을 가리키는 ‘살아있는 표징’>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한국교회의 수호자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엄청 기쁜 날입니다.
우리는 입당송에서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화답송에서도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 환호송에서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하고 기쁨을 노래하였습니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본기도에서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
한편, 19세기의 저명한 학자이며 교부 전문가인 헨리 뉴먼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에 관한 가장 오래된 초기부터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그녀가 바로 두 번째 하와라는 것이다.”
또한 초대 교부들은 하와가 인류의 타락에 고유한 역할을 했듯이, 마리아도 인류의 구원에 고유한 역할을 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와는 뱀의 말에 속아서 불순종과 죽음을 가져왔다. 그러나 동정 마리아는 믿음과 기쁨을 가져왔다.”(유스티누스)
“하와를 통해서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통해서 생명이 왔습니다.”(히에로니무스)
“사람을 속이기 위해 여인을 통해서 독약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은총 속에 다시 태어나게 하려고 여인으로부터 구원이 쏟아졌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사실 <창세기>에 따르면, 원죄를 짓기 전에는 ‘여인’으로 불렸고 범죄 후에 ‘하와’로 불려집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가나안의 혼인잔치’와 ‘십자가 아래에서 마리아에게 요한을 맡기실 때’ 마리아를 “여인이여”라고 부르심은 마리아를 죄 없으신 ‘두 번째(새) 하와’로 부르심을 말해줍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마리아가 '새로운 하와'임을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창세기> 3장 15절의 ‘원 복음’을 다루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전승은 이 대목(창세 3,15)을 “새로운 아담”의 예고라고 본다. 그분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리 2,8) 아담의 불순종을 넘치게 보상한다.
한편, 많은 교부들과 교회학자들은 ‘원 복음’에서 예고된 ‘여인’을 “새로운 하와”인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로 생각한다. 마리아는 최초로 그리고 특별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죄에 대한 승리의 은혜를 입은 분이다. 그분은 원죄에 전혀 물들지 않았고, 지상 생애 동안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그 어떤 죄도 범하지 않으셨다.”(411항)
이처럼 예수님과 마리아를 ‘새 아담’과 ‘새 하와’로 여기는 것은, 마리아가 죄 없이 잉태되셨고 죄 없이 사셨다는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마리아의 부모님이 죄가 없었다는 것도 아니며, 아들에게 죄스런 본성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죄를 씻은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님께서 죄를 이기신 승리에서 흘러나온 ‘특별한 은총’으로 죄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를, 곧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교종 비오 9세는 1854년 12월 8일, 믿을 교리로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처럼 '새 하와'인 마리아는 죄 없이 창조되어, 새 창조의 의로운 삶을 가리키는 ‘살아있는 표징’이 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가정을 되돌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2코린 5,17)이 되게 하셨습니다. 곧 성모님으로 하여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 열리기 된 것입니다.
이 새로운 창조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여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단지 죄를 용서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본래의 죄 없는 에덴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죽음이 없는 상태로 건너감이며,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해줍니다.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 5,21)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하늘에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히브12,23)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묵시록>에서는 말합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새로움으로 태어난 피조물로 축복을 입게 되었으니, 한없는 기쁨으로 '성모님의 노래'인 오늘 입당송을 다시 불러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입당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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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놀라운 일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기쁘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그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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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여성들은 자기 얼굴이 아름답다고 생각할까? 2013년 어떤 비누 광고에서 화장기 없는 자기 얼굴을 촬영하려고 할 때 고개를 돌리거나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여성들의 모습을 포착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의 모습을 어떤 모습을 어떤 모습이든 간에 개의치 않고 환한 미소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어린아이들의 모습과 대비시키면서 이런 문구를 내보냈습니다.
“언제부터 자신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저 역시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제 머리카락은 워낙 억세서 조금만 길어도 붕 뜨면서 지저분해집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에 왁스를 발라서 지저분함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왁스를 바르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할까요? 모자를 씁니다. 모자 없이 밖에 나가지 않고, 또 모자를 절대로 벗지 않습니다. 우연히 어렸을 때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다 붕 떠 있습니다. 지금보다도 더 뻣뻣한 머리였는데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남의 시선에 너무 신경 쓰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느님의 시선에는 무감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죄를 범하면서도 합리화하며 하느님을 무시합니다. 남의 시선에 신경 쓰는 것 절반만 하느님께 신경 쓰면 어떨까요?
우리는 오늘 하느님의 시선에만 집중하고 있는 분의 대축일을 보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께서 머무실 거처를 거룩하게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준비를 받아들인 성모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 하느님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예수님 잉태 소식도 “예”라고 응답하셨고, 이로써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고, 질문하고, 마침내 순종하십니다. 대천사의 말처럼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말씀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하십니다. 세상의 시선을 보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만 보고 계신 성모님의 굳은 믿음에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너무 쉽게 세상의 시선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면서 하느님의 시선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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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마리아께서 원죄에 물들지 않은 채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독서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 얘기가 나오고, 미사의 본기도와 감사송은 원죄에 물들지 않고 잉태되심에 대해 노래합니다.
그런데 원죄가 왜 인간에게 있는지 저는 반문을 합니다. 왜냐면 모든 것의 시작은 다 하느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인간이 무엇을 했다면 시작의 시작은 하느님이니 다 하느님 덕이거나 탓이지요. 그러니까 원죄는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있고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러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점을 설명할 때 부모와 자식 관계를 자주 예로 듭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꼼짝 못하는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부모의 사랑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의 원죄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자식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가 자식을 더 사랑하기에 부모는 언제나 자식에게 지게 되어 있습니다. 더 사랑하는 쪽이 항상 지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지 말라는 것을 하겠다고 우겨도 결국 지고 맙니다. 그리고 아무리 큰 잘못을 하고 계속 잘못을 해도 꼼짝 못합니다. 어디서 이런 자식이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자기가 그렇게 낳은 것이고, 그렇게 키웠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제 생각에 하느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잘한 것은 하느님께서 하게 하셨다고 하고 잘못한 것은 인간이 잘못한 거라고 하는데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잘하라고 하셨고 잘못을 하라고 시킨 것은 아니지만 잘하려 해도 잘못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리 만드셨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오늘 축일의 뜻도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작의 시작은 하느님이고, 선택하신 분도 하느님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 2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1,4-5)
보통 사람인 우리도 천지 창조 이전에 사랑으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하느님께서 하물며 우리 인간의 구원자를 잉태하실 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사랑으로 선택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보시고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천지창조 이전부터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마리아를 선택하시고 그리스도의 어머니답게 마리아를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기도와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동정녀를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시어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셨나이다.” “마리아를 원죄에 물들지 않게 하시고, 은총으로 가득 차게 하시어, 성자의 맞갖은 어머니가 되게 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마디로 병도 주고 약도 주는 분이십니다. 신명기를 보면 찌르는 것도 나요 고치는 것도 나라는 말씀이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당신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죄를 지을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드셨지만 은총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은총을 주시는 것만 사랑이 아니고 죄를 지을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드신 것도 사랑입니다. 사랑하셨기에 은총을 주신 것처럼 사랑하시기에 사랑할 수도 죄를 지을 수도 있는 자유를 주신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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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1,28)
<깨끗한 영혼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1,26-38)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입니다. '나자렛 처녀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 간택되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잉태되신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념하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이 큰 축일은 '천주의 성모이신 마리아(1.1)',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마리아(8.15)',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와 함께 중요한 '성모님의 핵심 믿을교리'입니다.
성모님께서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것은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품고 낳으실 모태이기에 당연한 믿을교리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루르드의 성모님 발현을 통해 성모님께서는 이 믿을교리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
하느님의 소식을 전하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나자렛 처녀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 주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십니다. 죽음과도 같은 이 엄청난 선택을 마리아는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품고 낳으시는 태가 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하신 일,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는 '대림시기'입니다. 구약의 4천년의 역사를 상징하는 대림초 4개 중에 2개가 불을 밝혔습니다. 세상 구원을 위해 오시는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태어나시도록 잘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영혼을 깨끗이 정화해야겠습니다.
'거룩한 미사와 고해성사(판공성사)'를 통해 죄에 물들어 있지 않은 영혼이 되어, 메시아이신 구세주께서 내 안에 태어나시게 합시다!
그리고 하느님 구원 사업에 도구로 부르시는 주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합시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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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루카 1,28)
하느님의 구원은
마리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보호된 첫 번째
사람이며,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첫 구성원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죄보다
더 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움직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먼저 일하십니다.
먼저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약속이
이미 우리
현실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인간의 구원은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하신
결과입니다.
은총은 협력이
되고
자유의지는
존엄성이 됩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교리는
단순히 마리아를
높이는 교리가
아니라
인간을 회복시키는
교리입니다.
한국 교회의
탄생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이
먼저 온
역사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은총에서 태어났으며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은
한국 교회의
정체성과
교회의 여정을
가장 잘 설명하는
수호자가
된 것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은총의 거룩한
첫 열매입니다.
그 첫 시작을
진실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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