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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들이 이루어낸 축제 강성희
추수의 계절이다.
바람따라 물결처럼 일렁이는 들판의 황금빛 벼들은 보기만 해도 눈이 부시다. 국도를 따라 가다 보이는 길 옆 과수원에는 붉게 잘 익은 사과를 따느라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하고, 마을 집집마다 몇 그루씩 서 있는 감나무도 반짝반짝 노란 빛을 더해간다. 농가 평상에서 빨갛게 말라가는 고추며, 마당 한가운데 멍석에서 툭툭 소리내며 터져 굴러가는 콩이며......
농촌의 가을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흡족하고 배가 부르다.
그런 때가 있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흡족하고 배가 부르던 때......
일 년간 고생을 하고 결실을 거두어들이는 추수의 시기나 그 수확물은 업종마다 다를 듯 싶지만, 내가 종사하던 교사라는 직종에서도 나름대로 추수라는 것이 있었다.
추수할 때 농부의 마음이 축제를 치르는 것처럼 신나듯이 내가 반평생을 바친 일터에서의 추수도 더 없이 신나는 축제였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리거나 모종이나 묘목을 구하듯, 나도 삼월이면 모종을 받았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의 일터에서는 2월 말 새 학반의 담임이 정해지고 1년간 내가 맡을 아이의 명단이 든 봉투를 받는 걸 ‘아이 받는다’라고 말했다. 20여명의 이 아이들은 내가 1년 간 온 정성과 피땀과 열정을 다해 농사지을 새 모종들이다. 모종은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채, 마음이 설레고 급해진 어설픈 농부는 모종들의 이름과 번호를 먼저 외운다. 내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가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으므로, 그들을 하루라도 빨리 나의 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는 그들의 이름을 먼저 외운다. 그리고 ‘올해는 이 아이들과 이러 이러한 활동을 주제로 이러한 밭을 만들어 보리라. 올해는 아이들의 이름을 더 다정히 불러 주고 눈도 많이 맞추어 주리라. 아이들을 더 사랑하고 더 칭찬해 주리라’ 이런 저런 각오와 감회도 새 모종을 받는 날은 남달랐다. 그렇게 3월 첫날,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나는 예쁜 모종을 받았다. 새벽 들판을 나갈 때 마다 쑥쑥 자라는 모종을 보며 마음이 설레는 농부처럼 나도 더 자주 손길과 눈길을 나의 모종에게 주었다. 더 튼실한 모종과 관심이 더 필요한 약한 모종을 찾아내고 그에 맞는 농법으로 모종들을 돌보았다. 매일 매일 모종 하나 하나 이름을 불러 주며 사랑을 주고, 지식이라는 퇴비를 넣어주고 인성이라는 영양제를 투여하며, 비와 바람, 어떤 해충과 악조건 속에서도 건강하게 자랄 모종을 위해 체력도 단련시키며 온갖 처방전을 연구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다 같은 비와 바람과 햇빛을 받고도 무엇은 황금빛 벼이삭을 달고, 무엇은 빨간 사과로 익어가며, 또 무엇은 까만콩으로 여물어 가며 추수를 기다린다. 그렇듯 한 해 교육과정이 끝나가는 늦가을, 우리 아이들도 제 각기 다른 개성과 다른 아름다움과 지식이라는 작은 꽃망울을 달며 예술제라는 가을 추수를 준비한다. 우리의 가을 추수는 바로 종합예술제이다. 예전에는 연극이나 음악 위주의 공연을 하며 학예회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다가 한 때는 교육과정 발표회라고도 했다가 요즘은 대체로 종합 예술제라고 불리운다. 종합이라는 접두어답게 글짓기, 그림, 판화, 서예, 연극, 춤, 합창, 연주, 군무, 과학탐구발표, 웅변, 그 밖에 아이들이 글밭에서 배운 모든 꽃과 열매를 펼쳐보이는 그야말로 종합예술제다.
시월 어느 날, 나뭇잎이 조금씩 빛이 달라져 보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이들은 들뜨고 나는 긴장한다. 교실은 한동안 추수 준비로 타작하는 가을 들판처럼 술렁인다. 교실 앞 뒤 게시판은 농촌 들판이고 농가의 마당이다. 모둠활동이나 집단활동이 많아 한바탕 교실이 난장판이 되고 나면 교실 이쪽 마당에 가족 친지 관계를 배우며 만든 고모집, 이모집, 삼촌집들이 ‘친척집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꾸미기로 선을 보인다. 한 모둠은 고모집을 근사한 이층집으로 꾸미고 이모와 이모부 이종 사촌까지 그려넣었다. 또 다른 한바탕의 난리가 나고 나면 저쪽 마당에 ‘우리마을로 놀러 오세요’하며 반 아이들이 모두 참여해서 만든 ‘우리 마을 그림지도’가 내 걸린다. 커다란 전지 한 장 반에 우리 마을의 큰길과 골목길 정도만 내가 그려 넣어 주면 그 길을 따라 자신들이 사는 아파트도 그려 붙이고, 공공시설도 만들어 붙이고 가로수도 심는다. 공원도 만들어 그네도, 마끄럼틀도 그려 붙이며 20여 명의 아이들이 솔방구리에 쥐드나들 듯 왔다갔다 하며 그림지도를 완성해 낸다. 이 작은 교실, 추수 마당에 내 걸리는 작품들은 모두 모둠 아이들이 같이 만든, 두레나 품앗이로 수확한 결실들이다. 여름에 피는 꽃들을 배우며 색종이로 만든 해바라기꽃, 나팔꽃들을 모아 아이들은 꽃밭도 만들었다. 아이들은 욕심이 많아 봄에 피는 꽃인 튤립, 민들레, 개나리도 같이 심어 주었다. 여름의 곤충들을 배우며 아이클레이로 만든 베짱이, 무당벌레, 매미, 잠자리 그리고 곤충은 아니지만 엉뚱하고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개구리도 도마뱀도 만들었다. 이미 만들었던 꽃밭에 곤충들을 풀어 놓으면 곤충과 꽃들이 함께 오순도순 사이좋게 살아가는 자연 환경이 되었다. 나는 그 꽃밭 사이로 푸른색 색지를 곡선으로 잘라 실개천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 언젠가도 모르게 누군가가 그 실개천에 송사리 금붕어도 풀어 놓는다. 그러면서 그 꽃밭에는 예술제를 끝내고 추수를 완전히 마칠 때까지 식구가 계속 하나씩 늘어난다. 그러면 어떠랴, 내가 씨뿌려 거둔 수확물이 사과면 어떻고 감이면 어떨 것이며, 그 개수가 늘어난다고 짜증부릴 농부가 어디 있을까? 농지가 모자라면 주인 없는 큰길가 하천변에도 씨앗을 뿌리듯이 복도 창가에도 주렁주렁 그림들이 매달리고, 복도에도 책상으로 만든 전시대 위에도 아이들의 개인 솜씨들이 축제장이 넘치도록 전을 펴고 있다.
나는 축제의 마당만 펼쳐 주었다. 칠판 위에 오색 색지로 휘장을 둘러 축제의 분위기를 띄운다. 가을 하늘을 연상하는 푸른 펠트지로 칠판을 가득 덮어 푸른 하늘을 만든다. 하늘 아래 은행나무와 단풍나무 몇 그루 세워 두면 아이들이 만든 고추잠자리가 그 하늘에서 날아다니고, 아이들이 색종이 접은 은행잎 단풍잎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코스모스는 한들한들 가는 몸을 떤다. 그리고 한 아이가 한 글자씩 온 정성을 다 해 적은 “2018, 2학년 1반 종합예술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글귀가 하늘과 땅의 중간쯤에 가서 자리를 잡으면 추수마당의 준비는 끝난다.
A4 한 장에 한 글자를 한 시간씩,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글자를 그리는 아이들, 자신의 글자 자리를 찾느라 옆 친구와 순서를 정하고, 글자를 붙이는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내가 속이 터진다.
해마다 이른 봄, 크기가 비슷하거나 다른 모종을 받으면서 늘 생각한다. 어떻게 이렇게 하나같이 다른가? 그리고 한 해 농사가 끝나갈 즈음 종합예술제를 준비하며 또 한 번 생각한다. 어떻게 이렇게 하나같이 다르게 이쁜가?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 줄넘기를 잘하는 아이, 계산을 잘 하는 아이, 일기를 잘 쓰는 아이, 청소를 잘하는 아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하는 어느 시인의 고운 시를 ‘첫눈에도 예쁘다, 오래 볼수록 더 사랑스럽다, 너희들이 그렇다.’하고 고쳐 주고 싶을 만큼 우리 아이들이 예쁘다. 우리 모종들이 예쁘다.
농부들이 자신이 보살피고 거두는 벼 알 한 곡, 콩 한 알이 소중하듯이 글밭을 보살피고 거두는 교사라는 농부에게도 하나 하나 이쁘고 소중하지 않은 아이들이 없다.
예술제의 정점인 당일, 내가 받은 모종들의 몸과 생각들이 자라서 맺은 열매들로 교실 마당은 한가득 풍년의 기운이 넘친다. 추수의 축제를 축하하러 온 손님들의 아끼지 않는 칭찬과갈채에 우리 모종들은 어깨가 으쓱해지며 또 한 뼘 자란다.
그렇게 해마다 하던 추수는 끝을 냈다. 내 생애 마지막 타작 축제를 끝내고 아이들도 모두 엄마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 간 후, 모아두었던 숨을 길게 내 쉬며 나의 마지막 추수마당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잘했어, 올해도 풍년이야.’ 스스로 대견해하며 자찬을 보낸다. 밤을 새워 정성껏 만든 오색색지 휘장을 걷으며 눈물이 핑 돌았다. 또 다시 이 휘장을 쓸 일이 있을까? 이런 화려하고 예쁜 추수, 속이 꼭꼭 여물은 알맹이들을 추수해 볼 수 있을까?
내가 키운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모종들과 하나가 되어 한 바탕 축제를 다시 해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에 잠시 슬픔에 젖었다. 이제 또 다른 추수를 위해 다른 농사를 시작해야 할 때인가보다. (끝) 2018.10.11.
첫댓글 해마다 학급 학예회 프로그램을 짜고 파워포인트를 만들고 다양한 프로 그램을 만드려고 아이들과 의논을 하고 연습을 하던때가 생각납니다. 모둠별 공동작품을 만들고 전시할 개인 작품에 제목을 붙이고. 바로 2년전의 일들인데 아득하게만 느껴집니다. 사랑이 가득한 교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글 잘 읽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보람되고 성실한 농부가 좋은 인재를 기르는 일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제 갓 돋아난 새싹같은 묘종을 받아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가꾸어 그 결실의 기쁨을 누리는 종합예술축제를 자축하시는 선생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이제 인생 이모작을 위한 글밭 가꾸기에 전념하시면 수확의 기쁨은 선생님의 것이 되리라 믿으면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뿌린만큼 거두는 것이 추수이지요. 선생님이 쏟아부은 사랑의 결실은 어쩌면 그 축제에서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 아닐런지요. 이제 기다릴 일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자신의 남은 시간을 자신을 위해 보람있게 가꾸는 또다른 축제를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섬세하고 진솔한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추수는 정말 풍성하고 보람있는 추수였습니다. 선생님과 함께한 아이들은 알찬 열매로 영걸어 갈것같습니다. 저는 선생님과 같은 알찬 알곡을 한 번도 추수해 본적이 없는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선생님의 농장이었던 교실의 아름다운 풍경(알찬 결실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러집니다. 새로 시작한 농사도 대풍을 이루어 알찬 추수를 하시길 바랍니다.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아이들을 예쁜 모종에 비유하고 종합예술제를 타작(추수)축제에 비유하신 산뜻한 발상에 박수를 드립니다. 섬세하고 친절한 선생님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미소가 지어지고 감동받았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첫눈에도 예쁘다 오래볼수록 더 사랑스럽다 라는 말씀이 공감되며 선생님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듬뿍 묻어납니다
화려하고 예쁜 추수를 쌓고 또 쌓는게 얼마나 의미있고 보람된 삶인지 모릅니다. 이제 선생님을 위한 행복한 시간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아름답고 애잔한 글 잘 읽었습니다
풍요로운 가을을 그린 글 잘 읽었습니다 .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풍요로운 가을을 그린 글 잘 읽었습니다 .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콩나물 시루에 물을 주면 다 새어나가는것 같아도 튼튼하게 자라 맛있는 콩나물이
되는것처럼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 학생들은 잘자라서 좋은 열매가 되어 기쁨으로 돌아오는것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모종으로 지은 농사, 알찬 결실에 찬사를 보내드립니다. 선생님이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너무나 극진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다른 모종을 통하여 풍성한 결실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교실 현장의 모종들이 부리는 재롱잔치가 마치 훌륭한 예술작품을 방불케 합니다. 찬찬히 음미하며 잘 읽었습니다.
불알친구 셋이서 소주 한잔하는 자리에서 맹자의 君子三樂이 안주삼아 이야깃거리가 된 적이 있었답니다. 그 자리에 가르치는 선생님의 즐거운 삶을 오롯이 누린 교장으로 퇴직한 친구가 있었는데 일반직으로 퇴직한 둘이서 그 친구가 제일 부럽다고 공격을 했거든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또 다시 그 생각을 해봅니다. 부러워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어린 모종들이 무럭무럭 자라 듯 어린이들 재롱 떠는 모습이 눈에 선 합니다. 학생을 지노하는 자세가 모종을 키우는 농부들의 마음임을 실감합니다. 수확하는 기쁨이 뿌뜻하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가르치는 아이들을 모종으로 비교하셨네요. 꽃모종이든 가지모종이든 옮긴 모종에는 자리를 잡을 때가지 정성을 다합니다. 아이들이 자라나는 눈망울을 들여다보면서 정성스레이 가꾸시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정들었던 선생님께서 전근 가실때 선생님도 울고 학생들도 울었던 70 년이 다되어와도 성함도 잊혀지질 않는 선생님이 지금도 똑똑히 기억납니다. 그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모종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큰다는 말과 같이 학생들도 따뜻한 선생님의 사랑과 정성으로 일년동안 많이 성숙했을것 같습니다. 농사는 사람의 힘보다 자연의 힘이 절대적입니다. 비가오면 몰라보게 자라 있습니다. 학생들도 사회에서 관심과 보호가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이제 문인의 길로 정진하시기 바라며,정이 넘치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교실의 일년 장면이 눈에 꽉 들어차네요. 추수를 위해 도란도란 아이들에게 생각을 전하고 빨강, 파랑, 노랑, 초록으로 저 만의 성숙을 풀어내는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추수를 하는 농부인 교사! 멋있었습니다. 그 무지개빛 결실을 가슴에 묻어두고 꺼내보며 새로운 추수를 계약하는 당신. 그 당신은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