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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하늘, 그 가운데 고개를 내밀었던 그로테스크한 거대한 사람의 얼굴과 거대한 손, 그것들에게 잡혀가 듯 하늘로 향해 올라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저항, 그리고 빛의 기둥 안에서 홀연히 등장한 정체불명의 인형이 쏘아올린 한 줄기 절명의 섬광....
그 날 직후, 가린이 살고 있는 생명의 땅의 매스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그날을 피해상황 보다는 정체불명의 인형에 관하여 다루는 기사와 방송을 연이어 보도하였다. 하지만 그 놀라웠던 기적의 열기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첫째로 정체불명의 인형의 행방을 알 수 없었으며, 둘째로 그날의 현장을 기록한 모든 영상물에는 기괴하게도 정체불명의 인형의 형상이 잡히지 않았으며, 셋째로 사람들이 각자의 생계를 위해서 몸담아야 하는 직장과 사회는 그들이 그날의 기적과 기쁨을 회상하며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을 주지 않고 바쁘게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정체불명의 인형-그 주인공인 가린 역시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에 몸담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 이었다. 그 날 이후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정체불명의 인형이 자신이라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은 채 가린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자신의 가게에서 과자를 만들고 팔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 어서 오세요~"
" 안녕히 가세요~"
미소와 함께 첫인사와 끝인사를 반복하는 가린은 가게의 장사수준이 아크-기논의 사태 이전의 평균 수준 이상으로 회복한 것에 다 팔려나간 과자를 만드는 동안에도 얼굴에 버릇처럼 되어버린 미소를 쉽게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시계바늘이 12시 15분전을 가리키고 있을 무렵의 가게 안은 오븐의 열기와 함께 새어나오는 과자가 익어가는 달콤한 냄새가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런 가린을 슬레진져는 과자가 만들어지는 주방의 한쪽구석에서 가린의 일손을 도우면서도 틈틈이 가린이 하루하루에 임하는 그 자세를 보이지 않는 곳까지 체크해보고 있었다.
' 이대로는 안 돼. 가린은 과자점을 하면서 [갓-크라임]이란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낼 수 없어..'
그것이 그녀가 가린의 일상을 진단한 후 내린 최종 결론 이었다.
자신을 오랜 세월동안 압박하던 두려움에서 벋어나 다른 수많은 이들의 두려움을 걷어 내고, 절망과 어둠이 만들어 낸 암흑의 창공을 뚫어버린.....그녀는 자신이 세운 [용자]가 이대로 사회의 작은 일원이 되어 그 굴레에 파묻혀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
한 자루의 기다란 칼을 쥐고 있던 남자의 형상이 있었다. 단순하고도 화려하게보이는 흰색의 코트를
걸친 청년은 그 공간의 중심에 있었다.
사방이 백색의 연속, 한계가 체험되지 않는 무한의 공간....
인간의 일반적인 관념으로썬 이해가 되지 않는 미지의 공간..
그 중심에 그가 있었다.
청년은 공간의 사방에 투영되어 흐르고 있는..
어떤 사건이 '기록'된 [영상]을 보고 있었다.
암흑으로 뒤덮인 하늘아래 홀연히 출몰한 비행체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보이는 빛의 기둥...그리고 그 안에서 걸어 나온 거대한 인형...그리고 그 인형이 하늘을 향해 쏘아올린 섬광.....그 영상을 천천히 흩어보는 그 남자의 마음은 영상이 서서히 앞을 향해 흘러갈수록 무거워져만 갔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는 무게를 겨우 떨쳐내며 조용히 마음의 음성을 내 뱉었다. 그 남자의 눈에 투영되는 것은 어둠의 하늘을 뚫는 한줄기의 섬광...
.....[ 시령포(時靈砲)] 인가...갓 크라임...그것도 [시진패령왕(時陣牌靈王)] 이군...나와 같은.....
그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을 즈음 흰색의 공간과 그 남자의 눈에 투영되던 영상은 정체불명의 인형이 [땡큐-_-)乃] 를 쌔우려는 순간 전신분해되어 도망치듯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는 장면을 끝으로 서서히 흐릿해지며 소멸되어갔다.
"..;;;;;;;;;;"
그 남자는 정체불명의 인형이 슬그머니 치켜세우려던 엄지손가락의 모습이 담긴 영상의 한 장면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어렵사리 잡아놓은 분위기가 썰렁해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그 남자는 다시금 마음의 입술을 열었다.
하늘에 태양이 두개일 순 없는 법.... 시진패령왕 역시 두개 일 순 없어... 조만간 나는 저 녀석과 승부를 봐야하는 운명인가...?
순간 흰색의 연속이었던 공간이 그 중심에 서있는 남자를 중심으로 크게 좁혀져지고 있었다. 공간의 축소에 따라 그 남자는 공간의 한계를 사방으로 부터 점차 체험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어느덧 빛만이 존재하던 그 공간이 어둠이란 본래의 모양으로 탈바꿈해졌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남자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사이 불가사의한 미지의 공간은 좁다란 플라스틱 벽으로 이루어진 낯선 공간으로 변해있었고, 빛으로만 가득차있던 공간은 어둠이 창궐하는 상황 가운데 한줄기 빛만이 밝혀주는 불결한 곳으로 변해있었다. 변화는 공간뿐만이 아니라 그 남자에게도 닥쳐왔다. 화려하게 보였던 그 남자는 단출한 모자와 외투와 청바지, 그리고 검을 쥐고 있던 손에는 한 뭉치의 두루마리 휴지가 쥐어져 있었다.
...... 그 공간의 변화와 함께...위풍당당하게 서있던 그의 몸은 비좁은 공간 한계에 부딪혀 웅크리고 있었다.
" 야야!! 녀석아 빨리 나와!! 나 위급하단 말......."
뿌지직!!!…….
"……. 끄아아아아아아아아~!!!!!!!!"
공간의 밖에서 들려오는 한 남성의 다급한 소리....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결국 강렬하게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 음성의 주인공에게 절규와 함께 절체절명의 위기와 극도의 수치심을 안겨 주며 일단락 지어냈다..... 이윽고 들려오는 그 남자의 울음소리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의 신음이 공간의 밖에서 겹쳐 들려오고 있었다. 결국 미지의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던 남자는 기가 죽은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 이제 닦고 나갈게;;"
"... 가린아, 너의 의견을 듣고 싶어."
가린의 장사가 한창 탄력을 받고 사그러들어 여유가 생기는 시간이었던 오후 4시, 슬레진져와 가린은 원탁에 함께 앉아 서로를 낯설기만한 어색함 속에서 마주보고 있었다. 가게 밖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시장의 일상적인 소리가 배경으로 깔려있는 고요함속에 가린은 자신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슬레진져의 입술을 흘낏 바라보았다.
"... 예.."
가린의 시선에 잠깐 동안 들어오는 그녀의 입술로부터 나온 말은,
" 이제 나의 여행에 동참하지 않겠니?"
"... 예?"
가린은 순간 그녀의 얼굴앞에 자신의 놀란 얼굴을 숨김없이 내비쳤다. 그녀 역시 가린의 그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당황하는 낌새를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그 짧았던 경직된 순간을 깨고 슬레진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 뭐, 나는 가린이에게 내 여행에 동참하라고 강요는 하지 않으려고 해. 이 일은 가린이의 자유의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일이니까...그러니까, 오늘 밤까지는 가린 이의 의견을 듣고 싶어."
"... 오늘 밤 까지요?"
" 응, 준비할 것이 많으니까.."
가린은 그 때부터 고민에 빠져들기 시작했는지 그 날 오후동안에는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아졌다. 저녁손님과 밤손님이 찾아오는 그 순간에는 미소를 잃지는 않았지만, 분명 겉모습과 속마음은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영업시간이 끝나고 과자가 전시되어 있던 바구니의 청소와, 가게 바닥의 청소, 주방의 조리대와 식기와 오븐의 청소를 끝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샤워하는 그 순간에도 가린의 고민은 계속되고 있었다.
끼익...
가게의 2층에 자리 잡고 있는 가린의 좁다란 생활공간...화장실과 잠을 잘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만이 허락되어 있는 그 자리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은은한 어둠과, 검은색 추리닝이 걸려있는 기다란 옷걸이, 그리고 바닥에 이불과 엉켜져 함께 뒤둥군 채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은 슬레진져의 모습이었다.
" 헉!!"
가린은 순간 자신의 방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 속에서 갑자기 존재하고 있는 연두색 빛을 보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정확히 관찰하자, 그것은 검은색 추리닝의 등짝에 새겨진 SLAZENGER의 로고가 야광기능을 제때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 노..놀랐잖아.;;"
가린은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몸을 뒤둥군 채 잠든 슬레진져의 자세와 이불을 정리하면서 자신이 누울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가린은 잠든 슬레진져에게 박혀버린 눈길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는, 그녀가 그녀의 매력 포인트인 검은색 추리닝을 벋어 던진 그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효했다.
... 누나는 여전히 아름답.......헉!!!
가린의 마음속의 소년의 로망의 원인이 슬레진져 였다면, 그 로망을 부셔지는 물거품처럼 날려버린 것 또한 슬레진져였다. 이불속에 가리워져 드러나지 않았던 그녀의 속옷은...붉은 내복이었다. 그 짙은 자주색의 색상으로 몸에 밀착되어있는 모양새와 그 정교하고도 세련되게 수놓아진 내복의 소매 끝 레이스의 아름다움이 가린을 강하게 압박해오고 있었다.
" 쿨럭쿨럭.;;"
가린은 비좁은 잠자리에 드러누운 순간까지도 가린 자신의 당황함을 나타내는 버릇이었던 헛기침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장사가 잘되면 수익은 많았지만, 그와 반대로 육체에 누적된 피로는 막대하게 쌓여만 갔다. 일주일 정도 불황이었던 장사가 순간에 잘되어가자 가린의 육체는 생활의 패턴에 적응하지 못하고 누적되어버린 피로로 인해 짧은 시간 안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눈을 감고 있던 그 순간 동안 끝이 닿지 않는 밑으로 추락해 가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등은 따뜻했고, 온몸을 압박하던 긴장은 풀어져 있어서 육체와 마음은 더 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 두 사람의 가느다란 숨소리만이 비좁고 어두웠던 공간 안을 채우고 있을 무렵, 가린은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 가린아... 너의 의견을 듣고 싶어...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가린의 마음속으로부터 들려오는 잔잔한 음성은 분명 귀로 구분할 수 있는...청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가린아...이 누나의 여정에 동참하겠니?
몸은 깊은 잠 가운데 있었지만, 언젠가 부터 마음속에 들려오는 한 소녀의 음성이 가린을 잠에서 일어나야 된다고 은근히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의 조급함으로 다가왔을 때 가린은 깊은 잠중에 눈을 천천히 떴다. 풀어져가는 피로로 인해 눈 커플이 무겁게 느껴졌지만, 자신에게 잠을 즐기는 것 보다 중요한 일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머리위로 무언가가 있다...
그 생각이 처음 가린의 머릿속에 들어와 살짝 고개를 위로 돌리는 가린의 시선에 들어온 것 어둠이라는 실루엣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시선이었다.
".... 누나.."
힘없이 흘러나온 가린의 음성에 그녀역시 잠에서 막껜 것처럼 힘없이 가린에게 답했다.
"... 응"
슬레진져는 그대로 몸을 드러누운 상태에서 가린의 머리 바짝 위로 팔을 편 채 자신의 눈동자를 가린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불속에서 살짝 드러난 그녀의 절묘한 목선과, 자줏빛 내복의 레이스(.;;)가 어둠에 가려진 그녀의 신비로움을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 누나를 뒤따라가겠어요."
가린의 음성이 공간의 밑에서부터 위로 퍼져나갔다. 그 음성을 뒤를 이어 슬레진져의 음성이 또 한 차례 밑에서 위로 퍼져나갔다.
" 잘 생각했어, 가린아. 이제 내일부터 천천히 가게를 정리하자. 알겠지??
" 예에~?"
-Brave Revolution-
GOD-CRAIM
제3화 : 그녀의 용자[1/4]
50% 세일
도심 한가운데가 출근차량으로 한창 붐비는 아침, 슬레진져는 거리의 한복판에서 여유 있는 도배질로 공공 게시판에 무언가라 적혀있는 전단지를 붙이고 있었다.
XXX과자점, XX부터XX까지 X0% 세일..
슬레진져의 몸과 손에 가려져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전단지는 슬레진져가 그 전단지를 붙이고 어디론가를 향해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 순간에 그 온전한 의미를 되찾게 되었다.
가린의 과자점이 일주일후에 과자점을 정리하니 모든 과자를 50% 까지 세일한다는 것이었다.
50% 세일....과자에 있어서 모든 과자의 50%세일이란 어느 누가 평가해도 놀라운 것이었다. 인근 과자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가린이 손해 보는 장사를 한다고 하며 혀를 찼지만, 그와는 반대로 가린의 과자점은 평상시와 다르게 붐비는 사람들로 그야말로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사람들이 들어오면 미소로 답했던 가린이었지만, 그 상황 가운데에서 가린은 미소조차 짓을 여유를 주지 않는 북새통 이었다. 아직도 물러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가게는 만원, 그 상태에서 또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가린은 경악과 함께 사람들의 압박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한때 아기자기하고 아름답다는 가린의 가게 안이 자비심 없이 곡식을 갉아먹는 메뚜기 떼가 지나간 가을의 황량한 논밭같이 변해버린 것은 사람들이 일순간에 빠져나간 어느 한 낮 이었다.
" 아아..;"
가린은 어이없는 표정과 함께 과자가 전시되어 있던 바구니들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 부...부스러기도 없다...쿨럭"
가린은 바구니를 포함, 시야확대를 넓혀 가게 안에 들여 놓여져 있던 모든 바구니들을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바구니 위에는 부스러기 하나 남아있지 않고 있었다. 그 빈 바구니들을 정리하며 가인의 시선이 그나마 온전히 남아있는 유리문으로 덮여있는 냉장고 안에 있는 수많은 케이크들에게 가는 것은 그나마 썰렁해진 바구니와는 다른 가득 찬 느낌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커플로 의심되는 남학생과 소녀가 가게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나 소리 소문 없이 출연한 그들로 인해 가린은 인사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 순간 굳어져 버렸다.
" 이봐, 다크세이버. 어떤 거 먹고 싶어?"
" 마음 같아선 저기 있는 케이크 다 먹고 싶은데..."
" 나 돈 없어.;;"
" 으응~ 그렇게 짜게 굴지 말고 나 다 사줘~린. 너 돈 많잖아~"
" 으악!! 네가 나보다 훨씬 돈 많잖아!!"
".... 흐흑 너무해...내가 이래봬도 여자인데...그럼, 나 삐져버린다..."
순간 가게를 요란하게 울리던 두 사람의 대화는 어느덧 들려오는 소녀의 그 말에 순간 조용해 졌다. 남학생은 뭔가 고민하는 듯 하더니 결국 지갑을 꺼낸 다음 가린에게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을 보이며 물었다.
" 저기 있는 케이크 전부해서 얼마죠? 좀 전 여기 근방에 붙어있는 전단지 보고 왔는데..정말로 50%
세일 해주나요?"
" 아아.;;"
가린은 남학생의 진지함과 무엇보다 그 남학생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점차 울먹거리는 소녀의 모습에 압도되어가고 있었다.
" 아.;;예.; 반값으로 파니까, 저 케이크들 전부 합해서 12....."
가린이 거기까지 말을 이어간 순간, 남학생의 지갑으로부터 튀어나온 수표 한 장이 계산대 앞에 놓여진 일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 한 쌍의 남녀가 지나가고 난 후의 가게의 분위기란 그야말로 돌 위에 돌도 남지 않은 초토화 였다. 물론 가게의 기물의 파손 피해는 없었지만, 가게 안을 장식해오던 과자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니 가린의 마음속 벌판에는 서늘한 바람만이 불고 있었다. 가린이 한동안 그렇게 멍하게 과자가 떨어진 바구니를 든 채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인기척 없이 가린의 가게에 들어온 슬레진져는 한손에 검은색의 무언가가 담긴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그때까지 허무함에 젖어있는 가린은 의아함에 젖은 표정으로 어느새 자기 앞에 서 있던 슬레진져가 든 가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 가린아, 이 옷 한번 입어볼래? 내가 신경 써서 고른 옷이야."
옷? 가방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파악한 가린의 표정은 의아함에서 기대감으로 전환되어갔다. 슬레진져는 옷이 든 가방을 테이블위에 놓고 그 가방 안에서 곱게 접혀진 붉은색 추리닝 한 벌을 꺼냈다.
" 이 옷은...."
슬레진져가 꺼낸 추리닝을 만져보는 심각한 분위기의 가린은 접혀진 츄리닝을 펴보기로 했다.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기반으로 둔 츄리닝의 측면에 팔과 다리 선을 따라 내려오는 검은 선이 단조로울 뻔 했던 붉은색의 추리닝을 좀더 감각적인 분위기로 살려주는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 발목 소매 부분은 다리가 길어보이도록 통처리로 되어 있었고 발목을 조여 주는 조임 끈도 있는 감각적인 요소가 채용된 추리닝이었다. 또한 상의에는 후드가 달려있어 싸늘하거나 추운 아침 운동 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 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그 추리닝의 등에는 [Slazenger]의 로고 위에 하늘을 향해 날아갈 것만 같은 점프하는 한 마리의 야수가 새겨져 있었다.
";;;;;;;;;;;;;;"
"입어봐."
........
" 어머~ 어쩜 그렇게 딱 잘 어울리니~!"
".;; 그.;그런가요?"
미소와 함께 부추긴 슬레진져에 못 이겨 가린은 결국 그녀가 사온 붉은색 추리닝을 입게 되었다. 그녀의 칭찬에 멋쩍은 미소를 짓는 가린의 마음의 한쪽 구석은 알 수 없지 침울해져 있었다.
" 앞으로 그 옷의 도움이 없으면 나를 뒤따라오기 힘들 거야."
"?? 예?"
익숙하기만한 분위기에서 가볍게 내뱉은 그녀의 말에는 분명 가린에게 있어 암묵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가린이었기에, 황당함에 들떠있던 가린의 마음은 어느새 낯선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가린의 심리변화를 아랑곳하지 않고 슬레진져는 다음 말을 이어갔다.
" 그나저나, 장사는 잘 됐니??"
" 아.;;예.;; 보시다시피, 하나도 안 남았어요. 그렇지만 아직 창고에는 남은 원료들이 그래서 다 팔고 가게처분 하려면 족히
보름 정도는 걸릴 것 같아요..."
" 그럼 오늘 장사는 여기까지 하고 가게 문을 닫자."
" 버..벌써요? 아직 2시도 안 넘어갔는데.."
"... 나와 같이 갈 곳이 있어."
그로부터 한 시간 가량 흐른 무렵, 슬레진져와 가린은 사람들의 발길이 자주 닿지 않는 거친 등산로를 걷고 있었다. 우거진 나무가 만들어내는 잎과 기둥, 그리고 광범위한 그늘로 인한 시야의 장애로 인해 산의 정상을 향해 뻗어나가 있을 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 산의 허리 부근에서 슬레진져와 가린은 벤치에 앉아 아픈 다리를 달래고 있었다.....물론 다리가 아픈 사람은 가린 뿐이었다. 벤치에 앉아 이마를 적신 땀을 닦으며 후끈거리는 머리를 뒤로 약간 젖히는 가린을 보며 슬레진져가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 이제 조금만 올라가면 되. 가린아. 정 안되겠으면 내가 업어줄까?"
" 아.;;아니요."
가린의 힘든 기색에서 짓는 당황하는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슬레진져는 가린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다리위로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산속의 시원한 기운이 느껴질 때에야 가린은 뒤로 젖힌 고개를 다시 앞으로 숙이며 고른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때까지 가린과 함께 벤치에 앉아있던 슬레진져는 두 다리를 펴서 한번 허리를 젖힌 후 가린을 내려다보았다.
" 이제 다 쉬었니?"
" 네, 그런것 같아요.."
" 그럼, 가볼까?"
슬레진져는 가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가린에게 그 손을 잡으라는 의미였다. 벤치에서 충분한 휴식을 가진 가린 이었지만 여전히 운동 뒤에 몸에 달아오른 열기는 식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가린의 몸과는 대조적으로 슬레진져의 손은 가린에겐 시원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산의 허리까지 올라오기 까진 슬레진져는 가린보다 10걸음 먼저 앞서 올라왔지만, 허리에서부터 오르는 등산길에는 슬레진져가 가린의 발걸음에 맞춰 등산속도를 늦춰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 두 사람의 마주잡은 손길이 두 사람의 걸음걸이를 조율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침묵을 지키며 산의 정상 부근까지 올라갔다. 그곳에서 길을 틀어 그 두 사람은 등산로를 벋어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등성이 부근을 헤매고 있었다. 그때부터 가린은 그녀가 지정한 목적지에 대한 호기심이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다 왔어."
가린이 품었던 작은 호기심의 해답이 모습을 드러낸 건 등산로를 벋어난 산속을 헤맨 지 5분가량이 흐른 뒤였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발아래에는 낙엽이 쌓이고, 부러진 나뭇가지들의 잔해가 흩어져있고 흙이 고르지 않은 그곳에 쓰러질 듯한 오두막집 한 채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폐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오두막집으로부터 느껴지는 것은 오싹함, 가린은 그 오싹한 분위기에 서서히 짓눌려 가고 있었다. 가린과 함께 그 오두막집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슬레진져가 가린을 향한 음성을 내뱉었다.
" 가린아, 이 집의 위치를 기억해 둬. 앞으로 몇 번이고 이 집을 사용해야 하니까.."
슬레진져의 그 말에 가린은 그 순간 몇 번이고 등산로를 타고 이 폐가에 이르는 경로를 몇 번이고 되새겼다. 오두막집에 대한 오싹한 느낌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던 가린은 슬레진져의 말에 내포된 의미-그녀가 이 집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사실로 겨우 좋지 않은 느낌을 떨쳐낼 수 있었다. 그때까지 가린의 손을 잡고 있던 슬레진져의 손이 스르르 하는 느낌과 함께 가린의 손으로부터 떨어졌다. 그리고 자기를 앞서 오두막의 낡은 문을 향해 앞서 걸어가는 슬레진져의 뒤를 가린이 따라가고 있었다.
" 가린아, 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
슬레진져는 오두막의 문을 열고 가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려져있어 그 내부의 모든 모습이 가린의 눈앞에 들어왔다. 그 오두막 안의 분위기는 외부의 오싹한 느낌과는 확연히 대조적으로 정리된 나무 벽들과 그것에 걸려있어 분위기를 살려주는 몇 점의 액자들, 그리고 방안을 은은하게 밝혀주는 주황색 램프가 걸려있었다. 가린이 먼저 오두막의 안으로 들어갔고, 가린의 뒤를 따라 슬레진져가 문을 잠그며 가린을 뒤따라 들어갔다. 고요하고 아늑하기 만한 아담한 오두막의 내부의 한쪽 구석에는 잘 정돈되어 있는 새하얀 이불로 덮여있는 나무 침대가 놓여져 있었다. 램프가 올려져 있던 내부의 중심에 놓여진 원탁에는 램프를 중심으로 한 쌍의 차와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가린은 그 밀폐된 내부의 낭만적인 분위기에 감탄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이 곳에 온 목적과 앞으로도 순례해야할 이곳에 대해서는 그때까지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 저..."
여러 가지 의문이 해결되지 않아 슬레진져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려는 가린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슬레진져는 원탁에 앉아 그 열기가 식지 않아 계속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 찻잔의 손잡이를 쥐고선 입을 열었다.
" 이곳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게이트 같은 지점이야."
평소에는 멍하다거나 둔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가린이었지만, 그 상황만큼에서는 슬레진져의 말을 그 누구보다 빠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 예?!...그..그런"
" 이제 가린이 네가 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가린이 네가 보았던 외부의 장면들이 아닌 다른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게
될 거야..."
가린은 그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 될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현재 거하고 있는 오두막 내부를 밀폐하고 있던 문을 열고 밖에 나가야 된다는 것을...그러면 자신이 거하고 있는 차원과는 다른 곳에 와있다는 것을 눈으로 체험하게 된다는 것을...
하지만 가린은 거기까지 만으론 무슨 일을 더 해야 할 지는 정확히 알진 못했다.
" 이 집으로 부터 조금만 내려가면 거대한 저택이 한 채 보일 거야. 그 저택에서 '쥬쥬' 라는 인형을 기다려..'
슬레진져의 지시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자신의 해야 될 일을 정확히 가늠하지 못하던 가린에게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그 순간이었다. 가린은 그녀의 지시에 대한 이해의 확인차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 그 저택에서 쥬쥬라는 인형을 만나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 응, 일단은 그래. 나중에 내가 뒤따라 갈 테니까....우선 문을 열고 나가서 쥬쥬라는 인형을 찾아보렴."
".. 예"
가린이 문을 열고 오두막 밖으로 나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5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에서도 그녀가 가린의 뒷모습을 향해 눈길을 떼지 않았던 것은 가린을 향한 그녀의 관심이 매우 크다는 간접적인 증명 가운데 하나였다. 슬레진져는 홀로 남겨진 오두막 안에서 자신의 손에 들린 찻잔에 담겨져 있던 노란색 차를 한번 음미한 뒤에서야 자신이 가린에게 권하려던 것을 하나 잊어버리고 넘어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아 참, 저 차... 아까워서 어쩌나.. 그냥 내가 마셔야 겠네."
가린의 두발이 닿은 대지는 분명 페타모르와 같은 생명의 땅이었다. 푸른 풀과 원색의 꽃들이 피어오른...생기가 돌고 있는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는, 자신이 보았던 그 숲들과 별단 다르지 않은 곳이었다.
다만 나무들의 위치가 눈에 띄게 바뀌어져 있다는 것을 가린은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에야 알 수 있었던 사실은 오두막에 한번 들어가서 나온 이곳의 공기가 오두막에 들어가기 전의 산속 공기보다 좀더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가린은 발을 옮겼다. 가린은 천천히 어느 정도 여유있게 발을 옮겼지만 오두막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걸음걸이는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고, 숲 속에서 등산로에 접어들고 있었을 즈음에는 자신조차 놀랄 수밖에 없었던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마음에선 알 수 없는 급박함이 자신을 채찍질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산 아래를 향해 미끄러지듯이 달려가고 있을 무렵, 가린의 시선 앞에 저 멀리 길이 세 갈래로 나눠진 모양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세 갈래의 길 중 가린은 멈추지 않고 다리가 움직여 주는 대로 왼쪽 길로 향해 몸을 비틀었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가린은 그 판단이 중요한 순간 자신의 본능을 신뢰하고 있었다.
하아..하아..
몸의 한계도 모른 채 멈추지 않고 뛰어오던 가린이 점차 피로를 느끼며 숨이 거칠게 돌아가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시선을 가리던 우거진 나무가 점차 줄어들면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한 거대한 저택이 들어왔을 때 였다. 그렇게 한참을 뛰어오던 가린은 결국 몸에 힘이 빠져 속도를 줄이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때였다. 가린은 잠시 동안 자신의 거친 숨과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불쾌한 전율을 진정시키고, 자신의 시선이 발견한 거대한 저택의 모양 하나하나를 뜯어보았다. 갑부가 사는 곳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던 거대한 저택은 사실 사실의 사이즈에 맞춰 지워졌기 보다는 작은 요소들의 크기가 너무 컸다. 창의 크기도 일반 창의 크기보다 10배...입구로 보이는 출입문도 약 7배. 창의 비율로 따지자면 그 저택은 3층이었지만, 높이는 대기업 빌딩과 비등되는 길이였다. 그리고 그 저택의 정원이라고 말해야 어울릴 것 마당은 말도 안 되게 넓었다. 그 거대한 규모 때문에 그 거대한 저택이 이런 깊은 산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몸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을 때, 가린은 두다리를 펴서 추리닝에 묻은 흙을 털고 그 저택의 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저택을 발견한 가린은 슬레진져가 말해주었던 '쥬쥬'라는 DOLL을 만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느린 발걸음이었지만, 가린이 그 거대한 저택의 입구 앞에 발을 들어놓기 까지 걸린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그 눈앞에 놓여진 담장과 대문은 그 저택의 규모처럼 그 장벽의 높이 또한 엄청났다. 그러나 그 담장과는 대조적으로 사람의 사이즈에 맞춰진 초인종은 새하얀 종이위의 미세한 점과도 같아 보였다.
".. 응?"
초인종을 누르려고 손가락을 초인종의 끝에 옮기던 가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초인종 위로 쌓인 두터운 먼지 층이었다. 아무래도 사람의 사용이 오랜시간동안 없었던 모양이었다. 가린은 그때 그 먼지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초인종을 눌렀다. 위생을 따지기 전 이미 자신의 손은 흙에 더러워졌기 때문이었다.
꾹....
초인종을 누르는 가린은 차츰 느껴지는 썰렁하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가 없었다. 초인종을 누르게 되면 반드시 뒤따라오는 것...그것이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곧 가린의 그런 느낌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것은 저택의 거대한 출입문이 열려진 순간부터 였다.
쿵쿵쿵쿵쿵쿵!!!!!
"허헉!!"
가린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갑자기 열려진 출입문, 그 문을 통해서 뛰쳐나온 금속재질의 거대한 인형체는 충분히 가린의 갑빠를 오그라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인형체의 등장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가린를 향해 달려옴으로써 자아내는 장면은 가린에게 공포심을 자아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인형체가 만들어내는 그늘이 가린을 삼킨 것은 갑빠가 오그라들대로 오그라든 순간이었다. 그 대문의 높이를 훌쩍 뛰어넘는 신장을 지닌 인형체의 눈빛이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하고 있는 가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 어머, 죄송해요. 이 저택이 세워진 이 후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라서,..너무 놀라고 기뻐서 저도 모르게 주책없이 뛰어왔네요.. 죄송해요...들어오세요/
주책?..인형체의 말을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던 가린은 추책스러운게 아니라 괴기스럽다고 몇 번이고 인형체의 말을 고치며 되새기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 우왓!!"
경제가 발전된 지역의 현대형 도심의 형태중 하나라면, 좁은 땅위에 많은 사람이 밀집될 수 있도록 높은 건물이 수백 개 세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높은 건물이 이루는 인공 숲 사이를 배경으로 시가지전을 벌이는 같은 크기의 두 인형체가 있었다. 그 갑작스럽게 치러지는 두 인형체의 시가지 전으로 인해 도심의 거리를 헤 짓는 사람들의 비명과 함성이 연차 겹쳐들려 오고 있었다. 시가지전에서 밀리는 붉은색과 검은색이 같은 비율로 도장된 인형은 장검 한 자루를 든 흰색의 인형에게 쫓기고 있었다. 뒤쫓기는 인형은 도망가는 동안에는 그 거대한 발로 차를 뭉개거나 사람을 압사시키는 피해를 입히는 반면, 그 로봇을 바짝 추격하는 흰색의 인형은 곡예를 하듯, 대충 내딛는 것 같으면서도 거리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며 피해를 입히지 않고 있었다. 그 두 대의 급박한 움직임으로 인해 도심 바닥의 울림을 동반한 굉음은 멈출 줄을 모르고 천지를 흔들고 있었다.
/ 거머리가 따로 없군!! 쥬쥬!! 진정 나를 파괴시킬 샘이냐?!!/
그 백색의 인형으로부터 추격당하는 인형이 고개를 살며시 비틀며 상당히 긴장된 어투로 외쳤다.
/ 선불까지 받은 의뢰는 확실하게 처리해야 하니깐요!/
/ 쳇!!/
검붉은 인형의 말에 답한 것은 백색의 기체로부터 흘러나온 소녀의 음성이었다. 그 음성이 말이 끝을 맺던 순간, 검붉은 도장의 인형의 뒤를 쫓던 백색의 인형이 방향을 틀어 그 자취를 감추었다. 한창을 도주하던 인형은 그 발을 멈추고 백색의 인형의 행방을 찾느라 몇 번이고 사방을 두리번 거려보았지만, 우뚝 솟은 빌딩 숲에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 안됐군요../
슈악-!!!
그 순간 인형의 시야의 범위를 벋어난 범위의 빌딩 숲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며 그 인형의 동체 앞 바짝 까지 다가온 백색의 인형은 검이 쥐어진 오른손을 궤적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신속하게 휘둘렀다. 인형이 내뱉은 냉담한 어투와 함께 공중위로 검붉은 도장으로 이루어진 로봇의 머리가 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며 공중위로 떠오른 광경이 영화의 슬로우 모션처럼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쿵!
머리가 잘려나간 동체는 더 이상 미동을 보이지 않고 그대로 정지해버렸다. 그 인형을 해치운 백색의 기체가 기름과 붉은 피가 뒤엉킨 점성 있는 액체가 묻은 칼을 닦으며 칼집에 넣은 것은 공중으로 한참을 떠오르던 인형의 머리가 땅의 아스팔트를 조각내며 부딪쳤던 때였다. 소란을 일으키던 로봇의 침묵으로 인해 그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한숨을 동반한 관심과 구경을 정지된 인형과 백색의 인형에게 쏟고 있었다. 그것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후우...그렇게 도망 다니지 말고 이렇게 될 거였으면 빨리 끝내는게 좋았잖아요.../
백색의 인형이 그렇게 그 인형의 머리로부터 등을 돌린 순간..
/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쥬쥬/
백색의 인형을 포함한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 검붉은 인형의 머리로부터 흘러나온 싸늘한 음성이 느껴져 왔다. 그때까지 그 머리를 향해 등을 돌리던 [쥬쥬]라 불리던 백색의 인형은 순간 고개를 돌려 그 머리가 떨어진 지점과 동체가 드러누워 있는 지점을 바라보았다.
/ 앗.! 어..어디 갔지?/
분명 그 인형이 정지된 자리에는 싸늘한 음색의 주인공이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 위다....쥬쥬/
다시 한번 들려온 싸늘했던 음색에 이끌린 쥬쥬의 시선은 땅으로부터 하늘로 옮겨갔다. 쥬쥬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어느새 공중에 떠있는 인형의 동체와 인형의 목이었다. 그 모습이 사람들에겐 공포심과 혐오감을 자아내고 있었지만, 쥬쥬는 대수롭지 않는다는 듯 하늘위에 뜬 두 비행체를 여유 있는 모양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그 모양에서 나온 음색 또한 긴장감 없는 여유가 느껴지고 있었다.
/... 그 머리마저도 4등분 해줘야 좋겠어요?/
/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이제 넌 곧 내 손에 산산 분해 될 테니까...내 비장의 카드를 지금 너의 시선에 똑똑히 각인시켜 주겠다./
/ 그 비장의 카드라는 거...한번 제 눈에 각인해 볼까요./
/...... 흥.........각오해라/
한창 여유를 부리던 쥬쥬의 눈앞에서 그 검붉은 인형의 비장의 카드가 서서히 그 베일에 가려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베일에 가려진 진실은 목이 떨어져 나간 동체에서 일어났다. 그 동체로 부터 굵고 가느다란 금속선이 '한 없이' 터져 나오며 그 주변의 모든 것을 덮쳐나갔다. 마치 괴기한 생물의 촉수와 같은 금속선은 순간 터져 나오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마져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 크윽!/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금속선들 가운데에서 자기를 덮쳐오는 금속선들을 잘라내는데 조금 전의 여유와 머리에게 고정되어있던 시선을 빼앗겼던 쥬쥬는 다시금 시선을 금속선으로부터 머리가 존재하고 있던 공중을 향해 돌렸다.
/ 아..아니!!/
쥬쥬는 확실하게 잘려나간 줄 알았던 머리가 다시금 좀더 거대해지고 멈출 질 모르고 한없이 터져 나오는 금속선으로 인해 심하게 변형된 동체와 붙어 있다는 사실에 기겁을 하였다. 도저히 여유를 챙길 수 없는 쥬쥬를 향해 괴수의 모양이 된 인형은 낮은 톤의 싸늘한 음성으로 외쳤다.
/ 이 금속선은 너의 몸을 포박하고, 너의 몸의 작은 구멍 하나하나에 들어가 몸 내부를 뚫고 지나가 초토화 시킨다!!. 아무리 칼에 있어서 입신의 경지에 오른 너라 할지라도 당해낼 재량은 없을걸!!!/
도저히 인형이 아니라 괴수의 형태라고 말할 수밖에 없던 기체의 자신감 넘치는 어투는 분명 자신을 덮치려는 금속선을 잘라내느라 벅찬 모양이었던 쥬쥬를 조롱하는 것이었다.
.... 쥬쥬가 발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그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그 순간 쥬쥬가 쥐고 있던 검날의 뿌리에서부터 표면을 타고 올라오는 빛이 검 날 전체를 감싸 올랐다.
/ 뭐..뭐지?!!/
빛으로 감싸여진 검을 본 괴기체는 당장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 놀람은 그 광선 검이 자신의 무기인 금속 촉수를 종이를 자르듯 무참히 베어나갈때 이윽고 당혹스러운 느낌으로 점차 변해갔다.
슈욱-! 슈욱-!
/ 아..아닛!!/
촉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던 괴기체는 두 번의 칼놀림으로 주변의 촉수들이 20번 베어지는 광경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그 놀라운 위력의 광선검을 휘두르는 백색의 인형-쥬쥬는 공중에 떠있는 촉수의 근원을 향해 몸을 던져가며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슈욱-!
/ 크윽!!/
분명 공격의 위력이나 범위로썬 쏟아지는 촉수들 쪽이 유리했지만, 그 촉수들은 검날조차 베어버리는 쥬쥬의 광선검앞에 그 위력도 펼치기 전에 한 묶음씩 잘려나가는 것이었다. 괴기체의 형태를 지닌 그가 공격이 무력화되는 것을 확실하게 체험하고 있었을 때, 검광과 함께 쥬쥬의 흰색 동체가 그의 시선바로 앞에 바짝 거리를 좁혀왔다.
/ 비..빌어먹을!!!/
그 초조함과 다급함에 눌려있는 음색이 새어나왔을 때, 쥬쥬의 사방에서 수백가닥의 촉수들이 쥬쥬를 향해 날아들어 왔다.
슈욱-
하지만 그의 저항은 끝내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기진 못하였다. 촉수의 본체를 향한 한번의 칼놀림으로 인해 동체가 대각선으로 , 몸의 축이, 그리고 목이 베어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쿠웅!
그렇게 결정타를 먹인 후 쥬쥬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사람이 한적한 빌딩의 옥상을 중심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 사람의 모습이 닿지 않는 높은 곳의 옥상에서 검날을 둘러싼 빛이 서서히 소멸되어 갈 때에 칼을 허리춤에 달려있던 칼집에 밀어 넣었다. 쥬쥬의 시선 저 멀리에 한점으로 보였던 괴기체는 이미 땅으로 뿌리를 내린 수많은 촉수들로 인해 그 공중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순간에 베어져나갔기 때문에 폭발이 없이 침묵해버렸다.
/ 이걸로 한건 해결... 이제 돌아가야지./
그때였다. 쥬쥬의 시선에 뭔가 특별해 보이는 한 사람이 들어온 것은......
조금전의 소란으로 그 근방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는 것이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이었지만, 분명 쥬쥬의 발아래에는, 인간의 외형을 지닌 거대한
기체였던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자가 있었다.
/ 꺄악!!/
어느새 자신의 발아래 모습을 드러낸 여인의 모습에 쥬쥬는 우선 기겁부터 하였다. 좀 전까지만 해도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던 빌딩의 옥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시간은 오후 8시 30분, 그 빌딩에 자리 잡던 대기업의 본사의 근무시간은 오후 8시까지 였다. 도심의 불빛조차 닿지 않는 빌딩의 옥상....쥬쥬는 자신의 발아래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여자에게서 오싹한 느낌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 오..오지마../
자신보다 몇 배 작은 여자로 부터 뒷걸음질치는 쥬쥬의 모습은 우습다 못해 처절해보이기까지 했다.
".... 내가 그렇게 무서워?..; 나 귀신 아니야.;;"
어둠의 베일에 가려져 있던 여자의 말은 의심할 것도 없이 슬레진져의 음색이었다. 슬레진져 역시 쥬쥬의 예상외의 행동에 쥬쥬와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웠다.
/ 저..정말 귀신 아닌 거죠?/
" 내가 어딜 봐서 귀신처럼 보여?"
그녀는 우습다는 음색으로 말했지만 분명 어둠에 가려진 슬레진져의 모습에는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요소는 하나도 빠짐없이 갖추고 있었다. 문제는 그녀의 매력포인트였던 검은색 추리닝이 어둠과 더욱 잘 어울렸다는 문제에 있었다.
/... 그렇게 말씀하셔도 귀신처럼 보인다는.../
"........ 아무튼.;; 너....검에 있어선 입신의 경지에 오른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적인 신세대 검사 [쥬쥬]
맞지?"
어둠에 가려져 정확한 형상이 뚜렷하지 않았던 어둠 속의 슬레진져는 자신이 만난 백색의 인형에게 쥬쥬의 신변을 확인하고 있었다.
/... 예, 그렇게 불리우긴 해요../
쥬쥬는 그녀의 확인질문에 순응하였다. 이로써 슬레진져는 자신의 눈앞에 존재하고 있는 백색의 기체가 쥬쥬라는 것을 확인했는지, 그 다음 말을 내뱉었다.
".. 뭐 우리는 서로 초면이야. 지금 언니랑 군더더기 없이 단도직입적인 이야기를 좀 할까? 바레시카 가문의 독녀 [파인].."
그녀의 그 말은 제 3자에게 있어서 그저 별 특색 없는 대화의 일반적인 말이었지만, 쥬쥬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여러 의문을 갖게 할 수 밖에 없었던 말이었다.
/.... 어..어떻게 아무도 모르는 내 족보와 이름을.../
그때부터 쥬쥬는 확실하게 자신의 시선 앞에 인기척 없이 모습을 드러낸 여자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역시나......귀신??/
".......... 절대 아니야.;;;"
그렇게 한 인형과 한 사람의 대면이 말들어가는 타협들은 어둠이 삼켜버린 도심의 높은 곳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져가고 있었다.
[ 노블레스 공화국]의 [치안관리 중앙 통제실]이라 불리우는 거대한 규모의 홀은 언제나 전자기계를 만지고 각 부분의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과 스크린에 떠오르는 각종 수치들을 보고하는 오퍼레이터들의 음성으로 항상 분주하고 뭔가 꽉 찬 느낌만을 전해준다. 그 통제실의 작전총괄을 담당하는 작전팀장은 여러 각처의 부장들과 함께 일급비밀로 치부되는 내용을 다루는 회의를 은밀한 공간에서 진행 중에 있었다.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되고 있는 벽의 한쪽에 차지한 거대한 스크린에서는, 쥬쥬와 괴기체의 전투가 기록된 영상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영상을 주목하던 참석자들 가운데에서 그 회의를 주도하던 작전실장이 입을 열어 냉담한 음색으로 말했다.
" 보시다시피 쥬쥬가 우리의 의뢰를 처리했습니다."
그의 말에 답하듯, 또 다른 참석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역시 침착하고 냉담한 말투였다. 그 회의 가운데에서는 참석자들 서로가 감정의 트러블을 억제하기 위해 애써 냉정한 어투를 고집하고 있었다.
" 그래서 [쟈필]의 파손을 확인 후, 쥬쥬의 계좌로 금액을 입금했습니다. 총예산의 15%가량이 사용되었습니다."
그 때, 의탁의 맨 끝에 있던 참석자들 가운데 한명이었던 중년의 사내가 그 말에 무언가를 꼬집으려는 듯한 말투를 내뱉었다.
"15% 라......터무니없이 소요된 금액이 아닙니까?"
그의 말에는 그 회의에 참석했던 이들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고,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얼굴위로 안색을 띄우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 안색을 띄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하듯, 참석자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그 회의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듯이 침착하고 조용히 말했다.
" 아아..하지만, [쟈필]는 국제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범죄집단의 고위급 거물입니다...그 정도 금액으로 녀석을 잡은 거라면 오히려 이쪽에선 이득이겠지...요..."
쥬쥬를 고용했던 그들이 나눈 회의는 쥬쥬가 처치한 [쟈필]의 건과, 쥬쥬에게 소비된 정부예산을 보고하는 내용으로 흘러갔다.
그런 그들의 회의처럼 [쟈필]이 속해있던 국제적인 범죄 집단 [스네이크 아이즈]에서 역시 조직의 우두머리격 이었던 5명이 위로부터 짙게 깔린 어둠 속의 비춰오는 불빛아래 오각형의 탁자를 중심으로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주위로는 검은 제복을 입은, 그들의 경호부하로 보이는 자들이 넓게 원을 그리며 위압적인 기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 하아....[쥬쥬]녀석..결국 쟈필을 저세상으로 보내버리고 말았군.."
그 5명 가운데에서 고약한 인상을 지닌 한 중년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는 왼손에 들려있는 담배를 입으로 한번 빨아드린 다음 재떨이에 담배의 필터조차 부셔질 듯 뭉게버렸다.
" 예전에 한번 크게 다친 적이 있어서 기계로 뇌를 이식한 후에는 조직 내 서열 상위 급의 조직원을 잃었어...우리가 큰 문제에 직면한 것은 사실이고 쟈필의 복수를 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숙명이지만........상대는 쟈필을 가볍게 꺾은 녀석이야...계집애라는 사실이 기가 막힐 뿐이지만..."
광분상태로 재떨이의 중심을 담배로 뭉게던 그를 힐끔 쳐다보던 그가 입을 열어 핵심을 찌르르는 말을 내뱉었을 때, 그 식탁을 둘러싸고 있던 발언자를 포함한 4인은 자신들의 안색에 떠오르는 분함을 애써 숨기고 있었다. 다만 그 4인과 대조적으로 입가에 미소를 띄우는 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의 의미에 담긴 베일은 그가 내뱉는 말로써 벗겨져 나갔다.
"... 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이 세계에선 최강의 인파이터가 5정도 있어..그중 하나가 우리의 관심을 받고 있는 [입신의 경지에 오른,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신세대 검사 쥬쥬]야...하지만 쥬쥬는 나머지에 비하면 나이도 어리고 실력이 뒤쳐진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
그의 말에 흐린 빛이 감돌던 그들의 안색과 눈빛이 순간 그에게로 집중되어갔다. 나머지 4인방은 모두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 우리에게 유리한 점이 있다면 말이야....이 인파이터 다섯 모두가.....일정한 소속을 두지 않고
돈을 벌기위해 싸우는 '해결사'라는 거야..."
거기까지 흘러나온 말을 듣고서야 모두들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었다.
" 아아...결국 우리도 이쪽에서 한명을 고용해서....?"
"그 건방진 계집애를 치면 된다는 말이로군..."
" 뭐...그래, 다만 상대가 [쥬쥬]인 만큼 우리 쪽에서 준비해야 하는 자금 또한 많겠지만..."
..........
"와...진짜 크다.."
가린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저택의 내부를 빙 둘러보고 있었다. 규모가 워낙 커서..눈동자를 굴리는 것만으로는 내부를 전부 흩어보는 것은 불가능 했다. 고개를 돌리고 몸을 움직여야 했다. 손을 뻗어 점프하면 닿을 정도의 높이였던 가린의 집에 비하면, 그곳은 운동경기를 치루는 거대한 강당 급 수준이었다. 그래도 가린의 눈앞에서 집안일을 도맡고 있던 [미미]의 기준으로 보면 자신의 사이즈에 걸맞는 가정집임에는 분명하였다.
/ 저기 식탁에 앉아서 차라도 드세요./
사람의 형상을 지닌 기계라고 보기엔 금속으로 이루어진 미미의 얼굴이 보여주는 다양한 표정의 느낌과 재현성은 사람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가린은 그런 미미의 표정과 어투에 못 이겨, 자신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높이를 자랑하던 티테이블의 기둥을 부여잡고 힘들게 올라가고 있었다.
" 으헥!"
집 청소에 집중하느라 가린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알 턱이 없던 미미의 시선 뒤, 애써 티테이블 위로 올라간 가린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목욕탕 욕조수준의 찻잔에 담겨진 많은 양의 차였다. 그 믿기지 않는 사이즈에 가린은 기겁부터 하고 있었다. 그렇게 가린이 탁자위의 거대한 차에 압도되어 있을 때, 가린이 들어온 바 있던 저택의 거대한 현관문이 열려졌다.
" 으응?"
당연 가린의 시선은 갑자기 열린 현관문을 향했고, 한창 청소에 열중하고 있던 미미역시 하던 일을 제쳐두고 현관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 언니~ 다녀오셨어요?/
/ 으응....집 잘보고 있었어? 미미야?/
/ 예....손님이 오셨는데요..../
/ 손님이라고?...우리 집에 찾아올 사람은 없../
현관에서 부터 마중 나온 미미와 함께 집안으로 걸어 나오는 쥬쥬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티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한 소년-가린의 모습이었다. 순간 가린과 시선이 마주친 쥬쥬는 하던 말을 도중에 끊어버린 것이었다.
가린이 입고 있던 검붉은 추리닝....쥬쥬는 그 짧은 순간동안에 빌딩의 옥상에서 조우하게 된 슬레진져의 말을 하나하나씩 되새겨가고 있었다.
.....
... 그러니까, 제가 언니를 따라가게 될 거란 말인가요?
' 그래, 믿기진 않겠지만... 내일 오전 중에는 내가 하는 말이 이루어 질 거야.'
.....
' 그리고 네의 집에 내가 보낸 나와 같은 매력 포인트를 지닌 소년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 매.매력포인트요?;;
' 응.'
....
/;;;/
그때까지만 해도 베일에 가려져 있던 매력포인트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쥬쥬의 안색은 순간 멍해져갔다. 가린에 비해 10배 가까이 큰 동체의 쥬쥬는 발을 몇 걸음 옮겨 티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가린의 몸을 제 손으로 덮썩 잡아 가까운 거리에서 유심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쥬쥬는 그저 입을 굳게 다문 채 가린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손에 들려있는 가린의 표정은 창백하기만 했다.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자신을 손으로 잡아 올린 인형의 행동에 당황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그 상황 가운데에서도 가린은 알아야할 건 알아야 했다.
" 호..혹시..쥬쥬씨...맞나요?"
가린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가린을 쥐고 있던 쥬쥬는 가린을 다시 티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쌀쌀맞은 어투로 답했다.
/ 말 놓아도 돼, 너랑 나는 동갑이니까.../
" 으에에??"
쥬쥬의 답변에 가린의 얼굴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드러내듯, 서서히 놀란 표정을 드리워 냈다.
/ 그럼, 언니 식사준비 할게요./
그 둘이 쌀쌀함과 당혹감의 대면식을 가지고 있을 때,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미미의 음성이 들려왔다.
/ 응. 나 요번에 한바탕 전투를 수행해서 힘이 없으니까. 기름기 많은 음식 위주로 만들어 줘~ 알았지?"
/ 예~언니/
서로 같은 크기의 인형 두 대가 만들어 내는 가족 같은 분위기는 따뜻하기만 했다. 그랬기에, 그들보다 체구가 작은 가린은 그 가족외부의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가릴 수 없었다. 그런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기에 가린은 쌀쌀맞은 표정으로 자신을 대하는 쥬쥬의 반응이 당연한 것이다 라며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쥬쥬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남자아이에 대한 넘쳐나는 호기심을 도저히 짓누르기에 애를 쓰며 겨우 냉정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가 바로 쌀쌀맞은 태도였다. 인형의 기체였던 쥬쥬였지만 껍데기와는 달리 그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다시금 쥬쥬는 머릿속에 빌딩의 옥상에서 대면했던 슬레진져와 대화를 나누던 그때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
...... 매..매력포인트요?;;
' 응.'
아..알겠어요. 그런데 그 소년이 저에게 무슨 목적이 있어서..?
' 목적?...뭐..특별한 목적 같은 건 없고...앞으로 인생의 동반자가 될 사람과는 미리 만나두는게 좋지 않겠어?'
???
'... 이해가 안 돼?? 그러니까 말이야....너는 그 소년의 아내가 될 거야'
예에?!!!!
' 오늘 당장 만나보면 별로겠지만, 나중에 가면 네가 좋아서 매달리게 될 거야.'
........
/...../
"...."
그렇게 한대의 인형과 한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마주본 채 침묵 속에 파묻혀 있었다. 쥬쥬는 정지라도 한 듯 포커페이스로 가린을 바라보았고, 가린은 수줍음과 당혹감에 짓눌려 고개를 숙인상태에서 눈을 위로 힐끔거리며 쥬쥬를 바라보았다. 쥬쥬는 그 가운데에서도 생각은 있었는지, 자신의 사이즈에 맞춰 설계된 거대한 소파에 앉은 후 티테이블 위에 앉아있었던 가린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몰론 그럴 때마다 가린이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제차 밀려오고 있었다.
/....../
쥬쥬는 여전히 포커페이스로 자신의 호기심을 그 대상이었던 가린을 그 손으로 가린을 장난감 삼아 몸을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자기의 호기심을 해소하고 있었다. 쥬쥬에게는 호기심 탐구의 시간이....가린에게는 당혹감의 향연의 연속이 끊어진 것은 그 순간 들려온 미미의 음성이었다.
/ 언니~, 식사 준비 다 됐어요~/
.........
하나의 거대한 인형이 나무가 숲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한 공단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인형의 이름은 [도클다이], 그
세계에서 입신의 경지에 오른 인파이터 다섯 중 도끼를 주무기로 사용하는 인파이터 였다. 그런 그가 내전이 빈번한 개발도상국의 정부로부터
반군제거의 의뢰를 받고 반군의 핵심부인 폐공단을 찾아온 것이었다. 도클다이가 진입한 폐공단에 거하고 있던 반군들과 그들이 보유한 메카들은
그의 방문을 총알과 돌진으로써 반기는 것이었다.
투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반군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쏘는 총알은 하나같이 도클다이의 강철육체 앞에선 무력해졌다.
투웅-!!!!
그때 그들은 총으로썬 그를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대전차 로켓포를 그를 향해 발사하였다.
콰광!!!
대전차포가 도클다이에게로 명중했을 때, 강열한 폭음과 함께 불과 먼지가 뒤섞인 폭발이 일어났다. 그 순간 가운데 많은 이들이 도클다이의 파괴를 예상하고 벌써부터 전율을 느끼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 버러지들../
하지만 그들의 그런 희망은 물에 씻겨나가는 거품처럼 폭발로 인해 발생한 먼지 층이 진정되었을 때 모습을 드러낸 도클다이의 멀쩡함으로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최후의 반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슈우우우우우-!!!!
도클다이의 주변으로 도클다이의 크기와 비등한 국방색의 5대의 인형이 사방에서 넓직한 날을 가진 검을 쥐고 돌진해오고 있었다.
/ 훗...무기만 낭비하는 짓일 뿐이다../
도클다이는 자신의 사방으로 부터 접근해오는 인형으로 인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거리를 좁혀오는 5대중 하나를 향해 뛰쳐나갔다. 반군의 인형 5대 모두 사람이 타고 있는 물건들이라 도클다이가 정면에서 뛰어오는 위압적인 장면을 바라보는 조종사는 기세가 꺾여 속도를 늦추고 도클다이와의 접근 전을 위해 자세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그 조종사의 판단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빗겨나가고 말았다.
쿵!!
거리가 현저히 좁혀진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쉬를 멈추지 않았던 도클다이는 결국 그 인형 앞에 다가왔을 때에도 러쉬를 중지치 않고 인형의 헤드를 오른손으로 낚아채는 것이었다. 그런 후에도 러쉬를 멈추지 않았던 도클````다이였기에, 그의 손에 붙잡힌 인형은 땅에 질질 끌려가는 처참함을 무기를 쥔 사람들과 나머지 4대의 인형과 그 조종사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자기의 동료가 처참하게 당하는 모습에도 굳어져버린 그들이었지만, 무엇보다 한손으로 가볍게 자신의 크기와 비등한 로봇을 제압하는 도클다이의 출력에 질려가고 있었다.
/ 마무리다!!/
도클다이는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몸을 한바퀴 돌려 힘을 얻은 후 자신의 오른손에 쥐고 있던 인형을 공중 높이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뿌직!!!
무거운 동체가 공중으로 높이 날아갔을 때, 도클다이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것은 인형의 헤드뿐이었다. 그 헤드의 목은 강제로 뽑혀져 나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너덜너덜한 전선과 조종사의 뽑혀져 나간 내장이 처참하게 내밀고 있었다.
/ 조금만 기다려, 너희들 다 이 녀석 처럼 저세상으로 보내줄 테니까../
도클다이의 말에 모두들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결국 그것은 공포라는 하늘아래 삼켜져버리는 것이었다. 그 반군의 거처였던 폐공단이 순식간에 피에 얼룩지고, 폭음과 불길 그리고 맑은 공기대신, 쾌쾌한 연기가 자욱하기까지 거린 시간은 채 5분조차 되지 않았다. 도클다이의 오른손에 쥔 기다란 도끼는 수많은 생명과 기물을 파괴했다는 증명을 해주듯 피와 기름때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소수의 반군 몇 사람이 폐공단 밖으로 도망을 갔지만 도클다이는 그들의 처리를 나중으로 미뤄놓고 폐공단에 숨어 있는 반군들의 잔처리를 수행하고 있었다. 공장건물의 무너진 파편을 파헤치다보면 여지없이 극심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숨이 붙어있는 반군 청년들이 더러 있었다. 도클다이는 그러한 생존자에겐 여지없이 도끼세례를 날려 끔찍한 장면을 연출해 냈다. 그렇게 10분가량을 확인작업에 투자한 도클다이가 도주반군의 추격을 하려했을 순간이었다.
" 아아..."
가느다란 소녀의 음성이 자신이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파편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느껴져 왔다.
/......./
반군 생존자들의 처리는 확실해 해두어야 했기 때문에 도클다이는 여지없이 그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는 파편으로 이루어진 무덤을 헤쳐 나갔다.
/......./
" 아...아아..."
도클다이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민망함을 드러내듯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소녀였다. 채 다 자라지 않은 빈약한 몸을 드러낸 소녀의 눈동자에 가득차 있는 것은 겁으로 질려버렸기에 차오른 두려움만은 아니었다. 도클다이는 그 소녀의 눈물로 범벅된 눈동자로 부터 미묘한 색(色)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설마/
도클다이의 추측은 그 주변의 파편 하나가 걷어지자 맞아떨어졌다. 소녀의 주변에는...소녀와 마찬가지로 벌거벋은 채로 파편에 찢겨져 죽은 남자의 사체가 드러누워 있었다.
/....../
그때 철저한 킬링머신이었던 도클다이는 그 소녀를 보자 판단이 흐릿해짐과 감정의 흔들림을 느꼈다. 도클다이의 정신을 뒤흔들고 있는 소녀는 반군내에서 창기로써 취급받는 일원이었음이 분명했다. 어린창기.....그것은 과거 도클다이에게는 추억과 상처를 공유하고 있는...
/ 크아아아아아아!!!!/
기억의 저편으로부터 고통이 밀려왔을 때, 도클다이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짜며 괴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기의 폭발......그 소녀의 시선에 내비치는 것은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도끼의 날이었다...
사방으로 퍼져나간 소녀의 붉은 피는 도끼와 도클다이의 얼굴에도 튀겨나갔다. 그 폐공단을 흔적도 남지 않게 불태워 버리고 싶었던 도클다이였지만, 그 나라의 정부에서 파견된 정규군이 그 자리를 점령하는 바람에 그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정규군의 관계자로 보이는 남 남자가 폐공단의 구석에서 몸을 수그린 채 상념에 잠겨있는 도클다이의 근처에 다가왔다.
" 이정도면 완벽해...덕분에 우리 정부는 눈에 가시거리 같은 반군이 없어짐으로 해서 더 많은 정책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소. 당신의 구좌로부터 돈을 입금했으니 확인해 보시오.."
그 차가운 말투를 내뱉은 후 남자는 도클다이로 부터 등을 돌렸다.
그렇게 의뢰를 차질 없이 끝마친 도클다이였지만, 정작 도클다이는 그 의뢰를 치름으로 과거의 기억에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페타모르로 부터 가장 가까운 [시니볼]의 우주..그 생명의 땅위에 20년전 [신속의 용자]라 불리던 [크레스피]는 자신이 버린 도클다이의 옛 이름이었다. 그리고 크레스피 였던 도클다이에게 있어서 친구이자, 잠정적인 대장이 되어주었던 사람은......많은 이들의 추악함으로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창기가 되어버린 소녀였다......
/........ 젠장../
도클다이는 더 이상 그 아픈 과거를 되새기지 않기로 했다. 검을 버리고 도끼를 든 그때의 기억과 소녀의 최후와 함께한 뼈아픈 기억들의 회상을...
/... 정신 차려..도클다이...더 이상 과거의 환영에 사로잡히면 안 돼.../
그가 극심한 고뇌로 부터 달아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에 치쳐 있을 때...그의 몸속에 내장되어 있는 전화 기능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 여보세요../
'..... 당신이 그 유명한 도클다이 인가??'
/.... 그렇소만.../
' 의뢰가 있어서 전화를 했네...'
/ 뭐, 나한테 걸려오는 전화가 전부 의뢰관련이지...말해 보시오...원하는 게 무엇인지/
'....... 쥬쥬를 없애줄 수 있겠나?'
/.................................. 좀 돈을 많이 불려야 겠는데..../
' 쥬쥬만 없애줄 수 있다면, 부르는데로 지불하지'
................
시계 바늘은 대략 밤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어둠이 깔린 저택안의 유일한 빛은 티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램프...가린의 관점에선 거대한
전등만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린은 거대한 인형이었던 쥬쥬의 장남감이었다. 그렇게 식사시간을 제외하곤 쥬쥬에게 붙잡힌
가린은 자포자기함에 젖어버린 표정이었다.
/... 이름이 뭐니?/
그때 가린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자신을 갖고 노는 동안 침묵을 지키던 인형이 드디어 입을 연 것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의심이 앞선 것은 사실이었다. 가린은 자신이 헛것을 들은것인줄 착각했기에, 입을 아끼고 있었다. 물론 연차 쥬쥬의 물음이 가린의 귓가에 들려왔다.
/.... 이름이 어떻게 되냐구.../
그제서야 가린은 쥬쥬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 마가린....그냥 가린이라고 해.."
그제서야 쥬쥬는 자기의 손으로 가지고 놀던 가린을 티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선 다시 가린을 들어 소파에 앉아있는 자신의 가지런히 모은 허벅지 위에 올려 놓은 후 고개를 약간 내려 허벅지 위에 올려진 가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어떻게 내 집에 찾아왔어?/
쥬쥬가 가린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이름 외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은 쥬쥬와 그날 처음 만난 가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슬레진져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쥬쥬에게 있어서 가린에 대한 관심은 가린보다 높을 수밖에 없었다.
" 아니..그게.. 처음부터 설명하기가 좀 어려워서.;; 그.그냥 말하자면...누군가의 심부름 때문에
왔는데.."
/ 심부름?..무슨 심부름인데??/
" 그..그게.......구지 말하자면, 너를 만나보라는 심부름이었어."
/....../
자신이 그 집에 온 목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그래서 멍해보였던 가린을 시선에 두고, 쥬쥬는 다시금 슬레진져와 조우했던 그날 밤 8시 30분경의 기억을 회상하였다...
"... 이해가 안 돼?? 그러니까 말이야....너는 미래에 그 소년의 아내가 될 거야"
예에?!!!!
" 오늘 당장 만나보면 별로겠지만, 나중에 가면 네가 좋아서 매달리게 될 거야."
.... 도대체 어떤 아이 길래 제가 왜 좋아하게 된다는 거죠?..더군다나....결혼까지 하게 된다니..말도 안 돼요..
그 말로 인해 둘 사이에 침묵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한번 싸늘한 바람이 두 둘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 차갑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슬레진져가 입을 열었다.
" 그건, 앞으로 있을 일들을 경험할수록 깨닫게 될 거야."
/...../
" 그리고....쥬쥬, 아니, 파인 바레시카...너의 영혼을 언제까지 그 기계로 이루어진 인형에 의지하며 살순 없지 않니?"
/... 예?/
"..... 나는 네가 식물인간이 되기 훨씬 전부터 너를 알고 있었어..."
/?!!!!/
쥬쥬는 슬레진져의 말로 인해 충격을 금치 못했다. 분명 슬레진져는 쥬쥬의 부모 외에는 모르는 그녀의 상태를 정확하게 꼬집어 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부터였다.....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쥬쥬는 그것을 간파했기에 앞서 그녀에게 물었다.
/... 저에게 원하는 게...뭐죠?/
" 원하는 거? 특별히 없어...그저 내가 세운 시진패령왕에게 걸맞은 짝을 미리 소개시켜주려는 것뿐이야.."
쥬쥬에게 있어서 미스터리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그녀-슬레진져가 등을 돌리려는 광경을...쥬쥬는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쥬쥬가 그녀에게 바라는 것...자신의 소원을 그녀가 이루어 줄 것 같다는 예감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 저....!! 원하는 게 있어요...!!/
쥬쥬가 체 다음 말을 이어가기도 전, 그 말을 끊으며 쥬쥬의 생각을...슬레진져는 앞서 읽어나가고 있었다.
" 알고 있어... 인간의 몸으로 살고 싶다는 거지?. 앞으로 몇 년 후...네가 그 아이와 결혼하게 될 즈음엔 너의 그 소원은 이루어져 있을 거야."
그렇게...슬레진져는 옥상의 문을 열고 자취를 감췄다. 그녀가 사라지며 남긴 자취는....슬레진져를 향해 던지는 쥬쥬의 작은 음성이었다.
/.... 왜..하필이면 저 인가요..../
"..... 무슨 생각하고 있어?"
쥬쥬는 어느새 자신의 허벅지 위의 가린이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 그..그냥.../
그렇게 가린의 물음에 얼버무리는 쥬쥬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 소년을 바라보는 그 순간까지도,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11년이란 세월동안 쌓여진 사람에 대한 이질감을 이제는 무너트려야 한다는 간절한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쥬쥬는 빌딩의 높은 곳에서 만난 슬레진져의 말을 의심의 얕은 바다 가운데에서도 신뢰하며……
미래의 반려자가 될 소년에게 자신이 숨겨왔던 비밀을 드러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야만……소년에게 느끼는 이질감이 서서히 부셔져 나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내가 무서워 보이니?/
"... 으응?...; 소.솔직히 말하면..그래."
가린은 그런 질문을 던지는 쥬쥬의 얼굴의 표정이 침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비록 쥬쥬의 얼굴은 금속으로 이루어진 인형의 얼굴이었지만...가린은 정확하게 그 얼굴의 표정만으로 쥬쥬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그랬기에....가린은 서둘러서 입을 열었다.
".. 으응? 미..미안해, 내가 생각 없이 말해서.;"
가린은 그 말을 한 후 죄책감이 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뒤통수를 긁고 있었다.
/ 아니야. 10년 만에 사람이랑 가까이서 대화해보는 거라서...그냥 서러워서 슬퍼 보이는 거뿐이야.....다들 나보면 무서워 하는 거 당연한거니까 너무 기죽지마.../
쥬쥬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검지로 허벅지 위에 놓여진 가린의 푹 숙인 고개를 들어올렸다. 마치 키 차이가 나는 남녀가 입맞춤을 나누기 전, 남자의 손이 여자의 턱밑에 손을 가져다 올리는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가린의 시선은 다시 알 수 없는 각오에 찬 쥬쥬의 얼굴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 이건....내 돌아가신 부모님 외에 본 사람이 없는 나의 비밀이야.../
"...... 비밀 이라니?? 뭐가?"
/... 조금 있으면 알게 돼..나는 너한테 내 비밀을 보여주려고../
가린은 당장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보다 비밀이라는 쥬쥬의 말이 거슬린 것이다.
"... 왜...너의 비밀을 나한테 보여주려는 거야?..."
자신의 비밀을 소년에게 보여주려는 쥬쥬에게 가린의 그 말은 쥬쥬의 생각을 들춰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비수 같은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쥬쥬는 순간을 주저하다 힘겹게 말을 이어감으로 가린의 비수에 응답하였다.
/ 그..그건....내가 너와........너랑 친해지고 싶기 때문이야.../
그리고.....가린의 눈앞에 쥬쥬의 비밀이...쥬쥬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
그것을...금속이라는 베일에 가려져 있던 쥬쥬의 비밀이라는 것을 바라본 가린의 표정이 그때처럼 진지해진 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어때? 이제 내가 사람으로 느껴지겠지?../
쥬쥬의 가슴 부분의 장갑이 양쪽으로 쪼개지며 열려진 후 드러낸 그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는 내부동력장치들과 그 장치들 가운데 자리 잡은 문제의 유리관이었다.
"... 사..사람이.."
/ 바로,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나의 굳어버린 몸이야../
그 유리관 내부에 빛이 들어오기 전까지 가린은 그 안에 사람이 들어있다는 것만 대략 알 수 있었을 뿐,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의 형태는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런 가린이 유리관안에 들어있는 사람의 형태를 뚜렷하게 보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리관안에 반사적으로 불이 들어옴에 따라 그 모든 실체가 가린의 눈앞에 들어오게 되었다.
쥬쥬의 가슴에 숨겨진 유리관 안에는 가린과 또래로 짐작되는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생기는 돌지만, 초점이
맞지 않는 붉은색의 눈동자로 가린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유리관안에 채워진 투명한 액체들 사이를 헤 짓는 소녀의 붉은색의 옷감을 이루고
있는 실크처럼 선명한 붉은색을 띄며 소녀의 알몸을 감싸며 돌고 있었다. 빛에 타지 않은 새 하얀 피부, 부드러운 느낌의 굴곡을 지닌 바디라인.........이
모든 형상을 지닌,
그 육체가 마네킹처럼 굳어져버린 소녀의 모습이 가린의 시선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왜...왜 이렇게 된거니..."
가린은 겨우 유리관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쥬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가린은 분명 섬뜩한 전율을 느끼고 있음에 분명했다. 다만 그 전율과 같이, 가린의 표정에선 쥬쥬를 인형이 아닌...사람으로써 느끼고 있음을 쥬쥬는 희박한 확신을 안고 있었다.
/ 나는 11년 전에 부터 두뇌만 살아있는 식물인간이 되었어. 몸이 내 생각대로 전혀 움직여주지 않으니까, 기계에 의존할 수밖에../
그렇게 힘없는 음색으로..쥬쥬의 차가운 느낌의 금속 입술은 가린을 향해 흘러내려왔다.
" 그..그런..."
가린의 음색도 쥬쥬와 마찬가지로 힘은 없었지만, 서서히 쥬쥬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 갔다. 단순한 기계인형에서, 사람...자신의 또래로써....여자로써.....가린의 두 눈에 투영된 쥬쥬는 자신의 가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 쥬쥬의 입에서...울분어린 음색이 흘러나왔다
/ 내 가슴속에 있는 나의 실체가 11년 전에는 꼬마였는데....점점 자라나고 있어. 내속의 나는 이렇게 자라나고 있는데....내 모든 감각은 이 내 진짜 몸에서 있어야 느껴져야 하는데...../
그때..쥬쥬의 허벅지 위에 올려져 있던 가린은 느끼고 있었다. 바닥으로 부터 전해져오는 미묘한 떨림을...쥬쥬는 가린에게 그렇게 말한 후, 침묵을 지킨 채 특별한 미동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쥬쥬의 몸이 떨고 있음은 분명했다. 굳게 다문 입술과 그늘진 얼굴, 램프의 빛과 유리관안에서 비춰지는 두개의 불빛이 그 어눌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었다.
"...... 울고 있구나.."
가린은 쥬쥬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분명 쥬쥬의 기계인형이 지닌 얼굴은 메말라 있었지만...........파인 바레시카가 흘리는 눈물을 가린은 영혼으로서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 둘의 대면을 어둠속에 숨어 있던 [미미]는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언니../
..................
그렇게 그 저택에서 가린은 낯선 땅의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어젯밤의 쥬쥬 와의 그 일만이 머릿속에서 머물 뿐...거대한 소파위에
쥬쥬는 그 상태에서 졸고 있었고, 가린은 그런 쥬쥬의 허벅지에 누워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가린의 한손위에 가지런히
올라간 쥬쥬의 손-마치 그것은 잠든 애완동물을 다리위에 걸쳐놓은 여인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아침이 됐다. 그 저택 안의 셋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는 미미는 쥬쥬와 가린...두 '사람'을 깨우지 않고 조용히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피로에 지친 두 사람을 가만히 두어야 갰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미미역시 어젯밤의 기억들이 그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딩동..
그때였다. 저택 안을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그것은 가린이 누른 초인종 소리에 이어 저택 안에 울려 퍼진...저택이 세워진 이래 두 번째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였다.
/ 어머...또 누가 이 집에 왔을까?/
미미는 부엌의 식기를 황급히 정리하고, 저택의 문을 열고 대문을 향해 뛰어갔다.
쿵쿵쿵쿵..!!
미미가 뛸 때 땅이 요란하게 울렸다. 다만 그것을 미미는 신경 쓰지 않는다. 미미의 온 신경이 집중된 것은 바로 대문 넘어 보이는 한 거대한 기계인형의 형상이었다.
/ 누굴까?../
미미가 그렇게 대문에 도달했을 때..미미는 자신보다 약간 큰 거대한 인형을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 누구시죠? 무슨 용건으로 이 집에 오셨나요?../
미미는 살기가 넘치는 기계인형의 얼굴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미미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인형은 그런 질문을 던진 미미에게 차가운 어투로 답했을 뿐이었다.
/ 나는..도클다이..쥬쥬를 파괴하러 왔다./
'''''''''''
"으응?..."
눈을 비비며 일어난 가린은, 주변을 둘러본 후에야 자신이 거대한 침대위에 올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쥬쥬는 어디로 갔..."
침대로 부터 몸을 일으킨 가린은 주변을 한참 둘러보다 우연히 창 밖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 무얼 하려는 걸까...?"
창 밖 바로 보이는 드넓은 정원에서...쥬쥬와 낯선 기계인형이 서로 마주보며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그리고 미미는, 한쪽 구석에서 제 몸의 크기에 맞는 식칼을 든 채 겁에 질린 모습으로 그 둘의 대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
/......../
쥬쥬의 입술과, 낯선 기계인형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가린의 저택 안으로까지 그들의 음성이 도달되지 못했다. 가린은 그들의 대화를 듣기 위해서 창문을 열려 했지만...그 거대한 창문은 인간의 힘으로썬 열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잘 잤니?"
그때 였다. 가린의 등 뒤로 낯익은 여성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가린은 그 사람을 떠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 누..누나!"
" 어땠어? 어젯밤은 즐겁게 보냈니??"
가린의 등 뒤로...어느새 슬레진져가 나타냈던 것이었다.
쥬쥬는 도클다이와 정원에서 대면 중에 있었다. 도클다이의 눈빛은 차가웠고, 쥬쥬역시 그에 지지 않기 위해 애써 강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도클다이에게 압도되어가고 있었다.
/... 놀라운데요...아저씨, 전함급 기체를 주로 사냥한다는 '도클다이'씨가 저를 처지하기 위해서 오셨다니../
/ 너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너도 나를 없애달라는 의뢰를 받았으면 주저 없이 나를 찾아 왔을걸.../
/ 하긴요...저 역시 승부욕은 있으니까../
/... 그래서 네가 마음에 든다...'쥬쥬'/
그렇게 도클다이는 자신이 들고 온 기다란 하드 케이스의 껍질을 부수고, 자신의 주력무기인 도끼를 꺼내들었다. 그 도끼의 은붉은 날이 말해주듯, 도클다이의 도끼는 그가 지닌 분노와 공포, 그가 걸어온 피와 파괴의 역사가 물들어져 있었다.
그 도끼의 섬뜩한 모습을 보자 쥬쥬는 더욱 압도되어 갔다. 하지만 그런 무기라면 쥬쥬에게도 있었다. 그 20여년 전 ...시니볼의 생명의 땅에 한번 절망의 기운이 덮쳐왔을 때 세상을 구한 [신속의 용자]가 사용했던 전설의 검이...
쥬쥬는 자신이 왼손에 들고 있던 검의 전신, 검의 손잡이 부분을 잡아 칼집으로부터 그 기다랗고 날카로운 검을 뽑아 도클다이를 향해 겨누었다. 그 검을 보자 당장 당황하는 도클다이에 쥬쥬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도클다이의 위압적이었던 차가운 안색이 순간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때 였다. 자신이 사용하는 검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미미와 자신뿐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던, 쥬쥬의 생각이 무너져 내린 것은....도클다이는 정확하게 쥬쥬가 쥐 검에 대해 알고 있었다.
/.... 그 검은...[샤이닝 슬레셔]로군../
/!!!/
샤이닝 슬레셔....그 찰나의 순간...쥬쥬는 샤이닝 슬레셔를 손에 넣게 된 과거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었다.
엄마!!!아빠!!!
거대한 기계인형은...쓰러져 가는 가옥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부모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보았지만.....끝내 그 인형의 부모는 소녀의 바램을 산산히 부셔버렸다. 식물인간이 된 자신을 위해 천문학적인 투자를 해서 바레시카 가문의 유일한 독녀에게 비록 기계의 몸이었지만, 사람의 삶으로 누릴 수 있게 해주었던 파인의 부모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창 장마가 덮쳐왔던 때라...하늘에선 비가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하늘의 빛을 가려버린 구름으로 인해 대지는 미약한 어둠으로 뒤덮였다. 그것은 기계인형...아니 인형의 몸을 빌리고 있는 어린 소녀의 마음속에서도 감정을 젖히는 비구름이 끼어 있었다. 그렇게 비가 쏟아지는 질퍽한 땅....폐가가 되어버린 저택의 뒷동산에 거대한 인형은 자신의 손으로 자기의 부모의 시신을 묻을 묘를 팠다. 대충 나뭇조각을 긁어서 조립한 허술한 관은 한때 대부호였던 바레시카 백작과 부인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했고 비참하기까지 했다. 다행이 소녀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기계인형은 제 손으로 판 무덤에 자기 부모의 시신이 담긴 관을 묻어주었다. 다만...땅에 묻은 것이 너무나 후회스러워...너무나 안타까워 그 자리를 일주일동안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친척들도..이웃들도 소녀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바레시카 백작의 파산 소식을 들은 친척들과 이웃들은 다 하나같이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모두 백작의 재산을 보고 모여든 가벼운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어린 파인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파인은 오른손에 쥔 조그마한 책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 책은 바레시카 가문에 대대로 전해오는 검술에 대해 상세히 기록된 책이었다. 아직 10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 책을 마스터한 파인에게, 결정적으로 무기가 없었다. 기계인형의 장점을 이용해 단순노동에 나가 돈을 벌려 했지만,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거칠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을 단순히 생각 없는 기계 취급을 할 것이라는 예상이 섰기 때문이었다. 검술을 익힌 파인이 살아남을 길은, 자신에게 걸맞은 검을 구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런 무기를 구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덩치에 걸맞은 검이 무기시장에서 생산될 리도...거래될 리도 없었다. 더군다나 날만 선 쇳덩어리가 모든 것을 베어버릴리가 없었다.
그런 파인과....정체모를 한 자루의 검을 가슴에 품고 있던 한 기계인형과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쓰러진 저택의 터로부터 한발자국도 옮기지 않았던 파인을...기계인형은 어찌된 영문인지, 파인을 찾아온 것이었다. 검에 부르는 데로 이끌려 왔다는 신비스럽기 만한 말을 차분한 음성으로 내 뱉은 그 거대한 기계인형이 바로.......
/... 그래요...그 신속의 용자가 사용했던 검이죠.../
그 순간, 검 날의 뿌리서부터 빛이 검끝까지 타고 올라갔다. 빛으로 감싸여진 검...그것이 샤이닝 슬레셔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그 광검을 보자마자 도클다이는 차가운 미소를 띄웠다.
/..... 그렇군, 그렇기에 이 싸움의 승자는 바로 나인 것이다.../
/...?/
결전의 순간...쥬쥬는 근처에서 겁에 질린 안색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쥬쥬에게 한번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쥐고 있는 샤이닝 슬레셔를 안겨준 [미미]에게...미미를 바라보고 있는 쥬쥬의 표정은 '자신 있어'라고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 쥬쥬의 표정을 바라보고서야 미미는 어느 정도 두려움에서 벋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미미는 그리 좋지만은 않은 예감을 떨쳐낼 수 없는 것이었다. 쥬쥬와 도클다이..서로 인파이터 타입인지라...거리를 좁혀 몸을 부딪치기 전엔 대결이 성립되지 않았다. 서로 거리를 두고 자세만을 잡은 채...기세만으로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때 쥬쥬는 오만가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 공격의 파괴력을 제외하면....속도나 범위, 패턴 모두 검사인 내가 앞서있어...하지만..이 위압감은 뭘까...무기를 사용하는 접근전은 대게 승부가 3분이내로 끝나게 되어있어. 만일 내가 기계의 몸을 빌리지 않은 사람의 몸이었다면 20초를 넘기기 힘든 싸움이야...특히 상대는 도클다이!!....무엇 때문에, 나는 저 자에게 압도당하고 있는 걸까? 무엇 때문에 저 도클다이가 전함급 기체를 간단히 파괴할 수 있는 것일까..'
/ 그럼 간다!!/
서로의 기세가 견제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을 때, 찰나의 순간 도클다이는 쥬쥬가 상대해왔던 어느 적보다 가장 위협적으로 러쉬해오고 있었다.
챙!!챙!!
상식으로 믿기지 않는 속도와 공격으로 자신을 핀치로 몰아가는 도클다이의 맹공 앞에 쥬쥬는 정신의 혼미해짐까지 느끼며 힘겹게 수비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사자인 쥬쥬나 멀리서 지켜보는 미미에게나 예상치 못했던 광경이었다. 샤이닝 슬레셔의 공격속도나, 범위를 훨씬 상회하는 터무니없이 빠른 스피드의 도클다이의 도끼질 앞에서 쥬쥬는 공격이란 생각 할 수도 없었다.
/ 느려...한참 느리다고!!/
챙!!!
/ 끼악!/
도클다이가 휘두르는 도끼의 속도는, 쥬쥬가 수비를 하기 위해 움직이는 칼의 속도에 비해 훨씬 앞서가고 있었다. 무기의 파괴력과, 그것을 사용하는 도클다이의 속도...기법적인 공격에서 도클다이는 쥬쥬를 훨씬 앞서나가고 있었다. 그런 쥬쥬를 조롱하듯 도클다이의 싸늘하고도 광기 넘치는 음성과 함께 퍼져나오는 도끼질이 쥬쥬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 맹공 앞에 쥬쥬는 그동안의 전투동안 질러본적이 없는 비명을 내뱉었다. 그 순간 쥬쥬는 몸을 한 박자 이상 앞서 뒤로 움직여 나갔다. 도클다이의 공격범위에서 벋어난 것이었다.
/.... 뭐야...샤이닝 슬레셔를 들고도 이정도 밖에 안 되다니..../
이미 싸움을 일방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도클다이는 어느새 구석 가까이 몰려있는 쥬쥬에게 차가운 한마디를 던졌다. 그런 도클다이의 음성에 쥬쥬는 자존심의 문제까지 걸려 있어서 침묵으로 답할 뿐이었다. 채 10초 만에 이루어진 격렬한 도클다이의 맹공 앞에 질린 것은 쥬쥬뿐만이 아니었다. 미미의 표정에 싸늘한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 미...미칠 듯한 스피드야...'
쥬쥬는 속으로 도클다이의 빠른 움직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형 전함의 기능과 위력도 도클다이의 능력 앞에선 장난감의 기능에 불과했던 것임을 쥬쥬는 그 순간 깨닫게 되었다.
결국 쥬쥬는 비장의 카드를 쓸 수 밖에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 훗.../
도클다이와 미미는 쥬쥬의 발밑에 형성된 원형의 에너지 필드를 볼 수 있었다. 그 빛의 선으로 이루어진 에너지 필드의 안에 기묘한 문양과 문자로 채워져 있었다.
/ 포지시아 스텝인가..?/
도클다이는 쥬쥬의 비장의 카드에 대해서 간파하고 있었다. 쥬쥬는 도클다이가 자신의 기술을 간파했다는 것을 모른 체 시각을 혼란시키는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공격에 유리한 자세를 취하며 도클다이를 견제하고 있었다.
타앗!
쥬쥬가 순간 궤적을 남기며 도클다이에게로 파고들었다. 쥬쥬와 도클다이의 거리가 검과 도끼의 공격범위가 중립되는 수준까지 좁혀졌을 때, 쥬쥬의 샤이닝 슬레셔의 검끝이 도클다이의 동체를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 상하 좌우가 아니라...중앙이군../
/!!!/
승부가 결정 나는 짧은 순간에...순간적으로 도클다이를 상회하는 스피드를 지니게 된 쥬쥬의 결정타는...결국 동체의 방패막이 역할을 한 도끼날로 인해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기회가 더 이상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텅!
/ 끼악!!/
쿵!!
도클다이와 가까운 거리에 있던 쥬쥬가 한순간에 정원의 구석, 담장부근까지 튕겨져 나간 건 한순간의 일이었다. 그 순간 미미의 몸은 겁에 질려 굳어져 버렸다. 그렇게 튕겨져 나간 쥬쥬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운 후, 도클다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쥬쥬의 시각에 들어오는 것은 도클다이의 위압적인 형태뿐만이 아니었다. 발밑에 전개된 원형문양의 에너지 필드는 쥬쥬가 사용했던 그것과 같은...아크-기논을 지칭하는 문양이었다.
/[ 포지시아 스텝]...'댄스 오브 개나리'라....아크-기논의 힘을 근본으로 구사하는 기술이지. 하지만, 그 기술을 상쇄시키는 상위 기술이 있다는 것은 모르는 모양이군../
그때였다. 요란하고 청각에 고통을 안겨주는 소리가 한순간에 변방에 울려 퍼진 것이...부풀어 오른 풍선의 터지는 소리처럼 도클다이의 입에서 포지시아 스텝의 상위기술명이 터져 나왔다.
/[ 스크림!! 브레이크!!!!]/
한순간에 그 소리가 터져 나와 그 변방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쥬쥬가 사용하고 있던 포지시아 스텝이 힘을 잃고 그대로 소멸해버리는 것이었다.
/ 아..안 돼../
포지시아 스텝의 소멸은 쥬쥬에게 있어서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간신히 일으켜 세운 몸은 도클다이의 앞에서 사실상의 패배선언이었다. 그렇게 쥬쥬의 패배는 결정 났지만, 자신의 몸이 파괴되는 것을 면할 길은 없었다. 쥬쥬가 핀치에 몰릴대로 몰린 그때, 도클다이가 어느새 쥬쥬를 도끼의 공격범위 안에 가두고 있었다.
쿵!!!
[ 끼악!!!]
도클다이가 휘두르는 도끼는 자신의 둥지 안에 떨어진 힘없는 애벌레를 잡아먹는 새와 같았다. 그 도끼날의 처음 공격한 것은 쥬쥬의 허벅지였다. 허벅지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간 도끼날로 인해, 쥬쥬는 자신이 의지하는 기계 육체의 재현된 신경으로 인해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쥬쥬의 고통은 그녀가 내뱉은 비명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쿵! 쿵!
[ 아악!!!!!]
도클다이가 휘두르는 도끼의 궤적은 연이어 쥬쥬의 복부부분과, 종아리 까지 지나가 치명타를 남겼다. 당연 쥬쥬는 공격의 연타로 인해 극심한 고통이 더해지게 되었다. 게다가 몸을 지탱하는 다리부분이 입은 타격이 컸으므로, 쥬쥬는 몸의 균형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래도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 아아../
허벅지와 복부, 종아리에 입은 치명적인 타격은 쥬쥬를 도클다이 앞에서 쓰러지게 만들었고, 이내 쥬쥬를 공포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투지만은 꺾이지 않아서 오른손에 샤이닝 슬레셔는 놓치지 않고 있었지만, 그런 도클다이의 공격에 맞서 싸울 능력은 없었다.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의 실체가 숨쉬고 있는 가슴을...도클다이의 무자비한 도끼가 겨냥하고 있었다. 그 도끼는 쥬쥬... 파인 바레시카의 삶의 끝을 알리는 종지부가 될 것이다. 그 순간 쥬쥬는 자신의 집 정원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너무 어이없이 끝나버린 승부에 대한 아쉬움과 분함이 남아있었지만...아니, 인간의 몸으로써 살아오지 못했던 지난 세월이 원망스러웠지만, 죽어서 다시 엄마와 아빠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최후의 순간에 직면한 둔 쥬쥬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 우리 언니 건들지 마!!!/
그 순간 이었다. 쥬쥬와 도클다이의 싸움을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던 쥬쥬가 도클다이에게로 달려든 것은...막무가내로 도클다이의 팔을 과 몸을 붙잡고 미미는 절규에 가까운 성량으로 그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 제발..제발 언니를 살려주세요!!/
하지만 미미의 간절어린 호소는 굳어버린 도클다이의 광기어린 마음에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되려 미미는 극도의 광기 오른 도클다이에게 있어서 거슬리는 돌뿌리에 지나지 않았다.
/ 건방진.. 좋아!! 너부터 끝장을 내주마!!/
/ 미..미미야!!/
도클다이는 뒤로부터 자신을 붙들어 매고 있던 미미를 가볍게 땅에 내던졌다.
쿵!!
/ 꺅!/
그때였다. 미미의 팔에 도클다이가 내리친 도끼가 깊숙이 박힌 것은....그와 동시에 미미의 팔이 멀리까지 뒹굴러 나갔다.
/ 아악!! 내 손!!/
/ 다 죽여 버리겠어!!/
쿵!! 쿵!! 쿵!! 쿵!!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 미..미미야../
쥬쥬는 자신도 모르게 미미의 이름을 힘없이 내 뱉고 있었다. 도클다이의 무자비한 도끼세례에 미미는 그 한순간에 토막 나고 있었다...분명 막아냈어야 하는 일이었지만, 쥬쥬는 몸을 일으켜 세우기엔 다리가 성치 않았다. 도끼질을 멈춘 도클다이의 시선아래 보이는 것은 끔찍한 모양으로 파괴되어 버린 미미의 동체였다......
....... 크레스피...나는 널 원망하지 않아..
도클다이의 마음으로부터 허무함과 견딜 수 없는 죄책감...그리고 옛 상처의 음성이 밀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쥬쥬가 쥐고 있던 샤이닝 슬레셔의 빛이 폭주하듯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현상이 일어났다. 자신이 쥐고 있던 검으로 부터 생성되는 빛의 폭주에 쥬쥬는 흥분과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처음 샤이닝 슬레셔를 손에 넣은 직후 이런 현상이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샤이닝 슬레셔의 반응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쥬쥬를 멍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도클다이의 모습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그는 미미의 잔해를 바라본 채, 특별한 미동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 뭐..뭐하는 거지?/
도클다이의 그런 모습은 쥬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절호의 찬스였다. 미미는 쓰러진 상태에서 상체의 힘만으로 겨우겨우 도클다이에게 접근해갔다.
그런 쥬쥬의 접근을 도클다이는 인지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은 이미 신속의 용자라 불리던 크레스피가 최후를 맞이한 과거의 재현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 타냐]......신속의 용자와 대립하던 난공불락의 범죄 집단에 속해있던 어린 창기의 이름이었다.
소녀는 조직의 보스가 총애하던 창기였지만, 동시에 신속의 용자가 관심을 갖고 있던 존재였다.
신속의 용자는 소녀에게 잠재된 힘과 성품이, 악한 자들의 마수에 의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렇게 서로는 적대되는 입장이 편에 속해있지만 신속의 용자와 소녀는 다른 이들의 눈길을 피해 교제를 나누는 시간이 많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타냐는 크레스피에게 있어 신속의 용자가 존재해야만 유일한 이유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신속의 용자는 범죄 집단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신속의 용자에 의한 범죄 집단의 괴멸은 그 집단에 속해있던 타냐 에게도 괴멸을 가져왔다.....
/!!!/
도클다이는 다리로 부터 무언가에 베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클다이의 시선이 산만해진 그 순간을 이용해...쥬쥬가 그의 발목을 잡고 샤이닝 슬레셔로 그의 발목관절 부위를 베어버린 탓이었다.
쿵!!
그 순간 다리를 지탱하는 중요한 부위가 파손된 도클다이는 무너지듯이 주저앉고 말았다.
/... 쳇, 무승부로군../
도클다이의 말대로 두 기체다 다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기에, 더 이상의 승부를 가릴 순 없었다. 쥬쥬역시 그의 발목관절을 긋는 것 외에는 더 이상의 공격을 성사시킬 수 없었다. 사실 도클다이나 쥬쥬..둘 다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미미의 토막 난 동체를 시선 앞에 두고 주저앉은 도클다이와 쥬쥬 사이에 어색함이 깔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 였다...
/...... 그..샤이닝 슬레셔는 죽은 타냐와 함께 내가 묻었던 검이었다.../
그 무겁고 낯설기 만한 미묘한 분위기 사이, 도클다이의 입에서 힘없이 흘러나온 음색과 함께...그때까지도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던 샤이닝 슬레셔의 빛의 폭주가 소멸되기까지 잠잠해지는 것이었다. 당연 쥬쥬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 그런데 몰상식한 회사에서 타냐의 시신을 이용해 기계인형을 만든 모양이군...../
타냐?...쥬쥬는 도클다이가 내뱉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다만, 그 다음 말이 나오기 전까진...
/..... 그 샤이닝 슬레셔는, 내가 신속의 용자라 불리던 시설에 사용하던 검이다...그리고 내가 토막 낸
이 인형에는 오래전에 죽은 내 친구 [타냐]의 잠재의식이 남아있는 듯 하군../
/ 뭐라구요!!/
그런 그 둘의 상황을 정원의 멀리서 지켜보던 가린과 슬레진져 가 있었다. 가린은 쥬쥬가 있는 곳까지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슬레진져의 지시가 쥬쥬에게로의 접근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가린은 도클다이와, 도클다이와 쥬쥬의 선공과 선방부터 두 인형이 전투불능의 상태에 빠지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몇 번의 위기가 쥬쥬에게 있었으니, 가린의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도클다이와 쥬쥬 모두 다리를 못 쓰게 됨으로 말미암아, 둘 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지만, 멀리서 지켜보는 시점에서 그 두 인형이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선 정확히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전투는 사실상 막을 내렸지만, 판단이 흐려지는 위치에 서 있던 가린의 마음은 답답하고 불안하기에 짝이 없었다.
"... 내가 지시하기 전까지는 가지마, 가린아. 다행이 전투는 끝났어..."
그런 가린의 상태를 일찍이 파악하고 있던 슬레진져 였기에 가린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시선에 들어오는 두 인형...도클다이와 쥬쥬는 전의를 완전히 소멸시킨 채 대화만을 주고받을 뿐 이었다.
/그..그럼 당신이 바로..신속의 용자...?/
/......................... 예전에는 그랬지../
자신의 물음에 대한 도클다이의 대답에 쥬쥬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 뭐예요.. 당신......설마 샤이닝 슬레셔를 빼앗기 되찾기 위해 저를 파괴하려 했나요?, 아니면...미미, 아니 타냐라는 여자에게 볼일이 있어서 그랬던 건가요?/
쥬쥬의 냉소적인 말투에 도클다이는 침묵으로써 답할 뿐이었다.
/ 말 좀 해봐요!! 그 타냐라는 여자는...당신의 손에 죽었다해도....당신은 결국 미미를 파괴했잖아!!!!!/
오열했다.. 쥬쥬는, 몸을 힘겹게 움직여, 절리 떨어져나간 미미의 머리를 품에 안은 채, 그렇게 도클다이에게 원망을 퍼부었다.
/........ 데이터베이스에 까지 도끼질을 하진 않았어...공장에 보내면 다시 복구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로 인해 쥬쥬의 얼굴에는 드리워졌던 울분이 서서히 걷어지고 있었다. 그런 쥬쥬의 시선에 보이는 도클다이는...도끼의 손잡이를 길게 늘어트려 목발로 삼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지만, 한 쪽 다리의 관절이 끊어진 상태에서 더 이상의 전투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쥬쥬의 정원의 밖으로 나가려는 분위기였다. 그런 그를 쥬쥬는 더 이상 붙잡으려하지 않았다. 그와 다시 전투를 볼 마음도, 전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 안심하지마라, 쥬쥬......네 실력은 인정하지만, 그 신속의 검......샤이닝 슬레셔를 사용하기에는 너는 아직 부족해. 내 친구 타냐의 부탁이 있고 해서 더 이상 너를 건들지 않겠다.../
처음 저택에 들어왔을 그때와는 전혀 다른 기색으로 읊조리는 그의 모습에 쥬쥬는 넋을 잃다시피 바라다보고 있었다.
/.... 그 '미미'의 복구비용은 네 계좌로 보내주겠다..../
/ 아..../
/...... 덕분에 좋은 추억을 얻고 간다. 잘 있어라. 미미..../
그 말을 남기고 도클다이는 그 망가진 다리를 절뚝거리며, 어디론가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쥬쥬는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쥬쥬!!! 괜찮은 거니!!"
물론 도클다이가 물러남에 따라 쥬쥬에게 달려온 것은 가린과 그 뒤를 천천히 따라 걸어오는 슬레진져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쥬쥬는 도클다이의 뒷모습이 지평선에 완전히 삼켜진 후에야 발견하게 되었다.
/ 아..가린아../
" 걱정했다고!!, 어디 다친 데는 없어?"
/......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가린의 안쓰러운 표정에 쥬쥬는 기운이 빠진 안색을 지으며 가린에게 답했다.
" 응, 상대가 정말 강했어..."
/.... 맞어...하지만 다행이야. 내 마음은 다치지 않았어../
쥬쥬는 자신의 실체가 들어있는 가슴 쪽을 두드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슬레진져가 그 둘을 지켜보며 미소를 짓는 가운데, 그렇게 아침의 확실한 승패가 판가름
되지 않고, 조금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
그 날 정오, 미미의 파편은 공장에서 출장나온 트럭들의 화물칸에 옮겨지고 있었다. 이제 일주일 후면 미미가 복구되어 쥬쥬의 집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이었다.
/.... 언니..아까는 무서웠어...언니는 지금 괜찮아?../
비록 미미는 동체로 부터 떨어져나간 머리였지만, 다행히 음성만은 구사할 수 있었다.
/ 응, 내 걱정은 하지마, 어서 건강한 모습으로 만났으면 좋겠다.../
/...... 다시 돌아올게요./
미미의 머리는 그렇게 사람들의 들것에 실려 트럭의 화물칸에 실려 올라갔다. 미미의 파편들이 실려진 트럭들이 대열을 이루며 자취를 감출 때까지, 쥬쥬와, 가린, 슬레진져의 시선은 그 트럭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모든 일이 대략 정리된 후에야 슬레진져가 입을 열었다.
" 그럼 가린아, 가볼까? 나머지 창고에 쌓인 재고정리를 해야지."
그제서야 가린은 오두막으로 넘어오고 나서 부터 이곳에 있는 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의 직업을 깨우치게 되었다.
" 아, 맞다!!"
왠지 다정해 보이는 가린과 슬레진져를 내려다보는 쥬쥬의 표정에는 약간의 의아함이 서려있었다. 그들과 만난지는
고작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앞으로 이 둘과 함께 할 시간이 많게 될 것이라는 걸 쥬쥬는 그제서야 직감하고 있었다.
" 그럼, 가볼까? 가린아. 우리가 이쪽 세계로 넘어왔던 산장으로..."
다만, 가린은 이대로 가버리는 것에 대해 허전하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슬레진져를 사이에 두고, 가린과 쥬쥬는 서로를 그저 아무 말 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그들의 어색한 분위기를 읽은 슬레진져가 나섰다.
" 자 헤어지기 전에 인사해야지. 가린아...친구랑 말이야."
그제야, 쥬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던 가린의 표정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 잘 있어"
/... 응, 기다리고 있을게../
그렇게, 가린은 자신이 저택에 들어왔던 대문을 향해 뛰어갔다. 정원의 중간을 가로지를 때쯤, 가린은 뒤를 돌아 제법 거리가 멀어진 슬레진져와 쥬쥬에게 손을 한번 흔들고 크게 소리쳤다.
" 누나~ 어서 가요~!! 그리고 파인-!!! 다음에 또 올께~!!!"
그제서야 쥬쥬는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자신이 짓는 그 미소를 가린이 봐 주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쥬쥬에게 있었지만....가린이 그것을 보았든 보지 않았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던 쥬쥬였다.
/... 바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가린보다 발걸음을 아끼고 있던 슬레진져도 그제서야 슬슬 쥬쥬의 집에서 떠날 모양이었다. 그 기세를 느끼고 있던 쥬쥬는 슬레진져가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 그럼, 이만 갈께. 파인 바레시카...5일후에 가린이랑 함께 데리러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 저기..묻고 싶은 게 있어요../
" 뭔데..?"
/...... 왜 하필이면 저죠?../
쥬쥬의 물음에 슬레진져는 묵묵부답 이었다.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지 잠시 동안 하늘을 바라보더니 등 뒤의 쥬쥬에게 고개를 돌려 가벼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 알고 싶니?"
슬레진져의 미소에, 쥬쥬는 당장에 알 수 없다는 내색을 내비쳤다. 그런 쥬쥬로 부터 고정된 시선을 돌리는 슬레진져는 저 멀리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가린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쥬쥬에게 말했다.
" 그건, 너의 실체와 나의 진짜 모습이 닮았기 때문이야.."
/... 예?/
그녀는 쥬쥬의 질문에 답했지만, 쥬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말도...자신의 의아해하는 물음에 또다시 흘러나온 말 역시..
" 너의 진짜 모습을 본 가린은....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나의 진실 된 모습을 보게 된 거야.."
Epilogue
시니볼의 우주...그 생명의 땅위에 인간의 온건한 사체의 뇌를 이용해 전자두뇌의 단점을 커버하는 기술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 기술은 시니볼 우주-생명의 땅위의 전자기술발전역사에 있어 큰 획을 그었지만, 도덕적인 비난까지 피할 순 없었다.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라고 의심할 수 없었다. 주인 없는 무덤에 묻혀있던 타냐의 시신과 샤이닝 슬레셔는 우연히도 병기회사의 손에 의해서 그 두뇌는 [미미]라는 이름이 붙은 로봇의 데이터베이스로...샤이닝 슬레셔는 동시에 미미의 부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 같다.
내가..내가 도끼질을 가한 것은, 쥬쥬의 식구 '미미'가 아니었다...미미의 속에 자리 잡고 나를 기다려온 타냐의 잔여 의식이었다.
그제야 쥬쥬의 검이 샤이닝 슬레셔라는 사실과 그 검의 유입경로를 납득할 수 있었다.
발목관절의 파손부위가 보수되었을 때, 그 날 20년 동안 기다려 온 타냐의 유언을 듣게 된 날로 부터 3일이 지났다.
20 년 전....신속의 용자로써 싸움을 마치고 타냐 에게 돌아갔던 나는 주검이 되서 나를 반겨준 타냐로 인해 샤이닝 슬레셔를 버리고 도클다이로써의 역사를 적어가는 도끼를 잡았다.
여전히 나는 내 도끼를 버릴 생각이 없다.
나는 더 이상 신속의 용자 크레스피로 돌아갈 수 없다. 아니, 돌아갈 생각조차 없다.
이제야 느끼는 것이었지만....나의 광기로 인해 애꿎은 봉변을 당한 미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미미의 앞으로, 한 자루의 검……[샤이닝 히트]를 보내기로 했다.
.......... 내가 타냐가 속한 집단을 괴멸시키면 타냐역시 죽게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집단을 괴멸시킨 나에 대한 타냐의 입장을 이해했다......다만 후회스러운 것은 지난 20년간 도클다이로 걸어온 나의 역사가, 죽은 타냐의 영혼 앞에서 너무나 부끄럽다는 것이었다.
잘 있어라..타냐.
고맙다....
나 역시....너를
원망하지 않아..
첫댓글 후기 : 비평과 감상은 이곳을 활용.. -_- ;;
위험을 느낄만큼 엄청난 소설... 으음....... 역시 이 소설을 보면서 느끼는 점은 저도 이 소설을 본받아..(퍽!) 어쨌든 멋졌사옵니다...^_^
스크롤의 압박이었지만 잘 봤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감동때문에 흐르는 눈물 한번 닦고.. -,.-) 감사합니다..; 땡큐~ -_-)乃 ;;;; 제 목마른 영혼의 활엽수 같은 리플들이 오타 수정의 악몽을 보낸 저에게 위로가 되어 준다라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