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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 나은 점
로마서 3:1-8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롬 3:1-8 / 그러면 유대인이 나은 점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무슨 특전이라도 받고 있습니까? 유대인의 할례의식은 과연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2) 그렇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많은 이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당신의 율법을 맡겨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또 그것을 행하게 하시려고 한 사실입니다. 3) 분명히 유대인들 가운데는 불충실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몇 명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약속을 어기시겠습니까? 4) 절대로 그럴 리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ㄴ)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 의심을 품는다 해도 언제나 참되고 올바릅니다'라고 시편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ㄴ. 시51:4) 5)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것은 잘된 일입니다. 우리의 죄가 선한 목적에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도 악한 것을 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연히 알았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도움을 주는 마당에 우리를 벌하신다면 그게 정당한 일이겠습니까?' 6) 어처구니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눈감아 줄 리 있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심판하시겠습니까? 7) 가령 우리가 거짓말을 해야만 반대로 하나님의 진실성이 더 크게 드러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슨 죄목으로 우리를 심판하여 정죄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8) 만일 여러분이 이런 논리를 편다면 결국에 가서는 우리가 악하면 악할 수록 하나님께는 더 좋은 일이 된다는 말이 되고 맙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파멸을 당해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개중에는 내가 이런 설교를 하고 있다고 떠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 되었다는 것과 할례의 유익함이 무엇이냐는 유대인들의 의문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그들의 궤변에 대하여 답변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1-2) ‘나음’과 ‘유익’이란 단어는 유대인들이 스스로에 대하여 이방인들보다 더 탁월한 존재라는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자랑이었던 할례는 죄를 떠나 하나님께 바쳐진 마음의 성결이 있을 때 가치가 있지만, 그들에게는 외적인 종교의식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음속에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말씀이란 율법과 구약 전체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참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받아들였습니다(신 4, 6장).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소유해서 크게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구원에 관한 진리와 기본적인 형태의 복음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3-8) 하나님께서 불법과 불신앙으로 범죄한 유대인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시고 의로우십니다. 본문의 “어떤 자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기에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특정하는 의미입니다. ‘믿지 아니하였으면’이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배척함, 불신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된 것은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특히 메시야 예언은 무효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믿음이나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히 동일하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할례와 언약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를 내리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의하시지 않습니다. “나의 거짓말로...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심판을 받으리요”는 나 자신은 죄인으로 심판받을 이유가 없다는 유대인들의 궤변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 중 바울의 교훈을 오해하여 도덕 폐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바울은 바른 복음으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주고 있었습니다.
적용: 유대인들처럼 귀하고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지라도 겸손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면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고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 자기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크기와 무게는 다를 수 있으나 십자가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한 성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병도 제 십자가로 생각하고 참고 살아야지요.” 그런데 그 성도의 위장병의 원인은 평소 너무 많이 먹고 불규칙한 식사와 야식과 패스트푸드를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에 생긴 병이었습니다. 자신이 몸 관리를 잘못하고 음식에 지나친 탐욕을 부리다가 얻은 병을 주님이 주신 십자가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 설 교 >
바울을 향한 네 가지 반론
피영민 목사
서론
로마서의 전체 주제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님의 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에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장에 부도덕한 불신자(Immoral Unrighteous), 2장 전반에 도덕적인 불신자(Moral Unrighteous), 후반에 종교적인 불신자(Religious Unrighteous) 역시 하나님의 의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천국에 갈만한 하나님의 의를 자기 스스로 만들어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1~3장의 결론은 3장 10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또 로마서 3장 23절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3장 10절의 결론을 내리기 전, 1~8절까지 이 결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반론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다룸으로 복음에 거치는 장애물을 먼저 치우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는 이미 20년 이상 복음을 증거한 경험이 있는 상태였고, 복음을 거절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공통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칼빈주의 신학을 가르치다 보면 학생들로부터 매년 같은 질문을 들었습니다. 아주 뻔한 질문을 합니다. 10년 쯤 가르치다 보니 또 이런 질문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먼저 대표적인 네 가지 반론에 대해 답변하고 있습니다.
논쟁자들도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하지 못합니다. “내가 왜 죄인입니까?”라고 항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지옥에 가야 한다면 이 질문에 대답 좀 해 보라는 식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Ⅰ. 논쟁자들의 네 가지 반론
1~8절까지 내용 중 2개절씩 나누어 네 가지 반론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반론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1절은 반론자들의 질문입니다. “유대인들도 지옥에 가고, 이방인들도 지옥에 가고, 착한 사람, 악한 사람 구분없이 모두 지옥에 간다고 하면 우리가 유대인으로 그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유대인이 아무 소용없는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유대인의 유익은 범사에 많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사실도 알고, 애굽의 노예 되었던 200만 명이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광야에서 40년 방황할 때도 만나와 메추라기 떼를 내려주셔서 먹고 마시게 하셨으며, 그 가운데서도 옷과 신발이 헤지지 않는 은혜를 주셨는데, 이것이 어찌 유익이 아닐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받은 백성이 어찌 유익이 없다고 하느냐고 답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첫째’라고 표현한 것은 여러 가지 중에 첫 번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큰 유익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을 기록하실 때 유대인에게 계시를 주셔서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부터 메시아가 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유익입니다. 유대인으로부터 구원자가 나오고,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면 이보다 더 한 유익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반론과 답변은 3~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3절은 반론자들의 두 번째 질문입니다. “설령 유대인들 가운데 불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할 때, ‘너희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언약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 중에 일부가 믿든지, 그렇지 않든지 모두 다 구원해 주실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혹 있다고 해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언약이 파기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폐하시는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의 언약을 오해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유대인으로부터 메시아를 보내셔서 그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겠다는 것이지, 모든 유대인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방인들 중에 택한 자들과 유대인 중에 남은 자들이 유대인으로부터 나오는 메시아를 구주로 믿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구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 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언약을 이행하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라, 100% 지키시는 분이신데, 너희는 약속의 내용을 오해해서 시비를 걸고 있다는 요지의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저지르고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어 간접 살인하여 모든 알리바이를 숨겼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의 죄를 지적하게 하신 사건과 그가 쓴 반성문을 인용해서 논지를 전개하였습니다. 시편 51편 4절에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옳다는 내용의 반성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주의 말씀을 오해하고 왜곡해서 받아들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옳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대인 중에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지, 믿지 않는 자들까지 구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옳다고 해야지 오해해서 항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반론과 답변은 5~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그러면 우리가 불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의가 배경이 되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세지신 것이 아니냐는 주장입니다. 아주 고약한 논리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꼭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에 대해서 그가 은 30개에 예수님을 팔아 넘겨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었으니, 결국 가룟 유다도 좋은 일을 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도로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빌라도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그런데 우리 유대인을 심판하신다면 그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5절 후반부터 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불의하시다고 하느냐? 그것이 도대체 무슨 논리냐?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고도 그것을 바꾸어 선을 이루시는 지혜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죄나 악을 범한 것에 대해 심판하지 못하실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개에 팔아 하나님의 작정 경륜을 이룬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의로운 일을 행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일컬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나을 뻔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범하고, 악을 저질러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는 것은 억지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네 번째 반론과 책망은 7~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네 번째 반론은 세 번째와 비슷합니다. “나의 거짓말을 통해 하나님의 참되심이 드러난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인데, 어찌하여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이전처럼 대답하지 않고 야단을 치고 책망합니다.
8절에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악한 궤변을 늘어놓으니 하나님께 정죄받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는 막말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복음을 전하다 보면 반론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은 궤변인 경우가 많습니다. 궤변을 하면서 거짓되고 헛된 논리를 가지고 복음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증거할 때 자꾸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핵심에서 벗어난 질문을 계속하면 딱 잘라 일단 교회를 나오시라고 권하시기 바랍니다.
Ⅱ. 논쟁자들의 세 가지 특징
논쟁자들의 네 가지 반론을 통해 우리는 죄악 된 그들의 세 가지 인격적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얼마든지 좋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들을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죄악 된 논쟁자들입니다. 질문하는 태도가 잘못되었고, 질문의 내용도 극도로 왜곡되어 있습니다.
첫째, 이들은 항상 핵심에서 벗어난 질문을 합니다. 로마서 1~3장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라는 것입니다. “너는 네 능력으로 천국갈 수 있을 만큼 의로우냐? 아닙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면 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완전한 의를 받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질문은 “너는 죄인이냐? 아니냐?” 이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핵심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쓸데없는 변두리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복음을 전해 보면 꼭 이런 걸 물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순신 장군이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왜 이순신 장군까지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질문의 대상은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의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묻고 있는데 쓸데없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질문합니다.
며칠 전에 병원 심방을 갔는데, 성경책을 들고 가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목사님이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질문을 하는데 여자 사촌이 둘이 있는데 한 명은 65세, 또 한 명은 63세인데 둘 다 교회 집사임에도 불구하고 치매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어떻게 치매에 걸리게 되었는지 목사님이 대답 좀 해 보시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그 분들이 치매에 걸리게 된 원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 두 분은 치매에 걸렸어도 예수님을 믿으셨으니까 돌아가시면 천국에 가실 것이라고 대답해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대답하면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고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변두리 것을 가지고 질문하여 자기들에게 묻는 핵심적인 질문을 회피하려 합니다. “네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의를 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해줘도 이런 사람들은 꼭 “이 사람,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들은 끊임없이 질문하며 복음을 회피합니다. 질문해서 대답해 주면 또 질문하고, 또 대답해 주면 다시 질문하며 끊임없이 질문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촌이 감기 걸린 것은 어떤 연유입니까? 오촌이 교통사고 난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육촌이 암에 걸리게 된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런 식입니다. 온 세상 모든 민족에 대해서 물을 기세입니다. 이렇게 쓸데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계속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답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요구를 회피하며 시비 걸고 논쟁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들의 질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악한 방향으로 발전됩니다. 유대인들도 지옥에 간다면 유대인으로서 유익이 무엇이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중에 혹 불신자들이 있더라도 유대인들을 다 구원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질문부터는 굉장히 어리석은 질문들입니다.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때문에 심판받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냐? 또 네 번째 질문, 우리의 거짓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되심이 드러나니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의 질문은 어이가 없는 아주 사악한 질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들의 질문은 사악한 방향으로 발전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으려고 작심하고 어떤 변명이라도 찾아내려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이런 반론을 만나게 되면 친절히 대답해 주다가도 어느 시점에 그들의 질문을 막고 다시 핵심적인 질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계속해서 이런 사악한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Ⅲ. 논쟁자들의 두 가지 약점
첫째, 이들의 논쟁은 상식에 어긋나는 것들입니다. 상식을 벗어나는 질문들입니다. 계속 질문을 해서 답변을 얻으려 하는데, 답을 다 알아야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사촌이 왜 감기에 걸렸는지, 오촌이 왜 교통사고를 당했는지 알아야 믿겠다는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믿지 않겠다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밥과 반찬들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 알고 먹습니까? 아니면 그냥 먹습니까? 물론 알고 있는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는 대로 먹고 사는 것입니다. 이 반찬이 어디에 좋은 것인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 알고 먹는 것이 아닙니다. 다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먹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다 먹으니까 먹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사용할 때 모든 기능을 전부 숙지하고 사용하지 않습니다. 몰라도 사용합니다. 기능을 다 알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것 중 하나는 비행기가 어떻게 하늘을 날아다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육중한 쇳덩이가 수많은 사람과 짐을 싣고 날아갑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저는 표를 사서 비행기를 타고 다닙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질문에 답을 얻어야 행동하겠다는 것은 일반 상식에 어긋나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런 방식으로 살 수 없습니다.
둘째, 이들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대적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불의를 통해 하나님이 의로워지셨으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세를 졌다는 것이 말이 되는 주장입니까? 하나님을 모욕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빚졌다고 말합니다. 이런 태도가 바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태도요, 대적하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0)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을 모르고 하나님께 까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엄위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바다 속 지층을 흔드시면 쓰나미가 됩니다. 백두산 밑에는 서울 두 배 면적에 마그마가 있다고 합니다. 그게 터지면 한반도가 남아날 리 없습니다.
성경에 이 세상은 더 이상 물로 심판을 받지 않고 불로 망하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불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날을 ‘주의 날’, ‘여호와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것이 핵폭탄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지구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그마가 터지면 그 때는 모두 불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엄위하신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시면 지진이 나고, 화산이 폭발하게 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논쟁자들은 정상적인 인간 이성에도 맞지 않는 논리로 반론을 제기하고, 엄위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악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약점이고, 지옥에 떨어지는 영원한 약점인 것입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엄위한 심판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대로 하나님은 항상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도 자기 생각은 아니라고 고집을 부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Ⅳ. 논쟁자들에 대한 바울의 세 가지 반응
첫째, 바울은 가능한 한 모두 대답을 해 줍니다. 둘째, 핵심적인 질문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셋째, 계속 대답을 해 주다가 어느 순간에 답변이 아닌 책망을 통해 질문을 끊어냅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넘어갑니다.
결론
복음은 단순합니다. 그러나 단순하다고 해서 지루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복음은 듣고 또 들어도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죄를 지은 죄인들인데,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아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받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의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 안에 성령을 보내 주시고, 천국에서 받아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날 생명의 부활을 해서 영원토록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니,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 교회 처음 나오신 분, 아직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분이 계시면 이 말씀을 새겨들으시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신학교 교수가 끊임없이 질문하는 학생에게 어느 정도 대답을 해 주다가 쓸데없는 질문을 계속하니까 성질이 나서 “자넨 그 많은 질문들과 함께 지옥에 갈 사람일세!”라고 답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자 그 학생은 그 날 강한 충격을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논쟁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항상 옳고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순전하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 새생명초청잔치에 많은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
로마서 3:1-18 / 조상호 목사
EX) 제가 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한국과 외국의 몇 가지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보이는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는 특별히 병원에서 일하시는 의사 선생님들의 큰 차이를 발견하였습니다.
만약 암과 같은 심각한 병세를 진단하였다면, 한국에서는 환자에게 병명을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가족들에게만 조용하게 말을 해 줍니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과는 반대로 환자를 불러 놓고 직접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을 진단한 결과, 암 증세가 있습니다. 수술을 하면 성공하여 살 가능성이 30% 밖에 없어요. 그러니 마음으로 준비하십시오" 이 말을 들은 환자는 처음에는 절망하며 고통합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서 정신을 차립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나의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하고 고민하다가 결국은 마음을 굳게 하고 마지막 남은 생을 잘 정리합니다. 어떻게 보면, 후자인 외국 의사들은 매몰차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환자가 자신의 병명을 앎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지막 남은 삶을 잘 정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질병에 걸렸든지, 문제를 만났을 때, 무조건 '쉬 쉬'한다고 능사는 아닙니다. 그냥 덮어놓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문제를 그냥 '쉬, 쉬'하며 덮어둔다고 능사는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강단에서 이 '죄'에 대한 말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신성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자가 교인들이 싫어한다고 해서, 교인들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고 해서 죄의 문제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미국의 유명한 로버트 슐러 목사님 같은 분도 교회부흥을 위한 설교로 절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주장한 노만 필 빈센트 박사 같은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죄, 심판, 징계'에 대한 설교보다는, 오로지 '희망, 확신, 가능성'만을 이야기하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성경적인 말입니다. 설교자는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말씀만을 증거해서는 안됩니다. 설교자는 사람의 귀만 간지럽히는 얄팍한 짓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라면 비록 그것이 우리 귀에 거슬리고,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강단에서 힘있게 선포되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살았고 운동력있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우리에게, 우리의 삶에 유익하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로버트 슐러 목사님과 같은, 노만 필 빈센트 박사님과 같은 분들이 우리 기독교계에 엄청나게 훌륭한 영향을 끼친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모든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고루고루 들어야 하고, 우리는 들은 그 말씀을 우리 삶에서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딤후3:16)의 앞부분 '모든 성경'이라는 단어와, 후반부의 '유익하니'라는 단어에 주의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라면 그것이 어떠한 내용이든지 강단에서 선포되어져야 하고, 또한 우리는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3:10)에서 충격적으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전 인류를 확실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한마디로 죄인이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작년 10월에 박효진 장로님께서 저희 교회에 오셔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들킨 죄인이고, 감옥밖에 있는 사람들은 들키지 않은 죄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 본문은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의인은 없고 하나도 없다', '누구나 다 죄 아래에 있다'는 것은 로마서1장18절 이하부터 3주 동안 계속 살펴 본 말씀의 최종 결론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1장에서부터 찬란한 로마제국의 헬라문명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이방인들의 죄악을 열거하면서 그들의 죄악을 폭로하였습니다. 수많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보여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을 멀리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거짓으로, 순리로 쓸 것을 역리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21가지나 되는 죄악을 범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2장에서는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죄악을 고발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남만 판단하고 자기들의 죄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뭐, 뭐'인 척만 하던 표면적 신앙인 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8절까지에는 2장에 이어 유대인들의 죄악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악해도 얼마나 악하게 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상한 변증법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죄악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3절에서'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면 결과적으로 선택한 백성들을 멸망의 길로 몰아 넣는 것이 되는데 과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느냐'라고 떠들며 말장난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바울은 단호하게 4절에서 말합니다. '사람은 거짓되지만,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거짓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시 한번 5~8절을 통해서 반론을 제기합니다.
'자신들의 잘못으로, 또는 거짓말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졌으면 결코 죄인처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EX) 어떤 분이 신문에 칼럼을 썼습니다. 이름하여 가룟 유다 예찬론이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있었기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따라서 유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혁혁한 공이 있다. 그에게 공로패를 주어야 합니다> 라고 글을 썼습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죄를 교묘히 정당화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결과는 선으로 나타났지만, 그 행위를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의 십자가 사역을 이루기 위해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님을 팔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동전 몇닢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가서 역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없었더라도 십자가 사건을 이루어 나가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문제있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것은 죄지은 사람이 아닙니다. 변명하는 사람입니다. 죄를 지었어도 자신의 죄를 통감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고백하는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논리를 앞세워 어떻게 하든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더 큰 죄를 저지르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자신의 죄를 들추어내었을 때, 시편51편에서 "나는 주께 범죄하였습니다. 나는 악을 행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다윗왕은 신하인 나단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변명만 하며 경건한 척하는 사람들의 마지막이 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됨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죄를 각각 고발하였거니와, 또한 더 나아가 9절부터 18절까지 말씀에서 인간들의 죄에 대한 결론 부분을 말합니다. 9절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모든 사람은 '다 같은 죄인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유대인들도 이방인들보다 나은 것이 없고, 또 이방인들도 유대인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다 똑같이 죄인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아서 착하다고 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그것이 그것이고, 그 사람이 그 사람과 별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만 있을 뿐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에게 죄가 들어왔습니다. 비록 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직접 본 적도 없고, 만진 적도 없고, 보고 침 한번 삼킨 적도 없다 할지라도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범죄한 결과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후손인 우리 또한 죄인이 된 것입니다.
EX) 저는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의 가계에 대한 글을 읽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소개합니다. 그 목사님의 성이 '옥'씨입니다. 옥씨는 고려시대의 왕족인 왕씨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전주 이씨가 반란을 일으켜 고려를 멸망시키고 이씨조선을 세우게 되자, 왕씨들이 완전히 몰살당할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쪽의 거제도나 북쪽의 함경도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서도 생명에 위험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을 바꿔 버렸습니다. 모두 '전'씨와 '옥'씨로 바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그저 손바닥만한 논이나 밭을 개간해서 겨우 먹고사는 상놈 집안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옥씨 후손들은 이씨 조선 500년 동안 엄청나게 고생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후손들은 억울하였습니다. 이씨에게 왕위를 빼앗겼으며 그리고 고개조차 떳떳하게 들지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옥씨 후손들이 조상을 탓할 수 있습니까? 탓한다고 옥씨가 왕씨로 회복됩니까? 탓할 수 없습니다. 별 도리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류의 조상인 아담하고 관계가 없다'라고 소리를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담의 혈통을 타고난 이상, 아담의 자손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이상, 우리 또한 죄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죄지은 인간들의 구체적인 모습이 13절 이하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가득하고" 14절입니다.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여러분! 13절과 14절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첫째로 입술로 범죄하는 언어의 죄악입니다. 말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내면에 들어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별로 알 수 없지만, 순간적으로 머리에 혹은, 마음에 들어있는 것들이 나오는 것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EX) 어느 교회에서 여선교회 헌신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여선교회 회장이 예배 사회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350원 찬양을 드리겠습니다" 많은 회 중들이 찬송을 부르는 대신에 깔깔대며 웃었습니다. 여선교회 회장은 회중들이 자기를 보고 웃는 이유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자신이 '찬송 350장'이라고 하는 대신에 '350원'이라고 했기 때문에, 회중들이 웃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선교회 회장의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었을까요? '돈'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350장이라고 해야 하는데, 350원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옵니다. 내면에 '미움'이 있으면 미워하는 말이 나옵니다. 내면에 '질투'가 있으면 질투하는 말이 나옵니다. 내면에 죄악이 있으면 욕이 나오고 저주가 나옵니다.
우리 육체의 내과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 내시경을 사용하는데,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안을 들여다보지 아니해도,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을 보면 그 사람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까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13절부터 14절을 보면, 먼저 목구멍으로부터 시작하여 혀, 입술, 입 등의 순서로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속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중동 지방에는 원래 무덤 입구를 한국처럼 흙으로 덮지 아니하고 돌로 막아 놓습니다. 중동지방 같은 뜨거운 사막에서 무덤의 돌문을 열어 놓으면 엄청난 악취가 풍겨 나옵니다. 바울은 죄인의 첫 번째 특징인 입술로 짓는 언어의 범죄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이어서 둘째로, 15절부터 행실로 지은 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대표적 행실의 죄악을 말하면서 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15절부터 보겠습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는데, 그와 반대로 평화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까? 18절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목구멍, 입술, 입, 발등 육신의 많은 부분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18절에 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눈입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도록 했는데도, 그 주님을 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EX) 동부 이촌동의 모교회 목사님이 한번은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려고 집을 나섰는데, 차가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새벽기도회 시간은 바작바작 다가오고 차는 없고... 그래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택시를 잡았을 때는 20분밖에 여유가 없었습니다. 역촌동에서 동부이촌동까지 20분 동안에 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호등이었습니다. 이 신호등이 자동으로 꺼지고 켜지기 때문에, 아무도 건너는 사람이 없지만 초록색 불이 켜질 때까지는 마냥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니 이 목사님이 조바심이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엉겹결에 택시 운전사한테 재촉을 했습니다.
비록 빨간 불이 켜져 있었지만 건너는 사람이 없으니까 "기사 양반! 그냥 갑시다." 그랬더니 그 택시 운전기사는 "손님, 사람은 보지 않지만, 하나님은 보고 계시는데요." 이 목사님은 커다란 몽둥이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답니다. 새벽기도회를 인도한답시고 교회에 가는 목사가 개인택시 운전사한테 엄청난 설교를 들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죄를 짓는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주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지금 나를 보고 계신다'는 생각만 해도 내 마음대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EX) 전에 말씀 드린 예화입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옛날에 어느 나라에 임금님이 있었는데, 그 임금님은 옷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는 조금만 색다른 옷이라고 하면 꼭 입어 보아야 직성이 풀리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하루는 신하들이 와서 임금님에게 "어디 어디에 가면 세상에서 굉장히 구하기 힘든 옷을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그 옷은 값도 무척 비싼 옷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특별한 점이 있는데, 거짓이 있거나, 거짓말을 한 사람은 볼 수 없다고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임금님은 그 옷을 꼭 한번 입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부탁을 하여 옷을 짜는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신하들이 하는 말이 "임금님, 저기 저곳에서 짜고 있는 옷이 보입니까? 저 옷이 바로 저희들이 말한 그 옷입니다." 임금님은 아무리 보아도 보이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자기의 거짓이 들통날 것 같아 보인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윽고 신하들은 임금님에게 입었던 옷을 다 벗게 하고 새로 만든 값비싼 옷을 입혔습니다. 드디어 임금님이 군중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하여 임금님만 바라 볼 뿐 아무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지나가던 순진한 꼬마들이 "얼라리 꼴라리, 임금님이 옷을 벗었다네"하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챤인 앤더슨의 '발가벗은 임금님'이라는 스토리입니다. 자신이 벗은 줄도 모르고, 죄를 지은 것도 모르고 다 밝혀지는데도, 그들은 부끄러운 것도 모른 채, 경건한 척, 죄가 없는 척하고 있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의 모습이고 또한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의 사람들은 '죄인임을 아는 죄인'이 있고, 또 한 부류의 사람은 '의인이라고 하는 죄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 다 죄인이지만, 하나는 자신의 죄를 알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그래도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소망이 없습니다.
비록 '죄 아래 있는 나'라고 할지라도,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 앞에 나의 허물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용서라는 귀한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용서가 있기에 나의 삶이 주님 안에서 회복이 되며, 주님 앞에 다시 세워지게 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솔직하시기 바랍니다. 죄 없다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이 살길은 예수의 은총을 구하는 길입니다. 이 시간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 앞에 모든 죄와 허물을 고백함으로,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이방인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백장흠 목사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는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하였고, 2장에서는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라고 2: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 다. 남을 판단할 만큼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2:5-11절에서 는 "행한 대로 보응 하시되" 라고 하였고, 12절에서 16절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2장에서 얻은 결론은 드렌 W. 위어스비의 말대로 1)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 의 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그 사람은 반 드시 구원받고 상급 받을 것이라 하였는데 하나님의 진리에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2) 심판은 인간의 지위나 신분이 아니라 그 행위에 따 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지위나 신분과는 관계 없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분이나 경력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롬 2:6-16) 3) 심판은 인간의 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종 교, 어느 교파에서 신앙생활 하였는가? 그것이 아니라 복음대로 믿고 살았느냐에 따 른다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유대인들을 비판하였던 바울이 이제 변호하는 말을 하 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나음이 무엇인가? 그래도 좋은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 를 전파하는 바울은 아주 논리적이며 분명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죄를 지적한 그는 이제 그들에게 자존심을 갖게 하여 줍니다. 유대인은 나은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첫째,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백성들 중에서 유대인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입니다. 그들은 왜 선민으로 삼으셨을까?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그의 뜻대로 그분이 원하심에 의하여 받은 것입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입니다. 왜 선택하 여 주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택은 은혜라고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 는 선택받은 영적인 선민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도 그러하 지만 우리는 선민이기에 절대로 망하지 아니 합니다. 2차 대전 때에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는 큰 죄를 범하였는데 거기에 숨 은 일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을 시작하기 전에 히틀러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먼 저 유대인들을 예비 구속하였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갇혀있는 곳에 히틀러가 나 타났습니다. 유대인을 죽인다는 소문에 의하여 모두 공포에 쌓여 벌벌 떨고 있었습 니다. 그때 한 노인이 큰소리로 고함을 치며 웃었습니다. 히틀러가 "너 왜 그렇게 웃느냐?" 물으니까, 나이 많은 랍비 노인은 대답하기를 "역사적으로 유대인을 죽이 려는 시도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을 멸절하려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애 굽의 바로가 그러하였고, 70년에 디도 장군이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히틀러는 이 말을 듣지 않 고 유대인을 죽였으며 전쟁을 개시하였습니다. 그 랍비 노인이 말한 대로 히틀러도 그 뒤로 꼭 만 5년 만에 베를린의 포위망 속에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은 다 죽지 아니하고 살아 남아 있다가 1948년에 독립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은 하나 님이 지켜 주십니다. 둘째, 유대인들은 할례 받은 사람들입니다. 선민이라는 표식이 바로 할례였습니다. 이는 유대인이 태어나서 제일 먼저 거치는 의식이 할례였습니다. 선민이라는 흔적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자기 자신 을 자랑하면서 자존심을 표현할 때에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중에 이스라엘이고 베냐민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니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 요, 율법의 의로는 흠 없는 자라" 하였습니다.(빌 3:5-6) 이같이 할례는 그들의 자존 심이요, 자랑거리였습니다. 셋째,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라 하였습니다.(롬 3:2) 말씀은 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말씀하셨고, 출애굽기 19:1-2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과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이 주어졌을 뿐 아니라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이 전달된 것입니다. 이같이 말씀을 맡았다는 것 그들에게는 자랑 할만한 것이었습니 다.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의 계시를 받은 자이기에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책임도 있습니다. R. 와트슨이라는 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 게 맡겨진 것은 1) 이 말씀이 읽히거나 이해되도록 해야 하고 2) 정직하게 해석되어 져야 한다. 지난해에 성경 배포수가 42%가 증가되었다고 성서 공회가 발표하였습 니다. 성경이 많이 팔리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보아집니다. 그러나 많이 읽혀져 야 합니다. 어느 가정에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비참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웃집에 사는 어떤 분이 그 아내에게 성경을 한 권 주었습니다. 여인이 열심히 성 경을 읽다가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위로를 받고 보물처럼 귀 하게 여겼습니다. 남편은 교회에서 열심 하는 아내에게 핍박을 합니다. 하루는 남 편이 만취되어 집에 돌아와 아내가 읽던 성경을 빼앗아 난로 속에 집어 넣어버렸습 니다. 다음 날 아침 난로를 청소하던 남편이 이게 뭐야 보자 타다 남은 성경 몇 쪽 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나의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 라"(마 24:35)고 하는 말씀이 마음에 큰 감동을 가져 왔습니다. 성령께서 역사 하신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게 되고 새 사람이 되어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복된 삶 을 살게 되었답니다. 3) 이 말씀을 맡은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 런데 성경을 장식품으로 알고 서재에다가 장식해 놓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촬스 피니는 28세에 변호사가 된 수재였습니다. 그의 서재에 많은 책이 꽂혀 있었습니 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그도 남이 볼 때 그래도 성경 한 권쯤은 있어야 될 것 같 아서 큼직한 성경을 사다가 꽂아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몸이 아파 누워 있던 어느 날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성경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고, 그의 인생에 대전환점이 생긴 것입니다. 그는 법관의 길을 버리고 뉴욕의 브로드웨 이의 태버나클 교회를 창립하였고, 오벌린 대학의 제2대 총장으로 교육에 공헌했습 니다. 성경을 장식용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자꾸 읽고 묵상하면 삶에 안내자가 되 며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주는 능력의 책입니다. 4) 실제적 목적들에 사용되어지도 록 맡겨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받은 우리는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이 말씀을 전하고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하냐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유대인 보다 더 나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 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교만이 죄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남을 수용할 줄 모릅니다. 자기 만 옳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잘못 되었다 라고 하는 선입 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 에 수용하지 아니 합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특권을 얻는데 왜 거절하나요? 교만해서 그럽니다. 그러므로 거절하고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거절합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죄가 있습 니까? 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려고 그렇게 사정하는데 듣지 아니 합니다. 거절합니 다. 죄란 바로 거절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줄줄도 알아야 하 지만 받아들일 수 있어야 사랑입니다. 부부간에도 상대방을 거절하고 수용하지 못 할 때에 문제가 생깁니다. 환영하지 못 하겠다는 데 평화와 행복이 있을 리가 없습 니다. 사랑이라 하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에 비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자녀 들은 언제 부모가 나를 사랑했느냐? 라고 항의하는 자식이 있습니다. 왜 그러합니 까?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을 줄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줄줄 몰랐 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때 자녀가 됩니다. 미국의 어느 지방에 알코올 중독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들이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의 파산한 술값으로 파산하여 집을 떠나서 각자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알콜 중독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분석하였습니다. 이후 에 두 아들을 인터뷰하는데 심리학자들은 이들이 형제라는 데 놀랐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형은 자신의 일에 성실하고 능력을 인정받는 금주가로 행복하게 살 고 있었는데 동생은 아버지가 한대로 행하여 희망 없이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알코 올 중독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심리학자는 형제를 따로 불러 당신 지금의 모습이 어 떻게 된 것입니까? 라고 물었답니다. 그런데 이들의 대답은 같았습니다.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저런 사람이 되지 않겠다 라고 생각 한 아들은 이후에 훌륭하게 되었 고, 다른 한 사람은 아버지 하는 대로 남이 하는 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 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그리고 나의 주 님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후로 우리에 게는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으로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자격이 없음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관계 를 부부관계로 표현하였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남편인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 이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필요를 따라 채워주시는 하나님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랄 때에 가장 행복한 것이며 사 람다운 사람이 되어 갑니다. 어떻게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부모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때는 효자 효녀입니다. 이렇듯이 우리가 영적으로 어 리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선택하시고 필요를 따라 은혜로 도우시는 아버지의 사랑이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절대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사랑입니다. 부부 가 관계는 나빠졌다 하면 이혼을 합니다. 그러면 남이 됩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포 기할 수 없습니다. 혹 못된 부모가 있어서 자식을 버렸다고 하나 그래도 아버지이 고 자식입니다. 즉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 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이방인들보다 나은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진실됩니다. 본문 로마서 3장 4절을 보면 "사람은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거짓될 수 있습니 다. 겉으로만 사랑하는 것 같이 합니다. 사람 자체가 거짓됩니다. 마음도 거짓됩 니다. 죄로 인하여 부패하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하 나님은 진실하십니다. 진실하신 아버지로서의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거짓될 수가 없 다는 말입니다. 진실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하나 님의 사랑은 헌신적이며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실하고 거룩하고 불변의 사랑이랍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 이방인과 전혀 다른 점 입니다. 2. 이방인과 우리는 소망이 다릅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요?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소망 이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부자가 되는 것이 소망일 것이며,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출세하는 것이 소망일 것입니다. 병든 사람에게는 건강이 소망일 것이 며, 장애자는 마음껏 걷고 뛰는 것이 소망입니다. 삼중고로 고생하던 헬렌켈러 같 은 사람은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꼭 삼일동안만 눈 을 뜨고 보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면 나는 그 순 간 손끝으로만 만져도 알던 나를 이 만큼 가르쳐주신 셜리번 선생님의 인자한 얼굴 을 몇 시간이고 바라보면서 마음속에 간직하겠습니다. 다음에는 친구들을 찾아보 고 들로 산으로 나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잎사귀를 들에 피어있는 꽃과 나무들 그 리고 석양에 빛나는 아름다운 노을도 보고 싶습니다. 다음 날 새벽에는 동이 트는 웅장한 장면과 오전에는 오페라 하우스 오후에는 미술관 저녁에는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하루를 보내겠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길가에 나가 출근하는 생동감 넘치는 얼굴을 보고 낮에는 영화관에 가고 밤에는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거리에 나가 진열 된 상품을 구경한 다음에 집에 돌아와 삼일 동안 만이라도 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 사의 기도를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소망은 현실적인 것이 며 유한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이라는 것이 올 때에는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 고 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다릅니다. 영원한 소망입니다. 죽음이 와 도 없어지지 않는 소망입니다. 예수 안에 사는 이들의 소망은 하늘나라입니다. 죽 음이 오면 오히려 부활의 소망 때문에 슬퍼하지 아니 합니다. 많은 사람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던 배가 갑자기 불어오는 거센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배는 뒤집히려는 듯이 요동하기 시작합니다.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입니 다. 그런데 노인 한 분은 아주 평화로운 얼굴로 기도를 드리고 있더랍니다. 그 노인 에게 한 사람이 가서 묻습니다. 두렵지 않으세요. 노인은 아니요. 나는 소망가운 데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귀여운 딸이 둘 있었습니다. 큰딸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작은 딸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만약에 배가 뒤집 혀 죽게 되면 천국에 있는 큰딸을 먼저 만나게 될 것이고, 이 배가 무사히 도착하면 작은 딸을 만나게 될 것이니 감사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소망입니 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다릅니다. 소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 기 때문에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 합니다.(아멘) 3.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가는 곳이 다릅니다. 즉, 방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 노래 중에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것이 있습 니다. 타향살이 몇 해 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 여 년에 청춘만 늙어 그 런 노래도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힘들게 살던 시대에는 삶에 철학이 있었습니다. 사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란 길지 않다. 가는 고향이 있다 라는 막연하지 만 그런 대로 생각은 했던 것입니다. 그런 생각들이 유행하는 노래로 불려진 것입니 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어차피 나그네 길이라면 고향은 어디냐 라고 묻고 싶습니다. 어디로 가고 있느냐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두 곳입니다. 하나는 천국이요, 다른 하나는 지옥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천 국에 가는 것이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교도소에는 누가 가던가요? 죄인이 가는 곳 아니던가요? 예수를 믿으면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 를 사함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아니함으로 심판을 받게 된 다고 하였습니다. 믿는 사람도 심판이 있습니다.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심판입니 다. 로마서 3:5절을 보세요. "사람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 고 하더라도 심판입니다. 예를 들면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게 됨으로 인류 구속이 이루어졌습니 다. 어떻게 보면 가룟 유다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 을 행하여도 심판이라 하였습니다. 즉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기 위하여 부자 집의 물 건을 훔쳤다고 하더라도 심판이라는 말입니다. 그 심판 중에 복음 심판이 있습니 다. 예수를 믿었느냐? 믿지 아니하였느냐? 믿었으면 천국이요, 믿지 아니하였으면 지옥입니다. 누구에게라도 물어보세요. 지옥 가고 싶으냐? 다 싫어합니다. 지옥이 싫으면 예수 믿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온갖 잘못된 죄를 범하였다고 하더라도 예수 믿으면 구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나요?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믿고 예수 안에 있으면 심판과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3: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 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였습니다. 요 한복음 5:24절에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 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5:12절에는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믿음을 갖고 있다가 버리 면 심판이라 하였으니 믿음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과 믿지 않는 이방인과는 엄청나게 다 릅니다. 1) 신분이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대신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자녀답게 살면서 자녀의 특권을 누리시 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소망도 다릅니다. 하늘의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인들은 가는 곳이 다릅니다. 저 천국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할렐루야) 성령 안에서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살아갑시다. 힘있게 삽시다. 오늘도 처음으로 교회에 오신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 믿고 삽시다. 이방인과 다르 게 복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 영접하고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의 특권을 누리시 기를 바랍니다. ∼ 아 멘 ∼
하나님의 신실하심
로마서 3:1-9 / 황광민 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칸트(Immanuel Cant)의 아버지가 고향인 폴란드의 실레시아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말을 타고 깊은 산 속을 통과하고 있는데 강도들이 달려 나왔습니다. 강도들은 값진 것을 모두 빼앗았습니다. 그리고는 "이것이 전부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칸트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여 그것이 전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저들은 칸트의 아버지를 가게 했습니다. 말도 빼앗겨서 숲속을 걸어서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강도들을 피하여 빠른 걸음으로 달렸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보니 손에 무엇인가가 잡혔습니다. 그것은 속옷 속에 안전하게 꿰매어 보관한 금덩어리였습니다. 칸트의 아버지는 금덩어리를 들고 강도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아까 내가 말한 것은 진실이 아니었소, 내가 무서워서 미쳐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소. 자, 여기 내 옷 속에 감추었던 금덩어리를 받으시오."
강도들이 이 말을 듣고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빨리 받으라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금덩어리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한 강도가 빼앗은 지갑을 갖다 주었습니다. 또 다른 강도는 빼앗은 기도책을 갖다 주었습니다. 말도 끌고와서 돌려주었습니다. 강도들은 모든 것을 돌려주고는 자기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잘 가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진실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진실하신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곳이므로 진실은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당장은 손해보는 짓이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진실이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진실이 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오해를 받아도 나만 진실하면 하나님께서 풀어주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로마서 3:1∼9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유대인의 나음은 무엇인가?"라고 시작하지만 그것이 주제는 아닙니다. 본문에 있는 대로 유대인의 나음은 말씀을 받은 것이요 그 말씀의 중심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선악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 본문의 중심 사상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 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대인의 나음 - 말씀을 받음
먼저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는 유대인의 나음의 첫째가 말씀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2절을 보십시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바울은 유대인의 나음을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를 말했습니다. 로마서 9장 4∼5절을 보면 여러 가지 유대인의 유익이 있습니다. 양자됨, 영광, 언약, 율법을 세우심, 예배, 약속, 또 육신적으로 그리스도가 동족이라는 것 등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점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전통 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말씀입니다. 이방의 기복종교와 비교해 보십시오. 어느 종교가 뚜렷하게 말씀 위에 서 있습니까? 어느 무당이 부흥회 하면서 말씀을 또박또박 가르칩니까? 기복 종교는 말씀이 없습니다. 단순히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말씀 위에서, 말씀 안에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말씀을 가리키는 헬라어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로고스'이고 다른 하나는 '레에마'입니다. 로고스는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의 일반적 의미의 하나님의 말씀을 기리킵니다. 그러나 그 말씀 중에 어떤 부분이 성령으로 내 가슴속에 역사 하여 나를 변화시키고 큰 믿음을 불러일으킬 때 그 말씀은 레에마가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말씀은 말씀이로되 내 속에서 역사 하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만나고 또 성령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말씀은 살아서 우리 속에서 역사 합니다.
말씀의 중심 - 하나님의 신실하심
그러면 이제는 말씀의 중심이신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질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고 택하신 하나님이 어찌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는가를 묻습니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의 답변은 간단명료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아서 실패한 책임을 어찌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3∼4절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이스라엘의 실패한 역사의 책임은 이스라엘에 있습니다 저들이 믿지 않고 범죄 함으로 벌을 받았습니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불성실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의로우시며 어떠한 판단에서도 그 분은 옳으신 분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종종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합니다. 신정론의 문제가 그것입니다. 어찌하여 열심히 믿으려고 애쓰는데도 어렵게 되고 불의한 자들이 형통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에 어찌 의인이 고난 당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십니다.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십니다. 갈릴레오가 "지구는 그래도 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이 받아들이던 받아들이지 않던 지구는 여전히 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믿던 안 믿던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당장은 모호한 것 같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의 신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전적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전적 수용(Total Acceptance)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잘 쓰는 말 중의 하나가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 2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고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즉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무엇을 만들든지 원망하지 말고 전적으로 수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전적 수용, 전적 아멘, 이것이 참 신앙의 기본입니다.
욥은 어려움 중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함을 고백했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는 슬픔 중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받으실지어다."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항상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가데스 바네아의 사건은 큰 교훈이 됩니다. 애굽에서 건짐 받은 일행이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12명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를 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을 12명이 똑같이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점령할 수 있다고 보고한 반면 10명의 정탐꾼은 불가능하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백성들은 흥분했습니다.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난리를 피웠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크게 책망하시며 벌을 내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즉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동안 광야에서 유리하게 될 것이며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제야 백성들은 후회하고 공격을 감행했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실패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약속을 하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어기신 것입니다. 실패의 원인은 백성들의 불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저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저들이 믿지 않고 순종하지 못하여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하나님의 계획대로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폐하여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전적으로 수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 선악의 기준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의 또 다른 질문을 들어봅시다.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면 그것을 불의 하다고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5∼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나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리요"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냈을 때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면 옳은 일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또 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결과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니냐, 과정이야 어떠하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결과만 가져오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고자 하지 않겠느냐, 저희가 정죄받는 것은 당연하다."
가롯 유다의 경우를 살펴보십시다. 가롯 유다의 배반은 예수님이 유월절 양이 되게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유월절 명절이 지난 뒤에 예수를 잡으려 하였었습니다. 백성들의 동요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서둘러 예수를 팔음으로써 급히 체포하고 처형함으로 유월절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유다의 행동이 하나님의 일을 순조롭게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가롯 유대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가롯 유다가 받은 형벌은 마땅한 것입니다. 결과야 어떻든 죄는 죄입니다.
구약에서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이야기를 살펴보십시오. 요셉이 애굽에 가서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형제들이 그를 팔았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이를 믿음 안에서 좋게 해석하였습니다. 즉 형제들이 그를 판 것은 자기 가족 전체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면서 두려워하고 있는 형제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렇다고 형제들의 죄가 정당화되는 것입니까? 결과가 좋았으니 과정은 무시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결과야 어떻든 죄는 죄입니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꿩잡는게 매다'라고 합니다.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결과만 좋으면 수단방법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공산주의식 발상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평등사회를 만들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가진 자들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평등사회가 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도 좋지 않고 과정은 물론 안 좋은 전례를 남겼습니다. 이런 생각은 아주 위험한 것이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 중에서도 '꿩잡는 게 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주 섬뜩한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정규신학을 하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사 출신이요, 상당한 양식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종종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을 할 때 거리감을 느꼈습니다. 이런 사고 구조는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좋은 결과라도 좋은 방법으로 얻어야 합니다.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할 수 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입니다. 진실만이 통할 수 있습니다. 진실이 선악의 기준입니다.
석교가족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진실이 통합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성공했다고 말하는 가치관을 멀리하십시오. 돈을 벌어도 합법적으로 벌어야 합니다. 조금을 벌더라도 덕스럽게 벌어야 합니다. 출세를 하려고 해도 정당한 방법으로 하십시오. 불의한 방법은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진실한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영원히 지켜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주안에서 진실하여 영원히 하나님께 사랑 받는 성도가 되십시다.
변 명
신성종 목사
사람들은 잘못을 했을 때에는 변명을 하는 것은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에도 그랬고(창3:12-13), 아간이 범죄 했을 때에도(수7:21) 그랬고, 유대인들이 선민의 자리를 빼앗겼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오늘 로마서 3장 1-8절은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변명이 나옵니다. 이제는 오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만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결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5명을 보내어 정보를 수집했는데 그것이 발각되었습니다. 가택침입과 도청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것을 닉슨은 알고 있었으면서 몰랐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모가 워싱톤 포스트지에 자세히 폭로가 되어 결국 닉슨은 탄핵을 받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사건입니다. 변명이나 일삼는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최근 이라크의 법정에서 후세인이 재판을 받으며 쿠르드 족들과 정적들을 재판도 없이 학살한 것에 대해서 변명을 늘어놓듯이 당시 유대인들은 변명과 공격을 하고 있고, 바울은 그것을 신학적으로 하나, 하나 답변하고 있는 것일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1. 바울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종교적 의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의식에 의존하고 있습니까? 물론 의식이란 예표로서, 혹은 그림자처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할례였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한 것으로서 신약의 세례처럼 더러운 것은 다 잘라버리고, 모든 것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는 할례의 연장이요, 완성입니다. 그러나 물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 없이는 하나의 형식이요 그림자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본질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과 성령의 세례 없이는 구원은 없습니다. 물세례는 성령 세례를 상징하는 의식일 뿐입니다.
바울은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크게 세 가지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것을 율법의 세 가지 역할이라고 말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에 이르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합니다. 갈3:24절에 보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초등교사)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우리의 죄 됨을 깨닫게 해주는 거울입니다. 롬3:20절에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줍니다. 롬12:2절에 보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는데 그 뜻이 율법에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있습니다. 하나는 DO(하라)의 형태와 다른 하나는 Don't(하지 말라)의 형태입니다. 이것을 율법의 세 번째 역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의 더 큰 착각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입니다. 이 말은 자칫하면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대부분의 성도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배웠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믿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우리가 믿는 그 대상이신 주님과 연결시켜 주님이 우리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점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사실 기독교인들만 믿는 것은 아닙니다. 이슬람교 신자들도 믿고, 불교 신자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마호메트를 믿고, 부처를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도 믿는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러나 그 대상이 다릅니다.
심지어 돈을 믿는 사람도 있고, 요즈음에는 권력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어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주님이 우리들을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주님을 붙드는 영적인 손일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믿음은 은혜를 받는 우리의 손입니다.
2. 유대인들의 변명에 대한 바울의 비판
(1)유대인들의 나은 점은 무엇인가?(1절).
바울의 말대로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꼭 같이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다면 선민의 나은 점은 무엇인가? 다른 말로 말하면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는데 그것도 아무런 유익이 없지 않는가?(1절 말). 이것은 바울의 고민이기도 했습니다.
즉 유대인들의 선민으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이제는 없어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즉 혈통과 종교적 훈련의 가치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유대인의 나은 점이 많다고 주저 없이 답변합니다. 2절에서 바울은 범사에 많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구약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셨는가? 그들의 성실성이나 의로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맡기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에 유대인들의 특권(말씀을 맡은 것)은 결코 자랑할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잘나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일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특권에는 의무가 따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마치 우리들이 복음을 들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의 특권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의무가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치 달란트의 비유처럼 그냥 묻어두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2)두 번째 질문은 유대인들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할 수 있는가?(3절)였습니다.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이 못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어떻게 되는가? 이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인간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지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배신행위에 관계없이 철회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에 “그럴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가 롬5:8절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3) 유대인들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들어낸다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필요가 없지 않는가라고 유대인들은 변명을 했습니다.
5절에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말 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가룟 유다가 아니었다면 주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을 것이고, 따라서 가룟 유다는 공헌자라는 논리와 같은 말입니다.
최근에 그런 주장을 하는 신학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들은 선을 이루기 위해서 심지어 악을 행하여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 폐기론 자들의 이론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단호하게 부정합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6절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주장은 하나님과 인간을 동일 선상에 놓는 논리입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불의 할 때 그것은 인간이 책임을 저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6절)고 바울은 답변했습니다.
7절은 유대인들의 궤변을 기록한 말입니다. 나의 거짓말로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심판을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궤변에 대해서 바울은 8절에서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고 결론짓는다.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런 이론에 근거하여 생긴 것이 그 유명한 상황윤리입니다. 21세기에 많이 유행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런 유대인들의 궤변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8절 초두에 나옵니다.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이론이며 말입니까?
3. 그러면 오늘의 말씀의 결론은 무엇인가?
(1)유대인들이 나은 것은 그들의 도덕성이나 특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맡은 것은 항상 책임이 따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특권만 보지 말고, 책임을 항상 기억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율법은 유익한 것이지만 그러나 한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첫째,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주는 안내역할을 하고, 둘째,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서 회개를 깊게 해주고, 셋째, 하나님의 뜻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3)바울이 율법의 한계를 말했지만 그러나 도덕 폐기론을 말한 것은 결코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역시 도덕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엡2:10절에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맺는 말
눅21:14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궤변이나 변명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잘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잘못을 변명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남들이 어떤 죄를 지어도 “제가 잘못 했습니다.” 라고 말하면 다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과는 상대를 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명은 인간의 가장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은 변명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에 책임이 따름을 기억하고,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유대인들의 반론에 대한 답변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
우리 나라는 옛날 양반과 쌍놈의 구분이 있었는데 양반과 쌍놈의 신분은 하늘과 땅의 차이와 같이 완전히 구별된 신분이었던 것입니다. 양반과 쌍놈의 차별된 신분을 아는 우리들로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을 양반과 쌍놈의 수준으로 이해하셔도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족보에 의해 유대인이 된 것은 표면적 유대인이요, 비록 이방인이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참 유대인이 될 수 있다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 풍습에 비교한다면 족보로 된 양반은 표면적 양반이요 비록 쌍놈의 족보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행동이 바르면 참 양반이 될 수 있다고 선포한 것이나 같은 선포였던 것입니다. 양반과 쌍놈이 구별될 수 없고 양반이나 쌍놈이나 다 똑 같다고 선포했다면 그 당시의 양반들이 얼마나 분하며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이방인과 조금도 차이가 없이 둘 다 똑같은 신분으로 선포했기 때문에 그들이 가졌던 자부심에 대단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충격을 받은 유대인들이 털어 놀만한 세 가지의 불평을 가상하고 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털어 놀만한 불평은 결코 타당하지 않다고 답을 하면서 유대인들이 남에게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자기는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윱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경멸이나 하는 유대인들은 믿지 않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현대의 교인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 귀한 교훈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인가? (1-2) [2]유대인의 불 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하게 할 수 있는가?(3-4) [3]유대인의 불의는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는가?(5-8)입니다.
[1]맨 먼저 1절부터 2절까지의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인가?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질문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똑같이 취급한데서 올만한 불평이요 질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율법을 주셨으며 애굽으로부터 구출하시되 갖가지의 이적적인 사건들을 보여주시면서 보호하시고 구출시켜주신 그 많은 과거의 체험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택해주시므로 입혀주셨던 그 많은 특수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는 말이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믿음 생활이 무엇인지를 보아온 자녀와 불신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신앙 생활하는 것을 보지 못했던 자녀를 두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견해로는 믿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든지 불신 부모 밑에서 태어났든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듣고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그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혜택이나 특수가 아무 것도 없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같은 차원에서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나음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부모 덕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기회가 많았을 것이고 크리스천 가정의 좋은 삶을 보아왔을 것이므로 좋은 믿음을 갖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므로 불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보다는 큰 혜택을 본 셈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일찍부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고 메시아에 대한 소망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혜택을 받은 그들이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오신 메시아를 십자가에 메 달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아 남은 가르쳤으나 자신들은 지키지 않았으므로 율법을 받지 않고 양심의 법을 지키지 못한 이방인이나 그 불신에 대해 심판 받아 마땅하다고 한 것입니다.
[2]두 번째로 3절부터 4절까지의 유대인의 불 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하게 할 수 있는가?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그의 자손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성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며 그의 씨를 통해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받았지만 자기 아내가 나이 많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의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좀 참았으면 이스마엘을 통한 고통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한 그의 불신이 현재의 중동 전쟁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즉 이스마엘의 후손과 이삭의 후손의 싸움이라 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등한히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파기하시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되게 하셨으며 아브라함의 씨앗인 후손 중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하심으로 그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질문은 자기들이 모세를 통해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안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신실하심을 무효화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답은 분명합니다. 인간들은 거짓되어 약속을 지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참되시므로 그가 약속하신 것은 그대로 지키신 다는 답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답을 주기 위해 시편 시 51:4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를 인용했는데 이 말은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론에 따라 변한 것은 없고 늘 의로우시며 그의 말씀에 따라 판단하시는 판단은 늘 옳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불 신앙을 가진다해도 하나님은 신실하시어 사람들 때문에 그 무엇을 변경하시지 않고 그의 계획대로 다 실행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3]마지막으로 5절부터 8절까지의 유대인의 불의는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는가?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간은 거짓되고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점점 의로와 진다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인간의 의로움의 격차가 점점 줄어들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말을 한다면 만일 인간들이 점점 더 악하고 불의를 행한다면 인간과 하나님의 의로움의 격차가 점점 커질 것이므로 인간이 불의 할수록 하나님의 의가 돋보이게 들어 나게 된다는 이론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논리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준 불의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은 옳지 않지 않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답변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죄이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것이지 그 죄로 인해 나타난 주변 사정은 전연 고려되지 않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거짓을 많이 행한 결과로 하나님은 더욱 의롭게 보이시고 영광스럽게 보이시게 된다 할지라도 죄인은 그 지은 죄를 인하여 심판하신다는 답인 것입니다. 그렇지 안는다면 하나님의 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우리들은 더 많은 죄를 짓고 악을 행하자고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답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50이란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해 주셨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50의 자비를 베푸신 50짜리 하나님이 되신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100이란 숫자의 자비를 베푸신 100짜리 하나님이 되시게 하기 위해 그 사람이 100이란 죄를 다시 짓겠다는 것은 하나의 궤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고 변경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여 궤변을 좋아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단호히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표준으로 죄인들을 심판하시며 심판시에는 말씀의 표준 외에 어떤 변명과 궤변이 결코 통하지 않는다는 교훈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그렇지 않다는 뱀의 말을 들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노아 때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선포하셨는데 역시 말씀대로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간에 사람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시겠다고 심판의 의지를 성경에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대로 심판이 이뤄질 것이며 그 심판의 표준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약속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실 것입니다. 심판대 앞에선 사람들마다 많은 변명과 특수한 사정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많은 궤변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나왔지만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오래 믿었으며 교회 일에 몸바쳐 봉사했다는 내역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믿음을 버렸다고 한다면 그 좋았던 사정이 심판에서 아무런 변명도 되지 못하고 자기를 구출해 주지 못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더욱 의롭게 하고 그의 자비가 더욱 풍성케 하기 위해 죄를 더 많이 지었다는 궤변을 한다면 지은 죄를 다 물어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엄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싫어하시어 죄 사함을 위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하셨는데 하나님을 위해 죄를 지었다고 한 자를 심판하실 것은 뻔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룟 유다에 대한 궤변을 털어놓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함으로 인류의 죄를 용서하실 계획이셨으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도록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는 인류 구원의 공로자라는 궤변입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기 때문에 가룟 유다가 아니고서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메 달리게 하실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삭을 대신하여 양을 준비하신 거와 같이 말입니다.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면 그렇다면 요단 강에 가서 받아야 한다고 대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세례를 꼭 받으라고 하면 이것이 못마땅하여 궤변을 말하기를 전쟁터에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믿기는 했으나 세례 받을 기회가 없이 전쟁 중에 사망한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냐고 특수한 예를 들어 대항하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의 교훈은 어떤 상황, 어떤 형편, 어떤 족보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심판은 말씀의 표준에 의해 집행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변명도 어떤 궤변도 하나님 앞에서는 용납될 수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약속대로 심판하시되 그의 약속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말씀 받기를 거절하고 변명을 좋아하는 자는 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믿음의 남용
주병열 목사
우리는 지난 세 주간 동안 인간의 죄에 대해 지적하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주는 세상적인 죄들에 대해 지적합니다. 윤리적인 죄와 성적인 타락,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죄들에 대해 신랄하게 도전했습니다. 두 번째 주는 도덕주의자들의 죄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들은 도덕과 윤리를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들이었지만, 남을 판단하는 죄를 범합니다. 그래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고,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고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 번째 주는 유대인의 죄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종교인의 죄입니다. 종교인들이 쉽게 짓는 죄는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하고 남용하며 악용합니다.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 실은 그 안에서 자신의 유익을 구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간음에 대한 계명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부부가 이혼을 해야 할 경우는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주어서 그가 다른 곳에 가서도 창녀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게 해서 그 사회에서 불행하게 되지 않도록 율법적으로 당시 약한 여성들을 배려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 남자들은 이 법을 악용했습니다. 아내가 싫증이 나고 다른 여인에게 관심이 갈 때 그들은 언제든지 이혼증서만 써 주면 이혼할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있을 때 이혼증서를 써 줌으로써 그들은 합법적으로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악용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유대인들, 즉 종교인들의 율법 남용의 일은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 주 위와 같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너희들이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라 자부하지만, 표면적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면적 할례가 중요하며,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몸에 하는 것보다 마음에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말씀을 전하는 사도 바울에게는 언제나 유대인들의 도전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도전들 중에 대표적인 것 두 가지를 로마서 3장을 시작하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의 질문, 혹은 도전을 로마서에서 언급하면서 그에 대한 답변을 줍니다. 그 첫 번째 도전이 1절의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만약 바울의 말처럼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표면적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우리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무슨 소용이 있으며, 우리가 할례를 받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냐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사실 다음 질문으로 가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징검다리 질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받은 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의 유대인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의 후손을 통해 주신 언약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이 되지 않겠냐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은 아브라함으로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셔서 그의 후손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고,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할 것이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언약)은 그의 후손, 즉 이스라엘 민족에게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표증으로 이스라엘 백성 남자들은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언약을 외적으로 표시하는 상당히 중요한 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몸의 할례의 흔적을 보면서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날마다 새롭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볼 때마다 자랑스러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어려운 고난을 당할 때도 자기 몸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야’ ‘하나님은 지금도 나와 함께 하셔’ 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랑만 남고, 삶은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부심은 남아있는데, 그 자부심은 교만이지 삶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남을 우습게보고, 저들은 할례 받지 못한 백성이라고 상종조차 하지 않던 것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 너희의 할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강하게 도전하는 말씀을 2장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이 실제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바울의 말대로 할례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할례의 언약과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유대인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은 모두 무엇이 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실패하실 때가 있느냐는 질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할례도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특권이고, 귀한 것입니다. 그것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할례를 받았지만, 할례에 따라오는 삶이 없다면 그 할례가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그들은 할례를 통해 자신들과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할례를 받을 때는 할례의 흔적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구나 하고 느끼고 고백하고 그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할례를 자랑만 했지, 그에 따라오는 고백도 없고, 삶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의 할례가 무슨 소용이 있냐고 도전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날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믿는 부모님들은 아기로 하여금 유아세례를 받게 합니다. 유아세례라는 것은 부모님의 신앙고백으로 아이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 아이를 나의 아이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아이로 키우겠다는 서약이 그 안에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귀한 고백입니다. 유아 세례를 받고 자란 아이는 장성해서 부모님의 신앙고백을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됩니다. 부모님으로부터 기도를 받으면서, 우리 아기 나중에 커서 훌륭하게 자라고 하나님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귀한 일을 하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를 받고 자란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내 부모님이 나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키워왔음을 고백하면서 그 믿음의 유익을 더 크게 확장시키는 은혜를 누릴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반드시 다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중에는 나중에 믿은 사람들보다 더 못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유아세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유아세례는 그 자체로서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받은 유아세례를 소중하게 여기며 부모님의 신앙을 내가 이어받지 않는다면 유아세례가 자신에게 아무 것도 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자랑할 일이 못됩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저는 목사의 사역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아이에게 목사 된다는 소리는 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목사 됨이 그렇게 감사하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쁩니다. 목사가 되면서 처음 적응되지 않았던 것은 주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도 보내고 싶고, 가정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은 지금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토요일 늦게까지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고 수고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목사 됨을 지켜나가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것이 목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없고 가운 입은 목사라는 사실 자체로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들로 봉사할 기회가 있습니다. 성가대와 꽃꽂이와 주방봉사와 청소봉사 등, 우리교회는 참 할 일이 많습니다.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 자체로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남에게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 자리에 있어서 남들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 자리가 나에게는 기쁨이요 감사요 감격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기쁘고 감사해서 그로 인해 기꺼이 자신의 삶을 드리는 수고가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성도라는 사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할례를 삶의 고백 없이 다만 자기들의 자랑으로만 사용했던 유대인들의 이중적인 신앙생활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살펴보고, 믿음의 고백과 삶의 기쁨으로 주님께 응답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5절부터 8절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성경(공동번역)을 통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느님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하는 말이지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겠습니까? 또 "나의 허위가 오히려 하느님의 진실을 더욱 드러내고 하느님의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죄인으로 단정을 받아야 하느냐?" 하고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예 선을 드러내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 하는 말이 나옴직도 합니다. 사실 내가 바로 그런 말을 한다고 하면서 나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단죄를 받아 마땅합니다.’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마태복음 20장 28절의 말씀대로 사람들을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 땅에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의 일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왜 그가 벌을 받아야 하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궤변입니다. 말이 안되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이런 논리적 함정에 빠질만한 이야기는 더 많이 있습니다. 요셉이 두 번의 꿈을 꿉니다. 한 번은 꿈에 밭에서 추수를 하는데,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단은 자기 단에 둘러서서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꿈에서는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별에게 절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그 미움이 결국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넘기는 증오를 갖게 했습니다. 그로 인해 요셉은 애굽에 팔려갔고, 그로부터 13년 동안 종살이와 옥살이를 하고 난 후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요셉이 누구 때문에 애굽의 총리가 된 것입니까?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죄 가운데 멸망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인간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지셨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들고,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온갖 과일 나무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한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나무의 열매만큼은 먹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 대한 원인제공자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 짓는 자들의 핑계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잘못이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냈다면 내가 왜 심판을 받아야 하냐고 항의합니다. 8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사람들이 말한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아서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왜 그들의 행위를 나쁘다고 해야 하느냐는 도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굉장한 도전입니다.
이런 도전을 오늘 우리들도 매우 자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신학교를 졸업할 때쯤이었습니다. 어느 동료 전도사가 졸업도 하기 전에 먼저 사역을 나갔습니다. 다소 지방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디든 간다는 마음으로 부름을 받고 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담임목사님과의 갈등이었습니다. 주일 예배가 마치면 교역자들이 회의를 하는데, 보통은 밤 12시까지 하는 것은 보통이었고, 어떤 경우는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기도회를 할 때까지 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시간에 효과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담임목사의 왕국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목회하는 곳에 참여하면서 이 전도사님이 마음에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8개월 만에 그 교회를 나왔습니다. 여러 가지 만류와 회유가 있었지만, 그는 단호하게 그 자리를 나왔습니다. 어디 가서 다시 목회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목회를 안 하면 안했지 이런 곳에서는 안한다고 결심하고 나왔답니다.
얼마 후에 그 전도사님에게서 다시 이런 고백을 들었습니다. 자기는 그렇게 교회를 나옴으로 그러한 불의에 대해 하나님의 책망하심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즉 나도 잘못한 것이지만, 나의 불의를 통해서 그의 잘못을 드러내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의 말씀처럼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도 잘못하는 것이 있지만, 그것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된 것을 가르칠 수 있다면 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논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에 깨달은 것은 그 분의 잘못은 그분의 잘못이고, 나의 잘못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그의 잘못을 고치려고 내가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너그럽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진리의 칼을 드리대곤 합니다. 자신의 불의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이 되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서 종교적 위선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모습이 없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자칫 우리에게 유대인들과 동일한 종교적 위선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살피는 근신하는 마음이 없이는 우리는 매우 자주 그리고 매우 쉽게 이런 위선과 오만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소중히 여기자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으면 그 할례의 의미를 깊이 새기면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고난과 어려움 중에도 그것이 나의 삶에 힘과 소망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할례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우월성을 자랑하는데 사용하고, 하나님 앞에서 감사와 기쁨, 그리고 고난 중에도 믿음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악을 합리화시키는 궤변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나의 악한 행위가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면 내가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냐고 논쟁하는 유대인들처럼, 우리들도 간혹 결과만 좋으면 동기가 문제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지적하면서 나는 오히려 법을 어깁니다. 세상의 악을 멸하기 위해 내가 악을 행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지적합니다. 성숙한 성도로 살아가기 위해 더욱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자신을 돌아보는 근신하는 자세를 지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