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태백은 수중에 비친 달을 보고 시흥에 취한 나머지 그걸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현대인들은 과연 달의 정체가 무엇인지 로켓을 발사하여 달의 표면을 샅샅이 뒤져보고 과연 달이 인간에게 어떤 유용가치가 있는가를 찾아내고 있다. 이런 실리적인 추구를 하는 현대인에겐 이태백의 낭만은 한갓 넌센스에 불과할뿐이다.
그러므로 허대인은 자연을 멀리두고 관망함으로써 느낄 수 있는 자연에 대한 신비감을 상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허대과학은 인체구조 등 모든 물질적인 구성원리를 거의 다 파악하고 있는것 같다. 반면에 인간 실제 생활내면에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인간사가 부지기수이다.
물질분명은 종교나 예술 문학이 추구하는 내적세계보다 근본적인 인간학 우주신비의 영역밖에 있어 그것은 궁극적인 문제와는 실제 먼거리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할 때 과학으로 인간이 우주를 정복했다느니 인간의 실제가 무엇이라느니, 결국 우주나 자연 인생 등의 실체는 하등의 신비로운 것도 없으며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과학 물질만능의 현대인만큼 정신적으로 미개한 시대인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시시각각으로 자아가 무엇인지 자기 존재이유는 무엇인지 자아를 확인하고 내성하고 돌아볼 때 단순한 물질로서의 인간으로 끝나지 않고 보다 인간으로서 인간만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수 있다. 개개 인간 영혼의 신비는 인간이 추구하는 영원한 과제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상치되는 성향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동물이라고 한다.
사람이 남을 사랑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파괴하는 것도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의 하나가 아닐까? 따라서 인간의 돌연한 파과성은 그의 평탄한 인생행로 위해 우연히 일어나는 사고도 아니며, 그것은 뿌리깊은 인간본능의 발로라는 말이 있다. 이 본능은 각자가 가진 이성과 의지로써 좋은 방향으로 돌려질때 오히려 건설적인 행위로 나타날 수가 있다.
이런 이성이나 의지력은 선천적일수도 있지만 후천적인 교육에 의하여 육성될 수가 있을 것이다. 인간사회는 아무리 안정된 환경일지라도 인간 자체가 불완전한 존재이고 사회가 그런 인간들로 구성되니만큼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흔히 현사회는 범행자 자체보다 그가 처해있는 사회환경에 그 원인을 추궁한다.
물론 개인의 범행이 어느정도 사회책임이 있고 동시에 개인의 운명적인 환경에 동정을 금치 못하는 원망스러운 때가 허다하다. 그러나 인간은 의지와 자유와 사고의 기능을 가진 이상 자기행위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면할 수가 있겠는가? 모든 범행의 동기를『사회가 나빠서』이런 식으로 책임 전가를 한다면 범행의 피해와 사회악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하겠는가?
자기범죄를 외적인 탓으로 돌리고 사회에 대한 파괴적인 저항이 마치 뚜렷한 대의명분이나 되는 것처럼 자기행위의 합리화를 하는 그들에게 어떤 절실한 사회의의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참으로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이 시대가 너무나 물질만능주의에 치우친 나머지 사람들은 지나치게 타의에 지배되는 타성적인 인간이 아니면 무조건 사회에 대한 반항으로 범행하는 몰지각한 청소년을 계몽하고 선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최소한의 인간다운 이성을 가지고 자유와 책임으로 의지력을 훈련하는데 있다고 보겠다. 이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이다.
김영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