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세손 시절과 영조 3년상을 치른 이후 의빈 성씨에게 청혼했지만 두 차례 모두 거절당한다. 그러다 다른 후궁인 화빈 윤씨가 의빈을 괴롭히는 걸 막으려고 한 세 번째 구애로 사랑을 이루게 된다. 과연 조선 시대에 세손이나 왕이 구애하는데 궁녀가 이를 거절하고, 심지어 왕은 이를 받아들이는 게 가능했을까? 역사학자들조차 전무후무하다고 말하는 이 사건은 의빈이 눈을 감은 뒤 정조가 직접 지은 ‘어제의빈묘표지명’에 기록돼 있다.
묘표는 죽은 이의 이름과 이력 등을, 묘지명은 그를 칭송하는 글을 묘비 등에 새긴 것을 말한다. 이 비석의 앞면은 박명원, 뒷면은 서용보의 글씨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장서각은 조선에서 배우자를 위해 비석의 문장을 짓거나 글씨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으며 특히 국왕이 글을 짓고 당대 명필로 이름 높던 이들이 글씨를 쓴 것은 유사한 예를 찾기 힘든 경우라고 설명한다. 정조는 이 글 말고도 의빈의 3년상을 치른 이후까지 ‘어제의빈치제제문’,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 등 여러 제문·축문을 직접 지어 의빈의 죽음을 비통해하면서 절절한 사랑을 표현했다.
특히 ‘어제의빈묘표지명’에서 정조는 “처음 의빈에게 승은을 내리려 할 때 ‘효의왕후가 아직 자식을 보지 못했다’며 죽기를 각오하고 울며 거절하자 감동해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15년 뒤 널리 후궁을 들인 뒤 다시 명하였으나 또 고사했다. 이에 의빈의 하인을 벌한 뒤에야 명을 따랐고, 그달에 임신을 하여 임인년(1782년, 정조 6년) 9월에 왕세자가 태어났다”고 밝혔다. 정조가 31살 때로, 첫 자녀였다.
다른 기록들과 함께 살펴보면, 정조보다 1살 어린 의빈은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 집 청지기의 딸 성덕임으로, 창덕궁에 있던 혜경궁 홍씨의 처소 궁녀로 10살(1762년) 때 입궁했다. 그해는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때로,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영조가 옮겨간 경희궁으로 거처를 따라 옮기면서 외로웠을 혜경궁이 어린 의빈을 딸처럼 아꼈다고 한다. 정조와 의빈이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효의왕후와 결혼한 지 4년이 넘도록 후사가 없었던 15살 세손 정조였기에 의빈이 구애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조는 왜 이를 수긍하고 15년을 기다렸을까? 극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지점에서 정조는 조선의 로맨티시스트로 등극한다. “의빈을 후궁의 반열에 둔 지 20년, 산달에 기력이 가라앉자 매일 세수할 때 직접 가서 보고 살폈다.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후계를 잇는 일)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정조실록>, 1786년 9월14일) 같은 애절한 기록은, 그가 진심으로 의빈을 사랑했기에 더 고집을 부리거나 처벌하지 않았다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당시 정치적인 상황에 비춰보면, 자기 마음대로 하기엔 정조의 입지가 불안했다는 풀이도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여색을 밝힌다는 것이었고, 정적인 노론 벽파가 그의 처소에까지 세작을 심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세손 자리에서 끌어내릴 꼬투리를 잡으려 들던 시절이었으므로 스스로를 지키려면 그래야만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두 사람은 1782년 문효세자를 낳았고, 정조는 직접 빈호를 지어 내리며 다정한 시간을 보냈다. 이듬해엔 옹주도 출산했다. 하지만 옹주는 태어난 지 2달여 만에 갑작스레 숨졌다. 생후 22개월 때 세자로 책봉된 문효도 5살인 1786년 5월 홍역으로 목숨을 잃었고, 임신 중이던 의빈은 같은 해 9월 34살에 눈을 감았다. 당시로선 늦은 나이의 임신으로, 임신중독이 사망 원인으로 추정된다.
이런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왜 이제야 널리 알려지게 됐을까? 이미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전통한국연구소 연구교수는 “후궁은 정치나 사회 변화와 크게 관련이 없기 때문에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이 연구가 되지 않는 관심 밖의 인물들”이라며 여성 사회와 관련된 자료 자체가 별로 없고, 있어도 한글로 번역이 잘 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어제의빈묘표지명’ 등은 정조가 직접 쓴 글을 모은 60권짜리 <홍재전서>에 실려 있지 않다. 아직 정식 한글 번역본도 없으며, 그나마 한자 원문 PDF 파일을 제공하는 디지털 장서각 사이트에서도 텍스트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어제의빈묘표지명’ 하나뿐이다.
드라마의 원작 소설을 쓴 강미강 작가는 <한겨레>에 “(소설을 쓰기 전 우연히) 논문을 보고 이런 내용을 알게 됐다. 마침 한문법을 공부하던 시기여서 사전을 찾아가며 어찌저찌 해석을 해서 집필하게 됐다”고 밝혔다.
“아우만은 절대 죽이지 않겠다 버티셨는데…”
드라마에는 노론 벽파와 결탁한 궁녀 비밀조직 광한궁이 정조 즉위 뒤 대전을 습격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진상을 밝히는 과정에서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전군이 배후로 지목됐고, 정조는 끝내 은전군을 죽인 뒤 괴로워한다. 드라마를 쓴 정해리 작가는 “행궁에서의 시해 시도 사건은 드라마상의 순수 창작이지만, 대전에서 벌어진 역모의 모티프는 실제 ‘정유역변’(정조 시해 미수 사건)이다. 월혜는 사료 속 실존 인물로 역모의 공모자”라고 <한겨레>에 밝혔다.
‘역적의 아들’인 정조는 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적들한테 세손 시절부터 끊임없이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그의 세손시절 기록인 <존현각일기>엔 “이때 적도(賊徒)와 역당(逆黨)들이 흉모(凶謀)를 빚어내고 얽어내어 위태롭게 만들려는 계략과 협박하려는 꾀가 날로 더욱 급박하게 이루어지니, 나는 낮에는 마음을 졸이고 밤에는 방 안을 맴돌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흉도들이 내가 거처하는 집을 엿보아 말과 동정을 탐지하여 살피지 않는 게 없었기 때문에 또한 옷을 벗고 편안히 잠을 자지도 못하였다”(1775년 윤 10월5일) 같은 기록이 심심찮게 존재한다.
<정조실록>(정조 1년 1777년 7월28일)을 보면, 이날 정조는 경희궁 존현각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고 있었는데, 철편(도리깨 모양의 철제 무기)을 든 정조의 호위군관 강용휘와 칼을 든 자객 전흥문이 정조를 죽이려고 존현각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뜯고 모래를 뿌렸다. 이날 역모는 실패했지만, 범인도 잡히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조는 창덕궁으로 이궁하는데, 강용휘와 전흥문은 8월11일 다시 한 번 정조를 암살하려고 궁궐 담장을 넘으려다 포졸들에게 잡히고 만다. 이때 이들과 내통해 도운 것이 강용휘의 딸 강월혜로, 붙잡혀 옥살이를 하다 1782년 흑산도에 노비로 보내진다.
이 사건을 꾸민 것은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르는 데 일조한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 등이었다. 그런데, 이들을 추국하는 과정에서 이들 일당이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전군 이찬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가 발각된다. 이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은전군이 이들에게 가담했다는 증거가 없었지만 노론을 비롯한 대신들은 그의 사형을 거세게 요구했다. 정조는 이를 거부했으나, 대신들의 끈질긴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사약을 내린다.
정조를 오랫동안 연구하고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의 책을 낸 김준혁 한신대 교수(한국사)는 영조의 금등은 사도세자가 죽은 뒤 영조가 정조와 채제공을 불러 “그 죽음엔 나도, 사도세자도 잘못이 없었다”는 취지로 쓴 것으로, 그의 첫 번째 왕비였던 정성왕후의 위패를 받치는 방석 안에 숨겨놨었다. 또한 정조가 이를 공개한 것은 1793년 수원 화성 축성을 준비할 때로, 축성에 반대하는 노론의 여론을 잠재우려는 시도였다고 설명했다.
영조 때부터 신임이 두터웠던 남인 채제공은 정조 17년(1793년) 영의정에 오르면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재조사하고 관련자를 징계하라는 상소를 올린다. 노론 벽파를 중심으로 조정에선 채제공을 벌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이에 정조는 “금등 속의 말은 하나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하나는 지극한 효성에서 나온 것”이라며 ‘혈삼혈삼 동혜동혜 수시금장천추 여회귀래망사(血衫血衫, 桐兮桐兮, 誰是金藏千秋, 予懷歸來望思)라는 금등의 일부 구절을 공개한다.
<정조실록> 8월8일치 국역본은 이를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 동(桐, 오동나무)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 천추에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란다”고 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뒤쪽 두 구절은 “누가 안금장, 차천추(한나라 무제의 충신들)인가. 내 죽은 자식을 그리워한다”로 보는 연구가 많다. 어쨌든 핵심은, 정성왕후의 죽음을 슬퍼해 피눈물을 흘려 옷소매를 적실 정도로 효심이 깊은 사도세자였고, 영조는 공식적으로 그를 역적이라 못 박은 것과 달리 신하들의 모함에 못 이겨 그런 아들을 죽게 한 것을 후회한다는 내용이다.
김준혁 교수는 채제공을 벌하라는 근거가 사라진 노론 벽파는 더는 이런 주장을 하지 못했고, 정조는 아버지 죽음의 진상을 다시 캐는 대신 화성 축조에 이들의 협조를 얻어내는 것으로 타협을 이뤄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광한궁과 동덕회는 실재했던 조직일까? 심용환 역사엔(N)교육연구소 소장은 유튜브 채널 ‘현재사는 심용환’에서 “조선은 왕이 신하와 토론·숙의를 해 국정을 운영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거기에 궁녀나 환관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특히 조선처럼 성적 위계가 분명한 사회에서 궁녀의 정치세력화는 불가능하다며 더구나 정치적인 위력을 보이려면 당상관(정3품) 이상은 돼야 하는데, 궁녀 가운데 가장 높은 제조상궁이 정5품이므로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건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광한궁과 달리 동덕회는 실제로 있었다. 동덕회는 정조가 즉위한 이후 결성됐다. 그 계기는 정조의 대리청정이었다.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세손은 누가 노론인지 소론인지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더욱 알 필요가 없다”며 반발한다. 이는 <영조실록>에 기록돼 있는 좌의정 홍인한(혜경궁의 작은아버지, 정조의 작은외조부)의 실제 발언으로 ‘삼불필지설’ 즉, 알 필요 없는 세 가지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장차 나라를 운영할 사람에게 정책 조율(당파)에도, 문무관 인사와 국방(이판과 병판)에도, 국정 지휘(조정의 일)에도 개입하지 말고 대신들이 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라는 것으로, 정조뿐만 아니라 영조까지 능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82살에 기억력과 판단력이 온전치 못했던 영조는 홍인한을 벌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뒀다. 정조의 최측근이었던 홍국영은 이러다 대리청정은커녕 왕위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동궁시강원 사부들과 뜻을 모아 소론 핵심인물인 서명선에게 홍인한의 탄핵 상소를 부탁한다.
이 상소를 올린 날이 1775년 12월3일, 영조가 이를 받아들이고 정조가 공식적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한 게 일주일 뒤인 12월10일,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가 등극한 게 이듬해 3월10일이었다. 정조는 이후 홍국영과 서명선, 동궁시강원 사부들과 동덕회를 만들어 매년 12월3일마다 즐겼는데, 이는 위태로웠던 시절의 초심을 잊지 않으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정조는 이들에게 ‘보종시’, 즉 어떤 일이 있어도 사약을 내리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홍국영은 노론 벽파 홍인한과 같은 집안에서 정조보다 4년 일찍 태어났지만, 기생집과 노름판을 전전하는 아버지 탓에 그는 어린 시절 놀기를 좋아했고 왈패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러다 어머니의 호소로 공부를 시작해 25살인 1772년 과거에 급제했다. 하지만 급제 전 아버지가 홍인한에게 무시와 모욕을 당한 일로 원한이 깊어 그쪽 당파로는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예문관에서 일하며 영조의 눈에 들었고, 1774년 세손시강원 설서에 임명되면서 정조와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한중록> 등은 영조와 정조 모두 인물 좋고 머리 좋은 홍국영을 매우 좋아했다고 적고 있는데, 영조가 똑똑한 홍국영을 정조의 사람으로 만들어주려고 보냈다는 풀이가 많다. 그는 순식간에 정조의 최측근 자리를 차지했는데, 궁녀들의 호의를 사 각종 정보를 빼내 정조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만난 지 2년 만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홍국영은 도승지로 고속승진을 했다. 금위대장, 훈련대장, 숙위대장 같은 국왕 호위·수도 방어 책임자 역할도 겸직하며 승승장구했다. 정조 2년인 1778년엔 13살 된 여동생을 정조의 첫 번째 후궁(원빈 홍씨)으로 들이면서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궁에 들어간 지 1년이 채 못돼 원빈이 숨진 1779년 5월7일의 <정조실록>이다. “홍국영의 방자함이 날로 극심하여 온 조정이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홍씨(원빈)의 빈장(주검을 임시로 안치해 본장례를 치를 준비를 하는 것)에 관한 절차를 예관(禮官)이 모두 참람한(분에 넘치는) 예(例)를 원용하였고 송덕상은 마땅히 공제(公除. 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뒤 일반 공무를 중지하고 26일 동안 조의를 표하는 일)가 있어야 한다고까지 하였다.”
또 홍국영은 정조의 조카를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왕의 본관인 완산주(전주)와 자신의 본관인 풍산에서 한 글자씩을 딴 ‘완풍군’에 봉해, 그때까지 자식이 없었던 정조의 후계자로 삼도록 했다. 급기야, 효의왕후가 원빈을 독살했다고 생각해 왕후의 독살을 시도했다가 들통 난다. 하지만 정조는 약속을 지켰다. 그를 강릉으로 유배만 보냈을 뿐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홍국영은 화병에 시달리다 정조 5년(1781년) 숨졌다. 34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