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의 하룻밤
이 현 자
부안에서 내변산을 지나, 청자로(路) 따라 전주 가는 길이다. 산야는 초록으로 흠뻑 물들어 청자 빛보다 더 푸르른데, 바닷물이 쑥 빠져나간 드넓은 갯벌은 저 멀리 수평선과 맞닿아 있다. 아니 일상에 지쳐 허허로운 내 마음과 이어져 있다. 열려진 차창 틈으로, 염전 쪽에서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갯내를 싣고 와 표정 없는 얼굴에 스친다
한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 기기(機器)에 목적지를 설정하고 안내에 따라 다니는 길이지만, 어딘가에서 누군가 나타나 손 맞잡고 이끌어 줄 것 같은 막연한 그리움의 도시다. 지금 있는 곳은 막걸리가 넘치는 삼천동 골목도 아니고 산해진미가 잘 차려진 음식점도 아니다. 태조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이 코앞에 있고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해 연회를 베풀었던 오목대가 지척이다. 들풀 같은 백성들과 이름 없는 군사들이 무시로 다녔을 이 거리에 내가 서 있다. 묵직한 역사가 흐르던 이곳 한옥 마을의 거리는 때 아닌 젊음이 넘쳐나고, 정체불명의 먹거리와 놀 거리는 뿌리 깊은 나무에 웃자란 새싹 같이 느껴진다. 옛사람들이 목숨 바쳐 지켜낸 역사의 바탕 위에 세워진 풍요를 저들은 알까. 사람도 그 나이에 맞지 않게 차림새가 요란하거나 조용했던 이가 호들갑스러워 지면 놀라기도 하려니와 이질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이다. 예향의 도시에서 느끼는 젊음은 한옥과 뒤섞이고 빛바랜 느림의 미학이 더욱 마음을 허전하게 한다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나서듯 인파가 북적이는 거리를 여기저기 쏘다닌다. 청년과 노년의 중간쯤 어정쩡하게 끼어 세월이 흐른 변화에 따르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일 년이면 바뀌는 세상 아닌가. 훗날엔 이런 청춘의 모습이 또 다른 유형무형의 문화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끌리던 도시 어디선가, 잘 왔다고 반겨주는 목소리가 들려 올 것 같은데, 옛 모습을 은근하게 품은 활기 넘치는 거리엔 세월이 곁들여져 다양한 삶들로 덧입혀 진 것 같다. 생경한 모습은 내 마음을 흔들지만, 손 내밀면 잡아줄 것 같은 허상이 아른거린다.
마음이 허전할 때 심성이 깊고 맑은 사람 옆에만 서도 위안이 되듯, 유구한 역사 앞에서는 저절로 경건해진다. 국난에도 사고(史庫)의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문화를 굳건히 지켜나가던 순박한 백성들이 이 길을 오고 갔을 것이다. 마음속에 발자국을 그리며 천천히 걷다 보면 전주 읍성의 남문엔 보초 서는 옛 군사 같은 풍남문이 있고, 객사였던 풍패지관과 전주 향교가 어우러져 있다. 허상이 아닌 오래된 문화유산이 든든하게 자리하고 그 위에 피어난 젊음의 문화가 결코 가볍지 않은 것 같다. 무심결에 걷다 길의 끝머리쯤 경기전 맞은편에는 호남에서 처음, 서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며 조형미가 돋보이는 전동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 최초의 순교자가 있었던 이 건물은 무거운 과거를 안고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빌린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오고 가는 젊은이들은 마냥 밝기만 하다. 저 청춘들도 살다보면 역사의 뿌리를 되돌아 볼 수 있으려나... 성당을 사진에 담는 대신 마당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이들과, 이 거리를 굳건히 지켜낸 수없이 많은 혼을 기리며 마음속으로 가만히 성호를 그어 본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도 이곳의 역사처럼 깊이 오래 보아야 보이는 것이 있듯, 시간 차이를 두고 몇 번 와보고서는 외관이 변하였다고 실망하거나 다른 시선으로 볼일은 아닌 것 같다. 비빔밥의 조화처럼 옛것들이 산재해 있는 거리를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수백 년이 흘렀어도 깊은 내력이 제자리에 뿌리 박혀 있다. 그것을 지켜내고 보존하는 노력이 사람의 마음 다독이듯 곳곳에 묻어난다. 그토록 심정이 끌리고 뜨거워졌던 것은, 깊이 있는 제 모습을 보아 달라는 도시의 외침 때문 이었나 보다. 가끔은 사람보다, 지난 추억보다, 무심코 떠난 여행이 일상에서 허기진 감정을 추스르게 한다.
천천히 다니다 보니 사람의 내면을 보는 눈이 생긴 것처럼 여행의 끝에 있는 역사의 도시이자 젊음이 넘치는 거리의 깊이가 보이는 것 같다. 왕은 아니지만, 본향에 온 것처럼, 누군가 반기고 있는 것처럼, 그 어느 때 보다 이 도시에 녹아든다. 오늘밤이 지나면, 좋은 사람에게서 자연스레 사람의 냄새가 배어나듯, 그간 알지 못했던 유서 깊은 고장의 향기에 취하려 시내 초입에 있는 국립박물관으로 향할 것이다. 그곳으로 가면 인자하고 인품이 깊은 누군가가 나를 기다릴 것만 같아, 괜히 설레어 잠을 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