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김효은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방탄복이야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구명조끼야
화약을 뭉쳐 온몸에 덧댄다
누군가 지나가다가
휙 던진
담배꽁초 같은
한 마디
말에
순식간에
불이 옮겨붙는다
구경꾼들
몰려오고
아침이면
해변 쪽으로
쓸려온
비명과 변명의
찌꺼기들
모래 위에는
살려주세요
곧 지워질
글씨들이
패각처럼
먼지처럼
쌓여있다
조문과
구조신호와
그것은
짧을수록
좋다
완벽한 시월을 위한 삼중주
얇은 네트형 커튼 사이로 햇살이 쏟아진다 오후의 빛 고운 입자들이 흔들리며 체망에 투과된다 유리창을 뚫고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의 음영들 더러는 바닥으로 미끄러지는 그림자의 미늘들 언젠가 미용실 바닥에 툭 떨어진 머리칼 뭉치 같다 헝크러진 빛들 뒤엉킨 기억들은 아무리 쓸어담아도 파편들을 남긴다 눈보다 부신 마음의 모서리 위로 블라인드 줄을 당긴다 작은 간이 테이블엔 푸른 빛의 안개꽃이 에스프레소잔에 이식되어 있다 방금 추출된 커피의 표면 위로 익숙해진 온도가 빛의 예각 사이로 날아간다 라떼에 덧그려진 잎사귀의 거품들이 수근거리며 손끝에서 일렁이다가 터져오른다 기포들 잦아들고 마주 앉은 당신의 얼굴이 길어진다 깊은 수로가 생기고 동공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두 줄기의 정적 혹은 어둠 그 간극 사이로 시월이 켜진다
무소음 시계의 초침은 오로지 묵음만을 위해 쉬지 않고 돌아간다 방향과 높낮이만큼은 바꿀 수 없는 진로들이 단호한 음정을 낸다 나와 당신은 하나의 벽을 향해 호흡이 부지런해진다 드리워진 블라인드 너머로 해가 기웃거리며 이운다 서로가 침묵을 멈추거나 멈추지 않기 위해 초조함을 감추려 기색한다 눈길의 각도와 손놀림이 엇갈린다 마른 기침조차 겹치지 않게 조심스러운 규칙만을 주고 받는다 시선과 몸짓 앉아 있는 자세조차 살짝 비껴있다 분절된 미안함은 더 커진 어색함 속으로 병합된다 카운터 너머에서는 포트가 끓어오르고 때마침 탁 하는 기계음에 열이 차단된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연주가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닫는다 이따금 악보의 시야를 흐리는 건 지난 밤 꿈의 잔상이거나 창밖으로 날리는 낙엽들 궤도를 도는 열차의 소란스러움이다 열차의 머리와 꼬리가 분리된다 잘린 꼬리는 다른 머리가 되어 갈라진 선로에서 우회한다 약간의 시차를 사이에 둬야 재동이 쉽다는 듯 꼬리가 멈칫 고개를 가로저으며 행로를 바꾼다 나중에 나오는 꼬리는 먼저 떠나보낸 머리의 뒷모습과 그림자의 방향을 기억해야 한다 플라나리아의 이별처럼 동강나는 시간들 향취와 동선이 겹치지 않게 각자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이제 망각을 위해 기억은 총동원된다 메트로놈 소리에 보폭을 맞춘다 오해하지 않도록 돌아보는 일을 자제한다 숫자 12와 6 사이를 직선으로 반원과 반원이 만개한 꽃처럼 갈라진다 악보가 찢겨나가는 동시에 새로운 개화가 시작된다 정확히 오른쪽과 왼쪽으로 각자 원점에서 최대한 멀어지면서 마주보는 디미누엔도 우리는 각자 점점 작아진다
카페의 위치는 대로변과 나란히 위치 해 있을수록 알맞다 연민에 빠지거나 계절감에 경도되거나 뜻밖의 실연에 놀라 직진으로 뛰어나간다면 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다 부주의한 당신이라면 애당초 골목 깊숙하게 위치한 작은 찻집을 고르는 게 안전하다 미로 속의 계절이 개장된다 오직 시월만이 조금의 길도 이탈하지 않고 중순을 지나 하순으로 간다 저무는 것들만이 잘게 부서져 더욱 눈부시다 하늘은 유난히 맑고 노을의 각도와 채도는 절묘하게 어울린다 카페의 실내온도와 습도 의자를 감싼 페브릭의 질감까지 적당히 부드럽다 카페 바깥의 풍향과 풍속 보도 위에 깔린 낙엽의 바스락거림도 알맞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동시에 바깥으로 나온다 한 사람은 신호등이 없는 방향으로 한 사람은 신호등 쪽으로 향한다 한동안 걷다 보면 길 앞에 놓인 가로등은 하나 둘 점등될 것이고 서서히 내려오는 밤은 그들의 어깨 위나 등 뒤에 내려앉아 식어버린 오후의 잔영을 마디 마디 쳐낼 것이다 내일은 상강 곳곳에 약간의 서리가 내릴 예정이며 미세먼지는 보통이라는 일기예보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길 건너 전광판 자막으로 지나간다 산간 지방에는 더러 얼음이 어는 곳도 있다는 자막도 앞 단어에 바짝 붙어서 간다 페이트 아웃 페이드 아웃 페이드 아웃 누군가 고개를 가로저으면 이별이 시월의 악장을 완성한다
시와 여름과 오늘과 나
여름이다. 여름은 내가 태어난 계절이다. 정직하고 강렬하지만, 위반과 모순으로 가득한 계절. 작열灼熱하는 저기 저 정오의 태양을 보라. 무엇이든 삼킬 것처럼 허기진 아우성으로 난리다.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불의 아가리를 벌리고 천형의 가마솥처럼 펄펄 끓어오른다. 불의 심장이 벌떡인다. 가장 짐승 같은 계절이다. 여름이다. 지독한 폭염과 거침없는 폭우, 예고 없이 급습하는 장마와 태풍의 수난은 더러 애꿎은 목숨까지도 앗아간다. 그렇게 모든 것을 집어삼킨 삼복 지나 입추가 오고 처서가 오면 가을이 온다. 기어이 정색하듯 서늘하게 그것은 오고야 만다. 이 뜨거운 여름, 곧 증발할 열기들, 화염에 쌓인 당신을 나는 증오하면서 사랑한다. 매미의 울음 속에 아니 쌓여가는 매미의 사체들 속에서, 나는 또 어떤 울음을, 어떤 죽음을 잉태해서 울어내야 하나. 과실들도 어떤 고통의 알맹이들도 이 순간 쉼 없이 여물게 한다. 이 애증의 계절에 나는 태어났구나. 여인은 이토록 더운 여름날 산고 속에서 비명을 질렀겠구나. 당신도 자연분만으로 태어났다면, 비명 속에서 탄생했으리라.
정확히는 칠월 칠석 하루 전날, 7월 6일 낮 3시에 나는 이번 세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알다시피 음력 7월 6일은 견우와 직녀가 만나기 하루 전 날짜이다. 그들은 1년에 하루 그러니까 칠석날, 힘겹게 오작교를 건너 눈물겨운 짧은 만남과 긴 헤어짐을 반복한다. 364일을 꼬박 서로를 간절히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사무치게 그리워해야 하는 그러한 그리움 가득한 삶에 대하여 생각한다. ‘아 드디어 내일이면 당신을 만나겠구나!’라며 칠석을 하루 앞둔 날에는 잔뜩 마음을 졸이고 한없이 설레겠지. 하루 남은 시점에서 그들은 얼마나 애틋하고 초조하게 들뜬 가슴을 두근거리며 마음을 졸일 것인가. 나날이 좁혀지는 시공의 거리 속에서 얼마나 행복한 단꿈을 꿀 것인가를 단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선물 상자를 열기 전, 케이크에 촛불을 끄기 전, 그러니까 무슨 일이든 그 직전에 외려 더 설레는 법이니까.
칠월칠석에서 하루빨리 세상에 온 나는, 그러니까 그러므로 하물며 아직도 여전히 전날만을 살고 있으니 나는 또 얼마나 부지런하고 행복한 사람인가. 하여 나는 그(견우/직녀)를 한 번도 접견하지 못했다. 매일 매일 새로 태어나는 사람이므로.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생애 첫날이 펼쳐지고, 매일 매일, 내일의 약속만을 상기하면서 날마다 생일을 자축하며 살아가는 이토록 기이한 사람이 바로 나다. 나는 하루하루 출생의 기쁨과 원망을 동시에 느끼는 사람. 업보를 되새기면서 기대감과 기다림 속에서 오늘을 무한 반복 사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치의 꿈을 꾸고 내일의 희망을 기다리는 일은 이제 내 직업이 되었다. 바야흐로 시를 쓰고 읽고 공부하고 더러는 가르치기까지 하는 일이 생업이 되었으니 말이다. 내게 시를 쓰는 일은 직녀의 베 짜기와도 같고 견우의 소 치기와도 같다. 견우와 직녀가 서로 만나기 위해서는 각자의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해내며 부지런히 일상을 살아야 한다. 단 하루의 기쁨을 위해 1년 치의 노동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점점 멀어지는 컴퍼스의 두 개의 바늘이 그리는 원, 부단히 서로에게 멀어져야 다시 만나게 되는 시곗바늘과도 같은 숙명에 대하여. 베를 짜고 소를 치고 농사를 지어야 거리는 좁혀진다. 신이 허락한 사랑에도 공짜는 없는 법. 신은 지극히 계산적이고 경제적인 존재인가 보다. 게다가 타자의 조력까지도 필요하다. 바야흐로 까마귀, 까치의 희생이 동원되고 담보되어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주변에 신세까지 져야 하는 이토록 궁색한 운명과 사랑의 세레모니라니. 이별이 쉽고 사랑은 어렵다.
내가 만나고 싶어 하는 견우는 단 하나. 시詩이고, 문학文學이고 결국엔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아직 ‘견우’를 만나지 못했다. 견우는 매일 달라진다. 오늘도 나는 새로운 ‘견우’를 애타게 기다린다. 그러므로 눈을 뜨면 언제나 매일이 음력 7월 6일이다. 매일이 생일인 나는 축복 받은 사람. 이 여름을 껴안고서 나는 계속 환하게 무르익어갈 것이다. “그리운 것은 다 님”이라고 만해가 말했지만, 그 ‘님’이 단 한 사람, 단 한 명이라면 좀 지루하겠다. 사랑도 기다림도 반복되기만 한다면, 어느 순간에는 지리멸렬하고 귀찮고 무료하고 피곤해지지 않을까. 나는 매일 새로운 당신을 만나려고, 이 지구에 매일 아침 도착한다. 내가 당신에게로 가는 길과 당신이 나에게 오는 길이 어제보다 짧아졌다. 그 오늘을 나는, 가장 사랑한다. 어떤 수신호처럼 강렬하게 간절하게 빛나는 저, 여름날의 태양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