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하늘을 짊어진 함백산에서
일 시 / 2016년 1월 9일
코 스 / 만항재 - 함백산 - 중함백 - 샘터삼삼거리 - 적조암암(10Km)
금년들어 제일 추운날 함백산을 향한다.
하이원호텔에 9명의 운탄고도길의 전사들을 나전장에 내려놓고 만항재를 향한다.
만항재에 이렇게 많은 관광버스가 몰려있는것은 지금껏 한국의 산하를 누벼가며 돌아 다녀봤지만 처음있었던일
전국의 등산객이 다모였는가 첫 출발부터 정체다.
찬바람은 얼굴을 할퀴고 잔득 얼어붙은 등산로는 아이젠의 압박에 비명소리가 메아리친다.
하늘은 푸르다 못해 눈물을 쪼옥 떨어트릴만큼 쪽빛으로 마음을 사로 잡고, 쉬엄쉬엄 정상에 오르니 태백산,수리봉,청옥봉, 중함백,은대봉, 금대봉, 비단봉, 매봉산을 이어가는 백두대간길이 높낮이로 이어가고 우측으로는 장산, 백운산허리엔 하얀띠를 띤 운탄고도의 길이 하얀선을 긋고 뒤돌아보면 똬리굴을 태백선의 품고있는 연화산그뒤로 백병산이 떡버티고 서있다.
살아천년 죽어천년이라는 주목군락지 눈밭위에서 맛있는 점심을 나누고는 중함백을 거쳐 하산길을 잡는다.
지장산엔 동양 최대의 수직갱이 있던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였다. 지장산은 버럭더미, 아예 석탄산이었다. 중턱엔 650갱 광부 마을이 있고, 그곳 아이들은 근처 지장초등학교에 다녔다. 지금의 강원랜드 카지노와 호텔이 들어선 곳. 30분 정도 더 올라가면 해발 900m의 백운산 6구 화절령 마을이다. 다소 완만한 비탈에 一자형 연립주택 수십동이 들어서 있었다. 한 동마다 5가구가 살았고, 가구당 5~6평 공간에 방 2, 부엌 1칸이 배당돼 있었다. 화장실은 대여섯 동이 함께 쓰는 공동화장실뿐. 그곳은 1970년대 반공드라마에 종종 등장하던 북한 아오지탄광 세트로 이용되곤 했다. 대한민국의 아오지.
20분 정도 더 올라가야 운락초등학교다. 해발 960m쯤 된다. 학생이 많을 땐 140명이나 됐다. 이 중 100명 정도가 화절령 마을에서 살았다. 학교는 이제 기념석 하나만 남기고 흔적도 없다. “이곳은 운락초등학교가 소재했던 곳으로, 1967년 3월1일 설립돼 22회 544명의 학생이 졸업했다. 폐광과 함께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1992년 2월28일 폐교되어 건물을 철거했다. 1994년 10월.” 불과 24년 만에 없어졌다.
새카만 아이들이 검은 운동장에서 검은 신발을 신고 검은 공을 차고, 검은 고무줄놀이를 하던 검은 학교. 그러나 아이들은 맑고 밝았다.
화절령 마루는 초등학교에서 다시 20여분 더 올라가야 한다. 고개 남쪽은 영월 중동면 직동이고, 동쪽으로는 만항재, 서쪽으로는 새비재로 이어지는 신작로다. 운탄길이다.
백운산은 흔히 석탄이 절반이라고 했다. 게다가 올라갈수록 노두탄이어서 찾기도 쉽고 채굴도 쉬웠단다.
1177항, 1070항 등 해발 높이가 갱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갱 옆의 사택촌에도 그 숫자가 붙었다. 오로지 탄을 캐기 위해 존재하는, “밤에는 밤이고 낮에도 밤인” 공간을 상징하는 숫자였다.
만항재에서 새비재까지는 35㎞. 그 길은 1962년 저 악명 높은 국토건설단이 개설했다. 5·16 쿠데타 세력들은 병역미필자를 구제한다는 핑계로 조폭이나 부랑아들을 붙잡아 들였다. 이들을 군대식 편제와 군대식 규율 아래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예비역 하사관과 장교가 이들을 지휘하고, 헌병이 막사나 작업장을 지켰다. 새비재 아래 신동읍 예미엔 숙소가 일부 남아 있다. 작은 창문엔 예외 없이 철조망이 촘촘히 쳐져 있다. 무려 2000여명이 그곳에서 노역을 했다.
길은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잇는 것. 그곳으로 물자와 사람과 정보가 오고 가며, 그 길로 말미암아 사람과 마을은 다시 태어난다. 중국 윈난성, 쓰촨성 그리고 티베트 고원의 사람들은 차와 말과 소금 따위를 교환하기 위해 해발 4000m 산허리를 따라 수천㎞나 되는 차마고도를 뚫었다. 운탄길은 태생이 다르다. 오갈 데 없는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탄을 캐러 산정까지 올라왔고, 그들이 캔 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강제 동원된 이들에 의해 개설됐다.
그렇게 세상으로 나간 석탄은 구공탄이 되어 가난한 이들을 살렸다. 그들의 시린 등을 덥혀주고, 밥도 짓고 국도 끓이고 도루묵도 구워내는 착한 연료였다. 살인적인 저임금 속에서 그들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농민에게 강요된 저곡가, 광부들이 목숨 걸고 캐낸, 싸디싼 석탄 때문이었다.
그때는 구름도 탄식하며 넘나드는 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구름도 감탄하는 길이다. 물결치는 백두대간 산록을 굽어보며 걷는 길이다. 광부들이 한 삽 한 삽 삶을 파내던 곳은 골프장과 스키장이 되었고, 허파가 석고처럼 굳어가는데도 들어가야 했던 갱 위에는 한 방에 인생역전을 노리는 이들이 득실대는 카지노가 들어섰다.
화절령에서 하이원리조트, 골프장에 이르는 6~7㎞ 구간은 야생화 꽃길로 바뀌었다. 백운산 정상을 중심으로 밸리콘도 북쪽엔 바람꽃길, 동쪽 골프장 쪽으론 얼레지꽃길, 처녀치마길, 바람꽃길, 양지꽃길, 박새꽃길이, 서쪽 스키장 정상부 주변엔 산철쭉길, 산죽길, 낙엽송길…. 제무시가 헉헉거리던 만항재에서 새비재까지 운탄길엔 원색의 라이더들이 달린다.
세상의 모든 길에는 인간의 삶이 다져져 있다. 개인과 가족과 공동체의 땀과 눈물과 피가 베어 있다. 그들의 희로애락과 절망과 희망을 씨줄과 날줄 삼아 짠 피륙의 길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 같은 이는, 그런 길을 걷는다는 걸 ‘존재의 확인 과정’이자 ‘자신을 해체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운탄길은 브르통의 말로도 담기 힘들다. 그곳엔 현대사의 저 어둡고 고통스런 밑바닥의 삶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피와 눈물이 산업화의 거름이 되었고, 땀은 이 땅의 에너지가 되었으며, 사북항쟁 등으로 터져나온 분노는 불의한 땅에 정의를 세우는 갱목이 되고, 삶 자체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추동력이 된 이들의 이야기다. 초등학교가 없어지고, 갱도가 폐쇄되고, 광부가 사라졌다고 잊힐 순 없다.
화절령 근처 해발 1133m 능선엔 지하갱도의 함몰로 땅이 꺼지면서 생겼다는 도롱이 연못이 있다.
첫댓글 오랜만에 함께한 산행 즐거웠습니다~
선생님 사진 감사해요~^^
세상에나 함백산이 가을철 설악의 대청봉 같습니다.
눈발 날리기 시작하길래 큰소리좀 치겠다 싶었습니다.
ㅎㅎ
파란 하늘이 아름다웠던 함백산 많은 인파속에도 즐거웠습니다. 수고 많으섰습니다.
겨울 함백산이 맞는거죠 수고하셨습니다
파란하늘 맑은 공기에 정화된 몸을 다시 장착했습니다..ㅎㅎ
오랫만에 뵙게 되여 잠시이지만
반가웠습니다 ~~
쪽빛 하늘은 좋은데 산빛의 흰색은 다 어디갔나요? 겨울산에 눈이 없다. 산타가 다 데려갔나!!! 산타님 눈 돌려주세요.
사북탄광 광부들의 얼큰한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그 들의 고단한 삶을 곱씹어 주시던 선생님.목구멍이 뜨거워서 혼났습니다. 파란산도 .사람도 좋았으나.늘 선생님의 사람사랑말씀이 우리산행의 백미입니다. 올 해도 늘 강녕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