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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30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요한 8,51-59
죽음을 살다
2005년 삼성 이건희 회장 막내 딸 이윤형씨가 뉴욕 자신의 숙소에서 목을 매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남자친구와 사귀었었는데 그 남자친구의 집안배경이 썩 좋지 못하자 집안의 반대가 있었고 그것 때문에 우울증을 앓아왔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윤형씨에게 삶의 의미는 돈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살아왔었는데 이루어질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살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좀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한 남편이 버스 추락으로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다 아내가 죽은 자리에서 자신도 몸을 던져 자살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 남편에겐 아내가 삶의 의미 전부였던 것입니다.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무엇일까요?
반대로 무엇 때문에 사람이 무기력증이나 우울증에 걸려 자살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마더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방문하여 어떤 도시에서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데 여자 교우 한 분이 테레사 수녀를 붙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자살을 결심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어요.”
이 말을 듣고 테레사 수녀는 이런 권면을 했습니다.
“그러나 자매여, 자살하기 전에 내가 자매에게 한 가지만 요청하고 싶어요.
내가 있는 인도의 캘커타에 와서 나와 같이 한 달만 일하고 난 후에 자살을 하세요.”
이 여자 교우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테레사 수녀를 따라서 인도의 캘커타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오랜 기아와 질병으로 까맣게 말라 비틀어 죽어가는 그들을 붙들고 부지런히 간호하고 치료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살고 싶어졌습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내게도 살 만한 보람이 있었구나.’ 그래서 이 여자 교우는 자살의 유혹을 극복하고 테레사 수녀와 함께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확히 말하면 ‘무엇을 위해서 (What for)’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즉 삶의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냥 살아가지 않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게 창조된 존재입니다.
생존자체가 목적인 것은 동물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찾고 싶어 하고 그 이유를 정하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동물은 살기 위해서 살지만, 인간은 세상에 왜 내던져 졌는지 그 존재의 이유를 묻고 그 이유를 찾아야만 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공지영씨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세상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세상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던 자살만 기도하던 사형수는 한 여자의 사랑을 받고 처음으로 다시 살고 싶어짐을 느낍니다.
사랑만이 살아있음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게 할 수 있는 인간의 가장 소중히 간직해야 할 보물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살고 싶어집니다.
이 ‘위해서’가 바로 지금의 우리들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명확히 아는 사람만이 참으로 살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잃어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삶이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사랑을 할 때도 그 사람을 위해서 많은 것을 해 주려 노력하고 그것이 행복이기는 하였지만,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삶의 근본적인 이유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셨다면 무엇을 위해서 사셨겠습니까?
바로 인간 구원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사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 ‘무엇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합니까?
바로 우리를 위해 사셨던 그 분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그 분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기에 사랑하는 것이지 그 사랑 자체에 삶의 의미를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인간 모두의 삶의 목적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고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바로 ‘당신을 위해서’ 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를 위해 사셨기에 죽음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아버지와 인간을 ‘위해’ ‘사신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순교자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을 산 것이지 참으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을 위해 살 때 ‘죽음’도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매일매일 죽음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행복할 때 살아있다고 느낍니다.
죽으면서도 행복하다면 그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르는 사람이 벌써 죽음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살면 죽음도 죽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됨을 되새겨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30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요한 8,51-59
우리 역시 아브라함처럼 세례를 통해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엄마가 제일 싫어할 때는 언제인가? 라는 질문에 여러 대답들이 나왔습니다.
애써 저녁상 차려놓았는데, 아무리 오라 오라 해도 식구들이 안 올 때, 속옷이나 양말 뒤집힌 채
세탁기에 넣을 때, 그리고 이런 대답도 있더군요.
애써 목돈 주고 개명(改名)했는데, 남편이 촌스러운 옛날 이름 떡 하니 부를 때...
이름을 바꾸는 전통은 교회 역사 안에 종종 있어 왔습니다.
회심을 기점으로 사울은 바오로로 개명했습니다.
아브람의 부인 사라이 역시 사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베르골료 추기경님 역시 266대 교황님으로 선출되면서 프란치스코라는 새 이름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세례 성사를 통해 또 다른 이름이 추가 되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한 인간 존재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의 운명을 결정짓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이제 그를 당신 구원 계획안에 큰 역할을 부여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과거의 삶과 결별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굳은 결심이요, 종래와는 철저하게도 차별화된 생활을 시작하겠다는 강력한 표시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친히 선택하시고, 큰 민족의 아버지로 세우겠다는 약속의 징표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십니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창세기 17장 5절)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은 힘차고 장엄합니다.
그러나 좀 웃기고 신뢰가 안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였으며, 아내 사라 역시 이미 가임이 불가능한 연세였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주시려면 진작 주시지, 이 늙은 나이에 자식을 약속하시는 하느님이 야속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어이없기도 한 나머지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라 역시 한참 웃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된 하느님의 약속에 마침내 아브라함은 믿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지만, 하느님이 거듭 말씀하시니 마음을 새롭게 하여 힘차게 응답합니다. “네! 믿습니다. 주님!”
기이하게도 인생을 정리할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사악을 얻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인간적 시각으로 볼 때, 가혹함, 기이함은 계속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다시 아브라함을 당혹함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정든 땅을 떠나라고 요청하십니다.
자신의 미래이자 전부인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앞뒤 따지지 않는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순명으로 하느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습니다.
그의 자손은 대대로 이어집니다.
그는 전 세계 모든 신앙인들의 모델로 자리매김합니다.
우리 역시 아브라함처럼 세례를 통해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베드로, 요한, 마리아, 루치아...
우리들의 새로운 이름은 과거의 낡은 삶과 결별하고 주님 안에 새 삶을 시작하겠다는 표현입니다.
우리들의 세례명은 주님의 제자요 자녀로서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명하겠다는 표현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5주간 목요일>
(2023. 3. 30. 목)(요한 8,51-59)
<영원한 생명>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이 말씀은,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의 6장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믿는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그저 사는 동안 복을 빌기 위해서, 또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만을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만일에 ‘영생’이 그런 것이라면, 즉 지금의 인생과 지금의 생명이 무한대로 연장되는 것이 영생이라면, 그것은 그냥 지옥일 뿐입니다.
지금의 인생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인생’이어야
그것을 희망할 이유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17장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이 말씀에서 ‘알다.’ 라는 말은, ‘지식’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란 아버지와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은, 아버지와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서 함께 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버지처럼, 또 예수님처럼 되어서 그분들과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부활과 영생에 대해서 이렇게도 표현하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4-36).”
천사들과 같아진다는 말씀은, ‘몸 없이’ 영적으로만 부활해서 산다는 뜻이 아니라, 육적인 욕망 같은 것들을 모두 초월하는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우리 교회는 ‘영혼만의 부활’이 아니라 ‘육신의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는 말씀은, 가족과 가정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욕망에서 비롯된 갈등과 다툼 같은 일들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부부와 가족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서도 가족과 가족에 대한 사랑은
지속될 것입니다.
어떻든 ‘영생’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고, 지금의 인생이 무한대로 연장되는 것도 아니고, 또 지금의 몸을 가지고서 무한대로 생존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르고 새로운 세상에서, 즉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운 몸으로
지금의 인생과는 완전히 다른 새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완전하고 순수하고 참된 행복과 평화와 기쁨을 영원히 누리는 ‘천상의 삶’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요한 8,52-53)”
여기서 ‘마귀 들렸다.’ 라는 말은 ‘미쳤다.’ 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미친 사람의 헛소리’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말이 ‘부활’을 부정하는 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들도 마지막 날의 부활은 믿지만,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헛소리’ 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영원히 안 죽을 것이다.”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유대인들은 표현만 보고서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한 번은 무조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진실일까? 아닙니다.
예외적으로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에녹’과 ‘엘리야’가 죽지 않고 승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창세 5,24; 2열왕 2,11).
<그래서 예언자들도 죽었다는 유대인들의 말은 ‘틀린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말할 때 바로 그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6-17).”
재림 전에 죽은 사람들은 부활해서 재림을 맞이할 것이고, 살아 있는 동안에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채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채로 심판 때 구원을 선고받으면, 그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나 한 번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간절하게 바라는 희망에는,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장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소망도 들어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