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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샤바 쇼팽 콩클에서 우승한 조성진군의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 실황*
쇼팽 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
* 쇼팽과 여류작가 상드가 잠시 거주했던, 스페인 마요르카 섬의 발데모사 마을 전경
[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릭 쇼팽(1810~1849) ]
쇼팽은 1810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가까운 젤라조바 볼라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프랑스인. 어머니가 폴란드인이었습니다.
생후 8개월에 일가는 바르샤바로 나왔습니다.
쇼팽은 어릴 때부터 피아노의 신동으로 소문나 7세 때 첫 작품을 쓰고 8세 때
첫 공개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1830년(20세 때) 세계 악단에서 활약하기 위해 바르샤바를 떠난 뒤 비엔나를 거쳐
이듬해 9월 기대와 불안을 가지고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이때부터 39세로 죽을 때까지 쇼팽은 18년간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파리를 무대로
악단의 총아가 됩니다.
쇼팽이 파리에서 맨 처음 자리 잡은 곳은 포아소니에르街 27번지. 생 드니 門
부근의 영화관과 카페들이 줄선 이 거리를 지나다 이 번지를 찾으면 그 자리는 햄버거 가게입니다.
그 뒤쪽을 눈여겨보면 건물은 간 데 없이 아치형의 옛날 돌문이 시커멓게 세월의
때가 낀 채 남아있습니다.
거기 걸린 銘板의 어두운 글씨를 가까스로 해독하면
'쇼팽이 1831년에서 1832년까지 이 집에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1832년 말 이 집에서 옮겨 간 곳이 큰 길 건너편 쪽의 포부르 몽마르트르가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드는
시테 베르제르라는 私道의 4번지. 당시대로 지금도 호텔입니다.
쇼팽이 이 호텔에서 1833년 6월까지 머물던 시절은 이미 천재 음악가로 명성이
나서 양가의 자제들을 가르쳐 경제적으로 안정된 때였습니다.
그 다음 주거는 쇼세 당탱街 5번지의 오텔 데피네라는 저택.
1836년 9월까지 3년간 살던 이 집은 1862년 길을 내느라고 무너져 버렸습니다.
쇼팽이 여기서 다시 이사를 간 같은 쇼세 당탱街의 38번지는 갈르르 라파예트 백화점의 분관
모퉁이쯤이 됩니다. 그 때의 호텔이 지금은 자취도 없습니다.
이 자리에 있던 호텔의 방 2개를 빌려 살기 시작했을 때 쇼팽은 규수 작가 조르주 상드와 운명의
상면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2년 뒤 마요르카 섬으로 상드와 사랑의 도피행을 하면서 이 곳을 떠납니다.
* 마요르카 섬 지도, 바르셀로나 아래쪽에 있습니다
이 무렵부터 쇼팽의 음악적 활동은 상드와의 애정의 기복과 부침을 같이합니다.
1836년 10월 쇼팽은 리스트의 애인이던 다구 부인의 살롱에서 처음 상드에게 소개되었고
그 때 쇼팽은 26세,상드는 32세였습니다.
1838년 11월 두 사람은 지중해 가운데의 섬 마요르카로 떠났습니다.
파리 사교계의 성가신 입방아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다 쇼팽의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을 겸한 여행이었죠.
스페인령인 마요르카 섬은 바르셀로나에서 남으로 132마일, 발레아르 諸島 중 가장 큰 섬으로
경치 좋고 기후 좋아 섬 사람들 스스로 '지중해의 진주'라 자랑하는 곳입니다.
인구 50만. 쪽빛 바다 한가운데에 수백년 생의 올리브 고목들이 온 섬을 덮고 특히 扁桃 재배가
유명하여 1월과 2월의 개화철은 화려한 꽃섬이 됩니다.
* 발데사모 마을
스페인이 세계에 자랑하는 관광 휴양지지만 우리에게는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씨가
살던 곳으로 귀에 익습니다.
섬의 主港인 팔마에 들어서면 해안에 늘어선 현대식 호화 호텔들의 하얀 행렬과 대조적으로
구시가 지대에는 古건물들의 황색 고풍이 창연합니다.
쇼팽과 상드가 팔마에 짐을 풀자 구경에 나섰던 13세기 때의 大寺院, 중세 아랍 왕의
궁전이던 알무다이나 궁,14세기 때의 고딕식 건물인 벨베르 城, 옛날 증권 거래소인 론하 등이
그 때 그대로입니다.
쇼팽이 다녀간 지 150년이 지난 세월에도 古色은 더 바래지도 않았습니다.
쇼팽이 팔마 도착 후 푸른 하늘과 따뜻한 陽光, 남국 식물과 이국 정서에 취해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팔마에 와 있다.
야자수,사이프러스,선인장,오렌지,레몬,알로에 등의 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식물원의 온실에나 있을 나무들뿐이다.
게다기 터키玉 같은 하늘, 靑유리 같은 바다, 에메랄드 같은 산들, 천국 같은 공기가 있다.
"라고 썼습니다.
지금도 그 풍경은 하나도 변색하지 않아 이 묘사에 한 줄 더 보탤 것도 덜 것도 없습니다.
* 발데사모 마을
쇼팽과 상드의 이 섬에서의 생활은 상드가 쓴 <마요르카에서의 한겨울>이란 책 속에 자세합니다.
이 책에 의하면 두 사람은 팔마 시내에서 방을 구하지 못해 에스타블린츠라는
마을의 '손 벤트(바람의 집)'란 별장을 빌립니다.
에스타블리멘츠는 팔마에서 북쪽으로 7km 떨어진 시골 마을입니다.
팔마에서 버스가 다닙니다.
동리에서 외떨어진 들판 가운데의 높다란 곳에 쇼팽이 머물던 집이 있습니다.
'손 벤트'라는 옥호도 그대로입니다. 바람이 많이 닿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그만큼
덩그런 2층 집입니다.
쇼팽이 약 한 달 머무는 사이 전주곡 작품 28의 2와 28의 4를
쓴 흔적은 이 집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쇼팽이 폐결핵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집 주인이 집을 비워 달라고 하자 그는 그 해
12월 이 집을 떠나 발데사모의 수도원으로 갑니다.
* 발데사모 마을의 수도원
발데사모는 팔마에서 북쪽으로 18km, 아몬드,올리브,오렌지 나무의 숲이 이어지는
길을 한참 가면 바위들이 맨살을 여기저기 드러낸 산이 나타나고,
그 산 언덕의 마을 가운데 솟은 것이 수도원입니다.
15세기 때 세워진 이 옛 수도원은 1835년에 이미 수도원이 폐쇄되면서 12개의 庵室이
일반인들에게 분양되었고, 쇼팽 일행이 도착했을 때는 이 넓은 건물이 텅 비다시피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안은 공활한 채 그 암실들에게는 각각 주인들이 들어 살면서 쇼팽 기념실을
보여준답시고
입구에서 표를 사야 들여보내 줍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이상한 것은 쇼팽 기념실이 2개 있다는 겁니다.
12개의 암실 중 2호와 4호. 쇼팽과 상드가 들었던 방이 어는 것인지 고증된 것이 없기
때문에 두 방의 소유자가 각각 자기 방이라고 우겨 서로 70년 이상 本家 싸움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 수도원의 쇼팽 기념실, 쇼팽 흉상과 피아노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먼저 2호. 2개의 방에는 쇼팽이 파리에서 보낸 피아노가 도착하기 전 현지에서 구해 쓰던
피아노, 쇼팽의 친필 편지, 연습곡 등의 육필 악보, 쇼팽이 상드에게 준
자신의 머리 한 묶음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4호. 기다란 복도를 끼고 2호와 방 하나 건너로 나란히 있습니다.
진열품은 2호만큼 모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방 안에 놓인 피아노가 자랑입니다.
이 피아노가 쇼팽이 파리에서 부쳐 와 이 수도원에서 전주곡 등을 작곡하면서 쓰던 진품입니다.
2호건 4호건 쇼팽의 이 수도원에서는 생활은 암울한 것이었습니다.
마요르카 섬은 그 때 雨期에 들어 있었고 예년에 없던 일기 불순이 계속되었습니다.
바람은 산협을 타고 윙윙 불어와 수도원의 돌바닥 낭하를 질주했고 비는 세차게 암실의
창을 두들겨댔습니다.
병세는 오히려 악화되어만 갔습니다.
게다가 발데모사 주민들은 이 폐결핵 환자를 경원시했습니다.
마요르카 섬 주민들의 이런 몰이해와 어둡고 사나운 기후에 시달린 쇼팽의 당시 심경은
그 일면이 그가 이 수도원에서 써낸 <전주곡집>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24곡으로 된 <전주곡집>은 쇼팽의 아름다운 詩情과 강한 정열이 잘 응축된 그의
20대 젊은 시절의 영감의 기록인데, 동시에 쇼팽의 '마요르카 日記'라 할 만한 작품입니다.
일부는 마요르카에 갈 때 쓰여져 있었으나 발데모사 수도원에서 마지막 손질을 하면서
나머지 곡들을 추가하여 1839년 1월경 섬을 떠나기 직전에 완성을 본 것입니다.
<전주곡집>에서 특히 널리 알려진 곡이 제15번 <빗방울>입니다. 상드가 쇼팽이 죽은 후에 쓴
<내 생애의 역사>에는 이 곡의 유래를 암시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 노년의 여류 작가 조르즈 상드
어느 날 병세가 나쁜 쇼팽을 수도원에 두고 상드가 아들을 데리고 물건을 사러 팔마에 나갔다
오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급류가 범람했습니다.
홍수 속을 뚫고 가까스로 밤늦게 돌아왔더니 쇼팽은 상드가 위험에 빠진 상황을 상상하여
환각에 빠진 채 전신이 이상해져 있었습니다.
나중에 정신이 돌아왔을 때 쇼팽은 자신이 호수에 빠져 있고 가슴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규칙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수도원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것이죠.
왼손의 반주가 되풀이 A플랫 음을 두들기는 <빗방울> 전주곡이 이 빗소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으나 상드가 전하는 이 이야기는 이 곡의 분위기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쇼팽과 상드는 1839년 2월 마요르카 섬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밀월 여행이나 다름없었던 체재는 상드 스스로가 인정한 것처럼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쇼팽의 건강은 출발 때보다 더 나빠져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마르세유를 거쳐 노앙에 도착했습니다.
노앙은 中佛의 조그만 벽촌입니다.
르 샤트르에서 샤토루를 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근처에 앙드르 川이 흐르고 산도 언덕도 없이 널따란 들판에 수풀이 점재하는 아름다운
전원지역 안에 있습니다.
여기 조르주 상드의 城館이 남아 이 시골까지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 노앙의 조르즈 상드 저택
상드는 4세 때 아버지를 잃고 조모 밑에 자라면서 방이 20개가 넘는 이 커다란 성관에 살았고
나중에 그 주인이 되었습니다.
쇼팽은 마요르카 섬에서 돌아온 그 해와 1841년부터는 1846년까지 매년 여름을
이 성관에서 지냈습니다.
그의 여러 폴로네즈,발라드,녹턴,마주르카 중의 걸작들이 이 집에서 쓰여졌습니다.
유명한 <장송 행진곡>이 포함된 피아노 소나타 제2번도 여기가 산실입니다.
쇼팽이 명곡들을 낳은 성관의 2층 방에는 그의 초상화가 놓여있습니다.
창 밖으로는 그가 즐겨 내다보며 마음을 안식시키던 넓은 초원입니다.
이 아름다운 시골 풍경과 맑은 공기가 쇼팽을 한층 소생시켰습니다.
상드는 쇼팽에 간섭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시중을 들었습니다.
여름날 저녁 식사가 끝나면 쇼팽은 이 방에서 쓰고 있는 작품을 피아노로 치다가
상드를 위해 즉흥 연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쇼팽은 건강 때문에 일찍 잤고 상드는 그 때부터 새벽 5시까지 글을 썼습니다 .
이 무렵 쇼팽의 창작 과정에 대해서는 상드가 <내 생애의 역사>에 잘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의 음악은 찾는 것이 아니라 절로 솟아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써 낼 때는 너무 고심을 했다.
그는 종일 방 안에 갇혀 울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펜대를 꺾기도 했다.
한 소절을 몇 번이나 고쳐 썼고, 한 페이지를 쓰는 데 6주의 시간이 걸린 적도 있었다'
육체는 불치의 병에 좀 먹혀 가고 있었지만 쇼팽의 예술은 至高의 상태에 달해
걸작을 낳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대하는 쇼팽의 유명한 초상화는 1842년 화가 들라크루아가 이 성관을
찾아왔을 때 그린 것입니다.
넓은 정원을 산보하다 보면 한쪽 구석에 가족 묘지가 나타납니다.
거기 쇼팽을 극진히 간호하여 그의 음악을 살려 놓았으나 끝내는 헤어지고 만
상드가 묻혀 있습니다.
쇼팽과 상드는 1839년 10월 마요르카에서 나와 노앙에 머물다 파리에 올라와서는
쇼팽은 트롱셰 街 5번지. 상드는 피갈 街 20번지에 각각 따로 살다가
1841년부터는 쇼팽이 상드의 집으로 아예 옮겨 함께 살았습니다.
두 집이 모두 지금 건재합니다.
트롱셰 가에 살 때의 쇼팽은 제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낮에는 종일 피아노 레슨을 하고
밤이면 피갈 가의 상드의 집으로 갔습니다.
*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쇼팽
들라크루아, 발자크 등이 이 집에 모였습니다. 발자크의 증언에 의하면 상드의
방은 실내 장식이 녹색 계통이었고, 응접실에는 골동품이 가득 든 찬장이 있었고,
쇼팽이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상드는 담배를 물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시 1842년부터 두 사람은 스콰르 도를레앙이라는 곳에서 안뜰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는 건물의 5번지와 9번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발자크, 하이네 등이 쇼팽의 즉흥 연주회 손님이던 이 건물에는 각각 기념판이 붙어있습니다.
1847년 드디어 9년 간에 걸친 쇼팽과 상드의 친교는 끝났습니다.
상드의 딸을 둘러싼 미묘한 감정 대립 때문이었습니다.
상드와의 파국은 쇼팽의 심신에 치명적 타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지고 음악의 샘도 말라 버렸습니다.
작곡은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쇼팽의 음악은 상드와 굳게 묶여 있었고,
상드와 헤어진 후 쇼팽은 죽음으로 치달았습니다.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가까운 방돔 광장은 나폴레옹의 아우스테를리츠 대승을
기념하는 높이 44m의 청동색 기둥이 서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광장을 둘러싸고 코린트식으로 통일된 高雅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 그 12번지가 쇼팽이 운명한 집입니다.
지금은 '쇼메'라는 귀금속상이 들어 있습니다.
쇼팽은 정문 바로 위의 2층에서 1849년 10월 17일 죽었습니다.
햇빛 잘 드는 곳을 찾아 이곳으로 이사 온 지 5개월 만이었습니다.
* 쇼팽이 마지막으로 기거했던 집, 2층
마들렌 성당에서 거행된 장례식은 쇼팽 자신의 <장송 행진곡>으로 시작되었고
쇼팽의 전주곡 중 제4번과 제6번이 연주되었습니다.
조르주 상드는 그 때 노앙에 있었습니다.
파리의 페르 라셰즈 공동 묘지에는 하얀 대리석 뮤즈 상을 머리에 인 쇼팽의 무덤이 있습니다.
조르주 상드의 딸 솔랑즈의 남편이던 클레상제의 작품입니다.
쇼팽 말고도 상드의 애인이던 뮈세, 들라크루아의 무덤이 모두 이 묘지에 모여 있습니다.
쇼팽의 무덤 앞에는 찬미자들이 갖다 놓는 꽃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 파리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의 쇼팽의 무덤
극성 팬들은 뮤즈 상의 손이나 발을 자꾸 잘라가서 그 때마다 복원해 놓는다고 합니다.
이 무덤은 사랑하는 연인들끼리의 우편함으로도 이용되어 서로의 연락 메모를 묘비 뒤에
숨겨 놓고 가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무덤에 매장될 때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나던 날 친구들이 기념으로 준 폴란드 땅의
흙이 관 위에 뿌려졌습니다.
유해는 여기 묻혔으나 쇼팽의 심장은 그의 유언대로 고국에 보내져 바르샤바의
크라코프스키 체드메슈체 거리에 있는 성십자가 교회에 황금 단지 속에 담긴 채
안치되어 있습니다.
바르샤바에서 서쪽으로 54km 떨어진 젤라조바 볼라 마을의 쇼팽이 태어난
옛 스카르베크 백작 부인의 집(쇼팽의 아버지가 이 집의 가정교사로 있을 때 쇼팽이 태어났다)은
불타 버린 것을 1948년에 복원하여 기념관이 되어 있습니다 .
세계 각국에서 보내 온 1만 그루가 넘는 식물들이 심어진 이 집의 넓은 정원에서는
5월부터 9월까지 일요일마다 야외 음악회가 열립니다.
* 쇼팽의 생가
바르샤바에는 쇼팽 협회에 부설된 기념박물관이 있고, 와젠키 공원에는 쇼팽의 동상이 세워져
이 위대한 음악가가 폴란드인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쇼팽처럼 조국을 사랑한 예술가도 드뭅니다.
그러나 하이네의 말처럼 音의 시인이던 그의 진정한 조국은 詩의 나라요,
꿈의 나라였습니다.
* 쇼팽의 동상
쇼팽이 후반생을 보낸 파리는 몽소 공원에 피아노 앞의 쇼팽을 새긴 석상을 세워
그를 추념하고 있습니다.
* 파리 몽소 공원의 쇼팽 석상
* 마우리지오 폴리니가 연주하는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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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고운걸음 감사드립니다.
꽃샘추위 정말춥네요.
감기조심 하시고. 즐거운 오후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