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일 前인간능력개발원 원장] “눈(眼)이 보배”
미해군 장교 ‘제임스 홀먼’은 24세때 실명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후 40년간 세계 각국을 여행하고 여행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저술했다. 본 것이 아니라 듣고, 생각하고 만져 본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았던 것이다.
1959년 뉴욕의 한 고층 빌딩에 전기 고장이 났다. 칠흑 같은 어둠에 엘리베이터도 움직이지 않아 사람들이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가운데 침착한 인도자 몇 사람이 나타나 모두를 무사히 대피시켰다. 그 사람들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눈병이라도 나서 한쪽 눈을 가리고 살아 보면 얼마나 불편한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예 보지 못하는 생활이 얼마나 불편할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한쪽 눈으로만 살아도 불편 모르고 사는 법을 터득하면 한쪽 눈의 세상이 진실인 줄 믿게 된다. 사실 그런 사람도 많다. 그래서 멀쩡히 눈이 두 개인 사람의 눈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의 세상에 가면 불구자 취급을 받기도 한다. 엄연히 백조이면서도 Γ미운 오리새끼」 취급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는 한쪽 눈의 괴물이 나온다. ‘키클로페스’라는 신이다. 화산의 신 또는 쇠를 다루는 기술을 이간에게 가르친 신이다. 그래서 괴테는 과학자의 눈을 ‘키클로로페스’에 비유하여 힘은 세지만 근시안적일 수 있음을 겅고 했다.
이에 비하여 로마 신화에 나오는 ‘야누스’라는 신은 앞뒤에 얼굴이 있어서 앞뒤를 볼 수 있다. Γ과거와 미래를 볼 줄 아는 지혜」를 상징한다. 아프리카에 있는 어떤 물고기는 눈이 아래위에 한 쌍씩 있어서 아래위를 동시에 볼 수 있다고 한다. 한쪽 눈의 괴물보다 얼마나 시야가 넓을지 상상이 간다.
물론 눈이 많다거나 시야가 넓다고 해서 좋은 곳, 옳은 거만 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서에는 Γ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빼어 던져 버려라」하는 말씀도 있다.
눈은 우리가 지각하는 것의 70% 정도를 받아들이는 문이지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좁은 시야로 만족해 버리는 습성이 있다. 어떤 사람은 아집과 편견으로 시야를 일부러 좁게 한 채 의기양양인 경우도 있다. ‘탈레스’는 하늘의 별을 관찰하며 걷다가 웅덩이에 빠졌지만, 어떤 사람은 땅 밑만 보고 걷다가 나뭇가지에 머리를 다치고도 한다.
Γ眼光이 徹한다」는 말도 있듯이 시력도 중요하다. 눈이 나쁜 줄 모르고 살던 사람이 안경을 쓴 후 너무 놀라서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옥상 의 네온사인이 그처럼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줄을 Γ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였더란 것이다.
눈은 사물을 보라고 달린 것이지만, 겉모양은 눈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눈도 있다. ‘靑盲과니’라고 부르는 눈이다. 눈 뜬 장님의 눈이다. 사실 우리의 눈도 어떤 때는 ‘청맹과니’인 때가 있다. 관심 빢의 물건이나 초점을 맞출 수 없는 거리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앙드레 지드’는 Γ중요성은 그대의 시선 속에 있다. 사물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莊子의 우화를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작고 둥근 하늘만 보고 살아 온 것은 아닐까? 우물의 깊이가 깊을수록 대롱으로 내다보는 하늘의 크기는 더욱 작게 보일 테니, 그런 통탄할 일이 어디 있을까?
눈을 뜨고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에 비하면, 아예 눈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Γ눈을 감아라, 그러면 모일 것이다」라는 ‘버틀러’의 말처럼 ‘호머’나 ‘밀턴’이나 ‘헤렌 켈러’, 앞에서 말한 ‘제임스 홀먼’은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았던 것인가?
보는 일은 눈에만 맡기고, 시야를 열고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들, 눈은 멀쩡히 뜨고도 Γ맹한」 사람들은 모름지기 그분들에게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지 않을지? 눈은 보배이지만, 보배를 보배답지 않게 여긴 적은 없는지? 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