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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하나도 없다
롬 3:9-18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 3:9-18 / [모두가 죄인이다] 그러면 우리 유대인들만이 훌륭한 사람들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죄인입니다. 10)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ㄱ) `어리석은 자들은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잘도 말하는구나. 하나같이 썩어 빠져 흉칙한 짓만 저지르고 (ㄱ. 시14:1-3,143:2) 11) 혹시나 깨달음 있는 이 있을까 하나님을 찾는 이 있을까 하여 찾아보시나 12) 모두 다 딴 길로만 걸어가 하나같이 썩어 버렸구나. 착한 일 하는 이 찾을 수 없구나. 도무지 없구나. 13) ㄴ) `저것들이 뇌까리는 말 한마디인들 어찌 믿을 수 있나요. 생각하는 것마다 못된 것뿐이고 목구멍은 열려 있는 무덤이라. (ㄴ. 시5:9,10:7,14:3) 14) 혀에 발린 말밖에 할 줄 모릅니다. 15) 하는 말마다 저주요 거짓이요 으름장입니다. 16) 남 욕이나 하고 꼴 보기 싫다는 말이 아예 입에 발렸습니다. 17) 모두 다 딴 길로만 걸어가 하나같이 썩어 버렸구나. 18) 착한 일 하는 이 찾을 수 없구나. 도무지 없구나.'
바울은 자신뿐 아니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온 인류에 대해 진술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나으냐(9) 본문에서 우리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있다고 선포합니다. 유대인과 헬라인과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차별 없이 전인류가 죄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10-14) 바울은 시편 14편을 인용하여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하며 인류의 죄악상을 열거합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란 인간의 영적인 무능력 상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이 없는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 치우쳐”라는 말은 돌아서다, 피하다, 멀리하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을 떠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멀리하는 인류의 모습을 선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선(善)이란 인간에 대한 선행을 의미합니다. 인간에 대하여 무정하고 무자비하며 애정이 없는 인간의 상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극단적 이기주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시편 5편을 인용하여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라고 말합니다. 팔레스틴의 무덤은 사람이 서서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큰 굴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사람의 목구멍을 열린 무덤에 비유한 것은 입을 통하여 온갖 더러운 것, 저주와 악독 등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입을 통하여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15-18) 바울은 이사야 59장 7-8절을 인용하여 살육과 파괴를 일삼는 인류의 죄악상을 고발합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는 생명에 대한 위협이나 도발을 의미하며 또한 이런 죄를 범하는 인류의 행위가 매우 잔인하고 신속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는 그들이 장차 받을 형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는 하나님은 물론 이웃과 화목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내적이고 외적인 모습입니다.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는 시편 36편 1절의 인용으로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순종이 없는 인간의 영적인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적용: 역사는 범죄와 재난의 기록에 지나지 않고 죄의 파도는 끊임없이 인간에게 밀려오지만,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요,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고 혼란스러워도 믿음의 눈으로 그 세상을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교회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세속화의 물결이 거세고 성공주의, 물질주의, 반기독교적 정서가 강한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 더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기도는 소원성취의 통로나 만사형통의 지름길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때가 되면 가장 선한 길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 설 교 >
죄 때문에 힘듭니다
이윤재 목사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고통을 피할 수는 없는가? 고통의 원인이 죄와 시험이라면 우리가 죄와 시험을 피할 길은 없는가?
제가 며칠전에 저희 아파트 지하에 주차를 하는 데 밤늦게 가서 차들이 이미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두 바뀌 돌다 한 자리를 발견했는 데 아주 좁은 자리가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후진해서 들어가는 데 갑자기 “쿵”하고 소리가 납니다. 문을 열고 내려 보니까 제 차 오른쪽 뒷 밤바가 그 차 앞 밤바를 쳤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제 차는 밤바의 줄이 떨어질만큼 많이 다쳤는데 그 차는 살짝 금만 갔습니다. 저는 가끔 그렇게 기적적으로 사고를 냅니다. 순간 그냥 갈까 생각했습니다. “내 차가 더 다쳤는데” 하다가 그래도 내일 아침되면 주인이 속상하겠다 싶어 볼펜을 꺼내 쪽지를 썻습니다. “죄송합니다. 후진하다 앞 밤바를 쳤습니다. 고쳐드릴테니 연락하세요”. 그리고 제 핸드폰 번호를 써서 차에 남겼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쉬고 있는 데 바로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하고 보험으로 고쳐드렸는 데 저녁 무렵에 문자가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이곳에 7년째 사는 데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요즘 우리 나라도 이랬으면 문제가 없을텐데 (점점점). 하여튼 감사합니다”. 저는 자동차 사고나고 나라까지 이야기하는 사람 처음 보았습니다. 저도 돈 물주고 괜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작은 일을 통해서 지금 우리 나라가 겪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이야기하다니 이 사람이 철학자인가? 애국자인가? 차를 쳐도 이렇게 수준높은 사람 차를 쳐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자동차 사고 좀 안날 수 없을까요? 우리는 자동차만 부딪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고 서로 상처주고 미워하고 사는 데 이런 것 좀 없으면 안될까요? 어쩌다 실수했다고 합시다. “모든 것이 내 잘못입니다. 내가 죄인이예요.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다 내 잘못이예요. 내가 벌을 받을께요”. 이런 사람 좀 있으면 안될까요? 왜 우리는 삶속에서 고통가운데 살까요?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듣기 위해 우리는 로마서로 가야 합니다. 로마서는 인간 존재의 근본 문제를 믿음의 눈으로 살핀 책으로 성경에서 가장 중요 책이며 인류의 정신사에서 보물같은 책입니다. 그래서 영국 대영박물관장 필립스가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에게 온세계를 다 준다해도 대영박물관과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 친필 원고를 단 한 페이지만 준다고 해도 대영박물관과 기꺼이 바꾸겠다”. 그만큼 로마서는 중요합니다. 로마서가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의 진수인 믿음을 죄, 의, 은혜, 연합, 거룩, 성령, 승리등 모든 주제와 함께 근본적으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뜻깊은 3월과 4월, 부활에 이르는 사순절에 이 은헤를 함께 나눌 때 우리 모두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으로 넘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죄아래 있다.
로마서가 다루는 첫 번째 믿음의 주제는 죄입니다. 믿음으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이 죄문제라고 봅니다. 그것이 롬1-3장까지 나타납니다. 그런데 순서가 재미있습니다. 1장은 이방인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2장은 유대인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3장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점차 강도를 높혀 갑니다. 자, 1장입니다. 롬1:21-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이 죄인인 이유는 하나님을 몰라보고 우상을 하나님으로 섬긴 죄입니다.
이번에 제가 미얀마를 갔습니다. 양곤에 가면 스웨다곤 파고다라는 것이 있는 데 이 나라의 국보입니다. 수백년동안 만들었습니다(1. 사진). 이 탑에 금이 5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가 5천개, 보석이 2천개가 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파고다 주변에는 82개의 작은 방이 있는 데 거기에 수백, 수천개의 부처가 있습니다. 누가 봐도 부처보다도 금이 더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온통 금으로 장식한 탑을 보면서 하나님을 몰라보는 인간의 죄를 생각했습니다. 이방인의 죄는 하나님을 모르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짝퉁 하나님으로 섬기는 죄입니다.
이방인이 몰라서 죄를 짓는다면 유대인들은 알고도 죄를 짓습니다. 2장입니다. 롬2:18-21,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1장에서 바울이 이방인이 죄인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럼 그렇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죄야.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 그런데 바로 그 유대인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도 죄인이다. 이방인은 모르고 죄짓지만 너희는 알고도 죄를 짓는다. 너희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너희들만 옳다고 생각하는 죄다”. 유대인은 율법을 가진 민족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쁠 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만 옳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틀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믿는 우리가 언제나 조심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다행히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방인의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연조가 깊어가면서 이런 실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 옳아. 그런데 김집사는 문제가 있어. 왜 나처럼 안믿지? ”. 인터넷에 올라온 “진짜 무서운 사람” 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새벽기도에 한번도 빠지지 않는 집사님의 눈길이 무섭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꼬박꼬박하는 신자의 눈길이 무섭다.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다. 크고 건강한 교회를 다니는 성도가 무섭다.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자가 무섭다. 성도수가 많은 큰 교회의 목사들이 무섭다”. 우리가 열심히 믿는 것은 좋지만 내 믿음을 절대화한 나머지 남의 믿음을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옳게 믿는 것은 중요하지만 잘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옳게 믿는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분이 옳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옳게 믿되 그것을 남을 정죄하는 수단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1,2장에서 이방인, 유대인의 죄를 말한 바울은 3장에서 죄를 모든 사람에게 확대합니다. 9절입니다. 롬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이 “모든 사람이 죄아래 있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죄아래 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아래”는 헬라어로 “휘퍼”입니다. 이 “휘퍼”는 다만 공간적으로 아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지배한다는 개념입니다. 누구 누구의 지배하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죄는 다만 어떠 어떠한 것 하나 둘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억압과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표현한 것이 롬7:23입니다. 롬7:23, ”내 지체속의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사도 바울은 죄를 ”나를 사로잡는 것, 나를 노예로 삼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죄의 법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 그 고통스러운 포로의 상태를 내가 알고 봅니다. 알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뻔히 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죄앞에 무력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교육학자들은 죄를 교육의 부재, 인격의 미성숙이라고 봅니다. 환경론자들은 나쁜 환경과의 접촉, 곧 후천적인 것으로 봅니다. 사회학자들은 죄를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전쟁과 사회적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온다고 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죄의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 곧 선이 부족한 상태가 곧 죄라고 말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심리학적 입장입니다. 심리학은 죄를 말하지 않고 죄의식, 죄책감을 말합니다. 죄라는 단어를 “상처”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상처는 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덮어주고 싸매주면 됩니다. 상처는 주로 인간관계에서 옵니다. 어릴 때 부모에게 나쁜 영향을 받았다거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갈등등에서 생깁니다.
1990년대 신출귀몰한 탈옥수 신창원은 한 수녀에게 어린 시절의 가슴 아픈 경험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너무 가난해서 육성회비를 제때 내지 못했는 데 어느날 담임 선생님이 회비를 독촉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같은 놈은 학교 다닐 필요없어”. 그 한마디가 신창원이의 마음에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그리고 그 뒤 범죄자가 되었습니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쁜 환경속에서도 성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입니다. 그는 창녀의 아들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매일밤 다른 남자들과 자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우찌무라를 창녀의 아들이라고 욕하고 발로 찻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라서 일본 최고의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문둥병자의 고름을 입으로 빨았고 평생 폣병환자와 함께 살았습니다. 나쁜 환경이 그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좋은 교육을 받으면 죄가 없어진다고 하면 교육수준이 높은 미국은 죄가 없어야 합니다. 죄가 더 많습니다. 환경이 좋으면 죄가 안생긴다면 노르웨이나 핀란드에서는 죄가 생기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해야 죄를 짓는다면 죄는 아프리카에서만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가난하든 부자든, 환경이 좋든 나쁜든, 교육을 많이 받았든 적게 받았든, 미국이든 노르웨이든, 아프리카든 세상 어디에나 죄가 있습니다. 죄는 인간을 속박하는 어떤 인격적인 힘입니다.
계속해서 볼까요? 10절에서 18절입니다. 롬3:10-18,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0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 여러분중에는 이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 “의인”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인”은 죄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책망받을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도 안중근, 이수현, 강재구같은 의인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도덕적 관점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의 “의”입니다. 영어로도 다르게 씁니다. justice, 이것은 사법적 의입니다. 재판안받고 감옥 안갔다 온 사람입니다. righteousness 라는 의가 있습니다. 이 “의”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입니다. 더러 착하게 살고 존경받는 의인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공부를 안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식이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어도 영적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다 치우쳐”.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쓸모없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사람의 행위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먼저 죄는 말로 나타납니다. 13절과 14절은 “말로 짓는 죄”입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절은 행동으로 짓는 죄입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이것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관계의 문제다.
로마서는 조금 깊히 들어 갑니다. 그러면 죄의 본질은 무엇인가? 죄가 무엇이냐를 물을 때 우리가 구분할 것은 죄의 뿌리와 죄의 열매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롬1:29-31절에 나오는 죄들이 있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여기 나오는 죄의 목록들은 죄의 열매지 죄의 뿌리는 아닙니다. 죄의 몸통이 있고 꼬리가 있습니다. 죄의 뿌리가 있고 죄의 열매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롬3:18절에 나옵니다.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죄에 대하여 다 말한 다음 그 모든 죄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죄의 뿌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롬1:21,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 없는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이방인의 죄는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믿는 죄입니다. 우상숭배죄입니다. 유대인의 죄는 자기 믿음을 하나님처럼 여긴 죄입니다. 한쪽은 우상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한쪽은 자신을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공통점은 28절입니다. 롬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절은 거기서 나온 뿌리입니다. 롬12: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29절은 죄의 열매요 28절이 죄의 뿌리입니다. 뿌리에서 열매가 나왔습니다.
죄의 뿌리와 열매는 한 나무에 붙은 한 존재입니다. 이를 위해 롬1:18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하나님이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 아닙니다. 진노한다고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진노할만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친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친절이 사랑은 아닙니다. 가장 친절한 사람은 여자를 유혹하려는 남자입니다. 지나가는 어린이 유괴범도 친절합니다. 그렇다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잘못하는 아들에게 친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죄에 대해서는 진노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어떤 죄에 진노합니까? 18절,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입니다. 곧 “불경건과 불의”입니다. 순서를 잘 보셔야 합니다. 경건치 않음, 불경건이 먼저 나오고, 불의가 뒤에 나옵니다. 그런데 두 가지가 조금 다릅니다. 불경건은 하나님앞에서 불경건한 것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 기도, 겸손, 이런 것이 경건입니다. 불의는 밖으로 드러난 나쁜 행위입니다. 앞에서 말한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이런 것이 불의입니다. 불경건은 잘못된 믿음이고, 불의는 잘못된 삶입니다. 불경건이 나무의 뿌리라면 불의는 나무의 열매입니다. 십계명을 보실까요? 십계명도 크게 둘로 되어 있습니다. 1-4계명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입니다. 우상섬기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 안식일 지키라. 이것이 경건입니다. 5-10계명까지는 삶에 대한 계명입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하지 말라. 십계명으로 보면 1-4계명을 어기면 불경건이 되고 5-10계명을 어기면 불의한 것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 불경건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불의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 뿌리에서 열매가 나옵니다.
이것을 전통적으로 교회사에서는 7가지 죄로 설명합니다. 모든 죄의 뿌리가 되는 죄가 하나 있고 6개의 가지가 되는 죄가 있다고 말합니다. 도표를 보겠습니다(2.도표). 죄의 나무입니다. 죄의 나무에는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먼저 뿌리는 땅속에 있습니다.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중요합니다. 모든 죄가 여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나태 탐욕
분노 탐식
뿌리=교만
모든 죄는 교만으로 시작합니다. 다른 죄가 행동으로 짓는 죄라면 교만은 마음으로 짓는 죄입니다. 다른 죄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온다면 교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c.s.루이스에 의하면 교만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맞서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대적은 이렇게 발전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반감으로 시작합니다. 반감은 하나님을 마음으로 무시하는 마음입니다. 반감이 반항이 됩니다. 반항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상태입니다. 반항이 반역이 됩니다. 반역은 하나님 자리에 내가 앉는 것입니다. 결국 교만은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시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모든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죄입니다. 한 두 가지 잘못이 죄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 무시하고 하나님 내쫓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남는 죄가 교만입니다.
이 교만의 뿌리에서 여섯 개 가지가 나옵니다. 먼저 시기입니다. 시기는 남의 불행을 기뻐하고 남의 행복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질투가 남이 가진 것을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슬퍼하는 것이라면 시기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진 것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질투의 촛점은 나에게 있고 시기의 초점은 남에게 있습니다. 분노는 사탄의 화로입니다. 분노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프”는 “코”입니다. 코를 벌렁거리고 콧구멍에서 뜨거운 김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라”란 단어도 있는 데 “불”입니다. 분노는 맹렬히 타는 불입니다. 그 불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다른 죄가 행하는 죄라면 나태는 행하지 않는 죄입니다. 잘못 행한 것도 죄지만 아무 것도 안하는 것도 죄입니다. 나태는 아무 것도 안하는 죄입니다. 탐욕의 원래의 뜻은 강물이 모여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만 결코 바다를 채우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탐욕은 만족을 모르는 욕구입니다. 소유가 많아지면 그 소유는 하나님을 대신합니다. 탐식은 생존 이상을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이 수단이 아니고 목적이 된 삶입니다. 정욕은 끊임없이 목마른 바닷물입니다. 성적 본성은 하나님이 주셨지만 정욕은 죄입니다. 정욕은 “통제할 수 없는 과도한 성적 욕망”입니다. 쾌락만을 목적으로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6개 가지들입니다. 이 가지에서 죄의 열매들이 맺힙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죄의 열매들이 여기 맺힙니다. 앞에서 롬1장에도 나왔고, 갈5장에도 나옵니다. 우상숭배, 주술, 원수맺는 것, 분쟁,당짓는 것, 분열, 이단, 엡4장에도 나옵니다. 거짓, 도둑질, 더러운 말, 악독, 떠드는 것, 비방, 딤전6장에도 나옵니다.
뿌리=교만 불경건
모든 죄는 교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 뿌리에서 여섯 가지가 나옵니다.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입니다. 이 가지에서 온갖 죄의 열매들이 나옵니다. 이것을 롬1:18로 표현하면 죄의 뿌리, 하나님과의 관계의 죄를 “불경건”이라고 부르고, 죄의 가지, 죄의 열매들을 “불의”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죄의 결과는 참혹하다.
그래서 묻습니다. 이래도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겠습니까? 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 말에 진정으로 동의하지 않습니까? 혹시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분들은 나는 과속으로 딱지 두 번 뗀 것 말고는, 어쩌다 부부싸움한 것말고는, 남들이 가는 유치장이나 감옥 한번 간 적이 없으니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묻습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저 많은 죄의 열매중에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까? 과연 그런 기적이 있겠습니까? 설령 있다고 찹시다. 죄의 6개 가지에도 해당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까? 일생을 살면서 한번도 남이 잘된 것 시기해 본 적이 없습니까? 남에게 이유없이 한번도 화를 내본적도 없습니까? 예쁜 여자 지나갈 때 마음의 동요 한번 없었다는 말입니까? 한번도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거나 정도 이상의 욕심을 낸 적이 없다는 말입니까?
100번을 양보해서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여러분은 항상 하나님 모시고 삽니까? 하나님을 마음으로 무시하거나 거역하거나 불순종하거나 다른 무엇을 하나님처럼 여기거나 내가 그 자리에 앉아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까? 없다면 그 자체가 죄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에 누가 안 걸리며 않겠습니까?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에 누가 걸리지 않겠습니까? 죄의 열매만이 죄가 아니라 죄의 뿌리가 더 크다고 하니, 법적으로 지은 것만 죄가 아니라 마음으로 지은 죄가 더 많다고 하니,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은 죄보다 하나님의 관계에서 지은 죄가 더 본질적인 죄라고 하니 누가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겠습니까? 어떻게 내가 지은 죄가 남이 지은 죄보다 더 많은 데 다른 사람의 죄를 논하겠습니까? 남의 죄를 논하는 자체가 이미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사는 동안 이 모든 죄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브라함도 거짓말하고 모세도 혈기내고 다윗도 간음죄짓고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했으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도 마귀에게 40일간 시험받고 시험후에 마귀가 “잠시” 떠났다는 데 우리는 얼마나 마귀가 집요하게 유혹하고 죄짓게 히겠습니까? 사과나무에 열매가 많이 있든 적게 있든 사과나무인 것처럼 내가 남보다 죄가 적어도 죄인이긴 마찬가지이니 나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하고 죄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은혜가 다음 주 롬3장에서 소개되는 데 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찾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움없이는 우리가 죄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이 사순절에 더 간절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겠습니까? 그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피고석에 앉은 인간
이규현 목사
인간의 삶에는 불행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행보다 그 불행의 원인을 모르는 것이 더 불행합니다. 고통하고 있는 것보다 고통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 더 큰 고통입니다. 병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병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입니다. 원인을 알지 못하면 치료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진단이 필요하고 진단에 따른 처방이 필요합니다. 왜 오늘 우리가 이렇게 고통하고 있는가? 왜 인간의 삶은 이렇게 힘들고 무거운가? 우리 가정과 삶이 겪고 있는 문제의 한가운데에 무엇이 있는가? 이것을 알려면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는 알 수가 없고,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책입니다. 인간에 대해 이해를 하려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기원과 불행하게 된 이유를 창세기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는 신구약 전체의 교리를 집대성한 책으로, 인간에 대한 선언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실존을 잘 정리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모든 인간을 법정에 세워 피고석에 앉게 한 것입니다. 의인이 없고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피고석에 앉은 인간이 죄인의 판정을 받고 있습니다. 이 판결은 누구도 뒤집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장 권위 있고 최종적인 판결입니다. 타협이 불가능한 확정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라기보다는 죄인으로 태어나 존재론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부릅니다. 시편 51편에서도 “죄악 중에 잉태”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에게 거짓말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거짓말을 잘합니다. 이기심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소유욕이 강하고, 형제끼리 장난감을 가지고 싸우다가 상대방을 깨물어버립니다. 몸을 부르르 떨며 깨무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는 것처럼 죄인에게서 죄라는 열매가 그냥 맺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편에서 죄인이 아니라고 외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요한일서 1장 8절과 10절을 보면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 되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죄를 숨기려고 하고 미화시키고 정당화하고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남을 탓하고 자신을 포장합니다. 죄를 지었다고 말하지 않고 실수했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죄를 지었는데도 인정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일평생 유혹을 받는데 문제는 죄성입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이 유혹을 받을 때 욕망이 건드려집니다. 돈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닌데 돈을 더 가지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을 유혹합니다. 끊임없이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이 되어 소유하려고 합니다. 채워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결혼을 했으면 한 사람에게 헌신하고 만족해야 하는데 또 다른 이성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마치 종이가 물에 잘 젖는 것처럼 인간은 죄의 유혹에 너무 쉽게 물듭니다. 성경에서 의인이 없다고 말씀하는 것은 죄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죄에 관한 한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해부도와 같습니다. 바울은 11절 이후부터 피고석에 앉은 죄인에 대한 판결문을 읽고 있습니다. 이것을 읽다보면 우리의 모습이 드러나 불쾌해질 수 있습니다. 법정에서 내 죄목이 조목조목 열거된다면 기분 좋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죄인의 실상입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죄로 인해 망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망가져도 많이 망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의 본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깨닫는 자가 없다는 말은 영적인 깨달음을 말합니다. 세상적인 지식이나 정보는 넘치지만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무지합니다. 정말 똑똑한 사람인데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주식이나 부동산, 건강, 정치 이야기를 하면 흥분하다가도 영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하품을 합니다. 이런 모습이 죄인의 모습이고, 죄의 결과입니다. 영적인 기능이 작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서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반응을 전혀 하지를 않습니다.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굉장히 심각한 상태입니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성경은 영적인 깨달음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서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아주 심하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에게 영적인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도망을 갑니다. 탕자문명입니다. 인간에게는 가출심리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도 아버지 집이 좋은데도 끊임없이 집을 떠나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하나님의 낯을 피해 계속 도망가려고 합니다. 이 가출의 심리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반감이 숨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스스로 가진 감정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올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전도를 하다 보면 이런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그냥 안 믿겠다고 하면 되는데 화를 내고 악을 씁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12절에도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라고 했습니다. 인간들이 다 치우쳐 살아갑니다. 치우쳤다는 것은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빠졌다는 것입니다. 기차가 레일을 벗어난 것을 탈선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상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평안의 길, 축복의 길을 거부하고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그리고 무익하게 되었다는 것은 어원적으로 맛이 간 우유를 의미합니다. 쓸모가 없는, 버려야 하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선을 행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선을 행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 내적 동기를 보면 불순한 것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악한 것으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한 정의를 내립니다. 인간에게는 선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13~14절에서 죄인의 상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롬 3:13~14)」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죄인의 증상은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나옵니다. 내면의 세계는 볼 수 없지만 그 속에 있는 것들이 언어생활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본문에서는 목구멍, 혀, 입술, 입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입은 악의 출입구가 됩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유대지방에는 무덤이 열리기도 했는데 그 안에는 악취를 내뿜는 썩은 시체가 있습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렇습니다. 몇 년 전 인도네시아 쓰나미로 인한 재해 현장에 봉사를 다녀왔던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는데 시체가 썩어갈 때 악취가 얼마나 지독한지 견딜 수 없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냄새가 지워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세상이 얼마나 더러워집니까. 사실 우리가 살기 힘든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말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인터넷을 통해 거침없이 말들을 쏟아냅니다. 인간의 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처럼 사람들끼리 속이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합니다.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우리의 언어는 참 이중적입니다. 앞에서 한 말과 뒤에서 한 말이 다릅니다. 앞에서는 칭찬하고 뒤에서는 욕을 합니다. 참 진실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픔을 겪습니다. 말의 이중성은 바로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독은 치명적입니다. 저주와 악독을 쏟아냅니다. 무서운 것 중의 무서운 것이 혀입니다. 폭력적이어서 일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후 가장 먼저 언어생활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 내면의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말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변화되었다는 것은 말에서 드러납니다.
또한,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8)」 죄의 뿌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죄를 지을 만반의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으니 어떤 죄도 지을 수 있습니다. 죄를 짓는 현장에 가 보면 하나님이 없습니다. 죄를 짓는 동안에는 하나님은 안중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짧은 몇 구절 안에 인간의 죄의 모습이 구체적이고 다양하게 열거되고 있습니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사실입니다. 이 내용을 듣고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일평생 거짓말을 한 적도 없고 죄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진짜 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죄 없다고 하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죄인의 특성은 죄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취급하려고 하고 죄를 아주 경미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다루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축복만 이야기하고, 죄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으려는 경향을 가진 교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죄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아니고, 죄를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느냐가 중요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신앙은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은 죄를 들추어내지만 그 목적은 우리를 살리려는 것입니다. 병원에 갔을 때 진단을 하고 수술을 하는 것은 살리려는 것이지, 배를 갈라 죽이려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법정에 세우고 죄인으로 만들어서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솔직하게 자기의 죄인 됨을 인정하면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교회를 십년 넘게 다녔어도 가슴 깊숙한 곳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분이 꽤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교회만 다닌다면 성경이 말하는 진리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죄의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접근과 이해가 없이는 십자가와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은혜는 없고 그저 도덕 강좌를 듣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로마서를 통해서 접근해야 할 부분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해결되면 인생에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고통 하는 이유를 모르는데 고통이 해결될까요? 분명한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인정을 하든지 인정을 하지 않든지 하나님의 판정은 우리는 죄인이라고 내려졌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선고라고 했습니다.
죄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라는 말씀처럼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이 사망은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말합니다. 죄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도 많지만 심판의 이야기도 수없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에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죄인에 대한 형벌이 없다면 구원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힘이나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스스로 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몸부림쳐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고자 했지만, 아무도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수준에까지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이 죄인 됨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종교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고 하고,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 합니다. 그런 것으로 이미 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지은 죄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고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최종적으로 도달할 곳은 사망이요 영원한 심판과 지옥입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미온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사소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굉장히 민감하십니다. 반드시 처벌하시고 맹렬하게 진노하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공의로 판단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에서 인간에게는 길이 없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편에서도 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인간을 구원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피고석에 앉아있는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피고석에 앉은 인간을 내려오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 피고석에 앉게 하신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스스로 피고석에 앉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그 아들이 대신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위대한 반전! 복음은 기가 막힌 반전입니다. 완전한 죄인으로,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구출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흠이 없으시지만 죄인 취급을 받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좀 더 행복하고 도덕적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처리하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죄의 대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넘겨졌고 그분이 모두 뒤집어쓰셨습니다. 홀로 그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로 인한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이렇게 명백하게 죄인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우리에게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진리를 들을 기회를 허락하시고, 진리가 귀에 들어오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난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행위의 문제로 인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로 인해서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갈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그 십자가의 위력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래도 우리가 받아야 할 징벌이 남아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언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 사함은 완벽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고집을 피우고, 나를 포장하고 미화할 이유가 없고, 죄인이 아니라고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죄인 됨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살 길이 활짝 열렸기 때문에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붙잡으면 됩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완벽한 대가지불을 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되어 피고석에 아들을 앉히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의 행위나 선함이나 공적이나 경력과 같은 자랑은 전부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난 순간 죄로 인한 하늘의 징벌이 불같이 임할 존재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죄로 인한 심판을 멸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죄에 대해서 더 이상 심판받을 근거가 사라진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의 문제로 다시는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진실한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피고석에서 해방되고, 더 이상 어떤 죄도 묻지 않으시며 죄인이 의인이 되는 은혜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헛된 자랑을 모두 내려놓고 그리스도 외에 어떤 것으로도 포장하려고 하지 말고,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고 또 감격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하지 않는 죄
임현수 목사
성경의 인간 진단은 사실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 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9,20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선언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죄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삶의 목표에서 벗어나므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는 삶을 살게 된 인간의 태도와 행실을 의미합니다. (롬3:9-18)절이 결론 입니다.
한문으로 죄라는 말이 흥미롭습니다.죄(罪)란 넉 사(四)자에 아닐 비(非)자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란 네 가지 아닌 것을 말합니다.
1.믿음으로 좆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롬14:23)불신앙(不信仰)
2.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입니다.(약4:17)불순종(不順從)
3.죄는 불법입니다.(요일3:4)불법(不法) 롬1:26-28 비 순리적으로 사는 것
4.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 입니다.(고전8:12) 비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죄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신앙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살고, 선이 아닌 것으로 살고, 법이 아닌 것으로 살고, 양심적이 아닌 것으로 살고 순리적으로 살지 않는 것이 죄 입니다.
이런 죄로 인해서 인간에게는 세 가지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1.영적인 죽음 입니다.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를 말 합니다.
2.육적인 죽음 입니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말 합니다.
3.영원한 죽음 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를 말 합니다.
그래서 범죄한 인간에게 남는 것은 곤고한 삶 뿐 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이런 곤고한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 입니다.
눅 5:32 /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딤전 1:15 /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눅 15:7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그러므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은 없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후배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당신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마시오. 그러므로 그 일로 시간을 보내며 그 일에 당신이 쓰여 지도록 하시오. 당신이 얼마나 많이 설교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며 이런 저런 일들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이 최선을 다해 영혼을 구했느냐가 문제 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죄인을 데려와 회개 하게 하십시오.>
예수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평생을 개인전도자로 사셨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때로는 새벽에도 밤중에도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나셨습니다. 도시에서도 촌에서도 거리에서도 산에서도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삭개오를 만나시고, 니고데모를 만나시고,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고, 시몬의 집에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던 죄 많은 여인 마리아도 만나시고, 군중들 사이에 숨어 몰래 자신의 옷깃을 만지던 혈루증 앓던 여인도 만나셨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다른 마을로도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다고 하셨습니다.
전도는 예수님의 삶의 최우선 순위였습니다. 그러므로 개인 전도자로서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삶의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할 것 입니다.
성경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경고 하고 있습니다.(고후9:16)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지옥 불에 떨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그 영혼들을 구원하지 않는 것은 큰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전도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죄입니다.
마태복음의 결론은 주의 지상명령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마 28:19-20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의 결론도 복음전파의 명령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막 16:15 /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누가복음의 결론도,요한복음의 결론도, 사도행전의 시작과 끝도 마찬가지 입니다. 땅 끝까지 가서 나의 증인이 되라는 것 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말씀 하십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불순종한다면 아무리 살진 소를 잡아 제사한다 할지라도 <가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전한다는 것은 <영생을 전한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고 <천국을 그에게 준다>는 말과도 같은 말 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에 가장 크게 쓰셨던 사람들을 보면 모두 전도의 명령에 즐겨 순종했던 사람들 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대표적인 인물 입니다.바울은 전도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 구세군의 창시자 부츠 장군,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암케리, 20세기 최고의 전도자 무디나 촬스 피니, 빌 브라이트,빌리그래함 오스왈드 스미스 같은 사람들은 철저하게 전도의 명령에 순종했던 사람들 이었습니다.중국의 전도자 마마꽝 같은 여인은 너무나 전도 하고 싶어서 전도하다가 툭하면 감옥에 잡혀 가다보니까 20년을 감옥에 갇혀 살았습니다.
국민학교 교장을 지내고 은퇴하신 한 장로님은 전도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자기가 잘하는 바둑과 장기를 가지고 시간 많은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전도했다고 합니다. 회갑잔치에 모인 자손들 140명 교회에 인도하신 노인…
미용기술을 가지고 전도하는 분들도 있고, 침을 배워서 선교하시는 분도 있고, 컴퓨터 배워서 전도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택시 기사에게 잔돈 안받고 전도..
한 시간에 2만원 번다고 2만원 주고 예배 1시간 참석 시킴..주안교회
미국에는 파워풀 리빙 (Powerful living)라는 켐패인을 벌여 전도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1년에 약 2,000만 달러 정도의 경비를 들여 TV 고정 프로그램을 세내어 네 사람을 출연 시킵니다. 그 프로에는 유명 영화배우, 정치인, 억만장자, 운동선수 등이 출연 합니다.그 사람들은 출연해서 이렇게 말 합니다.
<여러분 저는 영화 배우 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저에게 오직 인기가 제일 중요한 줄로 아시는 분 들이 계실 것 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 그러니까 참으로 중요한 것 이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전화 주십시오> 그리고는 마지막 화면에 자막으로 전화번호가 나타납니다. 다음에는 억만장자가 출연 합니다. 역시 <나는 억만장자 입니다…>라고 말 합니다.이렇게 해서 한 해에 전화와 편지를 받은 것이 950만 통 입니다.
전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하는 발 입니다. 복음을 실어 나르는 발이 가장 아름다운 것 입니다.아름답도다 산을 넘는 자의 발이여…
2. 전도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죄 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하셨고,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라 하셨습니다.(요14:15, 23)
전도에 미쳤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쳤다는 말 입니다.
고후 5:13-14 /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하신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꼼짝 달싹 못하도록 붙잡혔다는 말 입니다. 사랑의 열병에 걸렸다는 말 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그가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 입니다.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서 죽는 일도 흔치 않는데 그리스도는 죄인인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성경은 말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습니다. (롬5:7-8)
둘째는 그가 나의 삶의 이유가 되기 때문 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다시 사신 이유 입니다.그리스도처럼 살고, 그리스도를 칭송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수 있게 되었기 때문 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도 미쳐야 합니다. 유다 총독 베스도는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라고 했습니다. 그는 전도하는 일에 미쳐 있었기 때문 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바로 전도 입니다. 왜? 전도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인간을 변화 시키기 때문 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불만은 자기 자신 입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존재의 갈망은 변화의 갈망 입니다. 그런데 인간 변화는 진정한 사랑을 알고 깨달을 때부터 시작 되는 것 입니다.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치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 전도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 시키기 때문 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류최대의 과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정립입니다. 인간이 범죄한 후 일어난 가장 큰 문제는 관계가 깨졌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관계는 회복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이제 우리에게 이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전도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주는 책임을 말 합니다. 복음은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말 합니다. 화목의 말씀을 전해야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일에 미쳐서 살았습니다.
새 생명 축제에 미치는 것도 주님의 사랑에 미치는 것 입니다.전도하는 일에 미쳤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가장 많이 전도하는 사람 입니다. 구령열에 불 타는 사람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온 교회가 이 일에 미치면 세상이 감당 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적과 부흥의 역사가 우리교회에 찾아올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이야기를 전해 주십시오.
3. 전도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죄입니다.
한국교회의 뜻있는 지도자들이 외치는 구호 가운데 <교회를 갱신해야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듣게 됩니다. 교회를 갱신한다든가 교회를 개혁한다든가 하는 말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는 외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교회나 기독교 단체들이 그 본래의 정신을 잃어 버렸기 때문 입니다. YMCA, WCC, MISSION school(하바드, 예일, 스탠포드,연세,이화 등) 같은 학교들도 기독교 정신이 많이 퇴색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질을 회복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 주신 모범을 따라가는 것을 말 합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이 요청하시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마 4:19 /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우리가 주님을 믿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 입니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믿는 것 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 분이 가신 길을 가는 것이며, 그 분의 제자가 되는 것 입니다.
요12:26 /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벧전 /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영혼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결국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 입니다. 이번 새 생명 축제를 통해서 구령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다시 한번 회복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4. 전도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안에 거하지 않는 죄입니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라는 것은 그리스도안에 거하면 저절로 되는 것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도는 쉬운 것 입니다.
예수께 베푸신 다락방 강화 가운데 잘 알려진 말씀이 포도나무의 비유 일 것 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열매 맺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 하십니다.
포도나무의 존재 목적은 오직 포도열매를 맺는 일 일 것 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저절로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요 15:4-5 /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 말씀처럼 그리스도안에 거하지 않고는 영혼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 열매로 그것을 증거하여야 합니다. 열매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요 15:8 /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주 안에 거했던 빌립도, 베드로도,아나니아도 저절로 열매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광야에서도 열매를 맺고, 가정에서도 열매를 맺고, 감옥에서도 열매를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 구원의 열정이 없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기도를 잘하고,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도자가 주 안에 있는 자 입니다.
5. 전도하지 않는 것은 게으름과 불충성의 죄를 짓는 것 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세에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군고 하셨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예언 한 것처럼 말세가 가까워 올수록 시급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 될 것 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고파 있고 목 말라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생명수가 있고 생명의 떡이 있습니다. 이것을 안 나눠 준다면 주님께서는 악하고 게으른 종 이라고 책망 하실 것 입니다. 이것은 작은 죄가 아닙니다. 큰 죄입니다.
롬 1:14-15 /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복음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6. 전도하지 않는 것은 지혜 없는 어리석은 죄를 짓는 것 입니다.
의인은 생명나무와 같아서 영혼 구원의 열매를 맺어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 입니다. 전도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얻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 이라는 말 입니다. 이 이상의 지혜로운 투자는 없습니다.
사람을 얻으면 다 얻는 것 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근본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변화 이상의 혁명은 없습니다.
잠언의 지혜와 다니엘의 지혜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잠 11:30 /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단 12:2-3 /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이 세상 밖에 모르고 잠깐 지나가는 이 세상 일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입니다. 물질 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심판의 불이 임 할 때 나무나 풀이나 지푸라기 같은 것으로 세월을 보낸 사람들은 그 공력이 다 불타 버릴 것 입니다.
그러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이 영혼 구원 하는 일에 힘쓴 자는 하늘의 큰 상을 받게 될 것 입니다. 생명의 면류관, 기쁨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영혼을 구원한 자는 천국에서 영원히 빛나는 존재가 될 것 이라고 주께서 말씀 하십니다. 그러므로 잠깐 있다가 없어 질 것을 위해 영원한 것에 무관심하고 게으른 자는 근시안적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7. 전도하지 않는 것은 피 흘리는 죄 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피에 있다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고 하는 것은 어린 양 예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것을 말 합니다. 예수의 피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선물해 주는 생명의 피 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를 전해 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피 값을 우리의 손에서 찾겠다고 말씀 하십니다.
에스겔서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겔 3:17-19 /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우리의 책임은 사람들을 회개 시키거나 구원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책임은 죄인들에게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것 입니다. 선포하는 것 입니다.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인과 하나님과의 사이의 결단에 속한 것 입니다.
그러나 죄인을 경고해서 구원 해야 될 책임을 다 하지 않으면 피 값을 우리 손에서 찾겠다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놀라운 사랑을 전하지 않는 것은 죄악 입니다. 그래서 고전 16장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들은 모두 토론토에 사는 우리 동족들에게라도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므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되겠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작은 항구 도시 밀레도에서 전도하다 떠나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행 20:26-31 /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여러분, 만약 우리가 전도하지 않고 영혼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죄를 짓는 일이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죄를 짓는 것 이며,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죄인 것 입니다.또한 전도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안에 거하지 않는 죄이며, 게으름과 불충성의 죄를 짓는 것 입니다.
전도하지 않는 것은 지혜 없는 어리석은 죄를 짓는 것이며, 전도하지 않는 것은 이웃의 피 값에 대한 책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황광민 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스위스에서 고속도로를 개통하고 톨게이트를 백 번째로 통과하는 차량에게 일천프랑을 주기로 했습니다. 잠시 후 경찰이 입회한 가운데 백 번째 통과차량이 포착되었습니다. 담당자는 일천프랑을 주면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축하합니다. 선생님의 차는 고속도로 개통직 후 우리 톨게이트를 백 번째로 통과 한 차량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운금을 일천프랑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돈을 어디다 쓰시겠습니까?"
"네, 운전면허증 따는데 쓰겠습니다."
그때 옆에 탔던 부인이 얼른 입을 열였습니다.
"여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저씨, 이 사람은요, 술만 먹으면 언제나 이렇게 횡설수설한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고 있는데 뒷자리에 앉아있던 귀를 먹은 노인이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그것 봐라. 내가 뭐라고 했냐? 훔친 차를 타고는 멀리 가지 못한다고 하지 않더냐?"
성도 여러분! 사람은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죄인입니다. 죄 있는지 없는지 모를 뿐이지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다 죄인인데 두 종류의 죄인이 있다. 하나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고 다른 하나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 그런데 사실은 둘 다 죄인이다. 두 종류의 죄인이 있을 뿐 의인은 없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죄인입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철저하게 죄인됨을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해서 <죄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두 죄인이다
첫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어떠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바울은 먼저 이방인의 죄를 지적하고 다음에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고 나서 이제는 인류 전체가 죄인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불신자나 신자나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인이라는 점에서는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특별히 죽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죄인이라고 회개하지만 뼈저리게 느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구원받기 원하는 여인이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는 여인에게 사람은 모두 죄인임을 일깨워주고 따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나쁜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겠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한마디도 따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여인에게 구원받기 싫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인이 말하기를 "목사님, 저는 나쁜 죄인이 아닙니다. 저는 좋은 죄인입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믿든 안 믿든 자신은 꽤나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 의롭다고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얻어지는 상대적 평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 평가치가 아닙니다. 사람 보기에 좀 의로워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의는 상대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개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교만한 생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최선을 다하고도 부족함을 고백해야 옳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위험한 생각입니다. 99가지 잘해도 한 가지만 잘못하면 죄인입니다. 어떤 청년이 예수께 나와 영생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은 모든 계명을 어릴 적부터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다 잘했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가 부족하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 중에도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 나쁜 사람들도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 많은데 나는 왜 어려운지 모르겠다."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도 그렇습니까? 사실은 나도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원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를 알아야 지금 이만큼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죄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의인은 없나니
그러면 이제는 말씀의 중심이신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 이제 두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10절∼18절 사이에 '없다'는 단어가 7번 나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인간의 철저한 죄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성을 말합니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이것은 원죄입니다. 인간의 상태는 아주 심각합니다. 인간의 죄성을 심상히 보아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원죄문제를 심각하게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죄만 없으면 의인인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프랑스의 개신교 목사 모노드도 처음에는 바울이 과장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니까 이 구절들이 구구절절 진실된 말씀으로 부딪쳐 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느낄 수 있어야 정상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되어 있습니다.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나 똑같이 인정하는 교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으로 인하여 깡그리 없어졌느냐 아니면 그림자는 남아 있느냐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전적 타락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인간의 자격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형편입니다. 이것은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교회에 두 동창생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분은 어려서부터 절친한 죽마고우였습니다. 죽음이 아니면 그 우정을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대단한 관계였습니다. 대학교까지 활동도 같이 하고 졸업 후에도 한때 사업도 같이 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피를 나눈 형제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보증까지 서줬던 친구를 배반하고 많은 돈을 챙겨 가지고 도망을 쳤습니다. 뼈아픈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보증을 서 준 빚을 갚느라고 10년간을 고생해야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본인도 충격을 받았겠지만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람이 과연 이렇게 배신할 수 있는가? 과연 인간은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 사람은 다 그런 것인가?'라고 회의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소망을 두었다가는 실망하고 맙니다.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오직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습니다. 교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지 않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 만큼 약한 존재요, 타락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큰 기대를 하지 마십시오. 그게 차라리 마음 편합니다.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그래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튼 인간은 근본적으로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이제 본문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인간의 전적 타락한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하였습니다(11절). 인간은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물론 철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이 하나님을 차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적인 전 존재는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찾아주시고 보여주시기 전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또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12절). 정말로 세상에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겠습니까?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선을 행하는 하나도 없다고 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의 선이란 불순한 동기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의 선행 속에는 불순한 동기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심성의 타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13절). 이것은 언어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합니다"(14절).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까? "존경합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하지만 이 모든 말이 다 거짓말입니다. 입에 발린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말의 순도가 100%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고 하였습니다. 발은 행동을 상징합니다. 말로 해결 안 되면 발로 해결합니다. 발은 힘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힘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주먹에 힘이 있으면 좋은데 써야 합니다. 진검으로 운동하는 사람이 지나가던 사람이 기분 나쁘게 한다고 칼을 휘둘러 두 팔을 잘랐습니다. 요 며칠 전의 이야기입니다. 돈도 많으면 힘이 됩니다. 이 힘을 잘 써야 하는데 사람마다 주머니가 두둑해지면 좋지 못한 행동을 합니다.
br 이것이 인간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생각도 순수하지 못합니다. 말도 순수하지 못합니다. 힘은 있으면 엉뚱한 곳에 써버립니다. 쓸 곳에 써야 가치가 있는데 헛된 일로 낭비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18절). 성도 여러분! 인간의 본질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인간 자체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희망이시요. 주님의 능력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죄를 다스리라
이제는 죄를 다스리라는 말씀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성도는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다스리지 못하면 죄가 우리를 다스립니다. 죄는 권세가 있습니다. 가벼이 볼 존재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죄의 권세를 말했습니다. 죄의 법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어서 선을 행하고자 하여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죄는 우리를 악으로 끄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본문 9절에서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말하면서 "죄 아래"있는 인간을 소개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죄의 권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즉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죄인 죄의 뿌리는 영원히 인간과 함께 합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만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죄의 권세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형편을 헤아려 보십시다. 죄를 다스리지 않고는 참 자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도 이에 관한 말씀입니다. 죄의 아비 마귀의 자식이 되어서는 참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어느 집안이 도박으로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도박을 해서 문전녹답과 집을 몽땅 날렸습니다. 그 집에 3대째 도박을 하는데 할아버지가 도박으로 망하고, 아버지도 도박하다 집 날리고, 그런데도 아들까지 도박을 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도박으로 망해서 자신이 고생하여 산다'고 원망하면서도 자신도 도박을 했습니다. 그런데 손을 댄 다음에는 도박에서 손을 떼지 못합니다. 그 분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도박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죄의 권세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의지가 강하고 이성이 분명한 분이라도 자신의 힘으로는 죄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다스릴 힘을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의 힘을 입으십시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그래야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야 참 평화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 하여 능력을 입고 죄를 다스리어 참 자유를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으냐?
옥성석 목사
지금 시중에서는 책 한권이 화제를 뿌리고 있습니다. 학력위조와 공금유용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정아(39)씨의 자전에세이 ‘4001’란 책입니다. ‘4001’이란 자신의 수인(囚人)번호라고 합니다. 저자는 한마디로 자존감이 대단한 사람으로 ‘자기칭찬’ 일색입니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인격, 도덕관념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자신은 책임이 없노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부활하는 신정아 신드롬을 대하면서 두 가지를 느낍니다.
첫째, 모든 것은 결국 다 드러납니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눅 8:17). 더 중요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란 좀체 자기 잘못을 인정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은 다 못돼 먹었고, 몹쓸 인간들이지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못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못된 본성의 뿌리는 에덴동산입니다. 아담이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시켰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전가시켰습니다. 그의 아들 가인이 동생을 쳐 죽이고도 뭐라 말했습니까?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겁습니다”(창 4:13). 저들은 이런 저런 변명, 원망들을 늘어놓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들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죄를 어떻게 하든지 숨기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못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쭉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이 너무 부담스럽고, 너무 무겁습니다. 일주일동안 삶의 현장에서 힘들었는데 좀 편안한 마음으로, 말씀 받고 환하게 웃으며,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정반대입니다. 갈수록 그 강도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이 그러한데, 설교자인 저는 오죽하겠습니까! 바울은 왜 이렇게 부담스런 메시지를 계속 이어가는 것일까요?
남가주 최초, 1만 명이 넘는 대형교회로 자리매김했던 수정교회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압니다. 이 교회 담임인 로버트 슐러(Robert Harold Schuller) 목사는 자신만의 목회노하우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사람들의 귀에 아첨하는 말, 듣기 좋은 말만 들려주는 것, 이것이 성공비결이었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는 빈센트 빌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 계보를 레이크우드교회의 담임인 조엘 오스틴(Joel Osteen)목사가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의 메시지에 무조건 ‘아멘’해도 될까요?
다시 로마서를 펴보십시오. 집요할 정도로, 몸서리쳐질 정도로 죄를 반복하여 지적합니다. 1장에 이어 2장, 3장으로 넘어가면서 그 강도가 점점 더 심해집니다. 1장에서는 ‘그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2장에서는 ‘너희’의 죄를 지적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 ‘너희’가 유대인임을 밝힙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3장 9절에 와서 바울은 이렇게 도전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여기서 ‘우리’는 편지를 쓰는 바울을 포함한 우리 모두, 이 편지를 읽고, 이 말씀을 듣고, 여기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를 지칭합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이되 보통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롬 3:13-18). 지금까지 1~2장에서 그들, 혹은 너희, 혹은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보다 더 강한, 매서운 말씀들입니다. 그야말로 집요하게 우리의 치부, 약점을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집요하게 ‘죄, 죄, 죄’를 다루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는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죄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못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빠져나가려 하고, 변명하려 하고, 책임전가 시키려하는 못된 습성이 우리 혈관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얻어맞아 터지고, 그래서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상하고 터지고 새로 맞은 흔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사 1:6).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변명하거나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울만 강력하게 그러했습니까? 세례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외쳤습니다(마 3:7). 베드로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외쳤습니다(행 2:36). 스데반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라고 외쳤습니다(행 7:51). 공생애를 시작하신 주님의 첫 마디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란 것이었습니다(마 4:17).
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이렇게도 중요할까요? 첫째,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가 필요 없습니다. 주님은 죄인 때문에 오셨습니다(눅 5:32). 그런데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예수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요일 1:10).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거짓의 아비는 사탄입니다. 그런데 ‘내가 죄인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사탄과 한 부류로 만드는 것이 됩니다.
셋째,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은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죄가 더한 곳이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곳에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탕자에게(눅 15장),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세리에게(눅 18:13)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은혜 받기를 원하십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솔직히 인정하십시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그 누구에게 잘못을 전가시키거나 합리화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파스칼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위인, 의인, 성자를 가장 존경할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나는 이 세 가지단어를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의인이나 위인이나 성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사람만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죄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영적 경주장, 출발선에 다시 섭시다. 내가 죄 아래 있음을 고백합시다. 나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으며,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었음을 솔직히 인정합시다. 나의 발은 피 흘리는데 빨랐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었음을 중심어린 마음으로 회개합시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날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더 빨리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성도들도 자기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롬 3:9-18; 찬송: 252장 / 오덕호 목사
오늘도 아침 첫 시간을 주님께 바치며 새벽기도회로 모인 모든 성도님들 가정과 주님께서 세우신 서울산정현교회 위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면서 먼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가르쳐줍니다. 특히,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서 율법도 받고 할례도 받은 유대인마저도 그런 것으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면 충분할 것 같은데 바울은 결정적인 선포를 한 번 더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누굽니까? 바울과 동역자들입니다. 지금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죄인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까지도 다 죄인입니다. 바울도 죄인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자기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한다는 뜻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자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자기 혼자만 놓고 보면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며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해도 그냥 죄인일 뿐입니다. 성도도 자기 힘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 바울은 구약성경을 인용합니다. 성경이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0-12절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여기서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은 마음부터 악에 젖은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13-14절은 사람이 말로도 온갖 죄를 짓는 죄인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절은 행동으로 죄를 짓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7-18절은 다시 마음으로부터 타락한 죄인이라고 가르쳐줍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렇게 모든 사람은 마음으로, 말로, 행동으로 죄를 짓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파멸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죄인인데 특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마저도 죄인이라는 말씀은 믿음의 아주 중요한 특징을 한 가지 가르쳐줍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바울도 죄인이라면 바울도 자기 힘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고 예수님을 위해 가장 많은 사역을 한 바울도 자기 힘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떠나는 순간 바울도 죄인입니다. 아니, 바울은 계속해서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은혜 아래 있을 때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의 은혜를 떠나면 그 순간 죄인이 되고 그냥 파멸당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마치 전등을 전원에 연결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원에 연결하기 전에는 전등에 불이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어두움뿐입니다. 그러다가 전원을 연결하는 순간 불이 들어오고 밝아집니다. 연결되어 있는 동안은 밝습니다. 그러나 전원에서 코드를 빼는 순간 전등은 꺼지고 다시 어두움이 지배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내 영혼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있는 게 믿음입니다. 내 마음이 일순간이라도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으면 나는 죄인이고 구원에서 떨어져나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것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알아야 항상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모태에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목사가 되었고, 신학교 교수도 했고, 담임목사로 교회를 섬기기도 했지만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게 이렇게 중요한지는 몰랐습니다. 특히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닫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목사가 문제를 일으키고 장로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모두 다 내가 예수님의 은혜를 떠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더럽고 추한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나는 예수님을 믿는 신자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은혜 안에 있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도저히 예수님의 은혜만 의지하며 예수님께 순종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나는 죽어야 할 죄인이고 예수님의 은혜로만 살아간다고 믿지 않으면 정말 우리는 다 파멸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 깊이 이것을 기억하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죄인이 아닌 것처럼 함부로 행동하다가 교회를 더럽히고 우리도 파멸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내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녀도 내 마음이 예수님의 은혜만 의지하는 데서 떠나면 바로 파멸당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주님의 은혜만 의지하며 철저히 순종하는 참된 신앙생활로 꼭 구원을 받기 바랍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롬 3:9~20 / 석시현 목사
제가 대학교 입학했던 첫해에, 저자가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이 붙은 책을 한 번 읽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교과 과정에 필요하거나 교수님이 읽으라고 권해서가 아니라, 그냥 서점에 갔다가 그 책을 우연히 보는 순간 그 책의 제목이 너무나도 멋있고 호기심이 끌려서 사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때에는 그 책을 아무리 읽어보려고 해도 무슨 말인지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최근에 와서 ‘그때 내가 읽어도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몰랐던 그 책이 도대체 무슨 책이었을까?’하고 한 번 다시 찾아보려 했더니, 꼭 같은 제목의 책들이 여러 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 정말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져보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이 질문에 대한 책을 쓰게 되고, 그런 책 제목만 보고도 도대체 어떤 대답이 쓰여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어서 당장 한 권 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하여 스스로의 판단과 정의를 내려 보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지만, 아무도 명확한 답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식으로 인간 자신이 모든 철학의 대명제가 되어서, 인간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고, 인간 자신이 중심이 되고, 인간 자신만을 사용하여 그 질문에 대한 사색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눈으로 자기를 보려고 하니까 정확하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옷 한 가지를 입어도 남이 보아 주어야 전체의 매무새와 뒷모양까지 더 잘 보아 줄 수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묻고 스스로 판단하려 하니 자연히 어려운 질문이며 불완전한 대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가장 객관적이고도 정확한 답을 해 줄 수 있는 ‘남의 눈’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정확하게 인간을 관찰하고 인간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내려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대전제’를 먼저 세운 후에 사람을 그 하나님 앞에서 판단하고 정의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3장 1-8절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은 의로운 심판주이시다.’라는 대명제로 모든 불신앙적인 질문과 불의한 반발을 물리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무엇이 어찌되었든지 절대주권자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이러이러할 수밖에 없다.’라는 사실이 인간의 모든 논리나 이해를 초월하는 절대적 진리 선포인 것입니다. 바로 그 전제,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고 오직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그 대전제를 가지고 ‘그렇다면 그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라고 질문하게 될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대답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요긴한 대답, 즉 ‘성경적 인간관’을 선포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주신 말씀을 통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쳐 주는 두 가지 대답을 함께 깨닫고 기억하고자 합니다.
1. 인간의 본성은 다 죄 아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적 속성 그 자체입니다. 바로 로마서 3장 9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고 증거한대로입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이 ‘사도 바울을 포함한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인지, 아니면 ‘사도 바울을 포함한 기독교인들’을 가리키는 말인지 조금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앞의 8절에서도 「우리」라는 말을 있는데, 거기에서는 유대인들에게 비난을 당하고 있는 ‘사도 바울과 기독교인’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본 9절 하반절에서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고 할 때의 ‘우리’도 물론 ‘사도 바울을 포함한 기독교인들’이 될 것이므로, 9절 상반절의 「우리」 역시 같은 뜻으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과 헬라인 즉 이방인이 하나님 앞에서 볼 때에는 근본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는 존재라고 단언했습니다. 「다 죄 아래 있다」고 했으니 한 사람도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라고 했습니다. 즉 ‘바울 자신을 포함한 기독교인들은 이 점에 있어서 더 나은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대답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예수 믿는 사람이든지 안 믿는 사람이든지 간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죄 아래 있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꼭 같은 처지에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 ‘사람이 죄 아래에 있다.’는 표현은, 죄가 사람 위에서 사람을 지배하고 있고 사람 위에서 사람을 내리 누르고 있고 사람 위에서 사람을 파괴시키는 강력한 힘이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생이 예외가 없이 다 이 죄 아래 묶여 있다는 사실을 「선언」한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구약 성경에서 여러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0절로 18절의 말씀은 구약의 시편, 전도서, 그리고 이사야서의 말씀들 중에서 이와 같은 사람의 죄성(罪性)을 진단해 주는 구절들 예닐곱 개를 뽑아서 한데 모아 놓은 것입니다.
본문 로마서 3장 10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구절들이 사람의 본질적인 죄성에 대하여 선포하는 바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의 본성’입니다. 그것은 곧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죄인이다.’라고 말할 때 그 이유가 무슨 윤리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다거나 결여가 되었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 된 사람이 그 창조자 되신 하나님을 ‘찾지 않는’ 바로 여기에 죄의 가장 근본적인 성질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편에서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을 먼저 찾아 가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으며, 자기 딴에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교만하는 가운데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의 타락성’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죄는 사람이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 즉 그 심령과 감정과 양심과 의지와 판단과 행동에 이르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타락시킨다는 뜻입니다. 혀와 입으로 나오는 말, 그 발이 달려가고자 하는 방향, 그리고 그런 행위 끝에 결국 파멸과 고생을 당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결과에 이르기까지, 그 인생 전 과정의 구석구석에 바로 이 죄가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심령과 신체의 그 어느 한 부분이라도 죄로 인한 타락의 더러운 것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는 것입니다.
이 인용된 구약 성경 구절들에서 셋째로 밝히는 것은, ‘죄의 보편성’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씀에서 시작하여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라는 말씀, 그리도 계속 재삼재사 반복되는 표현들, 「없고, 없나니, 없도다」라고 한 말씀들이 이 사실을 여지없이 증거해 줍니다. 즉 이상과 같은 죄성은 ‘모든 사람에게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성별에, 인종에, 혈통에,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이러한 죄성을 다 꼭 같이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죄성들을 종합해서 한 마디로 말할 때, 신학적 용어로 ‘완전 타락’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불의한 존재이며 그 인격으로부터 행위에 이르기까지 다 타락해 있으며 이런 죄성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사람마다 다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켜, 우리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바로 ‘완전 타락’이라는 이 한 단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이처럼 자신이 죄인인 것을 먼저 절실히 깨닫고 겸손히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오직 기독교만이 이런 인간관을 가르칩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에 대하여 논할 때, 이 죄 문제를 먼저 인식하고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냥 바로 선의 단계로 뛰어넘어가려 합니다. ‘사람이 종교를 통하여 얼마나 착해질 수 있는가?’ ‘사람이 어떤 선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라는 것에만 처음부터 집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종교는 결국 ‘윤리적인 종교’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기독교 안에도 그런 수준의 종교생활에 머무는 자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교회의 제일 사명이 사회사업에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그 예산 중에서 구제에 쓰이는 비율이 가장 높다고 해서 그 교회가 마치 가장 이상적인 교회인양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가난이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면 그 말이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결코 가난과 병이 아니라 바로 죄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교회는 바로 그 죄 문제 해결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해야 하며, 그 십자가 대속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전도와 선교에 교회가 가진 모든 힘과 정성과 물질까지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함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 아무리 신심이 깊다 하는 종교인이라 해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이것부터 먼저 철저하게 깨닫지 못하면 기독교의 최고 은혜인 이 십자가가 왜 은혜롭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게 됩니다. 십자가 은혜는 바로 ‘죄 용서함’에서 나오는 것인데,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 십자가라는 것이 무슨 은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른 ‘인죄론’이 없는 종교는 회개 없는 종교, 은혜 없는 종교, 눈물 없는 종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 자복’의 애통과 ‘죄 사함’의 은총 없이, 그저 ‘선’만 내세우는 종교는 그야말로 바리새적인 율법 종교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죄 아래 있다.’라는 이 성경 말씀의 선포 앞에서 자신의 본성을 정확하게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고 그 죄사함의 은총,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만을 통하여 누리게 되는 이 최고 최대의 은총을 뜨겁게 체험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둘째로, 인간의 운명은 다 심판 아래 있습니다.
이것이 죄인된 사람이 결코 피할 수 없는, 만 사람에게 꼭 같이 임하게 되어 있는 미래입니다. 로마서 3장 19절과 20절에 기록하기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율법은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 「율법 아래 있는 자」라는 말은 ‘법적으로 율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 있는, 율법이 적용되는 모든 영역에 속해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의 법의 관할하에 있는 자’이기 때문에, 이 구절은 결국 ‘율법이 선포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것이다.’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율법이 말하는 바」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타락한 죄인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율법이라는 요소는 바로 이런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나 선행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그 커트라인을 보여 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율법을 준행함으로써 구원 얻을만한 의로움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다는 사실, 그만큼 사람은 구제불능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해 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바로 사람이 그 사실을 정확하게 깨닫고 확실하게 인정하고 겸손하게 고백하게 된다면, 율법이 말하는바 또 하나의 사실 즉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라는 사실 역시 자동적으로 믿게 됩니다. 여기 「온 세상」이란 두말할 필요 없이 ‘온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말 역시 아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의 권위, 영향력, 지배력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은 그 죄로 인하여 심판 받아 마땅한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성경은 아예 「모든 입을 막고」 선포합니다. 즉 자기 딴에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 자기는 결코 죄인도 아니고 심판받을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든 교만한 입들을 막아 버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의 의를 그 어떤 사람도 결코 완벽하게 이룰 수 없음을 명백히 드러내 줌으로써, 자기 양심만 가지고도 하나님과 같은 수준의 의에 이를 수 있으니 자기는 하나님 안 믿어도 심판 따위는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그 건방진 ‘입들이’ 감히 그런 소리 꺼내지도 못하도록 아예 처음부터 꽉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 - 여기에 그 어떤 예외가 있을 수 없고 그 어떤 이의를 달 수도 없습니다. 제 아무리 좋은 일 많이 하고 사해동포주의로 살려고 하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자기 같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좋은 사람이 지옥 간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 된다고 대어드는 사람 역시 틀림없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완전타락’을 믿으면 ‘전 인류의 심판’은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추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두고 ‘너무 심한 일’이라든지 ‘하나님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심판이 내려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약하거나 하나님의 이해심이 부족해서 된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오로지 사람이 죄를 지었고,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 필연적으로 임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한 명도 예외가 없이 각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바로 이 사실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꼭 알고 있어야 할 자신의 최종적 운명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있어야 만이 그 마지막 심판을 위해서 제대로 준비를 할 수 있으며, 그렇게 준비하는 자세로 살아야 만이 그 인생을 가장 의미 있고 보람 있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판날을 대비하면서 살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삶을 평생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독교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역사적 최종 권위가 바로 심판에 집약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생명에 대하여 소유하고 계시는 주권의 최종 적용 행위가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그런 심판권을 인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가 있겠습니까? 변명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지극히 만만하게 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심판 아래 있다.’라는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의 생의 최종 미래를 바로 깨달음으로써,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며 생활에서는 진짜 의와 선을 행하고 살 줄 아는 신실하고 경건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 - 이보다 더 사람의 근본적인 본성을 정확하게 진단해 주는 말씀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심판 아래 있다.’ - 이보다 더 사람의 필연적인 운명을 정확하게 일러 주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 인생과 이 인간 사회에 정말 가장 큰 문제, 제일 심각한 문제가 과연 무엇입니까? 식량 부족, 자원 고갈, 환경 오염, 핵무기 등이 인류 사회가 당면한 최악의 문제라고 떠드는 소리들이 우리 귀에 매일 같이 왕왕거립니다. 민족 감정, 인종 갈등, 윤리 부재, 도덕 타락, 교육 부족, 소외감, 실직이 인간이 해결해야 할 가장 급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떤 종교 창시자는 소위 크게 깨달았다면서 말하기를 사람에게 욕심이 있다는 것이 바로 문제의 시작이고 그 욕심만 없애면 모든 고통도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어떤 세상 철학자들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에 대한 존경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기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고 나아가서 전인류애를 함께 나눌 줄 모르는 것이 바로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라고 말들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다 틀린 말이며 완전히 빗나간 진단들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악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문제는, 우리 삶의 문제와 우리 존재의 문제점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되어 있다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잘못되어도 보통 잘못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 하면 우리 스스로는 해결할 길이 없을 만큼 극도로 잘못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타락한 죄인이라는 바로 여기에 우리 인생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가 있으며, 다른 부차적인 문제들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유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경 말씀만이 이 사실을, 이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며 경고해 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심판 아래에 있다.’ - 성령께서 우리 자신에 대하여 내려 주시는 이 진단을 깨끗이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십자가 대속을 통한 은혜을 충만히 누리며 심판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신앙생활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우리는 나으냐?
로마서 3:9-20 / 이병권
우리는 나으냐?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겸손히 돌아보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질문이 계속 마음에 남아서 되새겨지고 도전이 되어서 나를 점검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게 되는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장 18절에서부터 시작된 서신의 첫 번째 본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단락이 오늘 본문에서 결론을 맺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정말 복음이 복된 소식이 될 수 있도록 좋은 소식보다 먼저 나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사실,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생각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피조물로 바꾸어버린 사람들, 하나님이 정하신 원리를 자신의 욕심으로 바꾸어버린 사람들, 그런 자에게 심판은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핑계 댈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을 판단하며 자신을 살피지 않는 사람들, 스스로 괜찮다고 착각하며 회개하지 않는 사람도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율법과 할례를 내세우며 심판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차별 없이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대상을 “우리”라고 말합니다. 심판의 대상에 대해서 자신을 포함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 3:9 /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바울이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면서 그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선포했는데, 이제는 그 심판의 대상으로 자신까지도 포함해서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모여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이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그럴 때 말씀을 듣고 있는 이방인들은 입을 다물게 됩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유대인들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어서 할례를 받은 유대인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였던 유대인들도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끝이 아닙니다. 이제 누구보다 율법에 자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바울이 자신까지 포함해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우리는 나으냐? 그러자 유대인 중에서 아직 할 말이 있었던 사람들, 그래도 자신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있었던 자들 그들도 입을 다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유대인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은연중에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닌데, 나는 잘하는데’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고 교회의 타락한 모습을 지적할 때 우리는 다르다며 저들과 우리를 구분 짓고 선을 긋습니다. 저런 교회와 우리 교회는 달라! 나는 저런 가짜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맞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나는 나은 사람, 우리 교회는 나은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마땅한 나쁜 교회이고 우리는 말씀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 착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의 평가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아닙니다. 내 판단입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나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오늘 바울의 질문입니다. 우리에게 나은 게 있습니까? 겉으로 드러나거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지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죄악들이 감추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덮어두고 아닌 척하고 괜찮은 것처럼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계속 이 질문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 질문이 제 속에서 계속 메아리치는 겁니다. 계속 질문하게 됩니다. 말씀을 맡아서 말씀을 전하는 너는 나으냐?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너는 얼마나 자신을 가르치고 있느냐? 가정에서 아내와 자녀들에게 얼마나 본이 되고 있느냐?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코 아니라” 나은 것이 없습니다. 심판이 마땅한 자라는 것을 알기에 입을 다물게 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모두가 정말 심판이 마땅합니까?
바울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 대해서 유죄를 선언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죄 아래에 있다는 것은 죄에 사로잡혀 그 지배 아래에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죄의 문제는 사람이 죄의 지배 아래에 있기 때문에 사람이 죄의 종, 죄의 노예가 되었기에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 있는 죄의 노예라는 사실을 선언하고 그리고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인용하여 그 사실의 증거로 제시합니다. 성경의 증거가 10절부터 18절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보기에 따라 6~7군데의 구약이 인용되어서 특별한 목록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랍비들의 전통을 따르는 것인데 성경 구절을 진주알을 꿰는 것처럼 한 줄로 모아서 증거로 삼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 대한 유죄 선언이 참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목록을 작성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이 목록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나은 것이 있는지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증거 목록의 구성을 먼저 생각하면 증거 목록은 두 종류로 나누어서 각각 세 개씩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없음을 밝히는 ‘없다 세 가지’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몸을 비유하는 ‘몸 세 가지’입니다. 총 여섯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없다는 10절입니다.
롬 3:10 /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무엇이 없습니까? 의인이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의인이 단 한 명도 없을까요?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의인은 없습니까?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이 할 수 없는 선한 일이나 대단한 일을 성취한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의인이라고 말하는 기준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인에 대한 기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에 대한 기준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에 만족되는 사람만이 의인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의를 측정하는 기준은 사람의 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만족시키는 자가 의인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 기준에 미달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데 비행기가 아니라 헤엄쳐서 간다면 갈 수 있을까요? 세 사람이 태평양을 건너려고 합니다. 부산에서 출발하는데 첫 번째 사람은 수영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고 두 번째 사람은 어릴 적에 수영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은 국가대표 수영 선수입니다. 누가 미국에 갈 수 있을까요? 헤엄쳐서 간 거리 차이는 조금 있겠지만 아무도 미국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기준에는 어떤 사람은 조금 더 의인처럼 보이고 어떤 사람은 조금 덜 의인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 기준에는 모두 다 똑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격 미달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예외 없이 모두 다 죄 아래에 있습니다.
두 번째 없다는 11절입니다.
롬 3:11 /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무엇이 없습니까? 깨닫는 자,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을까요? 좀 과장된 말이 아닐까요? 우리가 믿기 전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것 아닌가요? 우리만이 아니라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까? 진리를 찾으며 나름의 종교를 통해서 절대자를 찾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 있습니다. 살면서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를 해결해줄 뛰어난 존재를 찾습니다. 나의 죄책감을 해결해주고 마음에 위로를 주는 어떤 것을 찾습니다. 만족을 얻기 위해서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무언가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도 없다면 하나님을 만난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 우리가 하나님을 찾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먼저 일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주셨기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나으냐? 나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찾기보다 하나님에게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습니다.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찾는 것입니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세 번째 없다는 12절입니다.
롬 3:12 /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무엇이 없습니까? 선을 행하는 자가 없습니다. 정말 선을 행하는 자가 없을까요?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좋은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을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재능이나 물질을 나누고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끔 마음 따뜻해지는 뉴스를 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선행에 대한 기준 역시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선한 일을 행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하는 일은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자녀가 부모와 원수 된 상태에 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그 상태로 부모에게 효도를 한다면서 온갖 일을 다 한다면 어떨까요? 부모를 위해 잔치를 열고 선물을 드리고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한다 해도 부모와 서로 원수 되어 있는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선행을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먼저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의를 행할 수 있고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야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의 증거 목록에 대해서 ‘없다 세 가지’를 살펴보았고 다음으로 ‘몸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몸 세 가지’는 입, 발, 눈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몸은 ‘입’입니다.
롬 3:13 /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 3:14 /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이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목구멍, 혀, 입술, 입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열린 무덤, 속임과 독사의 독, 저주와 악독, 사람에게 있는 이렇게 더럽고 냄새나는 치명적인 죄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증거가 됩니다. 말로 죄를 짓지 않는 말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요? 말이 많은 사람이든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이든 예외는 없습니다. 우리는 나으냐? 우리도 나은 것이 없습니다.
두 번째 몸은 ‘발’입니다.
롬 3:15 /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롬 3:16 /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 3:17 /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죄를 짓는데 빠른 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발을 통해서 증거 되는데 여기 발이 의미하는 것을 ‘행동’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말’과 ‘행동’으로 짝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그 말과 행동으로 죄인 됨을 드러내게 됩니다. 말과 행동이 죄인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몸은 ‘눈’입니다.
롬 3:18 /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증거가 ‘눈’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여기 눈은 그냥 눈이라기보다 마음의 눈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죄인이기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말한 죄인에 대한 증거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 경외함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심각한 죄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우습게보고 만만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은가요? 우리는 다릅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습니까?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지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모르실 것처럼 그렇게 쉽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사람이 보면 그럴 듯하게 꾸미고 괜찮은 척하지만 사람이 보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겁니다.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고 의식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건강을 염려하는 것만큼이나 나의 성공이나 나의 미래를 생각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이나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이 얼마나 있느냐 질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으냐? 이 질문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지요? 우리에게 나은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증거들로 인해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입을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롬 3:19 /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이 많은 증거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주석가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가 주어진 피고인이 자신에 대해 제시된 증거가 너무 무거워 입을 열지 못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판결이 내려지고 형이 집행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고 선한 일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기준이 다릅니다. 아무리 열심으로 율법을 지키고 순종했다 하더라도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롬 3:20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바울은 하나님이 왜 율법을 주셨는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그것을 지켜 의에 이르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나의 한계를 알고 죄를 깨닫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의로움을 줄 수 없습니다. 나의 노력과 나의 어떠함으로 하나님의 기준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죄에 대한 이해이지 죄에 대한 용서가 아닙니다.
루터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의 핵심 원리는 사람들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주어서 그들이 겸손해지고 무서워하며 멍들고 낙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위로받고자 그 축복받은 분께로 나아오게 하는 것이다.” 죄인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을 통해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이 절망적인 상황, 내가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소망으로 인도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오히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인정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하나님의 사랑,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진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방인은 물론, 유대인도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나은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같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같은 죄인이지만 그 결말은 다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죄인의 결말을 바꿀 수 있을까요? 결말을 바꾸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의 크기에 따라, 죄의 수와 정도에 따라, 아니면 선행에 따라 죄인의 결말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의 결말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이 죄를 책망하실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죄를 깨닫게 하셨을 때 그 죄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내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한 것은 타고난 성품이라고 저 사람 때문이라고 내가 자라온 환경 때문이라고 그 정도의 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핑계 댈 수 있습니다. 그 책임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인의 결말을 바꾸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하는 것은 나의 죄를 겸손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돌이킬 때, 그럴 때 우리는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유일한 피난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로마서의 첫 번째 본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이것을 배우게 됩니다. 나를 포함해서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조금의 희망도 없는 절망적인 나의 상황을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닫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더욱더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바르게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더욱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절망적인 나의 상황을 잊지 않기 위해서 다시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