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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유일한 5층 목탑입니다.
목탑 형식의 불탑으로 화순의 쌍봉사 대웅전이 있었으나
지난 1984년 신도의 부주의로 전소되어 지금은 팔상전이 유일한 현존 한국의 목탑입니다.
법주사 팔상전을 두고 탑이 아니고, 부처님을 모신 불당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만약 이 팔상전이 불당으로 분류된다면 우리나라에는 현존 목탑이 하나도 없게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런 논란을 종식시키는 일이 1968년에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팔상전을 완전 해체 수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차례 현장에서 말씀드렸지만
목조건물은 수시로 수리하되, 적어도 300년에 한번은 완전 해체하여 썩은 부재를 교체하여
다시 짜넣어야 그 수명이 수천년을 이을 수 있다고 했었지요. (그런 면에서 목조건축이 석조보다 더 오래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에 따라 지은지 340년 만인 1968년에 법주사 팔상전은 완전 해체수리를 하게 됩니다.
이때 중앙을 받치는 심주 아래의 심초석에서 부처님 사리를 보관하는 사리장치가 발견됩니다.
탑의 주된 기능이 바로 부처님 사리의 보관이므로 심초석에서 발견된 팔상전의 사리장치는
팔상전이 탑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되는 셈이지요.
일부에서 팔상전이 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는 목탑이 없다'를
주장하고 싶었던 일본 학자들의 견해를 따른 식민사관이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팔상전 단면도>
문화재청에서 1968년 해체복원수리를 한 후 작성한 복원 보고서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팔상전 종단면도입니다.
고층 목탑의 구조는 목탑의 나라라고도 불리는 일본의 목탑과 우리나라 목탑의 구조가 기본적으로 같은 틀을 갖습니다.
이때문에 일본의 목탑 기술은 한반도를 통해 전해졌다는 강력한 증거를 갖게 되는 것이고,
법주사 팔상전의 존재는 이를 다시한번 증거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우선 정 중앙의 심주가 바닥부터 상륜부까지 쭉 올라가며 정확하게 중심을 잡습니다.
그 밖에 네 개의 기둥인 사천주가 중앙 심주와
'누끼'(누끼라는 단어는 일본 목조 건축 해설서에서 본 단어인데, 국내 목조건축 관련 책에서는 이를 대체할만한 단어를 찾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인용합니다.) 로 이어져서 중심부 골격을 이루고 이 사천주가 그 밖의 고주(높은 내진 기둥)와 '누끼'로
연결되고, 그 고주와 평주(외진기둥)을 퇴보(대들보의 외진형)로 연결됩니다.
저 아래에 팔상전 횡단면도를 올려 두었으니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실내촬영은 금하고 있으나,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는 것은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으므로 무례하게도 셔터를 눌렀습니다.
사진에 중앙에 보이는 것이 심주 사방에 놓인 사천주 네개의 기둥 중 하나이며, 좌우로 사천주들이 더 보입니다.
그 밖의 고주와 누끼로 연결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팔상전이란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장의 그림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를 모신 전각을 뜻합니다.
법주사 팔상전의 경우 들어가서 오른쪽 면부터 팔상도가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상하건데, 해가 뜨는 동쪽에서부터 그림을 시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한면에 두개씩의 팔상도를 모셨는데 좌우의 순서는 각 면보다 달라 그 규율을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팔상도의 팔단계 순서는 인도와 중국이 조금 다른데 우리나라는 중국의 예를 따릅니다.
1.항도솔래: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부처님(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의 태몽 속으로 흰 코끼리를 타고 들어오는 부처님)
2.비람강생상: 마야 부인이 산달을 맞아 친정 가던 도중 산기가 있어 룸비니 동산에서 오른쪽 옆구리로 출생하는 모습
3.사문유관상: 왕자 석가모니가 도성의 성문을 나가 노인과 병자, 시체 등을 보고 북문에서 출가하는 사람을 만나 출가를 결심하는 모습
4.유성출가상: 29세 되던 해, 처자와 태자자리를 버리고 성을 떠나 출가하는 모습
5.설산수도상: 6년 동안 갖은 고행을 겪으며 스승을 찾아다니다 스승은 자기 안에 있음을 깨달아 보리수 밑에서 선정에 드는 모습
6.수하항마상: 선정에 들어가 용맹정진하여 마침내 마군의 항복을 받는 장면(여기에서 석가모니불의 대표 수인인 항마촉지인을 볼 수 있습니다.)
7.녹야전법상: 대오각성한 석가모니가 500리 떨어진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5명의 수행자에게 설법하는 장면(오비구전법상을 수국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8.쌍림열반상: 수많은 사람에게 법을 전하고, 용맹정진할 것을 당부한 후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는 모습
글자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알기 싶게 그림으로 전법하던 것이 바로 팔상도의 시초일 것입니다.
팔상전의 동쪽면입니다. 팔상도 두폭 중 오른쪽을 보면 흰코끼리를 타고 도솔천에서
마야부인의 뱃속으로 내려오는 첫장면입니다.
왼쪽은 석가모니가 태어난 후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는 모습이 상단에 있는 두번째 장면입니다.
팔상전의 평면도입니다.
기둥으로 보자면 중앙의 심주가, 그 외곽으로 네 개의 기둥인 사천주,
그 외곽으로 고주, 가장 바깥에 평주가 세워져 있습니다.
1968년 해체 복원 당시 여러 기단부의 조사결과
최초 세워진 신라시대 때는 방형(사각형)이 아닌 원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 조선 시대 때 원형은 천자의 나라라 일컬어지던 중국의 천자를 상징하므로
원형으로 하지 못하고 방형으로 지어진 것이 아닌가 짐작합니다.
법주사 팔상전은 상층부로 올라가면서 급격하게 체감율이 감소하여 상승감이 떨어지나
상대적으로 안정감을 갖습니다. 특히 처마선의 곡선을 과감하게 적용하여 체감율 감소에 따른
상승감을 보완하는 역할을 부여합니다.
법주사의 국보 문화재 3점 중 하나인 쌍사자 석등입니다.
8세기 중반 작품이라고 하는데, 시기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석조 기술이 가장
절정에 다다른 때입니다. 사자의 입 모양을 보면 '아' '훔'의 법칙을 따랐음을 볼 수 있습니다.
법주사 대웅보전 입니다.
팔상전이 수직의 조형미를 갖췄다면 대웅보전은 수평의 장중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 여타의 목조건축을 보아도 이처럼 수평선의 직선을 강조한 예가 흔치 않습니다.
대웅보전도 팔상전과 같이 지어진 전각으로 보물로 지정된 중요 문화재랍니다.
공포가 기둥 사이사이에도 있는 다포계열의 건축물로, 내부에는 이름처럼 세 분의 부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다만 수인으로 보아 주불로 석가모니불이 아닌 비로자나불을 모신 것이 일반적인 규범과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지장전의 내부입니다. 양쪽으로 금강역사가 서서 들어오는 이를 놀라게 만듭니다. ^^
지장전의 옆 벽면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비는 곳 답게 지옥의 모습이 탱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지장전에서 바라본 법주사 전경
어느분이 물어보신 대웅보전 지붕 합각마루 사이의 원과 점 세개는
불법승 삼보를 뜻하며, 이것이 다르지 않고 하나라는 뜻으로 다시 큰 원 안에 그린 것으로
조계종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법주사와 관련 있는 선승들의 진영(초상)을 모신 전각입니다. 보통 조사전이라 하는데, 진영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옆면의 탱화를 보면 원효대사의 해골물 마시는 장면 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물 1417호로 지정된 석조희견보살입상이라고 합니다.
향로를 받쳐든 모습 등의 사실적인 기법이 뛰어나다고 설명문에는 적혀 있습니다.
8세기 중반 작품으로 쌍사자석등과 동시대 작품입니다.
팔상전, 대웅보전 등과 함께 선조 때 지어진 원통보전입니다.
역시 보물 916호로 지정된 건물입니다.
사모지붕(사각 모임지붕)인 원통보전의 단면도입니다.
삼출목의 내, 외 공포가 있음을 알 수 있고, 불상의 위치 등을 살펴볼 수 있는데요.
불상이 약간 고개를 숙여서 예불자와 눈을 맞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이것은 조선시대 들어와서
생긴 유형이라고 합니다.
원통보전의 내부모습입니다.
원통보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에 붙이는 이름으로 '주원융통(周圓融通)'하게 중생의 고달픔을
씻어준다는 뜻에서 원통보전이라는 전각이름이 붙는답니다.
우리나라 유일의 현존 목탑, 팔상전에 다시금 눈길을 주고 자리를 뜹니다.
팔상전 앞의 사천왕문을 파노라마로 촬영한 것입니다.
들어가는 방향에서 볼 때 우측 뒤부터 동, 서, 남, 북의 사천왕입니다.
비파를 들고 있는 동방지국천왕부터 동서남북이 되는 셈이지요.
다만 호남의 일부 절은 이 법칙과 안맞는 곳이 일부 있습니다.
아차, 놓칠뻔했던 국보 세 점 중의 하나인 석련지를 보고 갑니다.
시대는 쌍사자석등과 비슷하지만 약간 앞선 듯 보인다고 합니다. 난간의 짧은 기둥의 형태가
불국사 다보탑의 석난간 동자주와 유사하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습니다.
다, 다시 주차장으로... ^^
겨울나무의 앙상한 가지가 힘찬 무늬를 그려내며 '나 살아있음'을 이야기합니다.
벚꽃 필 때 좋을 길.
차를 타고 나오다가 만난 정이품송
몇년 전 폭설 시 가지 위의 눈을 털어내려 뿌린 소방수에 가지가 부러져서 수세가 많이 기울었습니다.
차를 타고 다시 몇 십분 이동하며 만난 서원리 소나무.
정이품송과 내외지간이라고 하여 정부인소나무로 유명합니다.
수세는 지금의 정이품송보다 월등합니다.
아직도 싱싱합니다. 천연기념물 352호로 지정되어 있으므로 잘 보호되어
지금의 600년을 넘어 천수를 누리시기 기원합니다.
자, 차로 다시 얼마간 이동하여 만난 선병국 가옥(중요민속자료 134호)
집 터 양쪽으로 개천이 흘러가다 다시 만나는 전형적인 연화부수형 양택지에 지어진 고택입니다.
1919년부터 3년간 당대 제일의 궁궐 목수를 초빙하여 후하게 대접하며 지은 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재리식 한옥이 아닌 개량식 한옥의 구조를 볼 수 있습니다. ㄷ자가 아닌 工자형 주택이 특이합니다.
사당 영역, 사랑채 영역, 안채 영역이 별도의 담으로 두르고 있어서
이날 함께 가신 분들의 말처럼 하나의 고택이 마을처럼 느껴진다고 할 정도입니다.
실제로는 99칸을 넘어서 110칸이 넘는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 지어진 것이니 '99칸을 넘어서면 역적'이라는 불문율을 지킬 필요가 없었을테지요.
된장과 고추장, 간장 등 장류가 유명해서 전국으로 유통되는 집입니다.
신세계백화점에도 입점된다고 하네요.
우리가 찾았을 때 만나뵌 이집 종부께서는 설을 앞두고
선물용으로 주문받은 장들을 포장 하느라 집안 꼴이 말이 아니라며 미안해 하셨어요.
그런 설명 덕에 약간 어수선해 보였던 이유를 알게 되었지요. ^^
차량 진입로에서 답을 따라 빙 돌아가야 만날 수 있는 솟을대문.
북동쪽에 자리한 속리산을 주산으로 함과 동시에
남쪽으로 대문을 내기 위해 이렇게 진입로에서 돌아서 들어오도록 대문을 만든 것으로 여겨집니다.
대분이 이렇게 났으니 이에 따라 집안의 배치가 자연스럽게 남향으로 정해지지요.
사랑채 모습입니다. 뒤쪽도 이렇게 되어 있어서 H자 형태를 이룹니다.
원래 조선의 한옥은 H자 형식은 상공인의 공으로 여겨져서 잘 안썼는데요.
여기서는 공부의 공으로 여긴 것 아닌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상당히 좋은 양택지여서 좋은 자손들이 줄줄이 나올 것이고 지관이 이야기 했다는데,
실제 자손 중에 내세울만한 인물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이곳에서 공부한 이들 중에
법조인이 수십명이라고 하니 지관의 예상이 완전 틀린 것은 아닌 듯합니다.
사실 개천이 양 쪽으로 분리되었다 합쳐지는 내륙의 섬 같은 지형에 이런 대규모 집을 짓는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연원에는 병조판서를 지난 양해의 후손인 선영홍 님이 집터를 찾을 때
꿈에서 '섬에 집을 지으라'는 게시를 받고서 지관을 통해 집자리를 물색했다고 합니다.
당시 후보지가 지금의 자리와 서울 여의도였다고 하는데 지관이 지금 자리를 정했다고 합니다.
만약 여의도에 지었다면 어땠을까요?
언듯 생각할 때는 여의도 지금 땅값이 매우 비싸니 큰 부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한국전쟁 등이 일어날 당시를 생각하면 비행장 건설로 집의 보존은 고사하고, 온 집안이 화마에 휩싸였을 가능성도
매우 높아보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관의 선택은 탁월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실제 동쪽으로 난 개천을 메워서 농사를 지은 일이 있었는데, 1980년에 큰 홍수가 나서 수해를 입고는
다시 그 개천을 원래대로 복구했다고 합니다.
사랑채 중앙에 걸린 위선최락이라는 글씨가 돋보입니다.
뜻을 풀자면 '선정을 배푸는 것이 가장 즐겁다'라는 것이겠지요.
실제 많은 재산을 풀어서 지역 주민들을 위한 학교를 열기도 하는 등 선정을 많이 베풀었다고 합니다.
안채도 H자로 지어져 있습니다. 여기도 우측 툇마루에 위선최락 글씨가 걸려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데는 내외가 없다는 뜻이겠지요.
우리 콩으로 만든 된장 고추장 간장으로 메우 유명한 보성 선씨 종가집이랍니다.
선병국 가옥 안채의 뒤 부엌공간으로 갔는데요.
조금 어수선해 보였어요.
'명절을 맞아 전국으로 나가는 장류 선물포장에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라는 이집 종부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었지요. 그래서 뒤뜰 사진은 빼고, 창살문이 아름다운 곶간 문 사진으로 마무리합니다. ^^
빡빡했으나, 행복한 하루 일정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우리 문화유산의 위대함은 우리나라 곳곳에서 숨쉬며 우리의 눈길과 손길을 기다립니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그 문화유산들을 찾아 또 찾아, 걷고 또 걸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첫댓글 세상에나 .... 오래전 속리산 법주사엘 딱 한번 간적이 있는데
도대체 그때는 뭘보고 나온거죠?
팔상전도 먼발치에서 힐끔 보고온듯 하니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발견이님 덕분에 수준높게 공부하고 갑니다.
여행을 하면서도 공부를 해야 한다면 얼마나 머리가 아플까요. 죄송합니다. T.T ^^;;
@발견이(윤문기) 공부하는 여행도 즐거웠어요 ^^
하루 동안 정말 엄청 많이 보고 느끼고 걸었네요~ 정말 알찬 여행였습니다
법주사 대웅전 앞 계단 양옆 동물상은 사자가 아니고 원숭인걸로..(인터넸서 확인)
예전에 한옥서 살아 봤는데 겨울엔 많이 불편했었지요~~ 고택 종부님 뵈면서 느낌 고스란히 전해져 오더라구요~~ 구래도 가끔은 다시한 번 살아보구 싶다는 생각 해봅니다~~
카페지기님 음향 시스템이 좋아서 엿는지 탁월한 곡선택과 더불어 귀 호사 누렸던 하루 였어요 그러나 저러나 르 떵 데 꺄떼드랄--르 는 다외우셨나요?? ㅋㅋㅋ... 운전, 길안내와 자세한 설명 애 많이 쓰셨어요 감사합니다
아.. 잊었는데, 복습 시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르 떵 데 꺄떼드랄--르 한 백번쯤 또 하면 이제는 외워질지도... 꺄떼드랄은 확실히 노래에서 들리는데, 그 앞에 것들은 여전히 안들려요. ㅋㅋ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발견이(윤문기) 오늘 근무하는 중간중간 뜨끔없이..그 '르 떵 데 꺄떼드랄~드'가 마구 날라 다닙니다...ㅎㅎ
다시 사진과 함께 글을 읽고 나니 역사 공부 한 느낌 이예요
특히 속리산 법주사는 중학교 수학 여행 이후 40년 만에 가본 곳 이라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발견이님 피곤은 풀리셨는지요~
여행에서 상세한 설명까지 해주셔서 여행의 기쁨이 배가 된거 같아 감사 드립니다.
좋은 길에서 또 뵙겠어요^__^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좋은 길에서 뵙겠습니다. 와우... ^^
언제인지 기억도 안나는 시절에 다녀온 속리산과 법주사....오로지 기억에 남는 건 대불의 모습이였는데...
발견이님 설명을 통해 짚어본 법주사 곳곳은 그냥 사찰이 아닌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그 곳을 스쳐간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언젠가 기회되면 올려주신 평면도 가지고 명칭도 다시 한번 짚어주시고 설명도 다시 한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빌려주신 사진기 덕분에 오랜만에 손맛도(^^) 느껴보고, 많이 감사한 여행이였습니다.^^
아. 후기 올리셨던데, 전 아직 못봤어요. 급한 것 마무리하고 가봐야 겠어요. 홧팅!!
처음국내도보동참이었는데대바악~였네요.
오붓한인원에겨우내운동부족을채워준산성걷기참좋았어요
.여름에갔던법주사다시만나반가웠고발견이님상세한설명덕에법주사가가슴깊이들어앉았네요
엘디보와사라의노래가여행의길동무되어더.더.좋았구요
종가에서산정성깃든된장과간장으로맛난음식할기대에부플어있습니다
영걸스님침묵수행하느라고생많았구요~
맛난 식사 되시길 앙망하옵니다. ^^ 즐거운 걷기가 되셨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
너무 멋집니다.언젠가 기회가 되면 저도 동행하고 싶은곳이네요.도보여행에 따라 다니며 이곳저곳 절을 몇곳 가보니 각 절마다 분위기도 다르고 부처님의 모습도 미소도 다르다는것을 느끼면서 그걸 보면서 다니는것도 또 하나의 재미임을 배웠습니다.발견이님 말씀대로 문화유산 보면서 아끼고 자부심을 느끼며 걸어야겠네요.너무 멋진곳입니다
지금 섬나라에 계시나 섬나라 이야기를 하자면,
제가 섬나라 일본 문화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보니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이 왜 그리도 더 귀하고 애뜻하게 여겨지던지요.
그리고 왜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 사람만 일본을 심정적으로 무시하는 지 그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도 조금 이해가 되어지고...
아무튼 저에게는 역수입되어 한국의 문화유산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일본의 문화를 통해서도 배운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뵈어요. 화이팅!! ^^
'누끼(꿸 관)貫(나무 목)木'이라는 일본식 표현을 도라님께서 찾아서 한국말로 하면 인방이라고 찾아주셨습니다. ^^ 감사드립니다.
덧붙이자면 '방'이라고 하여 기둥과 기둥 사이에 위치하는 부재를 총칭하는데요.
이 '방'에는 창방, 평방, 인방, 충방 등이 있다고 합니다.
1.충방: 보 방향으로 기둥머리에 끼운 창방 또는 인방 모양의 부재를 지칭, 각황전 변주퇴보, 팔상전의 퇴량형 부재, 금산사 미륵전의 연결보로 쓰인다고 합니다.
(예를 든 곳들이 우리나라에는 모두 2층 이상의 목조건축이므로 충방이란 표현도 틀리지 않으나... 충방은 대체로 내진과 외진을 연결하는데 모두 외진측으로 쳐져내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