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에 1400억 원 배상, 누굴 탓해야 하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불법이었는지 여부는 재판 중에 있다. 검찰이 소집한 수사심의위원회는 불기소를 권유했지만 현재 금융감독원장인 이복현 당시 수사검사가 기소를 고집해 결국 기소가 됐다. 다만 정부가 합병 승인 과정에 압력을 행사해 삼성에 도움을 줬는지는 합병이 불법이었는지와는 상관없다.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승인 과정에서 정부가 합병 투표 찬성 압력을 행사해 7억7000만 달러(약 1조300억 원)의 손해를 봤다며 정부를 상대로 2018년 7월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했다. 그제 결과가 나왔다. 정부는 엘리엇에 손해배상금 690억 원에 소송 비용과 지연이자 등을 포함해 1400억 원을 지불하게 됐다.
▷대법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 때 삼성이 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약 16억 원을 후원한 사실에 대해 삼성과 같은 대기업에는 승계 작업이라는 현안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묵시적 청탁이 인정된다고 보고 제3자 뇌물죄를 인정했다. 삼성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낸 출연금 204억 원에는 제3자 뇌물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출연금으로 삼성을 처벌하면 다른 대기업도 처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억 원 후원은 처벌하지 않으면 합병 승인 과정에서 압력을 행사했다고 해서 처벌받은 안종범 전 경제수석비서관,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의 유죄 선고와 모순이 빚어진다.
▷안 전 수석이 형을 살고 나와 ‘안종범의 수첩’이란 책을 썼다. 안 전 수석에게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받아쓴 63권의 수첩이 있어서 수사에 큰 도움을 줬다. 그러나 정작 그 많은 수첩에 ‘삼성 합병’이란 말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검찰은 그에게 삼성 합병과 관련한 대통령의 지시를 진술하도록 별건 수사로 갖은 압력을 넣었으나 그는 세모를 네모로 만들 수 없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고육지책으로 묵시적 청탁이 인정됐다. 그러나 대기업에 현안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묵시적 청탁을 인정하는 건 청탁의 범위를 너무 넓힌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 엘리엇만이 아니다. 또 다른 미국계 사모펀드 메이슨 캐피털도 2억 달러(약 2700억 원)의 ISD를 제기해 놓은 상태다. 국내 소액주주들은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에서 패소했다. 그러나 엘리엇의 승소는 항소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부가 배상해야 할 액수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정부가 벌이고 정부가 바로잡는다고 한 그 일로 인해 세금으로 엄청난 손해배상을 하게 됐다. 우릴 자책할 수밖에 없긴 한데 정확히 누굴 탓해야 하나.
송평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