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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司馬遷, B.C.145년?-86년?)의 생애와 명언
생애 :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이다. 자는 자장(子長)이며, 아버지인 사마담(司馬談)의 관직이었던 태사령(太史令) 벼슬을 물려받아 복무하였다. 태사공(太史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후에 이릉사건에 연루되었다. 이릉 장군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중과부적으로 진 사건에서 이릉(李陵)을 변호하다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宮刑)을 받게 된 것이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의 저자로서 동양 최고의 역사가의 한 명으로 꼽히어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실제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를 사가가 해석한 글로 존중받는다.
학문 : 주나라 역사가 집안인 사마 가문의 후손이며, 아버지인 사마담은 전한의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인 태사령으로 천문과 달력에 밝고, 고전에도 통달하였다. 20세경 낭중(郎中)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태사령 : 사마천이 36살 때인 기원전 110년, 사마담은 무제가 태산에서 거행된 봉선 의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기다가 병이 나서 죽었는데, 죽을 때 아들 사마천에게 생전부터 편찬하던 역사서의 편찬을 완료해 줄 것을 부탁한다. 기원전 108년, 사마담이 세상을 떠나자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태사령이 되었다.
태초력 : 사마천의 나이 42살쯤 역법을 개정하여 태초력(太初曆)을 기원전 104년 무제 (태초 원년)에 완성하였다. 그 후 부친의 유언에 따라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릉 사건 : 기원전 99년에 무제의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던 장군 이릉이 패전을 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무제는 진노하여, 이릉의 처분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중신 회의를 열었다. 신하들은 모두들 이릉을 비난하고는 이릉의 가족들을 모두 능지 처참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사마천은 이릉의 충절과 용감함을 찬양하고 두둔했기 때문에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사마천은 태사령의 직책에서 파면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사마천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사형을 면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 즉,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궁형을 받는 것 둘뿐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궁형을 받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 풍조였으나, 사마천은 《사기》의 완성을 위해 궁형을 받아들였다(궁형으로 인하여 고환이 제거되어 그의 초상화에는 수염이 없다). 궁형으로 죽음을 모면한 사마천은 아버지의 대부터 편찬중이었던 역사서 《사기》의 편찬을 완료하였다. 그 후 무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 최고의 관직인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었다.
업적 : 그가 중국 최초의 임금인 황제(黃帝)에서 무제에 이르는 역사를 인물별로 나누어 쓴 <사기> 130권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획기적인 역사책이다. 이런 형식을 기전체라고 하는데, 연대순으로 써가는 편년체와 함께 역사 기록 방법의 하나이다.
저서 : 보임안서 (報任安書), 《사기(史記)》
명언
* 사람들은 자기보다 재산이 10배쯤 많은 사람한테는 욕을 하고, 100배쯤 많은 사람은 두려워하고, 1000배쯤 많은 사람한테는 그 사람 밑에서 일을 하고, 10000배쯤 이상 많은 사람한테는 기꺼이 노예가 된다.
* 선인들도 불행을 극복해 위대한 업적을 남겼거늘, 나도 불구의 몸이지만 비통함을 참으며 채찍질해 무슨 일이든 남기리라.
* 사람을 얻는 자는 흥하고, 사람을 잃는 자는 망한다.
* 공(功)은 이루기 어렵고 패(敗)하기 쉬우며, 때(時)는 얻기 어렵고 놓치기 쉽다.
* 단호하게 감행하면 귀신도 이를 피한다.
* 하늘에 제사 지내고 사당에 제사 지내는 때도 술이 아니면 신령이 흠향하지 않고, 군신과 친구 사이에도 술이 아니면 좌석이
* 아름다워지지 않으며, 싸움을 하고 서로 화해하는데도 술이 아니면 성사되지 않는다. 그러나 술은 또한 일을 망치기도 하기 때문에 함부로 마셔서는 안 된다.
* 책으로써 다스리는 자는 말(馬)의 성질을 다 알지 못하고, 옛날 것을 가지고 지금을 다스리는 자는 세상이 변하는 데 따르지 못한다.
* 가난해지거나 부유해지는 것은 사람이 빼앗거나 주거나 해서가 아니다. 지혜가 탁월한 자는 여유가 생기고, 어리석은 자는 자연히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 태산불사토양(泰山不辭土壤) : 태산은 작은 흙덩이도 사양하지 않는다.
- 도량이 큰 인물은 사소한 의견이나 인물도 잘 수용해서 큰일을 이룬다는 뜻.
* 복숭아와 오얏은 부르지 않아도 그 밑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
- 덕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구하지 않아도 자연히 사람들이 사모하여 그 밑으로 모여든다. 혹은 좋은 상품은 이쪽에서 구하지 않아도 고객들이 자연히 모여들기 마련이다.
《사기》(史記) : 중국 전한 왕조의 무제 시대에 사마천이 저술한 중국의 역사서이며, 중국 이십사사의 하나이자 정사의 으뜸으로 꼽힌다. 초기에는 《태사공서》(太史公書)로 불렸는데, 후한 말기에 이르러 처음 '사기'라 불리게 되었고 이것이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본기(本紀)」 12권, 「표(表)」10권, 「서(書)」8권, 「세가(世家)」30권, 「열전(列傳)」70권으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로서 그 서술 범위는 전설상의 오제(五帝)의 한 사람이었다는 요(기원전 22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말의 전한 무제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그 서술 방식은 후대 중국의 역사서, 특히 정사를 기술하는 한 방식의 전범(典範)이 되었고, 유려한 필치와 문체로 역사서로서의 가치 외에 문학으로서도 큰 가치를 가진 서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성립과정 : 편찬시기는 기원전 109년에서 기원전 91년 사이로 추정된다. 《사기》와 같은 역사책을 짓는다는 구상은 이미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담 때부터 존재했으나, 사마담은 자신이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되자 분개하며 아들 사마천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역사책을 짓는 일을 완수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사마천은 그러한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사기》의 편찬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99년, 사마천은 흉노에 투항한 자신의 친구 이릉(李陵)을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고, 이듬해에는 궁형에 처해졌다. 옥중에서 사마천은 고대 위인들의 삶을 떠올리면서 자신도 지금의 굴욕을 무릅쓰고서 역사 편찬을 완수하겠다고 결의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97년에 출옥한 뒤에도 사마천은 집필에 몰두했고, 기원전 91년경 《사기》는 완성되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딸에게 이 《사기》를 맡겼는데, 무제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기술이 《사기》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고, 선제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마천의 손자 양운(楊惲)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대(唐代)에 사마천의 후손 사마정(司馬貞)이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을 참조하여, 과거 사마천이 서술하지 않은 오제 이전의 삼황(三皇) 시대에 대해서도 「삼황본기」(三皇本紀)를 짓고 「서」(序)도 곁들였다.
사상적 배경 : 『사기』의 내용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사상은 바로 「하늘의 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非)」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하늘의 도리, 즉 인간의 세상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사기》 열전에서 가장 먼저 다루고 있는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은 의인(義人)임에 틀림없는 백이와 숙제가 아사(餓死)라는 초라한 죽음을 맞은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서는 사마천 자신이 과거 친구이자 이릉의 불가피한 항복을 변호했던 올바른 행동을 하고도 궁형이라는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은 것에 대한 비통함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있다.
그가 《사기》를 집필하던 시대 한 왕조는 무제에 의한 유교의 국교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공자에 대해서도 제후(諸侯)가 아닌 그를 굳이 세가(世家)의 반열에 넣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사기》의 기술은 유교 사상이 주가 되는 와중에 다른 사상도 가미되어 있는데(사마천 자신이 도가에 특히 호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이것은 「사실」을 추구한다는 역사서 편찬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반진(反秦) 세력의 명목상의 영수(領袖)였던 의제의 본기를 짓지 않고 실질적인 지배자인 항우의 본기를 지은 것도, 여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혜제를 본기에서 제외하고 마찬가지로 「여후본기(呂后本紀)」라는, 여후의 본기를 지은 것도, 그러한 자세의 발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후(王侯)를 중심 대상으로서 서술하면서도 민간의 인물을 다룬 「유협열전」(遊侠列傳), 「화식열전」(貨殖列傳), 암살자의 전기를 다룬 「자객열전」(刺客列伝) 등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에 대한 기술도 많다. 또한 당시 무제와 외척간의 추악한 권력다툼을 묘사한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이나, 남색(男色)이나 아첨으로 부귀를 얻은 자들을 다룬 「영행열전」(佞幸列傳), 법률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며 사람들을 괴롭혔던 관리들의 이야기를 모은 「혹리열전」(酷吏列傳)과 더불어 법률을 가지고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끌었던 관리들에 대해서도 「순리열전」(循吏列傳)으로 정리하는 등, 안이한 영웅 중심의 역사관에 치우치지 않는 유연하고 다양한 시점유지도 눈여겨볼 점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한의 숙적이었던 흉노를 비롯한 주변 기마민족이나 이민족에 대해서도 한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만을 담담하게 쓴다는 태도로 임하고 있다.
이러한 사마천의 태도는 유교가 중국 사회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종종 비판 대상이 되었다. 《한서》를 지은 반표의 경우 사마천이 건달이나 졸부 같은 인물을 사서에서 다루고 유교를 경시하며 도교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며 비판했고,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는 여자인 여후를 본기로서 서술했다며 비난하였다. 《사기》를 일종의 악서(惡書)로 보는 시점은 몹시 일찍부터 존재했는데, 성제 때에 제후인 동평사왕(東平思王) 유우(劉宇)가 한 조정에 《태사공서》를 요구했는데, "옛날의 합종연횡(合從連衡)이며 권모술수가 자세히 담겨 있는 책이라 제후들에게 읽게 할 책이 아니다"라는 의견이 나와 결국 허락되지 못했다는 것이다.[1] 또한 촉한의 초주(譙周)는 사서의 편찬은 경서(經書) 즉 유교 서적에만 의거해야 하는데 《사기》는 그러지 않고 제자백가의 설까지 인용했다며 비난하고, 《고사고》(古史考) 25편을 지어 유교 경전에 비추어 《사기》의 오류를 교정하기도 했는데, 《고사고》는 훗날 당대에도 《사기》를 읽을 때면 함께 읽히곤 했음을 당대 유지기(劉知畿)가 편찬한 《사통(史通)》 고금정사편(古今正史篇)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후대에는 《사기》와 《한서》의 비교 분석이 많은 지식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문학적 가치 : 역사 서술을 위한 간결하면서도 힘찬 문장은 「문성(文聖)」 또는 「백전노장의 군대 운용」과 같은 것으로 격찬받았다. 특히 「항우본기」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적 가치 : 정사로서 기술된 당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본 정보는 섬세한 기술로 당시의 생활이나 습관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서(書)」의 내용은 전한 시대의 세계관이나 정치, 경제, 사회 제도 등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또한 흉노를 비롯한 주변 이민족이나 서역에 대한 기술도 현재 알려져 있는 지리와 유적 발굴 등에서 판명된 당시 상황과의 정합성이 높고, 이러한 지방의 당시를 알기 위한 귀중한 단서가 되어 있으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에 근위병 3천인의 인형을 묻었다"는 기술에 대해서도, 시안 시 교외의 병마용갱 발견으로 그 정확성이 증명되었다.
한편, 《사기색은》이 인용한 《죽서기년》 등과의 비교 작업에서 연대 모순 등의 문제점이 종종 지적되고 있다(예를 들면 오 왕가의 요와 합려의 세대간의 가계도 등).
구성 : 사기는 다음과 같은 구성을 갖추고 있다.(본기, 표, 서, 세가, 열전)
본기(本紀12편) : 왕(王)들의 연대기를 다룬다. 중국 역사 초의 5제(五帝)에서 한(漢) 무제(武帝)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오제본기(五帝本紀), 하본기(夏本紀), 은본기(殷本紀), 주본기(周本紀), 진본기(秦本紀),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항우본기(項羽本紀), 고조본기(高祖本紀),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효문본기(孝文本紀), 효경본기(孝景本紀), 효무본기(孝武本紀)
표(表10편) : 본기에 나오는 제왕 및 제후들의 흥망을 정리하여 보여주는 연표이다.(1.삼대 세표(三代世表), 2.십이제후 연표(十二諸侯年表), 3.육국 연표(六國年表), 4.진초지제 월표(秦楚之際月表), 5.한흥이래제후 연표(漢興以來諸侯年表), 6.고조공신후자 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 7.혜경간후자 연표(惠景間侯者年表), 8.건원이래후자 연표(建元以來侯者年表), 9.건원이래왕자 연표(建元已來王子年表), 10.한흥이래장상명신 연표(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
서(書8편) : 역대의 정책과 제도, 문물의 발달사 및 전망을 다룬다.(0.예서(禮書), 0.악서(樂書), 0.률서(律書), 0.역서(暦書), 0.천관서(天官書), 0.봉선서(封禪書), 0.하거서(河渠書), 0.평준서(平準書)
세가(世家30편) :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진 제후(諸侯)들에 대해 다룬다.(0.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0.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0.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0.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0.관채세가(管蔡世家), 0.진기세가(陳杞世家), 0.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 0.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0.진세가(晉世家), 0.초세가(楚世家), 0.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0.정세가(鄭世家), 0.조세가(趙世家), 0.위세가(魏世家), 0.한세가(韓世家), 0.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0.공자세가(孔子世家), 0.진섭세가(陳涉世家), 0.외척세가(外戚世家 ; 여씨, 박씨, 두씨, 왕씨), 0.초원왕세가(楚元王世家), 0.형연세가(荊燕世家), 0.제도혜왕세가(齊悼惠王世家), 0.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0.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 0.유후세가(留侯世家), 0.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0.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 0.양효왕세가(梁孝王世家), 0.오종세가(五宗世家), 0.삼왕세가(三王世家)
열전(列傳70편) : 왕과 제후 외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개인들을 다룬다. 대상은 영웅, 정치가, 학자, 군인, 일반 서민까지 다양하다.(0.백이 열전(伯夷列傳), 0.관·안열전(管晏列傳), 0.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0.사마양저열전(司馬穰苴列傳), 0.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0.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0.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0.상군열전(商君列傳), 0.소진열전(蘇秦列傳), 0.장의열전(張儀列傳), 0.저리자·감무열전(樗里子甘茂列傳), 0.양후열전(穰侯列傳), 0.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 0.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0.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0.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0.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 0.춘신군 열전(春申君列傳), 0.범수·채택열전(范雎蔡澤列傳), 0.악의열전(樂毅列傳), 0.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0.전단열전(田單列傳), 0.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0.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0.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0.자객열전(刺客列傳), 0.이사열전(李斯列傳), 0.몽염열전(蒙恬列傳), 0.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 0.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 0.경포열전(黥布列傳), 0.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0.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 0.전담열전(田儋列傳), 0.번·역·등·관열전(樊酈滕灌列傳), 0.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 0.역생·육고열전(酈生陸賈列傳), 0.부·근·괴성열전(傅靳蒯成列傳), 0.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0.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0.원앙·조조열전(袁盎晁錯列傳), 0.장석지·풍당열전(張釋之馮唐列傳), 0.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0.전숙열전(田叔列傳), 0.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 0.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 0.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0.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0.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0.흉노열전(匈奴列傳), 0.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0.평진후·주보전(平津侯主父列傳), 0.남월열전(南越列傳), 0.동월열전(東越列傳), 0.조선열전(朝鮮列傳), 0.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0.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0.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0.순리열전(循吏列傳), 0.급·정열전(汲鄭列傳), 0.유림열전(儒林列傳), 0.혹리열전(酷吏列傳), 0.대원열전(大宛列傳), 0.유협열전(遊俠列傳), 0.영행열전(佞幸列傳), 0.골계열전(滑稽列傳), 0.일자열전(日者列傳), 0.귀책열전(龜策列傳), 0.화식열전(貨殖列傳), 0.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보사기 : 당나라 시대에 사마정이 사기의 내용을 보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