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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남산공원이 존재하듯이 대전에도 역시, 보문산공원이 존재합니다.
말하자면, 대전시민들에게 있어서 보문산공원의 위상은 서울의 남산공원 쯤 된다고
보면 되겠지요. 그만큼 보문산 공원은 아주 오랜세월 대전시민과 함께 해 온 유서깊은
시민 공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보문산 공원과 관련된 키워드를 하나하나 입력 해 가면서 보문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더불어 키워드 검색 스크랩 화면과는 별도로
대전과 관련된 여행기와 산행기 두 편 역시도 함께 올려드릴까 합니다. 물론, 모두 제가 작성한
글들입니다. 제가 작성한 여행기와 산행기 두 편까지 모두 읽어보시고 대전과 관련된 많은
정보 얻어 가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보문산 산행기]
필자는 지난번 일요일 보문산 산행을 다녀왔다. 오래된 대전 시민들의 휴식처인 보문산 산행이었는데 날씨 탓인지 생각보다는 산행 객들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아주 오랜만에 나선 산행이라서 그랬는지 다른 때보다 약간 숨이 찬 산행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보문 산이라고 하는 곳이 본래 서울의 남산처럼 매우 나지막한 산이 되어 나서 필자의 이런 넋두리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씁쓸한 사실은 보문산 자체가 과거처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한 때 시민들이 많이 찾던 보문산 공원 내 각종 유원지 시설들이 몹시도 쇠락 해 있는 현실하며 특히, 각종 놀이기구 시설들은 찾는 이가 없이 그대로 방치가 된 채 오랫동안 흉물로 남아있었던 듯 하여 미관상 보기에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기야 산에 있어 놀이기구 시설 따위가 그리 중요한 것은 못 될 것이다. 다만 필자도 어린 시절 그 곳에서 놀이기구들을 타며 즐거워했던 추억들이 있기에 그것이 새록새록 다시 떠올라 잠시 감회 어린 소회에 잠겨본 것이지만은 산이란 곳이 본래 될 수 있으면 인공적인 시설이 처음부터 들어서지 않았던 것이 훨씬 더 보기 좋았을 것인 바에야 굳이 그런 시설들이 재활성화 되기를 바랄 필요는 없는 일이라 하겠다.
아무튼 그러한 섭섭한 소회는 뒤로하고서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해 보운대를 거쳐 곧바로 보문 산성 정상에 올랐다. 이 보문 산성은 백제 시대 때 신라군과의 군사적 요충지라고 하는데 오랜 세월동안 그 흔적이 비바람의 흔적에 묻혀져 있던 것을 몇 년 전에야 비로소 다시 발굴해서 복원을 해 놓은 것이라 한다. 산성의 규모는 생각보다 큰 편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산성의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는 장대루 정자 그늘 속에 서서 사방으로 내려다보이는 대전 시내의 전경을 멀리 조망 해 보고 있자니 그야말로 가슴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다. 오른 쪽으로는 대전시내에서 제일 높다는 식장 산이 가까이 바라다 보이고 다시 시선을 돌려 저 멀리 중간쯤으로는 저녁노을이 제법 아름답다는 계족산 봉우리가 오뚝하다. 그리고 다시 왼편쪽으로 시선을 더 돌려보니 그 명성도 자자한 계룡산의 연봉들까지 꿈결인 듯 아득하게 바라보인다.
그렇게 잠시 보문 산성에서 흘린 땀을 식히고 난 뒤에 다시 그곳을 출발해서 산자락 건너편으로 보이는 시루봉 정자 쪽으로 향하였다. 이 시루봉 정자방향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나무로 짜여진 계단 길을 한참 올라가야 한다. 평소에 산행을 자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정도의 나무 계단 길을 오르는 것조차도 매우 숨이 가빠질 것이다. 그렇게 잠시 수십 계단 길을 올라가보니 시루봉 정자 안에는 주말을 맞이하여 산행 길에 나선 다른 산행 객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사람들과 정다운 인사를 교환하고서 그 곳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오늘의 짧은 산행 일정을 마감하기 위해서 부사동 하산 길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부사동 하산 길 방향에는 명수정이라는 약수터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명수정 약수터 주변으로는 예전의 절터 자리도 여럿 보이는데 과거, 3공화국 시절에 보문산 일대에 수없이 산재하고 있던 기도처나 절터들이 한꺼번에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명수정 옆의 이 절터 자리 역시도 그 시절의 흔적이라고 하니 그 감회도 새롭다.
명수정에서 한참을 앉아 쉬며 시원한 물 한 바가지까지 달게 받아 마신 뒤에 다시 발길을 재촉해 계곡 산길로 20분정도를 터벅터벅 내려서노라니 그제야 산자락과 맞닿아있는 부사동 마을 끝 동네가 반가이 나를 맞이한다.
언제나 오랜 세월을 그 자리에 지키고 서서 우리 대전 시민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보문산. 앞으로도 언제나 그 다정한 품으로 도시 생활에 지쳐있는 시민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보듬어주는 그런 산으로 남아있게 되기를 기원할 뿐이다.
나는 지난번에 대전 변두리의 보문산 자락에 있는 벙 굴(범 골)마을과 갑 천 탐방 길에 나섰었다. 그런데 마침 오전에 비가 잠깐 내려서 그랬는지 생각보다는 나들이객들이 많이 붐비지는 않는 것 같았다.
사실 이번의 나들이 길은 억지로 시간을 내어 아주 오랜만에 나선 행차라서 그런지 다른 때보다는 약간 숨이 가쁜바가 있었다. 그러나 보문 산이라고 하는 곳이 본래 서울의 남산처럼 매우 나지막한 산이 되어 나서 나의 이런 넋두리 자체부터가 애초부터 어울리지는 않는 것도 사실이다.
<벙굴(범골)마을의 현재모습>
그런데 한 가지 씁쓸한 일은 과거와는 달리 벙 굴(범 골)의 동네 인심이나 풍경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음을 확연히 느끼게 된 것인데, 나의 어린 시절엔 너나없이 동네 인심이 매우 후덕하고 동네 초가집들의 안온한 모습까지 전형적인 시골 마을의 정취가 그득했었던 바, 이제는 그런 모습들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으니, 무척이나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벙굴(범골)마을로 넘어가는 뒷 길>
하기야, 세월이 많이 흐른 이 시점에 있어 나 혼자서 어린 시절에 대한 그런 부질없는 소회에 잠깐 잠겨볼 수야 있다고는 해도 산자락 동네란 곳이 본래 될 수 있으면 푸근한 시골의 정취가 그대로 변하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이 오히려 지금에 와서 생각 해 보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는 바에야, 이런 서운한 감정을 어찌 인위적으로 달리 가져볼 수가 있을 것인가.
아무튼, 생경하게 변해버린 벙 굴 마을의 풍경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내가 이 번 산행 길에서 그나마 가장 반가운 마음으로 맞닥뜨렸던 것은 예전과 변함없는 모습으로 산행 길 초엽에서 만나게 된 정겨운 벙 굴 마을의 풍광이었다.
(벙굴마을 근처에 소재한 논밭 풍경)
과거, 나의 어린 시절에는 마을의 논들에서 동네 친구들과 하루 온종일 메뚜기들을 잡아내서는 강아지풀 줄기에다가 촘촘히 그것을 꽂아서 외가댁 부엌 아궁이에다가 그대로 노릿하게 구어 내던 즉시로 혹시라도 다른 아이들에게 그것을 빼앗겨 버리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해 가며 열심히 익어버린 메뚜기들을 아삭아삭 씹어 삼키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니 말이다. 사실 말이지, 이 벙 굴(범 골)동네는 나의 외가 동네다. 바로, 그런 동네의 산자락에 선산이 대구 경산 쪽인 조부모의 묘소가 엉뚱하게 모셔져 있는 사연이야 이야기가 자꾸만 늘어질 것 같아 이만 여기서 줄여야 할 일이겠으나, 그 대신으로 나의 어린 시절, 외할머님 댁에서의 기억 한 자락을 잠깐 떠올려 보자면, 비록 지금은 외할머니님 당신께서도 이승을 뜨신 지가 어언 20 여 성상이 흘러갔지만 당신께서는 처음부터 나를 매우 귀애 하셨고, 또 나 역시도 어머니보다도 더 외할머니를 따랐었던 기억뿐이니, 생각 해 보면 지금 역시도 그저 외할머니의 인정 많으신 그 모습만이 간절히 떠오를 뿐이다. 지금도 나는 가끔씩 외가 집에 들릴 때 마다 과자를 사 먹으라며 주머니에서 쌈지 돈을 꺼내주시곤 하던 외할머님의 그 때 그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가을날이면 울안 감나무에 열린 감을 직접 따내셔서는 내 조막만 한 손에 꼭 쥐어주시며 환히 웃음을 지으시던 그 다정하신 모습들. 그리고 일부러 삼촌들을 시키셔서는 안 벙 굴(안 범 골) 산 속의 맑은 산 개울물에서 가재를 잡아오게 하셔서는 뜨겁게 달아오른 화로 불 위의 뚝배기된장에다 듬뿍 집어넣으셔서는 자글자글 빨갛게 익히셔서 뚝뚝 그 살을 발라 나의 밥숟갈 위에다 한 점 한 점 정성스레 올려 놔 주시던 그 기억들. 또한, 겨울날이면 어린 내가 얼음을 지치다가 벙 굴 산 개울물에 빠져서 흠뻑 양말을 다 적시어 와도 언제나 어머니의 꾸지람으로부터 나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시곤 하던 인자하신 그 모습까지도.
(벙굴마을 근처에 소재한 개울물 풍경)
아무튼 그러한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보문산 자락의 모든 추억들을 뒤로 하고서 다음날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유등천과 갑 천 탐방길에 나섰었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대전 한밭에는 예로부터 큰 하천이 세 곳이 있는데 바로 대전천과 유등천, 그리고 갑천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런데 내가 어렸던 시절에는 대전역 부근을 포함하는 구도심 지역이 전통적으로 그 중심 지역을 형성하고 있었고, 또 대전이라고 하는 도시 자체의 면적 역시도 그다지 넓었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자연 그 당시엔 그 지역을 관통하고 있던 대전천만을 오로지 대전의 대표적인 하천으로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칠 팔 십 년대를 지나오면서, 도시의 규모도 점점 주변 지역으로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활오수나 공장폐수의 유입이 늘어남으로 인해서 대전천은 점점 거대한 하수구처럼 변해 가더니 결국에는 대전 지역의 주변 하천에 불과하던 유등천이나 새로이 시로 편입되어 들어온 갑천 등만도 못한 위상에까지 처하고 만 것이다.
(대덕구 대화동 근처의 갑천변 모습)
사실, 지금의 현실에 있어서는 오염이 되어버린 대전천이나 유등천 보다 대덕군에서 새로이 편입되어 들어 온 갑천이 오히려 더 대전의 새로운 대표적 하천으로 그 위상이 나날이 부각되고 있는 중인 것인데, 그 가장 큰 이유라고 하는 것이 전통적으로 대전 시에 속해있던 대전천이나 유등천을 흐르는 수량이 과거에 비해서 현저히 줄어들기도 하였고, 또한 시 당국에서 아무리 정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더라도 과거, 육 칠 십 년대와 같이 아이들이 마음대로 헤엄을 치며 놀 수 있기에는 여전히 매우 미흡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갑천(甲川)을 한 번 살펴보자면, 두 말할 것도 없이 군(郡) 단위에 속해 있던 탓인지는 몰라도 다른 하천들보다 상대적으로 오염이 덜 되어 있는 편이기도 하거니와 수량과 강폭 역시도 일반 개천 수준이 아닌 거의 중급 규모의 강물 수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매우 풍부하면서 넓다는 것이고 시 당국의 갑 천 가꾸기 사업 역시 꾸준히 지속되어 옴으로 인해서 현재에 이르러서는 각종 세계적으로 희귀한 민물고기나 원앙새, 백로, 왜가리 등속의 준 텃새들도 눈에 띄게 그 개체 수를 늘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금강과 합쳐지게 되는 갑천의 끝자락 두물머리 근처 풍경, 대덕구 신탄진 )
더군다나 요즘은 갑 천이 대전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면서 천 변 공원이나 운동시설, 산책로 등도 꾸준히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는 중인데, 예전 대덕 군 내에 편입되어 있던 시절에는 그저 평범한 시골 지역에 불과했던 주변 지역이 지금은 각종 관공서라든지 방송국 등의 신 청사 그리고 대전 엑스포 공원까지 자리 잡고 있음으로 해서, 갑 천은 이제 명실 공히 대전을 대표하는 대표적 명소가 되었고 또, 시에서 벌이는 다양한 문화나 축제행사 그리고 방송국들의 각종 야외 공연 행사까지도 가장 많이 개최가 되고 있는 장소가 된 것이다.
(갑천변에 새로 지어진 대전 MBC 신청사의 모습)
그러나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 언제쯤이나 되어야 갑 천을 포함한 대전의 모든 하천들에서 예전처럼 우리 어린아이들이 마음 놓고 다시 뛰어 놀 수 있게 될 것인가를 말이다. 왜냐하면, 지금 컴퓨터나 과외 등에만 찌들어 살고 있는 불행한 어린 세대들을 예전 그 때처럼 다시 맑은 자연 속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은 이 시대 우리 어른들에게 부여된 너무나도 막중한 사명이기 때문이다.
(멀리 엑스포 다리가 보이는 갑천변의 저녁 풍경 모습)
아무튼, 이번의 벙 굴(범골)마을과 하천 탐방에 있어서는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아련한 추억들과 매우 어려워진 농촌마을의 안타까운 현실, 그리고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한 하천들의 희망적인 현실을 직접 눈으로 재확인해 본 의미 있는 여행이 되었던 것 같다.
*대전 찾아오는 길/ 수도권에서는 경부 고속 국도를 타고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회덕 분기점에서 갈라지는 호남 고속 국도 상에서 차례대로 나타나게 되는 북 대전이나 유성, 서 대전, 안영 톨게이트 등의 대전 서부 권 톨게이트들로 진입해 들어오는 방법이 있겠고 또 다른 방법은, 경부 고속 국도를 그대로 계속 진행해서 회덕 분기점을 지나게 되면 첫 번째로 나타나는 대전 톨게이트로 진입해서 들어오는 방법과 그대로 지나쳐서 비룡 분기점에 이르러 대전 남부 순환 고속 국도로 진입을 한 뒤에 나타나게 되는 판암, 안영 톨게이트 등지로 진입해서 들어오는 방법 등의 아주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그리고 영남 쪽이나 호남 쪽에서 올라와 진입하는 방법은 위에서 설명한 방법들의 역순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편할 것이다. 다만, 벙 굴 마을(대전시 호동 소재)을 직접 한 번 방문해 보려는 분들이라면 서부권 톨게이트들 보다는 동부권 쪽의 대전 톨게이트나 판암 톨게이트를 이용하는 것이 시간절약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유등천이나 갑천을 탐방 해 보시려는 분들의 경우엔 대전, 북 대전, 유성 톨게이트 등을 이용해서 진입하면 무난할 것이고 말이다.
(보문산성에서 내려다 본 대전 구시가지 풍경, 오른편 아래로 야구장이 보인다.)
(대전 월드컵 경기장 모습, 안정환 선수의 월드컵 대이탈리아전 골 장면이 떠오른다.)
*관광 및 볼거리/ 대전 지역을 중심으로 한 관광명소도 꽤나 다양한 편이다. 우선 먼저 대전의 자랑인 계룡산 국립공원을 들 수 있겠는데 800 미터 급으로서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예로부터 이름난 명산으로서 입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동학사, 갑사를 비롯한 유서 깊은 사찰이 소재 해 있기도 한 곳이다. 학창 시절, 국어책에도 실려 있었던 ‘갑사로 가는 길’ 이라는 수필문의 소재가 되었던 곳이 바로 이 계룡산 남매 탑 부근이다. 또한, 오늘 나의 탐방기에서 소개한 보문산 역시도 대전 시민들의 오랜 휴식처로 각광 받아온 유서 깊은 산이라 할 수 있다. 산자락을 휘돌아가면서 벙굴 마을, 안영리 유원지, 대전 동물원 등이 소재하고 있다. 또한, 야경 사진을 찍기에 아주 좋은 장소로서 국내 유명 사진가들도 많이 찾고 있는 식장산(대전 동부에 소재)이 있고 석양 풍경이 아름다운 계족산이란 곳도 있다. 그 밖에 대청댐, 엑스포 공원, 유성온천, 청남대, 대둔산, 금산 인삼 재배지 관광 등 그야말로 대전 지역에서도 계획만 잘 세운다면 다양하고 풍부한 관광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남매탑에서 관음봉에 이르는 계룡산 연봉의 모습)
(계룡산 동학사)
(복원 된 보문산성 누각의 모습)
(대전 동물원에서)
(대청호의 가을풍경)
(대전 엑스포 남문 광장의 모습)
( 대전시 동구에 소재한 식장산의 모습. 국내사진작가들이 저녁노을 풍경
을 찍기 위해 자주 찾는 곳이다.)
*먹거리/ 대전 하면 예로부터 칼국수가 유명한 곳이다. 그 유명한 대전 발 영 시 오십분의 막국수도 막국수지만 특히, 대전시 대흥동 일대에 소재하고 있던 칼국수 집들이 더 유명한 편이었는데 지금은 한 곳에 몰려있던 가게들이 많이 없어지고 몇 몇 집들만이 남아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도 대전에 한 번 들리게 되면 대흥동 칼국수의 맛을 한번 경험 해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흥동 칼국수의 맛이야말로 국내 최고 아니, 세계 최고라 칭해 주어도 모자람이 없을 듯싶다. 아주 매운 칼국수 국물에 쫄깃쫄깃한 면발, 게다가 쑥갓이 한 소쿠리 푸짐하게 덤으로 나오기도 하니 말이다. 나는 언젠가 대흥동 칼국수를 먹고서 문을 열고 나오다가 갑자기 눈앞이 노란 해져 그대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던 경험까지 한 적이 있다. 그만큼 칼국수가 쓰러질 정도로 얼큰한 맛이면서도 고소한 독특한 무엇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칼국수의 양도 정말 푸짐하게 나온다. 결코, 일반 칼국수집의 하얘터진 칼국수 아닌 칼국수를 연상하지는 마시라. 그리고 우리 한국인들에 있어서, 해장국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음주 후 속을 푸는데 있어 최고의 음식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런데 이 해장국이라고 하는 것은 몇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인데, 하나같이 그 모든 것들이 나름대로 독특한 맛들을 우리에게 선사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 역시 이 해장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편이라서 어디 맛있는 집이라도 있다는 정보라도 듣게 되면, 굳이 시간을 내서 찾아가 맛을 보게 될 경우가 많다. 사실, 나는 지난 시절 한 때, 전국일주를 하며 밥벌이 수단을 삼던 때도 있었음으로 국내 각지의 소문난 해장국집이라면, 거의 다 들리다시피 했을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내가 지금 소개 해 드릴 곳은 대전시 원동 소재의 청주 해장국 집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대전이란 곳이 원래 예전부터 칼국수와 해장국이 맛있기로 소문난 동네인데, 운전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청주 해장국' 집이 그 얼마나 유명한지 대충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체인점 식 해장국 집들도 맛이 있기는 하지만, 그 보다 훨씬 더 입맛을 많이 당기게 하는 집이 바로 이 청주 해장국 집인 것이다.
(원조 청주 해장국집의 모습 - 대전시 중구 원동)
화물차 운전기사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들려보았을 청주 해장국 집. 그 중에서도 바로 원조 청주 해장국집은 바로 이곳 대전시 원동 대전천 뚝 방 옆에 존재하고 있다. 그동안 나는 전국의 다른 모든 해장국집 맛을 다 보았지만 이 원조 청주 해장국집의 맛처럼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집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맛을 도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고소하면서도 향기로운 얼큰한 맛이라고 하면 될까. 바로 그런 것 같다. 특히, 뼈다귀 해장국의 맛은 그야말로 청주 해장국집만이 자랑할 수 있는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강호제현께도 한 번쯤 맛을 음미 해 보시라 강력히 권해드리고 싶다.
또한, 우리 한국인들에 있어서 보리밥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일반 서민들 누구나가 그것으로 대부분의 끼니를 이어온 그야말로 눈물이 짙게 배인 음식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쌀이 너무 흔하다보니, 오히려 보리밥이 쌀밥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게 되어 일부 특정한 음식점들에서나 그 맛을 볼 수 있게까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보리밥도 지역 음식점들에 따라 그 맛이 천차만별인 것이니, 하나같이 그 모든 보리밥들이 나름대로 독특한 맛을 지니고서 각 지역마다 다양한 맛들을 선보여 오고 있는 것이다. 각설하고, 내가 지금부터 또 하나 여러분께 소개 해 드릴 곳은 대전시 대사동 보문산 공원 일대 소재의 보리밥 집이다. 그런데 이 보문산 보리밥 집의 보리밥 맛은 그야말로 구수한 고향집 보리밥 냄새가 그대로 살아있다는 점이다. 마치, 예전에 외할머니 댁에 놀러가서 먹어 보았던 바로, 그 무공해 보리밥을 다시 씹어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런 구수한 보리밥을 달고 맛있는 고추장에다 척척 비벼서 내기만 하면, 그야말로 둘이 먹다가 셋이 죽어도 모를 만큼 보리밥의 알갱이들이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보문산공원 입구 근처의 보리밥집 - 대전시 중구 대사동)
물론, 이 맛있는 보리밥을 먹고 난 뒤에 발생하게 되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생리현상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생리현상이 두렵다고 해서 어찌 이 맛있는 보문산 보리밥을 한 번 맛보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갈 것인가. 자, 우리 모두 입안에서 살살 녹는 보문산 보리밥 맛을 보러 함께 가 보자니께유!
필자는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에 계룡산 산행을 하고 돌아왔었다. 거의 18년 만에 다시 찾게 된 계룡산이었던지라 집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마음이 많이 설레고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18년 전의 어린 그 날에도 필자는 이종사촌 동생과 함께 동학사 쪽으로 올라 오뉘탑을 거쳐 갑사로 넘어갔다가 다시 그 길을 되짚어 돌아왔었다. 그러자니 두 다리가 상당히 팍팍하게 느껴지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뇌리에 선명하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 그만큼의 나이마저도 더 하게 되었으니, 아마 그 때보다도 더 많이 힘든 산행길이 될 것도 같다. 다만, 작년 6월초의 지리산 서북릉 종주 경험을 비롯하여 주말마다 보문산(대전에 소재)산행 역시도 꾸준히 실천을 해 온 터인지라 어느 정도 대비는 되어 있는 셈이었지만 말이다.
집 앞을 지나가는 좌석버스에 올라 유성까지 가서 동학사행 좌석버스로 다시 갈아타기 위해 잠시 버스 정류장에 하차해 있는 중인데, 젊은 백인 남자와 한국 여자로 보이는 두 사람이 다른 노선버스에서 함께 내려서는 천천히 필자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들이용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쳐 메고 있는 등의 여러 정황을 보아하니 계룡산 산행을 함께 나선 동료임은 분명한데, 정작 두 사람 다 본격적인 산행복 차림새는 아니었다. 남자는 짧은 반바지에 가벼운 반소매 상의(티셔츠), 그리고 끈 달린 신발(샌달)을 신고 있었고, 여자 쪽은 위아래 양 옆으로 하얀 줄무늬가 선 밤색의 긴 체육복(츄리닝)차림에 흰색의 단화를 챙겨 신고 있었으니 말이다.
필자가 처음부터 이렇게 그들의 산행복 차림새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새삼 18년 전 그 때의 계룡산 산행기억이 다시 또 떠올라와서이다. 필자 역시도 그날에는 지금의 이 국제연인(?)들처럼 본격적인 산행복장으로 챙겨 입지 못하고서 평상복 바지 차림에 다 낡아빠진 흰색 운동화, 그리고 허름한 긴소매 상의 차림만으로 단촐하게 산행길을 나섰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며 얼마동안을 더 버스를 기다리고 있자니 마침내 동학사행 좌석버스가 정류장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차 안은 역시 어린이날을 맞이해서 산행객들로 대만원이었다. 버스의 손잡이를 잡고 서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중에 마침 필자의 바로 옆에 서있던 다른 산행객과 더불어 이번 계룡산 산행과 관련한 여러 가지의 대화들을 나누게 되었다. 과거엔 좌석버스뿐만 아니라 동학사행 일반 시내버스까지도 운행을 했었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계룡산 천황봉 산행길과 박정자 사거리 초입에 위치하고 있는 산행로 입구를 계속 폐쇄시키고 있는 조치 모두가 아무리 환경훼손문제를 염두에 둔 것이라 해도 좀 지나친 것 같다는 이야기, 그리고 지난 1월부터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된 마당에 여전히 계속해서 특정한 종교(불교)시설 문화재 보호비용 명목의 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하고 있는 조치가 과연 합당한 것인가 하는 사항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게 산행객과 더불어 여러 가지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버스가 어느새 동학사입구 주차장에 와 닿았다. 그러고 보니 산행객은 이번 산행길이 필자처럼 단촐한 행차가 아니었던가 보다.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어린 아들과 초등학생 어린 딸, 그리고 자신의 아내까지 포함해서 도합 네 식구가 함께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들 가족일행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중인데, 산행객이 직접 설명 해 주기를 아내와 아이들을 어렵게 설득 해 함께 나선 길이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은 지금 잔뜩 골이 나 있는 상태로 보였다. 아이들에게 다가가 대견하다며 억지로 칭찬을 좀 해 주긴 하였으나 그리 신통해 보이지는 않는다.
산행객 가족을 먼저 앞서가게 하고서 그 뒤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얼마쯤을 더 가다 보니 한 쪽 길가에서 예의 그 버스정류장에서 처음 만났던 국제연인들이 서로의 모습을 부지런히 사진기안에다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필자 역시도 미리 준비 해 간 사진기(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들고는 여기저기 주변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촬영 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작년의 지리산 서북릉 산행 때는 사진기(디지털 카메라)가 없어서 동생 녀석의 사진기(디지털 카메라)를 빌려갔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활동사진기(뷰캠)도 함께 가져갔었고 말이다.
큰 배재까지 오르는 길은 그리 큰 경사도가 아니었지만 꽤나 힘이 들었다. 예전 같지 않게 가쁜 숨까지 몰아쉬며 잠시 길가 한 쪽의 바위 면에 기대 선 채로 주변 숲 속의 아름다운 5월 풍경들을 감상 해 본다. 그러고 보니 국제연인들과 조금 전 추월 해 온 산행객 가족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들 가족과 국제연인들 모두 저 아래편 어딘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 후, 다시 발길을 재촉 해 큰 배재의 바로 밑에까지 이르고 보니 편리하게도(?)나무 계단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항상 느끼는 바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인공적으로 나무 계단 길을 조성해 놓는 행위가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보게 된다. 기왕의 산행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운동을 겸한 경우도 많은 법인데 일부러 이렇게 인공적인 계단 길을 조성하면서까지 산행의 편리성만을 지나치게 추구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자연은 본래의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큰 배재 고개 정상에 오르는 길로 내쳐 걸어서 오뉘탑(남매탑)이 서 있는 곳까지 단숨에 이르고 보니, 18년 전에 이종사촌과 함께 처음 보았던 오뉘탑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도 그 모습 그대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좀 달라진 점은 오뉘탑이 서 있는 주변 마당으로의 모습이 약간은 더 넓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점이고 애틋한 오뉘탑의 전설을 소개 해 주고 있던 안내판 역시도 그 위치와 모양새를 달리해서 다른 쪽으로 옮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18년 전의 그 때나 지금이나 약간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점은 안내판속의 전설 그림들이 여전히 조악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무언가 고아하면서도 예술적인 향취가 느껴지기보다는 마치, 극장용 광고사진(포스터)을 기계적으로 찍어서 붙여놓은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런 기분이 들어서인지 안내판에 쓰여져 있는 남매지간에 얽힌 애틋한 사랑이야기조차도 자세히 읽어볼 염의가 나지 않아 심드렁한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데 저만치 아래로 예전에 보았던 절집 계명정사의 자태가 한 눈 가득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계명정사 역시도 18년 전과는 달리 새로 도색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렇게 새로 도색을 해 놓은 모습이 더 마음에 드는 것은 또 무슨 조화 속인지 모르겠다.
오뉘탑에 얽힌 전설 이야기는 예전의 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려 있던 이 상보 선생의 ‘갑사로 가는 길’이라는 기행 수필에서도 자세하게 소개가 된 적이 있다. 하도 오래전에 읽었던 내용인지라 지금은 그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멀리 경상도 땅에 살고 있던 처녀를 납치해서 제 등에 싣고 온 것을 젊은 스님 한 분이 구해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처녀는 자신을 구해 준 그 젊은 스님을 차차로 깊게 사모하게 된 나머지 마침내는 부부의 연을 맺기를 간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 스님은 수행하는 처지로서 절대 그럴 수는 없다고 하면서 부부의 연 대신 남매지정만을 허락 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바로 그런 곡절에서 생겨나게 된 것이 바로 이 오뉘탑의 전설이라는 것이다.
그런 애틋한 오누이의 전설이 살아 숨쉬는 오뉘탑과 계명정사 주변을 부지런히 오가며 열심히 사진 찍기에 몰두 하고 있노라니 마침 저만치에서 터벅터벅 탑 마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산행객 가족과 국제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의 표정이 처음보다는 꽤나 밝아 보인다. 그래서 산행이라고 하는 것은 집을 나서기 전보다 실제로 산의 품 안에 들었을 때라야 만이 진정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오뉘탑에서 삼불봉(775.1m)을 거쳐 자연성릉을 지나 관음봉(755.5m)에 이르는 길은 그야말로 계룡산의 산수미를 제대로 음미해 볼 수 있는 멋진 산행 길이었던 것 같다. 18년 전에는 이 길이 아닌 오뉘탑에서 금잔디 고개를 넘어 갑사 방향으로 방향을 잡았었는데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계룡산의 아름다운 산수미를 가슴 속에 고스란히 담아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사실, 계룡산이라고 하는 이름이 처음 붙게 된 연유 역시도 지금 필자가 향하고 있는 산길 의 주변 모양새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닭이 알을 품고,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 같은 기세 모습에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필자가 보기에도 무언가 예사롭지만은 않은 기기묘묘한 풍광들이 천지사방에 가득해 보인다.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바위산길 하며 좁은 소로 길, 그리고 산행 길 주변마다로 아득히 굽이져 보이는 계곡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말이다.
이제 관음봉정상으로 막바지 오르는 길은 가파르게 이어진 철 계단길이다. 오뉘탑에서부터 내쳐서 온 피곤한 다리 폼새에 철 계단 길 시작점 바로 밑에서 잠시 다리쉬임을 하고 있던 참인데 연세가 지긋해 뵈는 노인장께서 이제 막 이곳에 당도하신다. 그 모습이 하도 장해 보이시는지라 차마 한 말씀을 건네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사람보다 더 나아 보이시네요.”
“산에 오래 다녀서 그렇지 뭐.”
“그런데 춘추는 어떻게 되십니까?”
“팔십이 가까워.”
그 말씀에 그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참인데, 금새 저만치 철 계단 길 위로 발걸음을 옮겨놓고 계신 것이 아닌가. 혈기가 왕성하신 노인장의 그 모습에 필자 역시도 재차 기운을 내어 부지런히 철 계단 길을 줄여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노인장의 뒤를 따라서 관음봉의 정상에 오르고 보니, 낡고 퇴색한 빛의 하얀 콘크리트 정자 하나가 반갑게 필자를 맞이한다. 정자 속 그늘 안에는 같은 일행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함께 모여 느긋하게 다리쉬임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들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는 이미 먼저 도착하셔서 편하게 다리쉬임을 하고 계시던 노인께로 일부러 다가가 오이 쪽을 하나 권해 드리려던 참인데 갑자기 예의 산행객 가족과 국제연인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터벅터벅 정자 안으로 든다.
아마도 강제로(?) 아버지 손에 이끌려온 아이들과 가벼운 나들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온 저 국제연인들로서는 이번의 산행길이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특히, 외국인 젊은 남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명색이 그래도 계룡산 산행인데 끈 달린 신발(샌달)까지 신고 왔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다시 조우하게 된 그들 일행과 떠들썩하니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어 가며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갈 길을 재촉하노라니, 마지막 하산길은 결국, 은선 폭포가 있는 쪽으로 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천황봉이 저 멀리로 바라다 보이는 쌀개봉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싶었으나 지금은 천황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강제로 막아두고 있는 시기라 하니 잠시만 참아 둘 일이다. 도대체 언제쯤이나 되어야 저 천황봉으로 오르는 길이 다시 열리게 될지 답답한 생각이 든다. 게다가 저 천황봉 정상에 볼썽사납게 버티고 서 있는 철 구조물의 정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 언급하지만, 대전시내 식장산 정상의 철 구조물과 이 곳 계룡산 정상의 철 구조물은 하루빨리 제거되어야 할 흉물들이라 생각한다. 산의 정수리 위에다가 어울리지도 않는 장식물들을 함부로 심어놓다니, 오랜 시간 저 불편한 것들을 강제로 머리위에 있었을 두 산의 처지만이 그지없이 가련하다.
은선 폭포까지 내려서는 길은 온통 자갈길이다. 궁금한 편에 다른 산행객들에게 그 내력을 물어본 즉, 돌아오는 답이란 것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 어떤 이는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다른 곳에서 일부러 가져다가 깔아놓은 것들이라고도 하는데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종내 알 길이 없다.
하릴없이 재차 부지런한 발길을 옮겨 은선 폭포가 바로 코앞으로 올려다 보이는 조망대까지 이르고 보니, 정작 폭포의 물줄기는 가느다란 실타래처럼 그 명색이 초라하다. 근래 들어 비가 많이 내려오지 않은 탓이라 하니 후일을 기약해 보기는 하면서도 난생 처음으로 직접 목격하게 된 은선 폭포이기도 한지라 대견한 심정으로 한참동안을 더 열심히 사진기의 촬영 단추를 눌러대었다.
은선 폭포에서 동학사 주차장까지 마지막 내려서는 길은 유명한 동학사의 계곡물과 함께 하는 길이다. 무더운 여름철만 되면 많은 피서객들이 저마다 수박 한통씩을 들고서 찾던 장소가 바로 이 곳 동학사 계곡이라 하니 저 남쪽 산자락에 속해있는 수통 골 계곡과 더불어 대전 충청지역에서는 꽤나 많이 알려진 곳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필자는 오늘의 계룡산 산행을 마치려 한다. 언제 또 시간을 내어 이 곳을 다시 찾게 될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생각을 해 보건데, 지난번처럼 무려 18년이나 걸려서 다시 찾게 될 일은 없을 것 같다.
첫댓글 와.. 정말 가보고싶게 만드는 글인걸요!!
이번에 대전 내려가게 되면 한번 들려봐야겠네요...^^
<미션 통과> 대전 뭐 금방 가죠~ 친척분이 사셔서 가끔 간다능... ^^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