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첫
이현호
매미 울음도 짙은 한여름 무더위 속을 우리는 걸었다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게 했다
“생일 축하해.” “나 오늘 생일 아닌데?” “그냥 나무가 촛불 같고, 매미 소리가 폭죽 같아서. 꼭 생일에만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생일 축하해.” “나도 오늘 생일 아닌데?” “겨울에 태어난 아이는 추위에 강하고, 여름에 태어난 아이는 더위에 강하다잖아.”
무더운 한여름을 걸으며 우리는 매미 허물같이 바스락거리며 웃었다 그래야 할 까닭은 없었는데 그렇게 됐다
ㅁㅇ
새벽에 ㅁㅇ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그런 것보다는
자음子音만을 떠나보냈을 모음母音의 안부가
어쩐지 궁금했다
그게 마음이었다면
ㅁㅇ이 떠나가며 버린 자리엔 ㅏㅡ만 남아서
아으: [감탄사]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심하게 아플 때 나오는 소리.
명치끝에 얹힌 녹을 닦으며 쭈그려
앉아 있지는 않을까
마음의 미안으로
미안의 마음으로
한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랑일까 사랑이 일까
ㅁㅇ은 네모지고 둥그런 얼굴의 윤곽 같기도 하고
안경이거나 눈동자 같기도 해서
문영 미애 미옥 미연 민우…
누군가 내 명치에 집을 짓고 살았었던 것만 같은데
ㅁ과 ㅇ의 뚫린 입을 텅 빈 중심을 허방을 실족을 부재를
낯설어하는 내가 낯설기만 한 나는 누구일까
ㅁ과 ㅇ의 사방 벽을 울타리를 우물을 가시면류관을
어떻게 왜 무엇을 어디서 언제 누가
거꾸로 돌려봐도 무엇 하나 설명 못 하는 막연은
그런 것보다는
살기 위해 한 숟갈 미음을 억지로 삼키는 것처럼
한 마음을 입가로 흘리며 떠먹은 적 있었던가
새벽에 ㅁㅇ이라는 말을 보냈는데
ㅇㅇ이라는 답장이 돌아온다
아으, 라는 말을 발음하려거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응응, 나도 잘 지내
시가 되지 못한
처음 만났을 때 너와 나는 고체였다. 굳은살 박인 마음이 부싯돌같이 단단했다. 맞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그것은 만남이라기보다는 충돌에 가까웠다.
우리의 만남이 유리잔을 부딪칠 때 나는 맑고 쨍한 소리 같은 것이었다면, 더 좋았을까. 아니다. 충돌이었기에 너와 나, 각자의 세계가 깨어졌다. 마음에 잔뿌리 모양의 실금이 가고, 말과 온기와 눈빛이 그 틈을 파고들고, 마침내 봇물이 터지듯. 너와 나는 우리에 닿았다. 물과 물처럼 섞일 수 있었다.
급류였다가 천천히 가기도 하고, 홍수였다가 가물기도 하는 물처럼. 우리의 마음이 액체가 되었을 때, 우리는 함께 붇고 함께 말라갔다. 어제는 꽃잎을 나르는 시냇물이었다가 오늘은 큰물이 되기도 했지만, 어떤 둑도 댐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할 때도 마음 한쪽은 저수지처럼 한데 고여 있었다. 물이 증발하며 구름이었다가 빗물이었다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듯이. 우리는 잠시 멀어질지언정 아주 떠나가지는 않았다.
이별이 올 것을 미리 안다면, 이별을 만났을 때 충격이 덜할까. 이별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다. 그 한마디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부르고, 이 세상을 끝장내버렸으니. 하나님이 말로써 빛과 어둠과 물과 뭍과 하늘을 지었다는 얘기도 그럴싸했다.
담긴 그릇에 따라 물이 모양을 바꾸듯 우리가 처한 상황이 마음을 바꾸고, 상처를 감싼 붕대가 피에 흠뻑 젖어 더는 출혈을 막을 수 없었을 때. 흐르던 피가 딱딱하게 굳어 피딱지가 되었을 때. 그렇게 액체가 다시 고체가 되었을 때. 이별은 완성되었다. 한 사람이 울 때, 다른 한 사람은 곁에 없었다.
조용히 땅속을 흐르는 물이 만물을 기릅니다. 차고 넘치는 물은 뿌리를 썩게 하고, 해일은 모든 것을 휩쓸어 집어삼킵니다. 이것을 배우고부터, 나는 울음을 속으로 삼켰다. 마음 한곳에 눈물의 못이 생겼다.
우리가 함께였을 때, 나는 우리의 시간을 미래로 당겨놓았었다. 힘껏 당겼던 고무줄을 놓으면, 고무줄은 늘어나 있던 탄성만큼 빠르고 세게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나는 너무 먼 곳까지 우리의 미래를 상상했고, 끊어진 미래가 현실을 때렸을 때 그만큼 휘청거렸다. 넘어질 듯 넘어질 듯 휘청거리며 혼자 걸었다.
그때 상상했던 미래는 겪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오아시스 같은 것이 있다. 물을 주지 않아도, 매일매일 가슴속에 차오르는 것이 있다. 우리가 한마음이었을 때 기른 풀과 나무와 꽃들이 여태 거기에서 잘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