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북한 고모를 만났을 때
정말이지 처음에는 너무 놀랐다. 나는 물론, 온 집안이 충격을 받았다. 한국전쟁 기간 중 행방불명되었다던 큰 고모. 그랬던 큰 고모가 북한에서 살고 있다니. 더욱이 남쪽 혈육들을 만나겠다고 신청해 제18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때(2010년 10월말~11월초) 서로 만나게 됐다고 관계당국이 전해왔다.
거기에다 나로서는 객석의 관객이 무대 위로 오르는 기분이었다. 나는 신문기자 시절 한동안 남북관계를 전담했다. 1985년 제1차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공연을 비롯해 여러차례 이산가족 상봉을 취재하고 이산가족의 슬픔, 분단의 비극을 기사로 작성하였다. 그리고 30년 가까운 기자생활 동안 이산가족의 슬픔은 뼈아픈 동족의 문제였지만 나 자신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들은 평생 나에게 취재대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라고? 인생무대에서 갑자기 정반대 역할을 맡게 된 나는 한동안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큰 고모(恩淑·78)는 원래 나에게 종고모(5촌). 넷째 할아버지(諱 華鎭)의 세 따님 중 맏이였다. 그런데 종조부께서 돌아가시자 집안에서는 종조부 제사를 모시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때 부친이 선택되었다. 호적법상 ‘사후 입양’은 불가능하므로 사문서인 족보상 숙부의 ‘子’로 편입됐다. 이에따라 북한 고모를 만나러가는 5명의 혈육상봉단을 구성할 때 ‘친조카뻘’인 내가 포함됐다. 우선 순위로는 북한 큰고모의 생존 동생인 둘째 고모(惠淑·75), 그 딸(정경아·50), 큰 고모의 사촌오빠들인 숙부(濟均·84)와 당숙(雲漢·88) 순이었다.
▲ 필자가 난생 처음으로 만난 북한고모
유선과 모임을 통해 회의가 열렸다. “무얼 준비해야 하나···” 둘째고모가 생필품위주로 언니에게 드릴 선물을 이민가방 하나에 담아 준비했다. 그리고 몇몇 집에서 선물을 보탰다. 함께 돈도 약간 마련했다.
거기에다 나는 60년 집안 역사를 일별할 수 있는 파일을 만들었다. 우선 큰고모의 선친, 그러니까 나의 종조부(諱 華鎭)와 관련한 기록물들. 종조부께서는 일제시기에 통산 6년반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전 생애를 항일투쟁에 몸바친 영주 항일투쟁 지도자중 한 분이다. 해방이듬해인 1946년 고문후유증으로 돌아가시고 뒤늦게 김영삼 정부때 건국훈장을 추서받았으며 유해는 무섬 앞 선산에서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했다. 대전국립 현충원에 있는 산소 사진부터 종조부의 생애와 업적에 관련된 사진들과 신문·잡지·문서 기록물, 집안 친척들 사진, 고향 무섬마을과 큰집 해우당의 이모저모 사진과 기사들, 축약한 족보 등등...
▲ 앞줄 왼쪽부터 북한고모의 사촌 오빠인 필자의 당숙, 북한고모, 둘째고모,
또 다른 사촌 오빠인 필자의 숙부, 뒷줄은 둘째고모의 딸과 필자
일단 속초 한화리조트로 집결하라는 전갈이었다. 거기에서 금강산으로 월북, 상봉한다는 일정이다. 숙부는 수원에서, 둘째고모와 그 딸은 부산에서, 나와 당숙은 서울에서 각각 출발했다. 나는 속초로 가는 몇시간 동안 난생처음으로 당숙과 단둘이 여행을 하게 되었다. 당숙은 예비역 육군 소장. 바로 우리가 버스로 달리는 경춘 고속도로 부근 곳곳에서 전쟁기간중 포병장교로서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그 중 춘천전투는 6·25 전쟁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전투로 기록돼있다.
“바로 저기에서 홍천 말고개 전투를···” “저 위쪽은···” 퇴역 노장군은 차창밖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60년전 목숨을 걸었던 전쟁터를 떠올렸다. 하지만 참혹했던 그 전쟁터들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가을 하늘은 공활하고 구름 한 점 없었으며’ 밝은 햇살 아래로 펼쳐지는 만추의 산하는 찬란하기만 했다. 미수(米壽)를 넘어가는 연세 때문일까. 당숙은 만나면 주로 무용담을 과시하시던 과거와는 달랐다. 대신 창밖을 응시하며 “이 아름다운 산천에서···”라는 혼잣말을 되뇌었다.
▲ 60년 만에 만난 북한의 언니와 남한의 동생이 서로를 부여잡고
쌓인 사연들을 나누고 있다
설악산 한화리조트에 도착하자마자 기자들이 에워싸고 속사포처럼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기자가 저런 모습이구나···” 나는 평생 처음 기자로부터 취재를 당해보았다.
이날 저녁 숙부께서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다소 비장한 표정으로 당숙과 고모께 나누어 드렸다. 우황청심환이었다. “내일 상봉하기 전 이걸 한 알씩 복용하자”는 말씀이었다. 어른들은 이날 밤, 한 많은 60년 세월을 이야기하느라 늦도록 주무시지 못했다.
이튿날 남쪽 출입관리소에 도착해 신상명세가 적힌 인식표를 받았다. 일정을 마칠때까지 목에 걸고 다니라는 당부였다. 하지만 당숙께서는 인식표를 목에 걸지 않았다. 되돌아올 때까지 2박3일 동안 옆구리에 차고 다니셨다. “군대에서 인식표를 목에 거는 건 한 가지 경우뿐, 포로가 됐을 때이다. 대한민국 장군이 북한에 가면서 인식표를 목에 걸 수는 없다”는 말씀이었다.
첫 단체상봉. 북측 혈육이 입장한다는 장내 방송이 나오자 작은 고모가 일어나 입구쪽으로 나섰다. 언니를 잃었을 때 나이가 앳되기만 한 15세, 언니 나이는 18세. 이제 각각 75세, 78세된 노인들이 과연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주 달려가 껴안았다. 큰 고모의 얼굴을 모르는 나마저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돌아가신 종조모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 필자가 준비해 간 파일을 보며 가족과 고향의 모습을 떠올리는 북한 고모, 그리고 이것저것 설명하는 둘째 고모와 숙부
▲ 둘째 고모의 딸이 난생 처음 만난 이모에게 음식을 먹여드리고 있다
늙은 자매는 오랫동안 말없이, 말없이 부여잡고 흐느낄 뿐이었다. 이어 큰고모는 사촌오빠들과도 껴안고 60년만의 재회, 그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다.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묻고, 가족과 고향 소식을 묻고는 울고, 또 묻고는 부여안고 하였다. 큰 고모는 젊은 시절 간호병과로 군에서도 복무했다고 한다. 남측의 장군과 북측의 여군, 한때 ‘주적’이었던 두 사람은 세상에 더없이 소중한 사촌남매였다.
피차 적인 동시에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혈육,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 때리는 주먹이자 맞는 뺨···. 분단의 비극적 모순이 눈앞에서 실체로 재현됐다. 나로서는 취재기자 시절, 많이 목도하기도 했고 눈시울도 적신 현장이었다. 하지만 이날의 느낌은 나도 전혀 짐작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어른들과 달리 처음에 어색하기만 했다. 주위 친척들이 쓰는 말씨란 경상도 사투리이거나, 서울말씨 둘 중 하나. 그런데 초면의 고모로부터 함경도 사투리를 듣는 순간 이질감이 ‘확’ 들었고 착잡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내 육신의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인가가 올라와 온 몸을 관통하였다. 그리고 눈물이 흘러 내렸다.
▲ 금강산 숙소에서 북한고모와 필자
큰 고모는 가까운 친척들의 이름과 나이를 하나도 잊지 않았고, 일일이 그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준비해간 파일을 보여드리자 고향 무섬 사진들을 보고는 무섬마을의 어느 구석인지 우리보다도 더 정확하게 짚어냈다.
큰 고모는 전쟁기간중 북한으로 가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군대에서 전역한뒤 25세 나이에 우연히 고향 무섬출신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한 청년을 소개받았다. 이 청년은 서울출신으로 연세대 상과를 졸업한, 당시로서는 드문 인텔리겐챠. 그와 결혼해 평양에 살았고, 고모부는 북한 상업성 처장이라는 고위직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1976년 함경도 함주군으로 이주하게 되어 지금까지 살고 있다 했다. 고모부는 10여년전 돌아가시고 슬하에 1남 3년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 60년만에 만난 언니의 머리를 빗겨주는 둘째 고모
북한 큰 고모는 돌아가신 종조모, 부산 둘째 고모와 성품이나 외모 모두 흡사했다. 이 모녀께서는 타고난 성품에 오랜 인격수양으로 주위에서 ‘도인(道人)’이라는 말까지 듣는 분들이다. 벼락이 쳐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는 침착함에, 당신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엄살을 피우거나 구차하게 처신하지 않는 의연함이며, 남을 배려하는 아량, 형형한 눈빛 모두 닮았다. 이번에 함께 상봉했던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북한 고모는 젊었을 당시 모친인 종조모보다 얼굴윤곽이 더 뚜렷하고 피부도 매우 흰 미인이었다. 또 종조모보다는 좀더 적극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연세가 드니 그 모친과 생김이 흡사해졌다는 것이다.
북한 고모는 우리들에게 몇차례나 “고맙다”고 하셨다. 당신은 맏딸로서 아버지에게 할 도리를 다 못해 늘 죄스러웠다는 것이다. 그랬는데 혈육들 덕분에 아버지의 공적이 평가받고 있음을 알게 되니 여한이 없다고 하셨다. 개별상봉때 우리가 준비해간 선물을 드리자 큰 고모도 선물을 한 보따리 내놓았다. “위에서 마련해주신 것”이라면서.
첫 상봉에 이어 만찬상봉과 개별상봉, 점심상봉과 작별 단체상봉이 외금강호텔과 금강산호텔에서 이어졌다. 그리고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이 왔다. 상봉 이틀 동안 특유의 절제력으로 낮게 흐느끼기만 하던 둘째 고모. 그런 둘째 고모가 떠나는 버스의 창틀을 잡고 처음으로 대성통곡을 하였다. 취재기자들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취재를 하고 있었다.
▲ 모든 일정이 끝나고 북측 가족이 탄 버스가 금강산을 떠나는 모습.
모두가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남측의 이산상봉 신청자 수가 12만명, 그중 많은 이들이 이미 세상을 뜨고 8만3천명이 ‘로또’ 당첨보다 어려운 상봉 당첨을 기다리고 있다.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많은 상봉가족들은 화를 터뜨리고 있었다. “이런 상봉을 왜 하느냐”는 것이다. 18차 이산가족 상봉 역시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 피살사건 이후 2년만에 열려 겨우 100가족이 만났을 뿐이다. 귀환버스속 이산가족들이 터뜨린 화는 이런 메시지였을 것이다. “서신교환과 상호방문은 둘째 치고, 상설면회소 설치와 상봉 정례화, 수시 상봉은 속히 실행해 이산가족의 한을 풀고 통일을 앞당기라, 그러기위해 남북 모두 정치를 잘하라”
나는 귀경한뒤 예전의 일상생활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많았다. 그 며칠사이에 이산의 한을 풀었고 가족사의 빈칸은 채워졌다. 생전 처음 뵈온 북한 고모의 얼굴이 수시로 눈앞에 삼삼하고 그저 다시 뵙고 싶은 마음뿐이다. 또 있다. 북한 고모의 경제적 형편이 어떤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으나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반듯한 기품을 지니고 계심을 알게 돼 저으기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상봉의 감격도 잠시, 북한의 연평도 포격사건이 터졌다. 우여곡절끝에 이산가족 상봉 한번 하고 남북관계는 다시 얼어붙었다. 유리그릇처럼 예민하고 깨지기 쉬운 관계, 벼랑위의 대화, 위기의 일상화, 그 모든 남북관계의 특성을 알고 있으면서 또다시 자문해본다.
“남북관계는 과연 진전하는 것인가?”라고. 그리고 자답한다. “그러나 희망을 놓아선 안된다. 희망이 없으면 변화의 싹도 트지 않으며 열매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