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4월 15일
이안눌(李安訥)
4월이라 보름날
새벽부터 집집마다 곡하는 소리
천지는 쓸쓸하게 변하고
처량한 바람이 숲을 흔드네
깜짝 놀라 늙은 아전에게 물었네
곡소리가 왜 이리 처절한가?
임진년에 왜구가 바다에서 쳐들어와
바로 오늘이 성이 함락된 날이지요.
그때 오직 송부사께서
성벽을 굳게 지켜 충절을 지킬 때
모든 백성들 성안으로 몰려 들어와
한순간에 피바다가 되었지요.
몸을 던져 바닥 시체 더미 아래 파고든
천백 명에 한둘만 살아남았답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이날이 되면
제사상 차려 놓고 죽은 이를 이해 곡한답니다.
아비가 아들을 위해 곡하고
아들이 아비를 위해 곡하기도 하지요.
할아버지가 손자를 위해 곡하기도 하고
손자가 할아버지를 위해 곡하기도 합니다.
어미가 딸을 위해 곡하고
딸이 어미를 위해 곡하기도 하지요.
아내가 남편을 위해 곡하기도 하고
남편이 아내를 위해 곡하기도 합니다.
형제와 자매 모두 다
살아 있는 이들은 모두 곡을 한답니다.
이마를 찌푸리며 다 듣기도 전에
갑자기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륵 턱에 흘러내리네
아전이 다가와 또 말하기를
곡할 사람이라도 있으면 덜 슬프지요
서슬 퍼런 칼날 아래 죽은 자가 얼마나 많은지
온 집안사람 다 죽어서
곡할 사람조차 없는 집이 허다하답니다.
四月十五日(사월십오일)
四月十五日(사월입오일) 平明家家哭(평명가가곡)
天地變蕭瑟(천지변소슬) 凄風振林木(처풍진임목)
驚怪問老吏(경괴문노리) 哭聲何參怛(곡성하참달)
壬辰海賊至(임진해적지) 是日城陷沒(시일성함몰)
惟時宋使君(유시송사군) 堅壁守忠節(견벽수중절)
闔境驅入城(합경구입성) 同時化爲血(동시화위혈)
投身積屍底(투신적시저) 千百有一二(천백유일이)
所以逢是日(소이봉시일) 設尊哭其死(설전곡기사)
父或哭其子(부혹곡기자) 子或哭其父(자혹곡기부)
祖或哭其孫(조혹곡기손) 孫或哭其祖(손혹곡기조)
亦有母哭女(역유모곡녀) 亦有女哭母(역유여곡모)
亦有婦哭夫(역유부곡부) 亦有夫哭婦(역유부곡부)
兄弟與姉妹(형제여자매) 有生皆哭之(유생개곡지)
蹙額聽未終(축액청미종) 涕泗忽交頤(체사홀교이)
吏乃前致辭(이내전치사) 有哭猶未悲(유곡유미비)
幾多白刃下(기다백인하) 擧族無哭者(거족무곡자)
[어휘풀이]
-宋使君(송사군) :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
-設尊(설전) : 제사상을 차리다.
-涕泗(체사) : 울어서 흐르는 눈물이나 콧물
-前致辭(전치사) : 앞에서 사실을 말하다.
[역사이야기]
이안눌(李安訥:1571~1637)은 조선 중기 때의 문신이며 시인으로 호는 동악(東岳)이다. 한시 창작에 주력하여 4,000 수의 시를 남겼다. 문집으로 『동악집(東岳集)』이 있다. 이안눌은 선조 40년(1607년)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 4월 15일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맞서 싸우다 동래성이 함락된 날이다. 이 시는 당시 제삿날을 맞아 집집마다 들리는 고을 백성들의 곡소리를 듣고 왜구의 손에 유린당하던 당시 참상을 시로 남겨 생생한 역사적 사실을 후세인들에게 전하고 있다.
동래전투(東萊戰鬪)
임진왜란 띠 왜군에게 동래성이 함락당한 전투. 1592년 4월 14일(음려걔 부산진을 함락시킨 왜군은 다음 날 오전에 동래성에 도착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1551~1592)은 경상좌병사 휘하의 병력과 인근 군현 소속 군사들의 지원을 받아 성을 지키려 하였으나 경상좌수사 박홍은 장비와 병력을 포기하고 도주하고, 울산에서 이동한 경상좌병사 이각 역시 왜군의 군세를 확인하고 헌자 도망을 했다.
당시 동래성에는 송상현과 홍윤관 수비지원으로 입성한 양산군수 조양규, 울산 군수 이언성 등이 이끄는 3,000여 병력이 있었으며 왜군은 2만의 병력으로 대치했다. 진주성을 포위한 왜군은 조선군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이를 거부하자 전면 공격을 가했다. 왜군은 동, 서, 남 3면에서 조총 사격을 하며 총공격으로 성벽을 기어올랐다. 성안의 백병전투에서 부녀자들까지 지붕 위에서 기와를 던지며 왜군을 부상케 하는 등 전 국민이 힘을 다해 성을 사수하려 하였으나 결국 부사 송상현 이하 대부분의 병력이 전멸했다.
조총(鳥銃)
조총이란 이름은 새가 숲에 앉아 있을 때 쏘아서 모두 떨어뜨릴 수 있다는 뜻에서 얻은 이름이다. 조총의 총신은 약 1 미터이고 유효사거리는 100~200미터이며, 명중 거리는 50미터이다. 분당 4발을 발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
임진왜란은 1592년 5월 23일(선조 25년, 음력 4월 13일)에서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까지 7년간 조선과 명나라 대 일본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 17세기 동아시아의 역사를 뒤흔든 국제 전쟁이다. 왜군이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은 1597년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하여 임진왜란이라 일컫는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쇠퇴의 기운이 나타났다. 정치적으로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 훈구세력(勳舊勢力)과 사림세력(士林勢力) 간에 계속된 졍쟁으로 인한 중앙정계의 혼란과 사림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으로 국가의 정상젓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율곡은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국가 재정의 부족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정은 문약(文弱)에 빠져 근본적인 국가의 방책이 확립되지 못했다.
이즘 일본에서는 15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라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도시가 발전되자 발전되자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 형태사 위협받기 시작했다. 일본은 15세기 말부터 각 지역을 다스리던 영주들이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다. 약 100여 년간 전쟁이 이어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전국시대를 통일한 후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진출시켜 국내 통일과 안정을 도모하고 신흥세력을 억제하려는 목적항[ 데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된다.
조선에서는 정여립 모반사건 이후 통신사 일행을 선정하여 1590년 황윤길과 김성일을 일본에 보내 일본의 정세를 탐지케 하였으나 서인의 정사(正使) 황윤길과 동인의 부사(副使) 김성일의 보고가 서로 엇갈리게 된다. 조정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침공할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여 각 도에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중지시켰다.
일본은 먼저 조선에 수교를 요구하며 명나라를 정벌하려하니 조선을 통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명나라를 사대관계로 섬기고 있던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정규 병력 15만 명과 수군 9,000명, 지원부대를 포함하여 전체 20만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공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은 파죽지세의 시세로 불과 보름 만에 한양을 점령하게 된다. 선조와 신하들은 궁궐을 버리고 평야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떠났다. 일본군은 5월 말에는 개성을 점령하고 전쟁 개시 두 달 만에 평양성까지 함락시켰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이 일본군을 연달아 격파했다. 일본은 서해를 통해 수군을 북상시켜 육군과 합류하고 식량과 무기를 공급받으려던 계획이 실패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을 공격하자. 조선 육군도 전열을 가다듬어 일본군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명나라에 지원 병력을 요청하고 명나라는 일본이 자국ㅆ지 침략할 것을 염려해 1593년 1월 지원병을 보내와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게 된다.
지친 일본군은 함양으로 퇴각한 후 경상도 일대로 후퇴해 그곳에 성을 쌓고 근거지를 튼튼히 했다. 일본과 명나라는 휴전협상을 벌였지만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 1597년 다시 조선을 침공했다. 이를 임진왜란과 구분해 정유재란이라 부른다. 그러나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임진왜란은 마침내 끝이 나게 된다.
7년에 걸쳐 이어진 임진왜란은 조선과 명나라, 일본 모두에세 커다란 피해를 입히게 된다. 조선은 전쟁으로 가장 많은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입었고 전 국토가 황폐해졌으며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고 일본의 백성들도 생활이 피폐해졌다. 그러나 조선에서 약탈해 간 문화재는 일본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일본에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의 도자가문화를 일으켜 융성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명나라는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느라 국력이 약화되고 이 틈을 타 여진족이 만주에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위협하게 되었다.
출처 : 한시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