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야화> 정현왕후 윤씨
성종의 두번째 계비로 온화한 부덕의 소유자 연산군 땐 많은 수난 겪어
재물은 친척에게 나눠주고 항상 주변 사람들 배려해
폐비 윤씨가 생을 마감하자 성종은 새로운 왕비를 맞이해야 했다.
후궁 출신 중에서 선발하는 관례에 따라 숙의 윤씨가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가 바로 성종의 두번째 계비가 된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다.
정현왕후는 1462년 파평 윤씨 윤호(尹壕)의 딸로, 부친의 임지인 신창현(新昌縣) 관아에서 태어났다.
12세의 나이로 숙의(淑儀) 자리에 올랐다가 왕비가 됐다.
성종은 인정전에 나아가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을 진행했다.
성종은
“그대 윤씨는 명문 출신으로 숙덕(淑德)을 갖추어 어려서 궁궐에 들어와 일찍부터 드러나게 알려진 바가 있었으므로,
이에 의지(懿旨·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왕비로 책봉한다”고 했다.
성종은 특히 정현왕후 옥책문에서
“그대 윤씨는 단정하고 정숙하며 온화하고 공손하여, 후궁으로 선발되자 궐 안에 좋은 소문이 전파되었네.
삼전(三殿·정희왕후·소혜왕후·안순왕후)에게 귀여움을 받았으니 태임(太任·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의
아름다운 음성을 잇고 나 한 사람을 보필하니, 거의 도산씨(하나라 우왕의 비)의 덕행과 같도다”라고 했다.
왕비의 성실한 덕행과 기대감을 나타낸 것이다.
“성종께서 항상 칭찬하기를 ‘부녀는 질투하고 시기하지 않는 사람이 적은 법인데,
현명한 왕비를 맞아들임으로부터 내 마음이 편해졌다’고 하셨고,
소혜왕후께서도 역시 기쁨이 안색에 넘치면서 이르기를 ‘중궁다운 사람이 들어왔는데 낮이나 밤이나 무슨 걱정할 것 있겠는가?’
라고 하셨다”는 <중종실록>의 기록처럼 정현왕후는 온화한 부덕(婦德)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 시기에 그녀 역시 많은 수난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이 어둡고 어지러움에 미쳐서는 근심되는 마음과 애타는 생각으로 침식(寢息)이 편치 못하시어 이로 인해
병이 나셨다가 간신히 나으시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녀는 소혜왕후의 국상 때 연산군이 국상 기간을 단축하자 “예문에 의거해야 한다”고 강하게 맞서기도 했다.
그녀는 1488년 훗날 중종이 된 진성대군을 출산했고 1497년(연산군 3년) 자순대비(慈順大妃)에 봉해졌다.
1506년의 중종반정은 그녀에게는 단비로 다가왔다.
연산군을 축출한 반정군들은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현왕후를 찾아와 그녀의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중종)으로 추대했다.
그녀는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대비로서의 정치적 간섭보다는 조용한 내조의 길을 택했다.
“깊고 원대한 계책을 잠시도 잊지 않았고 고식적인 혜택은 조금도 베푸는 일이 없으셨다”는 그녀에 대한 평가가 주목된다.
그녀는 왕실의 안정을 위해 단호하게 처신하기도 했다.
1527년(중종 22년) 세자 생일에 쥐의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과 귀·눈을 불로 지져 동궁의 북쪽 뜰 은행나무에 걸어놓고
세자를 저주한 ‘작서(灼鼠)의 변’이 있자 언문 쪽지를 추관(推官)에게 보내 즉각 결단하여 경빈 박씨를 죄에 처하게 하는
단호함을 보였다.
1530년(중종 25년) 8월22일 경복궁 동궁의 정전에서 승하한 후 그녀의 무덤은 남편 성종의 무덤이 있던
선릉 왼쪽 언덕에 동원이강릉 방식으로 조성됐다.
“병이 위독하게 되어서는 남은 재물을 나누어 두루 친척들에게 내리셨지만,
일찍이 자제들을 위해 은택을 구하지 않으셨고 또 비둘기와 메추라기 고기를 먹고 싶었을 때 내친(內親)이 구해서 바치자,
왕후께서 외부 사람들이 알게 하지 말도록 하셨으니 대개 공상(供上)하는 폐단을 염려하신 것이다”
는 묘지문(墓誌文)의 기록은 죽는 순간까지도 주변 사람들을 배려한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