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2 – 4. 30 창동예술촌아트센터 (T.055-222-.2155, 창원)
휴머니스트 괴암 김주석
자유를 꿈꾸다
글 : 오창성(김주석기념사업회 이사, 오방사유운동본부장)
항일운동가이고 교육자이며 화가인 김주석 선생의 일대기 즉, 항일운동사와 작품세계, 미술교육자로서 그가 창안하고 국민운동으로 주장한 자유상상화를 소개하고 그의 정신을 계승 발전하여야 할 사항을 새겨보고자 한다.
김주석(1927-1993) 선생은 누구인가?
선생은 경남 진해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는 김상조의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어릴 때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하였으며 서예가인 외사촌에게 서예와 묵화를 접하면서 자라 초등학교 2학년때는 교내 미술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으며 미술에 심취하면서 성장하였다.
선생의 청년시절 마산은 6·25동란을 맞아 피난 온 유명 미술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서울과 부산을 연결 짓는 문화의 꽃을 피운 요지가 되었는데, 선생은 주로 미술인 단체에서 실무적인 일을 총괄하고 기획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자유로운 곡선을 그리고 거기에 연상되는 그림을 그리면서 채색과 장식을 하면서 그림을 끊임없이 그려나갈 수 있는 자유상상화를 창시하여 연구하다가 후배에게 물려주고 국민운동으로 발전되어 나가기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항일 운동가로서 김주석
경성전기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한 선생은 두 군데의 야학당에서 한글을 가르쳤고, 그림을 그리거나 미술전시회를 보러 다니는 일로 친구들과 어울렸다. 교내에서 일어 사용을 반대하다 두 번이나 정학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각종 계몽, 홍보활동도 하였는데 1942년 8월 여름방학 중에는 친구들과 함께 진해에서 학도병 징용과 특공대 징발을 반대하는 계몽활동을 하였고 9월에는 우리글, 우리말 다시 찾기 운동을, 1943년 2월에는 서울과 진해에서 일어상용 배격운동과 國語常用이라는 구호를 써 붙여 놓기도 하는 등의 일을 하다가 보다 조직적인 활동의 필요성을 느껴 나라 잃은 설움과 울분으로 단식을 하면서 투쟁의지를 다짐하다가 1943.1.3. 이일전의 하숙집에서 비밀결사조직인 학우동인회 항일결사대를 조직하였다. 헌병대에 연행됨으로써 조직의 실체가 발각되어 1944년 1월에 서울 하숙집에서 전원 체포된다. (이후 선생은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에 시달리고 진해헌병대와 부산 서대신동형무소에서 미결수로 1년 6개월을 복역, 다음 정식재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고 풀려났다) 작고하신 후인 2018. 8. 15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전점석이 쓴 ‘일제 말기 괴암 김주석 화백의 삶’ 중에서 일부 발췌)
화가로서 김주석
우리나라에 西洋美術은 1920년대 東京유학도들이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馬山美術은 이들 作家들의 뒤를 잇는 西洋美術의 제2세대이자 馬山美術의 제1세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1940년대 日本, 中國등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활동이 왕성해지면서 鄕土고장의 특유한 문화권 속에서 馬山美術은 태동하고 1947년 전국 규모의 全國美術展覽會가 개최되었다. 이 展示會는 서울의 김기창, 박래현, 부산의 양달석, 우신출, 창원의 김종영, 전라도의 김해근을 비롯하여 마산의 이림, 임호, 문신(1923-1995, 도쿄미술학교), 이준, 이수홍(1920-1969-제국미술학원), 최운(1921-1989), 안윤봉(1926-1985) 외 108점의 대규모 전람회로서 당시부터 馬山은 서울 부산과 전국을 잇는 교량적 역할을 해냈다. 최초의 문신 도불전, 허민, 변관식 등 전시회가 개최되었으며, 1949년 제 1회 경남미술연구회 작품전에 이림, 이준, 전혁림, 임호 등이 참가하는 등 1940-50년 馬山美術은 활발한 양상을 띠다가 전란으로 잠시 멈칫하였고 1962년에는 마산미술협회도 창립되면서 선생은 젊은 나이에 사무국장의 일을 맡는 등 적극적인 작품활동을 한다. 쟁쟁한 학벌을 자랑하고 서양화의 새로운 유입을 보면서 선배화가에게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하였고 조가가인 문신선생의 도불전시를 보고 상당한 놀라움과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결코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창작활동을 하면서 감동의 작품을 제작하며 역량을 발휘하여, 1976년 무학화가회 지도고문으로 추대되고, 9회의 개인전과 수백 회의 전시회, 1984년에 마산시문화상 외 30여 회의 미술 교육 관련 공로상, 감사패, 표창 등을 받았으며 1994년 경남미술대전 초대작가로 추서받았다.
교육자로서 김주석
학창시절 야학에서 무지한 국민이 많음에 한탄하고 교사가 되어 국민계도에 꿈을 가졌던 선생은 해방이 되자 교사의 길을 걷는다. 당시의 미술교육은 일본 자국에서는 창의성 교육을 하였지만 우리나라의 미술교육은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인을 양성하고, 체제를 선전하는 도구로서 미술교육이 이용되기도 하다가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인간을 위한 미술교육을 하는 세태로 바뀌어 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이미 선생은 아이들의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띤 그리고 창의적인 미술을 가르치려고 노력하였던 선진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주석선생 기념사업회 회원들이 염원하고 바라는 것은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유업, 남겨진 작품들이 영구 보전되며, 휴머니즘 정신은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김주석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기념관 건립, 김주석 연구 등이 더욱 활성화되기 위하여 정진해 가고 있음에 많은 격려와 응원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