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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는 1978년에는 시골이었다.
앞산에는 공동묘지가 있었고, 5일장이 열렸다.
종로 2가에서 미도파 백화점을 거치고 청량리를 거쳐서 오는 시내버스 종점이었다.
가끔은 종로 2가 학원에서 시내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청량리까지 오곤 했다.
그때 신설동 로타리를 지날 때면, 전파사 전축에서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 했었지’가 흘러나왔다.
어머니는 바로 위의 망우리 언니에게 나를 맡겼다.
불덩이처럼 발갛게 달아 있던 나를 달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이모에게 나를 맡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코뿔소처럼 아무도 말릴 사람 없었던 나를 위로하고 책임질 사람은 이모밖에 없었다는 판단을 했던, 어머니는 현명했다.
묵호에서 도둑질 말고는 나쁜 짓을 다하던 내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어머니는 순식간에, 나를 간단한 짐만 챙겨서 망우리 이모에게 보냈다.
묵호에서 패싸움 끝에 큰 사고가 터져서 도망을 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그 패싸움으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나의 첫 경험이었다.
“이모 말 잘 듣고, 이모 울거든 잘 달래거라”
어머니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것은 하루가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밤 마다 이모는 울었다.
단칸방 밖에는 찬 바람이 쌩쌩 불었는데, 이모는 나를 아랫목에 재우고 당신은 추운 문 앞에서 잠을 잤다.
이모의 울음소리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종로 2가 학원에 갔다 오면, 이모는 연탄불에 밥을 해서 내 앞에 대령했다.
내가 숟가락을 뜨면 어김없이 반찬을 숟가락에 얹어 주었다.
이모는 나와 절대 겸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다 먹고 나서야 이모는 남은 밥과 반찬을 처리했다.
그것이 이모의 미덕이었을까.
625때 갓 결혼한 남편이 빨갱이로 몰려 동네 미루나무에 묶여 총살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도, 그렇게도 남자를 받드는 이유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결혼하고 두 달 만에 남편이 죽고,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 이종사촌 누나는 간호사가 되어 독일에 가서 한국 남자 광부와 결혼을 했다.
이모는 항상 나에게 딸이 남편을 닮았다고 했다.
누나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나의 방황은 이모의 매일 같은 눈물로 잠재워져 갔다.
나의 불만은 이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또 나를 도왔던 것은, 묵호에서 나의 첫 순결을 주었던, 그녀의 말.
“남 동생 대학 보내야 해요”
그 말이 비수같이 내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
온갖 사내들에게 몸을 파는 이유가 고작 그것이라니.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서울에 와서 시내버스를 타고 학원에 가면서 오면서, 그녀가 했던 말이 비처럼 서서히 내 가슴을 적시기 시작했다. 이모의 울음과 함께.
내가 대학생이 된 이유는 두 여자, 이모와 그녀 때문이었다.
종로2가 학원을 다녔기 때문인지 나는 간신히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착한 친구였어요. 별거 아닌걸로 묵호로 내려가다니, 공장장 놈이 나쁜 놈이죠.”
“그 후로 소식을 들었어요?”
“처음에는 몇 번 연락이 오다가 시간이 지나서 끊겼어요”
“고향에는 안내려갔데요?”
“모르겠어요. 저도 궁금했어요”
“.........”
그녀의 친구는 초로의 여인이었다. 하얀 머리카락이 드믄드믄 보였다.
가발공장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였다.
“혹시 연락이 되면 전화 주세요”
“그럴게요”
그녀를 찾아서 그녀가 일하던 영등포 가발공장으로 가서 수소문하여 그녀의 친구를 만났으나 허사였다.
그녀는 간 곳이 없었다.
그녀의 고향 흑산도로 가서 남동생을 만날 계획을 했다.
그곳에도 그녀가 없다면 막막한 일이었다.
그녀는 없었다. 죽었다.
내가 남쪽 바다 마을로 찾아 온 것은 그녀 때문이었다.
그런데 죽었다.
내가 묵호로 40 년 만에 찾아 온 것도 그녀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쪽 작은 마을에 온 것도 역시 그랬다.
순전히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의 술집은 페허가 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어느 날 홀로 찾아와서 시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술집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죽고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어서, 마을 사람들이 무연고자로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의 기억으로는 참으로 착한 여자였다고 한다.
그것은 나도 인정할 수 있었다.
나와 딱 한 번 만났고, 그녀의 말 한 마디로 내 삶이 송두리째 변화 되었고, 40년 내내 나는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찾아다닌 것이다.
그녀를 잊기 위해 이곳 묵호 발한 삼거리로 내려왔다.
그곳은 동해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던 곳이다.
그래서 슬펐다!
아름다운 동해 바다는 그녀가 없어서 더욱 슬펐다!
아침에 일어나면 태양이 거실 가득 들어서곤 했다.
그래서 슬펐다!
가슴 한가득 바닷바람이 가득 채워지고, 동문산 자락의 신선항 공기가 방안 깊숙이 들어섰다.
그래서 슬펐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동해 바다를 아내와 항상 같이 내려다 보았다.
1988년 결혼을 하고, 학교 수업 때문에 신혼 여행을 설악산 하루 갔다 오고 일본으로 와야 했다.
맞선으로 만난 아내는, 남편이었던 내가 낯 설었으리라.
학교에 갔다오면 항상 아내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있었다.
학교의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일본어 교실에 자전거로 태워주고, 아내 스스로 일본어를 하게 되면서 다행히 아내의 鄕愁病 조금씩 사라졌다.
첫 아이를 낳고, 젖 몸살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내를 위해, 나는 밤새도록 마사지 해야 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그 아이가, 하라주쿠의 코스프레를 흉내 내는 것을 보고, 아내와 나는 태교를 잘못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아이는 자신이 태어난 일본을 항상 그리워 했다.
그래서 일본에 어학 연수 갔다가 후쿠시마 핵 때문에 다시 돌아오고, 그것 때문인지 백혈병에 걸려서, 나와 아내를 마음 아프게 했다.
아내가 없는 그곳 경치 좋은 아파트는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이곳 발한 삼거리 원룸으로 내려왔다.
겨우, 아내로부터 벗어나고 우울증을 이겨내고 이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묵호 발한 삼거리에서 아내를 다시 만날 것이다.
대학생의 첫 여름, 나는 해수욕장 인명구조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 태풍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다. 남자답게 태풍은 너무나 짧고 굵게 지나갔던가.
그해 여름이 여자 아닌 남자 태풍이 지나간 것에 대해, 40 년도 넘게 지난 요즘에 와서야 묘한 기시감 같은 걸 생각하고 있다.
그해 여름은 반드시 남자가 지나갔을 것 같은.
그해 여름이 특별했던 것은, 그녀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해 여름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이상한 죽음이 벌어졌다.
여름에는 구로공단 가발공장 여공 한 명이 데모 하다 신민당사 2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런데 떨어져 죽은 여공이 일했던 가발 공장이 그녀가 일했던 곳이었다.
YH 여공사건이었다!
그녀가 공장장으로부터 순결을 잃고 묵호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던 그곳이었다.
개학을 하고 조금 후, 그 당시 대학생 들은 꼭가야 하는 병영집체 훈련을 가기 위해, 전 날 마치 군대에 죽으러 가는 것 마냥 비장하게 떠들며 술 먹고 꼬꾸라져 잠이 들었다.
아침에 교련복을 입고 학교에 갔다가 안개 속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교문 앞에는 커다란 탱크와 함께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병영훈련을 가는 우리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라 착각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빨리 집에 가 새끼들아!"
저녁이 되어서야 대통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심복들과 술을 마시다가 총에 맞았다는. 내가 겨우 생각해 냈던 것은, 총으로 이긴 자는 총으로 망한다는 것 뿐.
학교는 바로 휴학을 했다.
모든 것들이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다.
서울의 봄아 찾아온 듯 착각을 했고, 나는 강릉으로 돌아와 사북에서 벌어진 일들의 소문을 들었다.
친구와 사북으로 가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광부의 아내들은 정의로운 투사였다. 우리는 수십미터 석탄 더미에 올라갔다가 친구는 떠밀려 큰 부상을 입고 나는 군대에 끌려가고 말았다.
군대에서 사회정화를 시킨다고 끌려 온 수 많은 사람들을 목격했다.
사회에 피해를 준 사람이기에는 너무나 착하게만 보였다.
더 이상한 죽음과 사건은 그 해 여름, 내가 일했던 해수욕장에서 였다.
"사람 살려! 사람이 죽었어요!"
망루에서 나는 바다로 급히 뛰어 들었다. 죽은 것은 그였다.
전날, 밤새도록 태어나서 처음 먹어 본 양주를 같이 마셨던. 그리고 그의 아름다운 애인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어쩌면 그해 여름 바닷가에서의 멍청한 그의 죽음 보다 나는, 그의 애인이었던 아름다운 하얀 비키니 그녀의 몸매에 더 관심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가 장군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밤새도록 떠들어 댔던 이야기는 나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장군이었고 그는 미국에 유학을 다녀왔고, 그녀의 애인은 모델이라는 이야기. 밤새도록 그가 떠들었던 이야기는 허공으로 날리며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그녀.
그녀가 입었던 하얀 비키니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대단한 것이었다.
그가 죽고 양복장이 수사관과 군인들이 백사장을 돌아다니며 설치다가, 드디어 같이 술을 마셨다는 죄명(?)으로 나는 조사를 받아야 했다.
"왜 같이 술 마셨어?"
"먹으라 하니 먹었죠"
그녀는 내 옆에서 울고 있었다. 나는 다만 그녀가 불쌍할 뿐이었다.
죽은 귀공자 그녀의 애인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혼란한 사춘기를 갖 지나고 반항심 많았던 나는 급기야는 수사관들에게 대들었다.
"이 새끼, 순전히 꼴통이네"
수사관들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 건물을 나오고, 그녀와 난 작별인사를 했다.
태풍이 지난 여름 하늘의 태양은 너무나 뜨거웠다.
태양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양산을 쓰고 가는 그녀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난 돌아서서 그녀를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그해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세월이 흘러 모든 것이 어렴풋하지만, 내가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그해 여름 태풍의 이름은 남자였단 것이다.
그것만이 혼란스런 시절에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단 한 가지였다.
그리고 하얀 비키니 그녀와 가발 공장 여공의 죽음, 그리고 그녀였다.
그해 여름의 일들과 그의 죽음과 하얀 비키니 그녀, 그리고 이후 벌어졌던 수 많은 죽음들,
남자였던 태풍과 함께 나는 글을 써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단편 소설 '그해 여름' 의 시작은 이렇다.
"그해 여름의 태풍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다. 태양은 너무나 뜨거웠다.“
나는 사북 사태로 육군에 끌려갔다가, 수영을 잘한다는 죄(?)로 해군으로 다시 입대해야 했다.
대학생의 첫 여름, 나는 해수욕장 인명구조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 태풍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다. 남자답게 태풍은 너무나 짧고 굵게 지나갔던가.
그해 여름이 여자 아닌 남자 태풍이 지나간 것에 대해, 40 년도 넘게 지난 요즘에 와서야 묘한 기시감 같은 걸 생각하고 있다.
그해 여름은 반드시 남자가 지나갔을 것 같은.
그해 여름이 특별했던 것은, 그녀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해 여름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이상한 죽음이 벌어졌다.
여름에는 구로공단 가발공장 여공 한 명이 데모 하다 신민당사 2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런데 떨어져 죽은 여공이 일했던 가발 공장이 그녀가 일했던 곳이었다.
YH 여공사건이었다!
그녀가 공장장으로부터 순결을 잃고 묵호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던 그곳이었다.
개학을 하고 조금 후, 그 당시 대학생 들은 꼭가야 하는 병영집체 훈련을 가기 위해, 전 날 마치 군대에 죽으러 가는 것 마냥 비장하게 떠들며 술 먹고 꼬꾸라져 잠이 들었다.
아침에 교련복을 입고 학교에 갔다가 안개 속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교문 앞에는 커다란 탱크와 함께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병영훈련을 가는 우리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라 착각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빨리 집에 가 새끼들아!"
저녁이 되어서야 대통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심복들과 술을 마시다가 총에 맞았다는. 내가 겨우 생각해 냈던 것은, 총으로 이긴 자는 총으로 망한다는 것 뿐.
학교는 바로 휴학을 했다.
모든 것들이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다.
서울의 봄아 찾아온 듯 착각을 했고, 나는 강릉으로 돌아와 사북에서 벌어진 일들의 소문을 들었다.
친구와 사북으로 가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광부의 아내들은 정의로운 투사였다. 우리는 수십미터 석탄 더미에 올라갔다가 친구는 떠밀려 큰 부상을 입고 나는 군대에 끌려가고 말았다.
흑산도로 가는 뱃머리에서 40년 전 그녀를 생각했다.
“남동생 대학 보내려고........”
그리고 그녀가 무심히 말했던 그 말 한 마디가 귀에 울리는 듯 했다.
그녀의 남동생은 어부였다. 흑산도 유일의 대학생이었던 그가 어부라는 사실이 생경했다.
“10여년 전 추석 때 한 번 왔다 갔어요. 그리고는 그후 소식이 없었어요”
“누나가 뭐 하고 사는지는 알고 있었어요?”
“강원도 바다가 마을에 산다는 이야기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결혼하면 같이 흑산도로 놀러 온다고 했는데.........”
“남자? 그 남자를 알아요?”
“그 후 누나는 소식이 끊겼어요”
남동생의 강한 전라도 사투리는 힘을 잃어 갔다.
“누나가 뭐 하는지는 알아요?”
“잘 몰라요. 서울서는 공장 다녔는데.......강원도에서는 뭐 했는지는........, 결혼할 사람이 배 탄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요”
“대학은 어디서 다녔어요”
“저가 대학 다닌 것은 어떻게 아세요?”
“오래전에 누나에게 들었어요”
“누나가 흑산도 산다고 누가 그래요?”
“서울 사는 누나 친구가........”
하늘에는 갈매기가 날고 있었다. 갈매기를 닮은 그녀는 어디를 날고 있을까?
“누나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고......”
“네? 아들이.....몇살이라고 해요?
”마흔살 정도라고 했던것도 같고.......“
문득, 스쳐가는 기억 하나는 그녀와의 하룻밤이었다. 그리고 아들.......
“너, 앞으로 만나면 죽어!”
그러면서 그는 내 뺨을 때렸다. 순간, 내가 왜 맞아야 하는지 궁금해졌다. 난 그와 초면이었다.
그에게 맞을 짓을 한 적이 없었다. 만나자 마자 만나지 말라면서 손찌검이었다. 만난적이 없는데, 다만 그 아이가 날 따라다녔을 뿐인데, 그 아이가 엉뚱한 소리를 한게 분명했다.
화가 났다. 뺨을 맞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지러움이 가시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아이의 거짓말과 함께 두 배나 되었다. 정신없이 두둘겨패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의 부모가 경찰에 신고를 하고 난 강릉으로 도망갔다가 서울 망우리 이모집에서 종로 2가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날 따라다녔던 여자아이는 묵호항 앞의 쌀집 딸이었는데, 이쁘고 바람기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대학생 애인을 두고 있었고, 대학생인 그가 소문을 듣고 나를 만난 것이다.
얼마 뒤, 학교를 졸업하고, 그 여자아이는 센데이 서울 수영복 모델이 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여자아이가 날 좋아해도, 난 관심이 없었다. 난 이미 창녀촌에서 내가 첫경험을 한 그녀 생각 뿐이었다.
망우리에서 종로 2 가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안정이 되어 갔고,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되고 묵호 창녀촌에 그녀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없었다.
그녀 덕분에 대학생이 되었는데 말이다.
묵호는 가자마자 싸움을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싸움으로 끝냈다.
그것으로 나의 고등학생 으로서 방황이 끝났다.
그러나, 싸움은 끝난게 아니었다.
대학생이 되고 박정희가 죽고, 진짜 싸움이 시작되었다.
전국은 소용돌이에 빠졌다. 그의 죽음은, 여름방학 때 해수욕장 인명구조원 할 때, 우연히 가게에서 신문 한귀퉁이의 기사를 봤는데, YH 무역의 여공이 신민당사에서 떨어진 사건이었다.
그것에 항의 하는 김영삼 총재는 박정희로부터 제명이 되었고 그로인해 부산 마산 지역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그 진압 문제로 박정희와 차지철 김재규가 술 먹다 싸우다가, 박정희와 차지철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YH 무역 여공의 죽음이 결과적으로 박정희를 죽게 한 것이다.
YH 무역은 내가 순결을 바친 묵호 창녀촌 그녀가 다니던 가발공장이었고, 그녀는 그곳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말 한마디 못하고 스스로 자책을 하며 창녀가 된 것이다.
그렇게 번 돈을 집으로 보내, 남동생 대학학비로 쓰게 되었다.
박정희가 죽고 학교가 휴교하여 학교에 가지 못하고, 다시 학교에 갔을 때는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려고 했고, 나는 자연스레 데모 학생이 되어 급기야는 군에 끌려가고 말았다.
그녀 때문에 대학생이 되었고, 그녀 때문에 데모하다 군에 끌려 간 셈이다.
“내가 누구야?”
“........”
그녀는 여전히 내 손을 만지면서 웃고 있었다.
나는 무의미한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와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 아무도 못 알아 볼 겁니다. 너무 심해요”
원무과 직원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녀의 지나온 세월은 그녀만이 알고 묻혀 버릴 것이 뻔했다. 나의 세월도 그녀에게 말 해 주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남동생 대학 보내려고요.......”
50 년 전의 그녀의 딱 한 마디 말만이 모든 것을 감싸안을 뿐이었다.
그날, 묵호의 깡패들과 싸움을 하고 선물로 받은 그녀였다.
늙은 여자의 안내로 그녀가 방에 들어 왔을 때, 그녀는 늦가을의 옷차림이 아니었다.
엷은 싸구려 망사 옷을 살짝 걸치고 있었다.
첫 경험 치고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 한마디에 심장에 비수가 꽂히는 느낌이었다.
날카로운 칼이 온 몸을 후벼파고 있었다.
남동생 대학을 보내기 위해 몸을 팔고 있다니, 나는 대학에 가기 싫어 사고 치고 돌아치고 있었는데.....
그녀의 말 한마디에 나의 온몸은 얼어붙은 듯 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말 한마디로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다녔던 학교 선생보다 훌륭했다.
“이쁘다......”
나의 말에 그녀가 알아들은 듯 빙긋이 웃었다.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보았다. 50 년전 딱 한 번 보았던 얼굴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흑산도 그녀의 남동생과는 말을 별로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소식을 알고 싶어 찾아갔다.
그녀가 몸을 팔아 대학을 보낸 남동생이라면, 무슨 말이라도 묻고 싶었지만, 다만 그녀의 소식만이 궁금했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상관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50 년 전에 머물러 있었다.
“누나 있는 곳을 알았어요.”
흑산도 그녀의 남동생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나는 급하게 묵호 노인 요양병원으로 면회를 갔다.
그녀는 그날 이후, 묵호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 묵호로 다시 찾아 올 때까지 그녀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혼자가 되고 묵호의 거리를 방황하면서 그녀가 생각났던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만나도 되는 것인가?
그녀의 세월과 나의 세월은 전혀 다른 물줄기로 흘러왔다. 세월은 모든 것을 삼켜 버리고, 이제 그녀와의 만남으로 종결 지을 것인가.
상관없었다. 50년의 시간은 전혀 문제가 되지 못했다. 그녀의 세월과 나의 세월이 비록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더라도, 이제 그녀는 내 앞에 있다.
그녀가 내 손을 만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긋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그녀가 빙긋이 웃기 시작했다.
50년의 세월은 전혀 문제가 되지 못했다.
마치 1978년 그 가을 날처럼, 우리는 그렇게 만날 수 있었다.
사람은 서로 의지하면서, 너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그녀가 있고 그녀가 있기에 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녀와의 50년 세월은 서로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50년 전의 한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더구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채 빙긋이 웃으면서 내 손을 만지고 있었다.
“네 손도 이쁘네......”
나도 그녀의 손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굴을 쳐다 보았다. 마치 오랫동안 보아 온 사람처럼 낯설지 않았다.
그날, 딱 한 번 본 것 뿐이다. 그녀를 잠시 품었다고 하지만 전혀 기억이 없다.
오히려 50년이 지나서 서로 손을 만지면서 느끼는 감촉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0년을 같이 살다 죽은 아내의 손길은 이제 가고 없었다. 아내의 얼굴 조차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얼굴이 아내와 겹쳐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 때문에 대학을 가고, 데모를 하다가 제대를 하고 일본에 유학을 갔고,
이 모든 것이 그녀 때문인 듯 했다.
나처럼 아내도 역시 그녀 덕분에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세월의 절차만큼 그 시작점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내가 나를 떠난 것조차, 그녀 때문일거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던 것일까.
30년을 의지해 온 아내는 나를 지탱해 주었던 분신이었다면, 그녀는 나에게 어떤 존재였던가.
그녀를 품에 안았던 기억은 사라지고 없다. 그녀의 향기와 몸짓조차도 없다.
오로지 그 말 한마디였다.
“동생 대학 보내기 위해......”
사람은 서로 의지하면서, 너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그녀가 있고 그녀가 있기에 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녀와의 50년 세월은 서로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50년 전의 한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더구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채 빙긋이 웃으면서 내 손을 만지고 있었다.
“네 손도 이쁘네......”
나도 그녀의 손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굴을 쳐다 보았다. 마치 오랫동안 보아 온 사람처럼 낯설지 않았다.
그날, 딱 한 번 본 것 뿐이다. 그녀를 잠시 품었다고 하지만 전혀 기억이 없다.
오히려 50년이 지나서 서로 손을 만지면서 느끼는 감촉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0년을 같이 살다 죽은 아내의 손길은 이제 가고 없었다. 아내의 얼굴 조차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얼굴이 아내와 겹쳐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 때문에 대학을 가고, 데모를 하다가 제대를 하고 일본에 유학을 갔고,
이 모든 것이 그녀 때문인 듯 했다.
나처럼 아내도 역시 그녀 덕분에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세월의 절차만큼 그 시작점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내가 나를 떠난 것조차, 그녀 때문일거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던 것일까.
30년을 의지해 온 아내는 나를 지탱해 주었던 분신이었다면, 그녀는 나에게 어떤 존재였던가.
그녀를 품에 안았던 기억은 사라지고 없다. 그녀의 향기와 몸짓조차도 없다.
오로지 그 말 한마디였다.
“동생 대학 보내기 위해......”
요양원을 나올 때 만났던, 대게 배를 탔던 김씨와의 약속이 생각났다.
“어떻게 왔어?”
“어머니 만나러 왔어요.”
김씨의 말에 문득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 어머니가 누군데?”
“절 못 알아봐요. 치매라서.......”
“그래?”
그 얘기를 듣자마자 부리나케 김씨와 약속을 잡았다.
김씨는 묵호항 어부들 중에 어린 편이었다. 나이 사십 초반에 선원을 하는 한국인들은 없었다.
외국인 선원들 틈에서 김씨는 특별한 존재였다.
성실하고 착한 젊은이였다.
일출 식당에서 김씨와 마주 앉았다.
“어머니는 좀 어때?”
“치매가 희망이 없잖아요. 돌아가실 날만 기다리는거죠. 형님은 요양병원에 왜 오셨어요?”
“아는 사람이 있어서......”
김씨에게 그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김씨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참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김씨에게 어머니를 물어 본다는 것은, 무책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김씨와 꽤 오랫동안 술을 마신 것 같았다.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술을 마신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전화부터 확인을 했다.
통화 목록을 눌러 보았다.
‘김성열’ 이라고 분명하게 박혀 있었다.
김씨의 이름이 나와 같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김씨의 어머니와 그녀가 같은 병원에 있다는 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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