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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거짓을 이긴다: 양천고 교장 1인 시위 10년
▲이계성 반국가교육척결
국민연합 공동대표,양천고 교장
40년간 교직에 몸담고 있을 때는 학교와 집을 오가는 것이
내 일과의 전부였다.
내가 교직을 시작한 1965년에는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이 67달러로,
아침을 굶고 학교에 오는 학생도 있었다.
어렵게 공부한 나는 교단에 설 때 제자들에게
배고픔만은 면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 배고픔을 면하려면 열심히 공부하라’고
가르쳤다.
제자들 가운데는 독일에 광부로 가서 1000m 지하에서
피땀 흘려 일하고,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시신을 닦으며
외화를 벌어들인 학생도 있었다.
베트남 전쟁 파병으로 피 흘려 외화를 벌고,
열사의 땅 리비아의 사막에서 피땀으로
외화를 벌어들인 경우도 있었다.
이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로 경제 건설을 하여
한강을 기적을 이뤄 냈다.
그런데 이런 경제 건설 덕분에 배고픔을 잊은
486세대들이 민주라는 이름을 팔아 대학에서 전대협,
한총련이란 이적(利敵)단체를 만들어 북한 독재집단의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남남(南南) 갈등을 조장했다.
1999년 김대중 정권에서 합법화된 전교조가
친북·반미·반정부·이적 교육을 일삼으면서
학생들이 학교에서 잠을 자고 학원에서 공부하는
공교육 붕괴 현상이 나타났다.
전교조 교사들이 제자들에게 취업하면 민노총에
들어가 기업을 타도하고, 대학에 진학하면 한총련에
들어가 정부를 타도하라고 가르칠 때,
나는 선배들이 이룩한 산업화의 기적을 가르치며
공부만이 살길이라는 교육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전교조와의 의견 충돌은 계속되었다.
전교조와 대립, 그리고 뛰어든 아스팔트
김대중 정권이 전교조를 합법화시키고,
파면·해임된 전교조 교사들을 민주투사란 이름으로
사면 복권시켜 학교로 발령을 냈다.
민주투사라는 이름으로 복직된 전교조 교사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교장은 밥이고 교감은 반찬’이라는
식으로 행동했다.
이때 전교조와 투쟁하다 쓰러지고
자살하는 교장, 교감이 속출했다.
이 시기에 교장, 교감을 한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3월 신학기 새로 부임한 전교조 교사들이
교감인 나한테 와서 책상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나는 7년짜리요”, “나는 5년짜리요” 했다.
나중에 교무부장에게 이 말의 뜻을 물으니,
교도소에 7년, 5년 동안 갔다 온 민주투사이니
알아서 하라는 협박이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불법으로 전교조 활동하다 파면·해임 되어
감옥에 갔다 온 교사를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민주투사로 둔갑시켜 연금까지 지급한 상황이
가져온 웃지 못할 일화였다.
고등학교에서는 진학지도가 가장 중요한 업무인데
전교조는 자율학습과 보충수업도 반대하면서 사사건건 교장,
교감의 발목을 잡았다.
학교에서 제대로 진학지도를 해주지 않으니
학부모들의 불만이 쏟아졌다.
결국 학부모와 전교조 사이에서 교장, 교감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전교조 교사들을 설득해 진학지도에 힘을 모아줄 것을
호소했으나 먹혀들지 않았고,
이런 갈등 때문에 교무실이 항상 소란했다.
하루는 교장이 교감인 나를 불러 “교육감도 교육부장관도
이기지 못하는 전교조를 당신이 무슨 재주로 이기겠다고 하느냐”며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내버려 두라”고 했다.
전교조가 학생들 생활 지도도 방관해서 교감인
내가 직접 나서서 금연 지도, 긴 머리 지도를 했다.
그러자 전교조 교사는 나에게 “당신이 생활지도 교사냐”고 대들었다.
이렇게 교감, 교장으로 전교조와 거친 언쟁이 오가는
투쟁을 하면서 학생 지도에
심혈을 쏟아오다 2004년 정년 퇴임을 했다.
이때 퇴임 교장 10여 명이 모여 전교조 퇴출을 목적으로
‘올바른교육시민연합’을 조직하고 ‘레드 아웃’이라는
카페를 만들어 전교조의 문제점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교조는 이를 트집 잡아 우리를 고발했다.
전교조가 계속 고발을 해오자 같이 활동하던 동료 교장들이
모두 떠나고 1년 만에 2명만 남았다.
우리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라 판단해 24개 교육 관련
시민단체와 연합해서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을 결성했다.
그러나 연합체로 행사만 할 뿐 전교조와의
실전에는 몇 사람만이 참여했다.
‘올바른교육시민연합’ 결성해 전교조와 투쟁 시작
우리는 먼저 전교조의 참교육이 그들 주장대로
‘참다운 인성교육’, ‘부정부패 없애는 교육’,
‘촌지 없애는 교육’, ‘창의성 교육’이 아니라,
실제로는 ‘민족 교육’(대한민국은 미제 식민지다.
미국을 몰아내고 해방시키자)
‘민주 교육’(노동자·농민 수탈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제거하고
혁명을 통해 인민민주주의를 설립하자) ‘
인간화 교육’(인민민주주의 설립, 민중에 의한 연방제 통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매일 오전 7시 등교 시간에 맞춰 학교 교문 앞에서
‘전교조 참교육은 민중혁명 교육이다’라는
현수막을 걸어 놓고, ‘민족 교육은 미군철수 교육’
‘민주 교육은 민중혁명 교육’ ‘인간화 교육은 연방제통일 교육’이라고
쓴 피켓을 들고 300여 개 학교를 돌아다니며
1인 시위를 하면서 참교육의 허구성을 알렸다.
1인 시위 하는 동안 욕설과 폭력 등 말할 수 없는 수모도 많이 당했다.
하지만 전국 1만여 개 학교를 대상으로
전교조 참교육의 허위 사실을 알리는 데에 1위 시위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교육의 이슈와 진실’이라는
전교조 참교육의 진실을 알리는 팸플릿을 발행하여 돌리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팸플릿 요구가 쇄도했고, 독지가의 도움으로
200만 부를 발행하여 전국에 배포하여 전교조 참교육이
사실은 민중혁명 교육임을 알렸다.
이런 투쟁이 효과를 발휘해 결국 전교조가
참교육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희망교육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했다.
전교조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친북·반미·반정부 교육을 일삼으며 국가보안법을 수시로 위반했다.
그래서 2008년 10월 15일 전교조를 이적단체로
서울 중앙지검에 고발했다. 당시 특별 수사팀에 가서
고발인 조사를 받는데, 수사관이 이렇게 말했다.
“전교조는 전임자만 130명에 1년 200억 원의 예산으로
정부와 투쟁을 하고 있는데, 일개 시민단체에서
고발해 해결될 단체가 아니다. 무고죄로 전교조에
고소당하지 말고 고발 포기서를 내고 가세요.”
10년간 1000여 회 1인 시위
나는 화를 내면서 법대로 처리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 자료 가지고는 기소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1999년 전교조 합법화 이후 전교조가 발행한 자료를 구해서
1주일에 한 번씩 수사팀을 찾아가 자료를 보강했다.
이렇게 1년 동안 자료조사를 해서 수사관은 1만 페이지가
넘는 자료를 갖추게 됐고, 전교조 1대 위원장부터 9대 위원장까지
소환 조사를 한 후 기소 의견을 붙여 검찰에 넘겼다.
그러나 검찰은 1년, 2년이 지나도 기소하지 않았다.
담당 검사에게 항의하니 자기 힘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검찰총장에게 탄원서를 내라고 했다.
그래서 검찰총장에게 탄원서를 냈으나 담당 검사에
지시했다는 답변이 돌아올 뿐 기소는 이뤄지지 않았다.
보수정부를 가장한 이명박 정부가 전교조 앞잡이
노릇을 하며 수사를 보류시켰던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벽에 부딪혀 전교조 이적단체 고발이 무산되었다.
마침 그때 공무원 노조가 비합법 노조 통보를 받았다.
그 사유를 알아보니 파면·해임 된 공무원을 조합원으로
인정한다는 규약이 공무원 노조법에 위반되어
행정자치부 장관 요구로 노동부 장관이 법외노조 통보를 했다.
전교조 규약을 살펴보니 제9조 1항(조합원이 조합 활동을 하거나,
조합의 의결기관이 결의한 사항을 준수하다 신분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입은 때에는 규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조합원 신분을 보장하고 조합원 또는 그의 가족을 구제한다)
규정이 교원노조법 제2조(현직교사만 조합원이 될 수 있다 규정)를
위반했기 때문에 규약을 개정하지 않으면 법외노조 통보를 해야 했다.
그래서 이주호 교육부 장관에게 행정자치부 장관처럼
노동부에 법외노조 통보를 요구하도록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노동부 앞에 가서 현수막을 걸고
2개월 가까이 1인 시위를 하면서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를 촉구했으나
역시 답이 없었다.
박재완 노동부 장관을 만나게 되어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를 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법외노조 통보에 따른 향후 전교조와의 소송에서
승소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전공노(전국공무원노조)는 행정자치부 장관 요구에
곧바로 법외노조 통보를 했으면서 전교조에 법외노조
통보를 하지 않는 것은 형평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는 “경제도 어렵고 사회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를 통해 불필요한
문제를 야기할 필요가 있겠느냐”고까지 했다.
결국 우리는 박재완 노동부 장관을 직무유기로 고발했다.
그의 후임으로 온 이재필 노동부 장관도 법외노조
통보의지가 없어 직무유기로 고발했다.
다행히 박근혜 정부에서 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통보가 이뤄졌다.
이후 2015년 5월 28일 헌법재판소의 합헌 판결, 효
력정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2015년 6월 3일
대법원의 원심 파기 등의 재판 결과가 이어졌다.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는 2심 확정 판결만 남겨 놓고 있으나,
이미 대법원 판결이 나왔기 때문에 법외노조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한 1심대로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전교조와 싸우는 데 지원 세력은 없었다.
재력도 없고 참여자도 적으니 할 수 있는 활동이라곤 1인 시위,
팸플릿 돌리기, 기자회견, 고발이 전부였다. 지
금까지 직무유기 등으로 장·차관, 국장, 국회의원,
시장, 자치단체장 등 70여 명을 고발해 많은 사람이 기소됐다.
전교조의 경우 7년간 545명을 고발했는데,
대부분 기소되어 벌금형을 받았다.
그 동안 전교조 참교육이 민중혁명 교육임을 알리기
위해 학교와 전교조 본부 앞에서 1인 시위 500여 회,
좌파 서울·경기교육감 퇴출 1인 시위 100여 회,
전교조 봐주기 판결을 규탄하는 법원 검찰청
앞 1인 시위 200여 회, 국회, 새누리당, 새정치민주연합 등에서
1인 시위 200여 회를 실시했다.
지난 10년 동안 1000회
가까운 1인 시위를 했으니 거의 아스팔트 위해서 생활한 셈이 된다.
그래서 1인 시위 1인자 소리를 듣게 되었다.
1인 시위가 쉬운 것 같지만 폭력 위협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추위와 더위를 이겨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겨울 강추위 속에서 1인 시위 1분은 10시간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의 투쟁
나는 천주교회를 다니는데, 일요일 교회에 다녀오면 기분이 상했다.
신부님이 성경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친북·반미·반국가 정치 선전 강론을 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안 나가면 죄를 짓는 것 같고, 나가면 또 듣기
싫은 편파적인 정치 강론을 듣고 와야 했다.
세례를 받기 위한 교리 공부에서 신부님은
하느님 명령의 전달자이니 순명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신부님에 항의도 못하고 가슴앓이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2011년 25명의 정치 신부가 정진석
추기경의 용퇴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항명이었다. 그
래서 박홍 신부님을 찾아가 이런 일을 보고 가만히 계시느냐고
항의를 했더니 “이런 일은 신자들이 나서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정의구현사제단의 대부 함세웅 신부가
근무하는 청구동 성당에 가서 ‘정치 신부 함세웅 사제복 벗으라’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시작했다.
함 신부 패거리들이 나와 폭력을 행사해서 경찰을
불러 놓고 1주일 동안 1인 시위를 강행했다.
이를 계기로 뜻있는 신자들이 모여 2013년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을 만들었다.
첫 사업으로 ‘어쩌다 어린양들이 사제들을 걱정하는
교회가 되었습니까?’라는 광고를 내자 전국 각지는
물론 외국 여러 나라에서 교포들이 격려와 성금을 보내 줬다.
540만 명 신자 중에 정의구현사제단 같은 정치
신부들이 싫지만 조용히 있던 420만 명 신자들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광고가 나간 뒤에 정의구현사제단의 친북·반미·
반정부 정치 행위를 고발하는 팸플릿을 만들어
전국 13개 주교좌성당을 돌며 1인 시위와 팸플릿 돌리기를 했다.
전국에 30만 부의 팸플릿이 배부되자 전국 13개 시도
지부와 외국 지부 2곳이 결성됐다.
그러나 정의구현사제단과 정의평화위원회 거리시국미사는 계속됐다.
이들은 ‘해군기지 반대’, ‘밀양 송전탑 반대’,
‘국정해체 대통령 퇴진’ 거리 시국 미사를 계속했다.
세월호 참사를 이용한 촛불 선동, 쌍용자동차 해고근로자
선동 등의 시국미사도 이어졌다. 결국 선망의 대상이던
천주교는 일부 좌익 신부들로 인해 ‘빨갱이 종교’라는
오명까지 쓰게 됐다.
창피하고 부끄러워 교회에 나갈 수 없다며
냉담해진 신자들도 계속 늘었다.
그래서 2015년 ‘친북반미반국가정치사제 100인 명단’을
만들어 각 시도 지부에 배부하고 명단에 있는
신부의 성당에는 가지 말고 헌금도 내지 말자는 운동을 벌였다.
그러자 그 성당들의 신자수와 헌금액이 반 토막이 났다.
이렇게 되자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치
신부들도 신자들에게 찍히면 교회 문을 닫는다는
걱정에 거리의 시국미사를 중단했다.
지금은 많은 신자들의 기도와 성원 속에서
정치 사제들이 사라지고 교회가 하느님 성전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우파 운동, 특히 아스팔트의 1인 시위는 처음 교육을
바로 세워 제자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러다 전교조의 만행에 분통이 터져 아스팔트 위에서 10년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이 죄 값을 치르도록 하면서 보람과 성취감도 느꼈다.
좌파 세력과 싸우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6만 명 조합원에 1년 200억 원의 자금력과 130명
전임자들이 있는 전교조와 싸워서 법외노조 통보까지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신념과 용기 때문이었다.
정의는 거짓을 이긴다는 신념이 용기를 줬다.
아스팔트 위 10년 동안 얻은 교훈
좌파 세력들에게 예의를 갖춰 대우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명예훼손이 안 되는 범위에서 막말을 구사하는 것이
효과적일 때도 있다.
그리고 반드시 사진 기사를 대동해서 사진을 찍어야
이들의 오리발 내미는 버릇을 막을 수 있고 고발자료로 쓸 수도 있다.
그리고 위태로울 때는
반드시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 보호를 받아야 한다.
처음에 전교조에 계속 고발만 당하다,
반대로 우리가 고발을 하자 더 이상 우리를 건드리지 않았다.
시민운동은 대규모 집회도 필요하지만,
몇 사람이 좌파 세력의 허점과 비리를 파고들어
공격하면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
전교조 척결과 정의구현사제단 척결에서 얻은 교훈이다.
전교조나 정의구현사제단 같은 세력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민을 속이고 상대방을 매도하여
자기들 이권을 챙기는 집단이다.
이들의 허점과 비리를 찾아 법적으로 고립시켜가는
방법이 가장 유효한 방법이다.
아스팔트에서 10년간 투쟁하다 보니 내 심성마저
거칠어지는 것이 하나의 문제점이다.
이제 추우나 더우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스팔트 위가
내 생활무대가 되었다.
하루라도 집에 있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다.
교육을 바로잡고 천주교회를 바로잡자고 시작한 일인데,
이것이 국가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또 노년을 보람 있게 보내는 방편도 됐다.
시작은 작게 했지만 정의는 이긴다는 신념과
용기가 큰일을 이뤄 낼 수 있었다.
보수단체는 좌익단체처럼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고 지원세력도 없다.
활동가들은 거의 노년층이고 젊은 활동가들이 매우 적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언론에서 보도해 주는 일도 없고
금전적인 지원도 거의 받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힘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애국시민단체가 계속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제 구실을 못하고 유명무실하게 지내다 이름조차 사라지게 된다.
보수 애국단체들도 조직체계를 만들고 젊은이들을
훈련시켜 활성화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활동비 지원 체계도 만들어야 활동이 원활할 수 있다.
조직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활동가를 양성하기
위해 부유한 보수 인사들이 힘을 보태야 좌익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순수 애국세력을 양성할 수 있다.
출처: 미래한국
쌍문동산소망교회
첫댓글 진정한 애국자이십니다.
우리나라에 이런분이 계시니
맘이 든든합니다 이 나라가
있는것도 이분 덕분 일수도
있습니다 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네요.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지켜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