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이에스더
동백꽃이 지고 있다. 툭, 꽃이 땅에 닿는 순간 미세한 진동이 안에서 일었다. 그냥 지나치기엔 뭔가 여운이 남는 떨림이었다. 그 까닭이 궁금했다. 마침내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서성이고 있는 오빠를 찾았다.내 기억 어디쯤에 오빠로 있었다가 점점 사라져가는, 동백꽃처럼 허망하게 져버린 사람이었다. 아주 오래 전 가족이라는 가지에서 떨어져버린 오빠의 얼굴이 슬프도록 고운 동백의 꽃잎 위에 겹쳐진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 부모님은 딸 넷을 내리 낳은 후에야 오빠를 얻었다. 금쪽같은 아들 덕에 아버지의 어깨가 활짝 펴지자 온 집안이 날마다 잔칫집 분위기였다. 천재가 났다고 동네를 떠들썩하게 하던 오빠였다. 그러던 오빠가 언제부터인지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다. 빨리 핀 꽃은 빨리 시든다는 말을 내가 이해하게 되었을 즈음 오빠는 이미 학교를 다니지 못할 만큼 약해져 있었다.
매일 새벽기도회에 다녀온 엄마의 눈가는 언제나 붉게 젖어 있었다. 어디고 용한 의원이 있다 하면 아버지는 주저 없이 그를 찾아 나섰다. 한약재를 연구하여 직접 환약을 만들어 오빠에게 먹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하루는 신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도축장을 향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소의 어느 부위를 손수 곱게 다져서 오빠에게 먹인 후에야 아버지는 일터로 향했다. 오빠의 삶에도 새벽이 오리라고 굳게 믿은 아버지는 온 몸에 묻어나는 짙은 어둠을 날마다 자전거 바퀴로 힘껏 밀어내고 있었다. 많은 것이 허물어져가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마치 가시고기 같았다.
모든 게 오빠 탓이라 여겼다. 식구들의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한 것도, 여유롭던 집안 분위기가 점점 움츠러드는 것도 오빠 때문인 것 같았다. 사춘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오빠를 내 삶의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병들어 불쌍한 피붙이였던 오빠가 점점 귀찮고 성가신 존재로 변해가고 있었다. 엄마가 없을 때면 오빠가 대소변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뒤처리하는 일이 내 몫이 되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이 어서 끝나기만 기다렸다.
그날은 여느 때와 달리 대문이 잠겨 있었다. 아무래도 집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집안에는 누워 있는 오빠뿐, 열쇠를 가진 누군가 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도 나는 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빠가 움직일 힘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분노와 오기 같은 게 치밀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라고, 제발 걸어 나와서 답답하고 절망스러운 우리 집 대문을 활짝 열어달라고, 부르짖듯 대문을 계속 두드렸다.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긴 골목을 넘어 큰길까지 퍼져 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찰카닥 찰카닥, 힘겹게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오빠가 문을 열고 있었다. 어떻게 오빠가 대문까지 나올 수 있었는지 지금도 상상할 수 없지만, 오빠는 잠겨 있던 대문을 열어주었다. 오빠가 방에서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그날 일을 말할 수 없었다. 담에 몸을 기대어 두 팔로 담을 붙들고 겨우 서 있던 오빠의 옆모습만 지금까지 내 안에 침묵으로 새겨져 있다.
어느 밤, 흐느끼는 소리에 눈을 떴다. 고통스러웠던 육신의 옷을 벗은 오빠 앞에서 엄마의 가슴이 미어지는 소리였다. 막상 현실이 된 오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날의 원망과 분노가 자책과 후회로 변하면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모질게도 이어지던 이생의 호흡이 멎은 오빠는 오히려 잠자는 듯 평온해 보였다. 손을 내밀어 얼굴과 손을 만져보았다. 이미 오빠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느 누구의 뜨거운 눈물로도 싸늘하게 식은 오빠의 몸을 데울 수 없었다.
미국 이민 시기가 정해지자, 아버지는 맨 먼저 오빠의 묘부터 정리하셨다. 자식이 누워 있는 자리를 차마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수 없어서였던 것 같다. 새벽녘에 집을 나선 아버지는 혼자서 그 일을 갈무리하고 별이 총총한 밤에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이 땅에서 오빠의 흔적을 그렇게 지우셨다.
오빠를 보낸 부모님의 그때 나이를 지난 지 이미 오래다. 가슴에 자식을 묻은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나는 마른 동백꽃을 보며 오빠를 생각할 따름이다. 하얀 눈 속에서선연하게 피어나 가슴 설레게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쩌면 이리도 빨리 말라버렸을까. 가지에서 떨어져 돌 틈에 막 내려앉았을 때만 해도 갓 피어난 것처럼 고왔는데 오늘은 마른 뼈 같은 모습으로 마지막을 고하고 있다.
흩어진 동백꽃을 모아 나무 곁에 묻고 흙을 덮었다. 부끄럽고 아픈 기억과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을 이젠 꽃과 함께 묻어도 될까. 동백꽃을 거두는 손이 가늘게 떨린다. 그날 밤 오빠 얼굴을 만지던 감촉을 기억하는 것처럼. 동백꽃은 땅에서 지는 꽃이 아니라 가슴에서 지는 꽃인 것 같다.
시애틀 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