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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 생활 입문(Introduction à la vie dévote)[제3부 수덕(修德)] 제38장 결혼한 이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결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에페 5,31-33)
혼인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면에서 신성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신성하다고 한 것은 기혼자이건 미혼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부유한 사람이건 누구나 겸손한 마음으로 혼인을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고, 모든 면에서 신성하다는 것은 그 기원과 목적, 형식과 방법이 모두 신성하다는 뜻입니다. 혼인은 하느님 나라를 성인들로 채우고자 지상에서 신자들을 양성하고 있는 성교회의 양성소입니다. 또한 혼인은 한 나라를 번성하게 하는 모든 강의 원천과 같은 것이므로 이를 올바르게 보전하여 더럽히지 않는 것이 국가로서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신약 시대의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처럼 오늘날의 모든 혼인 잔치에도 성자 그리스도께서 초대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격려와 축복의 술이 그 집에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혼인의 축복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은 주님 대신에 아도니스를, 성모님 대신에 비너스 여신을 혼인에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처럼 무늬가 있는 염소와 양을 낳게 하고 싶으면 그를 본받아 미리 싱싱한 나뭇가지들을 꺾어 껍질을 벗겨 놓아야 합니다(창세 30,37 이하 참조). 행복한 결혼 생활을 바라는 사람은 혼인 성사의 신성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실제 혼인 잔치에서는 오락과 잔치와 대화 중에 무수한 추태들이 벌어지고 있으니 혼인 문화가 문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먼저 부부간의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겠습니다. 이것은 이미 성경에서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 남편들이여, 아내들이여, ‘자연적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권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연적인 사랑은 산비둘기도 합니다. ‘사람의 심정에서 나온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이교 신자들도 그렇게 사랑합니다.”
나는 바오로 사도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4-25) “오, 남편과 아내들이여, 하와를 아담에게 데려다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혼인을 통해 그대들로 하여금 신성한 인연을 맺게 해 주시고 남편과 아내로 정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럼에도 왜 그대들은 지극히 신성하고 오묘한 사랑을 서로 나누지 않습니까?”
혼인의 첫째 효과는 부부간의 마음의 일치입니다. 노송나무 두 쪽을 접착력이 강한 아교로 붙이면 매우 견고해져 그것을 억지로 떼어 내려고 하면 접착된 곳이 아닌 다른 곳이 쪼개지고 맙니다. 하느님께서 두 사람을 한 몸과 한마음으로 맺어 주셨기에 두 사람의 영혼과 육체는 굳게 접착되었으므로 이를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부부는 단지 육체적인 결합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영혼과 마음도 사랑으로 일치되도록 해야 합니다. 혼인의 둘째 효과는 부부간의 변함없는 믿음입니다. 예전에는 반지에 가문의 문장이나 이름을 새겼습니다. 혼인 예식의 참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제는 반지를 축복한 뒤 신랑에게 건넵니다. 이 반지에는 그가 아내로 맞아들일 여자가 살아 있는 동안은 다른 여자의 이름이나 사랑을 그의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혼인 성사를 통해 서약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신랑이 신부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는 것은 신랑이 살아 있는 한 신부가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혼인의 셋째 효과는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일입니다.
“남편과 아내들이여, 하느님께서 영원히 당신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영혼들의 수를 늘리시고자 당신의 협력자로 그대들을 선택하셨으니 이 영광을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대들에게서 태어나는 아기의 몸 안에 하늘의 찬란한 이슬방울인 새롭고 싱싱한 영혼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새 생명을 창조하십니다.” “남편들이여, 그대들은 아내를 따뜻하고 온화하게 대하며 아내에게 믿음 있는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남자로부터 다정한 사랑을 한껏 받게 하시려고 남자의 심장에서 가까운 부위에 있는 갈비뼈로 최초의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대들의 아내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대들보다 미약하다 하여 멸시하지 말고 사랑으로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신 목적은 그대들이 여자를 반려자로 삼아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의지할 수 있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그대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그대들의 남편을 극진한 정성과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대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남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속한 몸임을 나타내고자 창세기에서는 여자를 남자의 뼈에서 나온 뼈이며, 살에서 나온 살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창세 2,23 참조). 하느님께서 하와를 아담의 팔 아래 있는 갈비뼈로 만드심으로써 여자로 하여금 남자의 보호와 지휘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지시하신 것입니다. 아내는 사랑과 존경으로 남편에게 순명하고 남편 역시 똑같은 사랑과 존경으로 아내를 보호하고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남편들도 자기보다 연약한 여성인 아내를 존중하면서, 이해심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아내도 생명의 은총을 함께 상속받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1베드 3,7)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그대들은 서로 사랑의 짐을 지고 성장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랑이 질투로 변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십시오. 잘 익어 맛이 좋은 사과에 벌레가 잘 꼬이듯이, 부부간의 사랑이 열렬할수록 질투가 파고들기 쉬워서 반목과 불화와 다툼이 잦아지고 끝내는 사랑이 부패되기에 이릅니다. 진정한 덕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진 사랑에는 절대로 질투심이 파고들지 못합니다. 질투는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사랑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불신과 부정이 개입되기 쉽습니다. 불완전하고 안정감이 없으며, 신뢰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질투로 사랑을 드러내려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질투가 사랑의 외적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표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의 순수성과 품성을 잴 수 있는 척도는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믿는 데서 생기는 반면에 질투는 그 사람을 불신하는 데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남편들이여, 그대들의 아내가 충실하고 정직하기를 바란다면 아내들에게 모범을 보이십시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대들이 부정한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아내의 정숙함을 바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이 줄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아내에게서 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의 아내가 정숙한 여자이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을 모르는 이교인들처럼 색욕으로 아내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1테살 4,5)라고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대들 자신이 먼저 아내에 대한 정조를 지켜야 합니다. 만일 그대들이 먼저 아내에게 거짓말로 나쁜 표양을 보이면, 아내가 정조를 지키지 않아 그대에게 치욕을 안겨 준다 해도 아무 할 말이 없게 될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그대들이 아내로서의 명예를 지키려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정조를 지켜야 합니다. 전심전력을 다해 자신의 명예를 보존하고 순결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순결을 더럽힐 위험이 있는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경계를 늦추지 마십시오. 그대들을 미혹하는 감언이설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대의 미모나 자태를 칭찬하는 남자가 있으면 한층 더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물건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물건을 훔치고 싶은 유혹이 생기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대의 편을 들면서 그대의 남편을 헐뜯는다면, 이는 그대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분명히 그대를 파멸과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할 자입니다. 장사할 때 첫 손님과의 거래를 그르치면 두 번째 손님과의 거래도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인들은 여러 알로 된 진주 귀걸이를 선호하는데, 프리누수의 말에 따르면, 진주알이 부딪칠 때 나는 달그락 소리에 여인들이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귀걸이에 대해 달리 생각하고 싶습니다. 내 생각에는 귀걸이에 남편이 아내에게 기대하는 것을 귀로 듣고 아내가 이를 충실히 지켜야 함을 일깨워 주는 의미가 감추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곧 아내는 복음에 나오는 동양의 진주처럼 정결하고 순결한 말씀 외에 어떠한 잡음에도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몸을 중독시키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고 마음을 해롭게 하는 것은 귀로 들어간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사랑과 믿음이 함께할 때에는 두 사람 사이에 친교와 신뢰가 싹틉니다. 우리는 성인들의 결혼 생활에서 이러한 친교와 신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애정은 두터우면서도 정숙했으며, 감미로우면서도 진실했습니다. 이사악과 레베카는 구약 시대의 가장 정숙한 부부였습니다. 그럼에도 아비멜렉이 두 사람이 애무하는 것을 창문을 통해 보고 그들이 부부라는 사실을 알아챘을 만큼 그들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위대한 루도비코 성인 임금은 매우 엄격했지만, 왕비에게는 참으로 다정하고 상냥하여 다른 사람들이 이를 흉볼 정도였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대담하고 용감무쌍한 임금이 부부애를 두텁게 하려고 왕비에게 세심하고 다정다감하게 대했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고 감탄스럽습니다. 순결한 사랑 표현은 마음과 마음을 연결시켜 사랑을 더욱더 깊고 기쁨에 넘치게 합니다. 모니카 성녀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잉태했을 때 성교회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를 여러 번 주님께 봉헌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나는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이미 하느님의 소금을 맛보았다.”라고 이를 증언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은 신앙인들이 본받을 만한 좋은 표양입니다. 겸손하고 착한 사람들의 봉헌을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하느님께서는 신심 깊은 어머니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언제나 도와주십니다. 구약 시대의 사무엘 예언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 피에졸레의 주교 성 안드레아의 어머니들은 자기 자식을 하느님께 봉헌한 모범을 보여 준 분들입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의 어머니도 자녀들에게 매우 훌륭한 어머니였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예수 그리스도께 봉헌한 다음, 그 아이를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신성한 선물로 생각했고 끔찍하게 사랑하고 보살폈습니다. 그 결과 일곱 자녀 모두 성덕이 출중한 사람이 되어 어머니의 수고를 한층 더 빛나게 했습니다. 자식이 세상에 태어난 뒤 자기 이성으로 활동할 나이가 되면, 부모는 자식의 마음에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공경을 새겨 주고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신앙심이 고결한 블랑쉬 왕후는 지극한 정성으로 아들 루도비코 성인 임금을 기르면서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단 한 번이라도 주님의 마음을 거슬러 대죄를 범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네가 내 앞에서 죽는 것을 보는 것이 더 낫다.”라고 자주 말했습니다. 이 말은 루도비코 성인 임금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그는 일생 동안 한시도 어머니의 거룩한 가르침을 잊지 않았으며, 이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임금이 직접 밝힌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를 낳는 것을 ‘혈통을 잇는 일’이라고 하고, 히브리 사람들은 ‘가문을 이룬다’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집트의 산파들이 하느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들의 집안을 일으켜 주셨다고 했습니다(탈출 1,21 참조). 이 말에는 훌륭한 가문을 이루려면 세속적 재화를 쌓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자손들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덕을 기르도록 가르치는 데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영광의 화관입니다. 모니카 성녀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악습을 고쳐 주고 그를 회개시키고자 바다건 육지건 아들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지극한 정성과 안내로 설득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회개시킨 그녀의 노고는 그를 출산할 때의 산고보다 훨씬 더 값지며, 모든 사람들이 이를 우러러보고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집안을 보살피고 대소사를 꾸리는 일은 아내의 본분이라고 말했습니다. 남편보다 아내의 신앙심이 경건해야 그 가정이 한층 더 화목하고 사랑과 행복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남편은 가족 부양을 위해 밖에서 일해야 하고 식구들과 함께하는 기회가 적기 때문에 자식에 대한 올바른 교육에 전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솔로몬 임금은 한 가정의 행복은 ‘훌륭한 아내’의 부지런함에 달렸다고 강조했습니다(잠언 31장 참조). 이사악은 자기 아내 레베카가 수태하지 못하자, 그녀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창세 25,21 참조). 히브리인의 전통에는 남편이 아내와 함께 성전에서 기도드리면 하느님께서 남편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서로 격려하며 열렬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경건한 부부의 일치보다 더 귀하고 유익한 일치는 없습니다. 과일 중에는 모과처럼 설탕에다 재어 놓지 않으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떫은 것이 있고, 앵두나 살구같이 설탕에 담가 두어야만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연하고 상하기 쉬운 것도 있습니다. 이처럼 아내들도 남편이 신심 생활을 잘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심이 없는 남편은 성격이 포악하고 모가 나기 쉽습니다. 남편 역시 아내가 경건하기를 바라는 이유는 아내가 경건하지 않으면 나약하고 덕이 없는 아내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신자 아닌 남편은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졌고, 신자 아닌 아내는 그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기 때문입니다.”(1코린 7,14) 하고 말씀하신 이유는, 혼인이라는 남녀 간의 유대 관계로 한편이 쉽게 다른 한편을 감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함께 독실한 신앙심으로 주님을 경외하고 덕을 쌓아 가는 것은 하느님의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의 선물입니다. 부부는 매사에 서로 도와야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분노하거나 반목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요란한 곳에는 꿀벌이 집을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도 싸움이나 말다툼이 그치지 않는 집에는 거처하시지 않습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의 말에 따르면, 부부의 결혼기념일에는 축하연을 베푸는 것이 그 당시의 관습이었다고 합니다. 그 관습을 부활시키는 것은 나도 찬성하지만, 그것이 너무 세속적이고 감각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부부는 결혼기념일에 고해 성사와 영성체를 하고, 특별히 그들의 결혼 생활을 하느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또한 사랑과 신뢰를 키움으로써 서로의 행복을 위해 결심한 것들을 새롭게 다지고,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랑의 짐을 견디기에 필요한 은총을 주시기를 주님께 간청하십시오.
제40장 과부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의지할 데 없이 홀로된 과부들을 돌보아 주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1티모 5,3 이하 참조). 과부가 정절을 지키는 데에는 다음 사항이 필요합니다. 첫째,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정절을 지키려는 결심을 항구하게 보존하려면 자신의 몸과 마음의 정절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서원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원은 하느님을 더욱더 기쁘게 해 드리고, 동시에 하느님께서 이를 준수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서원은 자기 결심을 파괴하려는 온갖 유혹을 차단하는 마음의 견고한 울타리가 됩니다. 만일 서원을 한 뒤에 정절을 지키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 되므로 서원을 어기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서원을 과부들에게 적극 장려했습니다. 신학자 오리게네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내가 남편이 죽은 뒤에 재혼하지 않겠다고 하느님께 미리 서약해 두면, 결혼 생활 중에도 정덕을 통해 공로를 쌓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서원은 덕행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의지 자체를 하느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정덕은 관능을 절제하는 것이지만, 정결 서원은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앞에서 말한 두 성인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이 가르침에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에게 그런 용기가 있는지 살펴보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며, 영적 지도 사제에게 조언을 구해야 합니다. 둘째, 재혼하지 않고 정절을 지키겠다는 결심은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사랑을 하느님께 바치고 그 마음을 모두 주님의 성심에 일치시키려는 것이어야 합니다. 셋째, 정절을 지키려면 세속에 대한 욕심과 향락을 자발적으로 버려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욕심대로 사는 과부는 살아 있어도 죽은 몸입니다.”(1티모 5,6) 하고 말했습니다. 정절을 지키겠다고 결심하고도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기를 바라거나 무도회나 극장 등에서 자기 모습을 돋보이게 하고자 화장에 각별히 신경 쓰고 향수를 뿌린다면, 그 정절은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아도니스처럼 잘생긴 남자와 문란한 사랑을 꿈꾸며 침실을 포근하고 하얀 새털로 꾸미는 사람이 얼굴을 검은 망사로 가린다 한들, 그것은 흰빛을 돋보이게 하려는 허영에 불과합니다. 올바른 신심 생활을 하려면 세속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합니다. 아가서에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아가 2,12)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짝을 잃은 멧비둘기처럼, 남편 상을 끝낸 과부에게는 한층 더 굳건한 신심이 필요합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마을 아낙네들이 “저 사람 나오미 아니야?” 하고 소리치자, 나오미는 “나를 나오미(나오미는 상냥하고 아름답다는 뜻)라 부르지 말고 ‘마라’(한 맺힌 여자라는 뜻)라고 부르셔요.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너무 쓰라리게 하신 까닭이랍니다.” 하고 말했습니다(룻 1,19-20 참조). 그녀가 이렇게 대답한 것은 남편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상냥하다거나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고, 다만 거룩하신 하느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자신은 하느님 앞에 비천한 존재로 남아 있기만을 바랐습니다. 향기로운 기름이 든 등잔에서 불을 끈 뒤에 향기가 더 풍겨 나오듯이,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을 했던 여인에게서는 남편이 죽은 다음에 더욱더 향긋한 정덕의 향기가 흘러나옵니다. 과부에게는 자녀들의 영혼을 보살피고 그들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돌보아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과부에게 자녀 교육의 의무가 있음을 서간에서 명백하게 밝혔습니다.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으면, 그들은 먼저 자기 가정에 헌신하고 어버이에게 보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1티모 5,4) “어떤 사람이 자기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그는 믿음을 저버린 자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쁩니다.”(1티모 5,8)
그러나 자녀들이 더 이상 돌보아 주지 않아도 될 만큼 성장했을 때에는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남편과 사별한 뒤 양심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재산에 대한 복잡한 소송 사건은 가급적 피해야 하고, 설령 자신에게 다소 불리하더라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분쟁을 통해 얻어지는 이득은 마음의 거룩한 평화에서 얻어지는 정신적인 이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보잘것없습니다. 홀로된 사람에게는 기도가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자석과 쇠붙이 사이에 금강석이 놓여 있을 때에는 자석을 갖다 대도 쇠붙이가 움직이지 않지만 금강석을 치우면 금방 자석에 들러붙듯이,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데 전념할 수 없었지만 남편이 죽은 뒤에는 천상 향기를 사모하여 “오! 주님, 저는 이제야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나이다.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저를 받아 주소서.”라고 말하며 하느님께로 달려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치 사랑의 기쁨에 젖은 아가서의 여인처럼 “나를 당신에게로 끌어 주셔요, 우리 달려가요.”(아가 1,4) 하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거룩한 생활을 하려는 과부에게 합당한 덕행은 완전한 겸손입니다. 명예와 지위와 존경을 받는 자리보다, 연회나 화려한 집회의 참석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에게 봉사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해 주며, 미혼의 젊은 여인들에게 신심을 가르치고 덕행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 바로 겸손을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깨끗하고 검소한 옷을 입고, 겸손하게 행동하고, 정직하고 친절하게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는 과부는 행복합니다. 거룩한 생활을 하는 과부는 이른 봄, 성교회의 화원에서 피어나는 제비꽃과도 같습니다. 그 경건한 향기는 비할 데 없이 감미롭고, 언제나 겸손하게 커다란 잎사귀 그늘에 그 자태를 숨기고 있으며, 차분하고 부드러운 빛은 고고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내 의견으로는 과부도 그대로 지내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1코린 7,40)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언급할 것이 더 있습니다. 자기 신분의 명예를 보존하고 싶은 과부는 예로니모 성인이 샐비어와 자신과 영적인 부녀 관계를 맺은 귀부인들에게 보낸 서간들을 읽어 보십시오. 예로니모 성인의 권고 말씀에는 덧붙여야 할 것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단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은 자신이 정절을 지킨다고 해서 재혼하는 과부들을 결코 비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이를 허용하실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겸손의 크기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는 옛사람들의 가르침을 한시도 잊지 마십시오.
제41장 미혼 여성들에게 결혼 생활을 염두에 두고 있는 미혼 여성들은 남편이 될 사람을 위해 자신의 첫사랑을 소중하게 보존해야 합니다. 애정 행각으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더럽혀지고 찢어진 마음을 그에게 주는 것은 커다란 배신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순결하고 영적인 수도 성소를 받아 그대들의 동정을 하느님께 바치려 한다면, 정결 자체이시며 그대들의 짝이 되어 주실 주님을 위해 그대들의 순결하고 순수한 사랑을 보존해야 합니다. 밭곡식의 첫 수확과 가축의 맏배는 하느님의 것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사랑의 첫 이삭이야말로 하느님께 속한 곳입니다. 그대들에게 필요한 권고 지침은 예로니모 성인의 서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심 생활 입문(Introduction à la vie dévote)에서 발췌- 2017년 4월 19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제1독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 무렵 1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3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5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사도행전 3,1-10)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루카 24,13-35) 오늘의 묵상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은 클레오파스입니다. 그와 그의 동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해 몇몇 여자가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빈 무덤을 발견한 이야기, 그들에게 천사들이 발현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또한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무덤으로 달려가 빈 무덤을 발견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반신반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서로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인지 토론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체념과 희망이 교차하였습니다. 그들은 길을 걸어가면서 낯선 사람으로 발현하신 예수님과 대화하며, 예수님의 부활이 성경에 예언된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그들은 예수님의 질책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어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았을 때, 그분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놀랐습니다. 여인들의 말이 모두 사실임을 깨닫고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를 열한 제자와 동료들에게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발현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나타나실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희의 눈을 열어 주시어 당신을 알아 뵙고 벅찬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십시오!’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2017년 4월 19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매일미사'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