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말아야 할 인물들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이 땅 위에서 살아온 이야기다.
단순히
인물의 이름과 사건의 연도를,
심지어
남긴 업적이나 작품 등을 외우는 게 아니다.
선조들이 내딛은 발자취의 흐름이나
고비마다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대한
서사(敍事)이다.
그래서
잘 정리된 역사는 '사건'이 아니라
'사연'을 담고 있다.
역사를 만나는 새로운 길이 있다.
EBS <역사채널e>는
길어야 5분 남짓 되는 짧은 시간에
역사 속의 사건과 인물,
또는
한 시대의 풍경이나 단면(斷面)을 가지고
시청자를 만난다.
짧고 간결한 설명,
그리고
내용을 뒷받침하는 영상 등을 통해
사건의 숨겨진 의미를 밝혀내고
그냥
지나쳤던 인물들을 재조명한다.
텔레비전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엔딩 신,
방송이 끝나도 그 여운은 오래간다.
5분 간의 내용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
- 연산군 -
이 책은
방송의 내용을 모아 편집한 두 번째 책이다.
방송을 보지 못했던 이들을 위해
해설과
참고자료를 추가해 알찬 내용이 되었다.
이미 방송을 본 이들에겐
알고 있는
내용을 환기시키는 효과를 지녔다.
텔레비전으로 접했던 짧은 영상과 글이
얼마나
세밀하게 조사와 연구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인지 느낄 수 있다.
그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이 책이 가진 하나의 장점은
기억해야 할 인물,
잊지 말아야 할 일들에 대한 제기(提起)이다.
역사 속의 모든 인물들은
그 시대의 오늘을 살다간 사람들이다.
지켜야 할 가족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아니 역사가 부를 때,
일신(一身)의 영달과 출세는 물론
가족의 안위와
자신의 생명까지 다 내버리고
오직
대의를 위해 그리고 나라를 위해
기꺼이
헌신한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다.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 박에스더의
본명은 김점동金點童이다.
그녀는
서울 정동에서 딸만 넷인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배재학당의 설립자인
선교사 아펜젤러의 일을 돕고 있었다.
그런 탓에
김정동의 집안은
서양 문물에 일찍 눈을 뜰 수 있었다.
현재 서울 정동에 위치한
이화여자고등학교 자리에
이화학당이 세워졌다.
설립자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이다.
남편과 사별한 뒤
의사인
외아들 윌리엄과 함께 한국에 왔다.
1886년,
교실과 기숙사를 갖춘
번듯한 학교를 세웠지만,
지원자가 한 명도 없었다.
양반집 딸들은
내외가 심해 접근도 어려웠고,
가난한 집에선 일손이 모자란다며
딸을 학교로 내놓지 않았다.
서양인이 학교를 채려
아이들을
유괴해간다는 괴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부모를 찾아 일일이 설득한 끝에
반년이 지나서 겨우 첫 학생이 입학했다.
김점동은
성경, 한글, 산수, 한문, 영어 등
새로운 학문을 배웠다.
총명한 탓에
타
학생들에 비해 학습능력이 탁월했다.
특히
영어는 발군이었다.
열두 살 때 세례를 받고
이름을 에스더로 개명했다.
이후
자신의 어학 실력을 발휘해
한국인과 서양 선교사 사이에서
통역 역할을 했다.
1890년부터 메리 스크랜턴의 추천으로
최초의
여성 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에서
통역과 간호 보조 일을 했다.
1887년 이화학당 구내에 설립시
명성황후가 지어준 병원 이름이다.
통역을 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한 사람을 만났다.
의료 선교 활동을 위해
미국에서 온 여의사 로제타 홀이었다.
속칭
'언청이'라 일컫는 구순구개열 어린이가
부모와 함께 병원에 진료차 들렀다.
로제타는
수술하면 고칠 수 있다고 했지만
그 부모는 반신반의했다.
당시 외과수술이란
듣지도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수술 후 아이가 붕대를 풀자
부모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 광경을 목격한 김에스더는
자신도 의술을 배워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겠다고 결심했다.
비록
신여성이었지만,
당시의 한국 풍습을 거스를 수 없었다.
집에서 그녀의 혼인을 서둘렀다.
이때 로제타는
선교사이자
의사인 남편 제임스 홀을 돕는
박유산이란 청년을 소개했다.
그녀의 부모들은
사윗감으로 못마땅해 했다.
신분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반대를 무릅쓰고 17살(1893년)의 나이로
박유산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한국인 최초로
교회에서 서양식 결혼식을 치렀다.
서양 풍습에 따라 박에스더로 개명했다.
-박에스더-
1895년,
두 사람은 로제타와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로제타의 남편이
발진티푸스에 걸려 평양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로제타가
귀국하면서 두 사람을 데리고 간 것이다.
뉴욕 리버티에 도착한 박에스더는
리버티 공립학교를 거쳐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
(현,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에 최연소 입학했다.
미국 생활에 필요한 경비는
두 사람이 해결해야만 했다.
고학으로
고생하는 박에스더를 딱하게 여긴
조선으로 다시 귀국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남편 박유산이 학업을 접고
아내의 공부 뒷바라지에 나섰다.
농장이나 식당에서 일하며 고생을 마다했다.
어느날,
박유산에게 당시 불치병인 폐결핵이 찾아오고
32살에 이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아내의 대학 졸업 3주를 남겨두고서였다.
1900년 10월
박에스더는 조선으로 귀국했다.
조선에 다시 돌아와 있던
로제타 홀과 함께 활동을 시작했다.
조선의 의료 환경은 열악햇다.
남녀유별이 심해
여성들은 병에 걸려도
치료 한 번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여의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따라서
박에스더의 일을 태산처럼 많았다.
귀국 후 열 달 동안
3천명의 여성을 돌보았다.
휴일이 없었다.
평양의
여성 전용병원인 광혜여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선
환자를 기다리지 않고
평안도와 황해도를 두루 다녔다.
산간벽지의 사람들은
양의사에 몸을 맡기는 대신
무당 푸닥거리를 택했다.
박에스더의 의료 활동은
미신과의 싸움이었다.
진룔를 받은 사람들은
그녀의 진심을 알아보았다.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귀신이 재주를 피운다'
박에스더는 매년
평균 5천 명이 넘는 환자들을 만났다.
진료 분만아니라
간호원 양성소에서 위생학 등을 강의하며
위생 관념을 가르쳤다.
이런 세월이 10년이나 흘럿다.
과로는 계속 누적되어 갔다.
사람의 몸은 철판이나 기계가 아니다.
결국 과로는
그녀에게 폐질환을 안겼다.
그녀의 남편이 그러했듯,
1910년
그녀는 폐결핵으로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34살이었다.
"그녀는 날마다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배우게 한다"
- 로제타 홀의 일기 중에서
◆독립운동가 김용환金龍煥,
노름으로 탕진한 줄만 알았던 재산이고스란히 보내진 곳만주 독립군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철저히 노름꾼으로 위장해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다그가 숨을 거두기 전오랜 친구가 건넨 권유"이제는 말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하지만 그의 마지막 대답"선비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아무런 말도 하지 말게."결국사진 한 장조차남겨놓지 않고 떠난 그는광복 59주년인 1995년,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된다조선의 독립을 위해한평생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독립운동가 김용환金龍煥, 1887~1946
깨뜨릴 파(破),
떨어질 락(落),
집 호(戶).
파락호는
다른 말로 '팔난봉'이라고도 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안동에서 노름꾼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용환은
조선 천지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파락호였다.
노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도박하느라,
마누라가
아이를 낳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땅 7백마지기를 노름으로 날리고,
아내에게
이젠 달라지겠다고 굳게 약속하고선
다음날
집에 있는 땅문서를 들고
투전판으로 달려간 인물이었다.
그는
경북 안동 일대에서 알아주는
명문가 의성 김씨 종가의 장손이자,
학자였던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이었다.
퇴계 이황의 수제자였던 학봉은
임진왜란 때
관군을 이끌며 의병을 지원하다가
진주성에서 병사했다.
이런 명예가
김용환으로 인해 한순간에 추락했다.
집안 재산도 모두 날아갔고,
대대로 내려오던 전답 18만 평도
노름빚으로 몽땅 팔렸다.
현시가로 약 200억원에 달한다.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은
친정에 가서 장롱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자신의 외동딸에게 준 돈마저도
가로채 노름으로 탕진했다.
그 딸은 하는 수 없이
할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가지고 울면서
시댁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헌 장롱이 귀신 들린 장롱이라면서
강변 모래밭으로 가져가 부수고 불에 태웠다.
'도박에 빠지면 김용환처럼 된다'
- 당시 유행어
우리나라
흥선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衡平社)운동 투사였던 김남수(金南洙),
김용환이 바로 그들이다.
김용환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흐른 뒤
여러 증언과 자료를 통해
노름빚으로 탕진한 줄만 알았던 집안 재산이
만주 독립군
군자금으로 흘러들어간 사실과 함께
노름꾼
김용환이 독립투사였음이 밝혀졌다.
그가 전 재산을 털어
남몰래 독립운동을 돕게 된 배경엔
할아버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할아버지 서산 김흥락이
사촌인 의병대장 김희락을 숨겨줬다가
왜경에게 들켜 종가 마당에서 꿇는
치욕적인 장면을 본
그는 항일운동에 몸 바치겠다고 결심,
식구들이
고초를 겪지 않도록 은밀히 해야 한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일제 눈을 피해
독립군 군자금을 대려고
철저히
노름꾼으로 위장했던 김용환,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평생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신분 위장을 잘 아는 오랜 친구가
죽음을 앞둔 그에게
"이제는 말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했지만
"선비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며 눈을 감았다.
평생을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던
외동딸 김후웅은
아버지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던 날,
존경과 회한을 담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편지를 남겼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 세에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 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우리가 결코 잊어선 안 될 일들도 얘기한다.
야스쿠니신사 이야기를 담은
일본인
전범들을 다룬 전범재판에 대한 이야기
'조선은 없었다'가 그것이다.
가해자인 일본은
아직도
반성은 커녕 이를 기념하고 추모하고 있다.
아울러
왜곡 홍보까지 벌이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도
마루타 생체 실험도
그들은
결코 용서를 구하고 있지 않다.
이 지구상에서
나치보다
더 추악한 집단이 바로 일본이다.
이럴진대
역사 교육에 이념을 주입하는 사람들은
일본보다
더 추악한 짓임을 지적하고 싶다.
출처: 정든 삶,정든 세월 원문보기 글쓴이: 地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