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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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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파란형광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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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까만 밤.
말되 안 되는 사랑이야기들에 여자가 미운 말을 내 뱉어.
"..다 거짓말. 그 자식도 거짓말만 늘어 놨어."
여자에게는 남자가 있었어.
시작할 때 그는 의대 본과 3학년, 정확하게 말하면 군대를 갔다와서
편입한 괜찮은 남자였어. 여자는 그를 정말 많이 사랑했어.
그래서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았고, 그와 그녀의 마지막은 결혼이려니 했지.
그와 동거를 하면서 한순간도 불안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를 믿었어.
하지만 그와 함께 한 5년이 모두 박살나 버린 건, 지난 주의 일이야.
그 날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산부인과로 들어갔어.
"...지우자."
"...오빠? 미쳤어? 이러려고 오늘 만나자고 한거야?
집에서 나한테 아무말도 없었잖아!!!"
"아는 형 병원이야. 잘해 주실 거야. 걱정하지마"
"그런걸 걱정하는 게 아니잖아!! 애는 나 혼자라도 키워."
"6주라며. 6주면 아직 살아있다고 보기 힘들어. 아기가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말해? 조금 있으면 다 생겨. 아기야. 내 아기야."
"......"
"이 아기로 오빠 붙잡거나 하지 않을께. 낳게만 해줘."
여자의 손목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풀리고,
더 큰 충격이 그녀에게 다가 왔어.
"...사실 오빠 다음 달에 결혼해. 미안하다."
1년 동안 같이 산 남자가
바로 오늘 아침에 내 옆에서 눈을 뜬 남자가
다음 달에 결혼을 한다는 말은 그녀가 아니라 다른 여자가 들었더라도
충격이었을 거야. 물론 그 결혼 상대가 본인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다시 지금 그녀에게 돌아가보면,
그녀는 드라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어.
거짓말이라며 미운말만 해가며 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꽤 집중하고 있어.
일주일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보냈고,
그 사람의 아이를 뱃속에 넣고 있는 여자치고는 참 담담하게 현실 안에 있어.
일주일 전까지 여자와 살았던 남자는 의사였고,
그녀는 약사야. 그녀의 이름이 걸린 간판을 가지고 있는 약사.
흰색 가운은 그녀에게 참 잘 어울리는 유니폼이야.
다른 약국들이 모두 문을 닫고 셔터를 내린 시간이지만,
그녀만큼은 그녀의 약국의 하얀 형광등 불빛을 그대로 두고
늦은 밤을 밝히고 있었어.
물론 일주일 전에는 그 누구보다도 빨리 일을 끝내고
그와 그녀의 집에 온기가 돌도록 보일러를 켜고
저녁식사 준비를 하던, 평펌한 여자였지만
지금은 다르지. 저녁을 준비 해야 할 이유가 빠져나간
그녀에겐 그녀의 집은 의미가 없으니까.
이별을 하고, 그녀는 식사를 거르지 않았어.
그건 그녀를 위한 일이 아니라 그녀의 아이를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최선을 다해서 먹었어.
지금도 그녀는 옆 상가의 분식집에서 순대랑 떢복이 같은 것들을
펼쳐놓고 먹는 중이었거든.
"작가들이 아직 사랑을 해보지 못한 모양이구만."
그래도 꽤 인기있는 드라마인데, 여자의 눈에는 그게 아닌가봐.
드라마 속의 남자와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바라보던 그 때,
약국에 늦은 손님이 찾아왔어.
-딸랑.
종소리가 울리고,
여자는 숨을 크게 들이마셔.
지난 일주일 간을 계속 있었지만,
짧은 시계 바늘이 숫자 8을 지나치고 나면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거든.
"...나.. 마데카솔..."
마데카솔.
그 깟 연고로 어떻게 될 것 같은 상처가 아니었어.
방금 약국에 들어선 남자의 머리에서 떨어지는 핏방을들은
한 여름 호러물보다도 더 공포스러웠거든.
여자는 카운터에서 튕겨져 나와 그 남자를 의자에 앉히고,
남자의 상처를 찾아내기 시작해.
남자는 종종 '으으'하는 신음소리만 흘릴 뿐 얌전하게 앉아있어.
여자의 흰 가운에 남자의 피가 묻어 가고,
TV속 두 남녀가 결국엔 서로 만나 부둥켜 안고 이야기가 끝나갈 때,
약국 속 두 남녀는 이제 서로 만나 시작하려 하고 있었어.
"출혈이 너무 심한데..."
여자는 그 말을 중얼 거리더니 왼쪽 진열대에 있는 생리대 봉지를 뜯어.
남자의 표정이 알듯 말듯 변하는 건 아량 곳 하지 않고
생리대를 남자의 찢어진 상처 위에 처억 하고 올려놓지.
"이봐. 보니까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머리 찢어 지면 마데카솔 사러
약국에 오는게 아니라 바늘로 꿰매러 병원에 가야 하는 거야."
"괜찮아."
"내가 볼 땐 적어도 열바늘은 꿰매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
그렇게 괜찮다던 남자는 머리에 생리대를 얹은 채로 여자 쪽으로 픽 쓰러져 버려.
남자의 괜찮다는 말에 따지고 나서려던 여자의 입은 그대로 닫혀,
그리고 남자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내려 놓고 파우더와 압박붕대를 가져오지.
하얀색 지혈파우더를 남자의 결좋은 머리카락 위로 뿌리고,
하얀색 압박 붕대로 생리대가 있던 자리를 감싸고,
여자의 눈 위에도 졸음이 쏟아져 내려와.
그리고 일주일만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편하게 잠이 들어.
약국의 형광등은 그 날 밤이 새도록 꺼지지 않았어.
-
다음 날 아침,
여자가 먼저 깨어 났어.
그 옆에는 죽은 듯 잠든 남자가 있어.
하얀색 붕대가 남자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걸 보고,
여자는 이 남자가 어디에서 왔을까 하고 곰곰히 생각을 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그대로 그렇게 누워서.
-딸랑
약국의 첫 손님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올 때 까지.
지난 밤 먹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 치우지 못한
음식들을 치우고, 편하게 잠들었던 의자쪽을 바라보자
어느새 깨어난 남자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봐.
그는 머리가 찢어져서 피를 질질질 흘리며 나타난 사람치고,
멀쩡해 보였어.
"...넌 뭐하는 놈이냐?"
곱지 않은 여자의 말이 남자를 향해 쏟아졌어.
"......미안한데. 기억이 안나네..."
도무지 알 수없는 표정을 한 남자는 눈을 감아버려.
"기억이 안난다고? ...병원갈래?"
"괜찮아."
눈을 감은 채로 남자가 또 괜찮다고 말했어.
정말 괜찮은 건지 아니면 병원에 가기 싫어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괜찮다니 어쩔 수 없잖아.
괜찮다는 사람을 병원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도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니까.
이렇게 남자는 자기 이름도 나이도 살던 곳도 연락처도 친구도 애인도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해.
여자에게는 매우 난처한 일이 되었지만,
기억이 없는 남자는 여자에게 미안한 척도 하지 않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어.
혹시 살 곳을 잃은 노숙자 였을까 싶을 정도로
남자는 여자의 집으로 가는 지금을 너무 기뻐하고 있어.
"기억나기만 해봐. 쫓아버릴꺼야."
여자의 혼잣말을 듣기는 한건지,
여전히 남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떠날 줄을 몰라.
-
여자는 일주일 만에 자신의 집에 발을 들여놨어.
그녀와 같이 살던 남자는 너무 간단하게 그 집을 떠났고,
그게 분한 여자는 이 집에 들어 오는 게 무서워서 피하고 있었지.
물론 이런 식으로 다시 돌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집은 변한 것 없이 그대로 여자를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야.
"...좋다."
"뭐가 좋아."
"혼자 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 혼자 살어."
여자의 굳은 얼굴에 남자가 입을 닫아.
그대로 집안에 들어선 두 사람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어.
그러다가 여자가 먼저 말해.
"방은 두개니까 니가 알아서 저쪽 방 써."
조금은 건방지다 싶은 말투지만
어쩌겠어, 미우나 고우나 그녀가 집주인인걸.
"난 아침 9시에 나갈꺼야. 넌 기억나는 게 없으니까 갈데도 없겠지?"
"......"
"그러니까 넌 그냥 집이나 잘 보고 있으라고-"
여자의 무심한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붕대 위로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그의 방으로 쏙 숨어버려.
여자가 남자에게 내어 준 방은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먼지가 뽀얗게 올라 있지만 남자는 불평없이 그 방 한가운데에
누워서 다시 잠을 청해.
환자니까 그 정도쯤은 이해해줄 법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자는 그닥 마음씀씀이가 좋지 못해.
"허. 집에 모셔왔더니 바로 잠이야? 일어나."
"머리아파."
"갑자기 안아프던 머리가 왜 아파? 적어도 집정도는 치울 수 있잖아?
방한칸 그냥 날로 먹으려고?"
"..씨...."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울리고,
이내 둘은 청소를 하기 시작해.
일주일간 사람한명 없던 집이었기 때문에 먼지가 쌓여 있어.
남자가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고 먼지를 털어 내는 모습을
가만히 보던 여자가 소파에 앉았던 몸을 일으켜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남자가 여자가 들어간 방을 훔쳐보면,
여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방 안에 있던 액자따위를 모두 덮어 놓기 시작해.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나봐.
그 집은 여자와 미래를 함께 할 것 같았던 남자의 전부라고 할 만큼
그와 그녀의 흔적들로 가득했거든.
심지어 그 곳의 먼지 하나까지도 소중하다면 소중한데,
그 걸 모두 치우는 걸 보자니 괴로웠던 거지.
비참해도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여자는 그녀를 가장 힘들게 만들 곳에 용감하게 들어와서
그와 함께 한 추억들을 모두 덮어버리고 있어.
눈에 맺힌 눈물은 그녀가 고통스러운 이 순간을 이겨내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어.
잘하고 있는 거야. 여자가 남자를 잊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싸움을 여자는 지금 해내고 있어.
그 걸 알리가 없는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걸어.
"나랑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싫수?"
농담반 진담반인 아줌마식 화술에 여자가 작게 웃음을 토해내면,
남자는 용기를 내서 다시 한번 여자에게 말을 걸어.
"근데 아줌마 나이가 몇이우?"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빤히 보면서 대답해.
"먹을 만큼 먹었어."
"...알겠다. 아줌마 서른이구나?"
"여자 나이 서른이면 퇴물인데, 너 내가 그렇게 밖에 안 보이냐?"
"난 기억상실중이라구. 그런걸 따질만한 상황이 못되."
"후... 난 확실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야. 스물일곱. 살만큼 살았어."
"그 소리 그대로 양로원 같은 데서 하면 아마 아줌마 살아남기 힘들껄?"
"...그러는 너는 몇 살인데?"
"그게 기억났으면, 아줌마 따라오지도 않았어.
그치만 나쁘지 않은 것같아. 이 것도 나름대로 괜찮아."
"편하게 살아서 좋겠구나 아가야."
-
그렇게 남자가 여자의 집에 들어 온지 벌써 2주나 지났어.
여자 뱃속의 아이는 벌써 10주째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고,
여자는 입덧으로 고생하고 있었지.
남자? 아직도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기는 하지만,
상태는 매우 양호해졌어.
여자가 볼 때 적어도 남자가 머리가 아프다느니 해가면서
꾀병을 부리는 일이 열번에 세번정도로 줄었으니까.
꽤 친해진 여자와 남자가 한 식탁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또 여자의 입덧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어.
"우읍."
"아줌마 밥맛떨어지게 자꾸 이럴래?"
"우읍. 하..."
"이 아줌마가 참 이상하네, 임신했어?"
"시끄럽... 웁..."
"이상하다. 난 아줌마 건들인 기억이 없는데...
아참. 나 기억상실이였구나. 그럼 내 아가야?"
"......"
여느때 같은 남자의 장난이었지만,
여자는 울컥하는 서러움에 남자를 흘겨보더니
화장실로 쪼르르 들어가 버려.
찝찝한 마음에 식탁에서 일어나 화장실 앞에 쪼그려 앉아.
"...장난이야. 새삼스럽게 우리 아줌마 예민해지셨네..."
"넌 장난이었는지 모르겠는데, 난 장난 아니야."
"무슨 말이야 그거?"
"내 뱃속에 애가 있어. 그 것도 아주 건강하대."
"전혀 현실성이 없는건 알고 있지?"
"......"
"그렇잖아. 내가 여기 온지 벌써 2주가 지났는데, 아줌마 남편은 본 적이 없고,
내가 아줌마랑 나는 2주전에 처음 본 사이라며."
"......"
"아줌마가 성모마리아도 아니고 어떻게 애를 혼자 가지냐?
내가 아무리 기억을 못한 다고 해도 그런걸 다 까먹은 건 아니라구."
남자의 말이 중얼중얼 화장실 앞에서 새나오면
화장실 안의 여자는 다시 헛구역질을 시작해.
아마 변기를 양손으로 꼭 붙잡은 채로
창백해진 얼굴을 해서는 부들부들 떨고 있겠지.
초조해진 남자가 이내 화장실 문을 벌컥열어.
"등 두드려줄께."
남자의 말에 여자는 토를 달지 않았어.
토를 달 기운도 그럴 정신도 없었거든-
너무 힘에 부쳐서.
"나 배고파."
여러차레 먹은 것들을 모두 게워낸 여자가
남자에게 한 첫번째 말.
이 날 뒤로 남자는 여자가 먹고 싶다는 것만 말하면,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어.
왜 그랬을까?
남편없이 애를 낳겠다는 이 여자가 가여워서?
아니면 신세를 지고 있는 집주인에 대한 작은 배려?
그건 아닐 것 같아.
그냥 순수하게 이 여자가 좋아서
그래서 이 여자가 하고 싶은 걸 해주고 싶은 마음에
그 모든 고생을 다 하고 있는 거 아닐까?
-
밤마다 남자가 집을 뛰쳐나간 보람이 있게
하루가 다르게 여자의 배가 부풀기 시작했어.
여전히 여자는 약국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가고 있고,
달라진게 있다면 아침 9시 출근이 1시간 뒤로 미뤄진 것과
혼자가 아니라 옆에 남자가 함께하고 있다는 거지.
"아줌마! 비타 500 몇상자?"
"비타는 두 상자만 넣어놔."
"이걸 여자가 어떻게 드냐? 그 동안 어떻게 했어?"
"들 만해. 하다 보면 익숙해져.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러세요~ 우리 아줌마 힘이 아주 남아도나 봐?"
"시끄러워."
티격태격하면서 둘의 입가에 웃음이 매달려서 떠날 줄을 몰라.
귀엽게도 둘은 이런 식의 사랑을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지만-
"아참."
"응?"
"또 까먹을 뻔 했네."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력을 쳐다 보더니,
흰색 가운을 벗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왜? 앉아 있어. 이런 건 내가 다 할테니까."
남자의 걱정스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큰 스웨터를 걸쳐.
"어디 가야 되?"
"응. 병원가야 되. 오늘 병원 가는 날이였어."
"누구? 아줌마 아파?"
"바보냐... 산부인과 간다. 금방 갔다 올께."
"같이 가자."
"뭐?"
"같이 가자고. 다른 아줌마들은 다 남편이랑 손붙잡고 갈껀데,
아줌마 그 동안 혼자가서 되게 창피하지 않았어?
내가 특별히 같이 가준다는데 좋잖아~ 나도 산부인과 한번 구경하고-"
태연한 그 말에 여자가 얼이 빠져 있으면,
남자는 어느새 약국 문을 받아 놓을 준비를 하고 있어.
[잠시 외출합니다.
중요한 용건이 있으신 분은
전화 주세요.
010-9216-9852]
"요거 붙여놓고 빨리 갔다 오자!"
남자가 쪽지를 팔랑팔랑 흔들면서 웃어보이면,
여자도 마지못해 따라 웃어.
다른 부부가 그러하듯,
둘도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걸어가.
진료실까지 따라들어가려고 하던 남자를 말리고
여자는 대기실에서 진료실로 이어지는 핑크색 병원복도를
걸으면서 곰곰히 생각해.
그 남자, 저기서 날 기다리고 있겠다는
한참 어린 저 하얀 남자를 내가 사랑해도 되는 걸까.
뱃속에 아이까지 넣고 선 내가 저 남자를 사랑해도 되는 걸까.
하고 말이야.
혹시 저 남자가 신세지고 있는게 좀 불편해서
그래서 쓸데 없이 배불뚝이 미혼모, 동정하는 건가.
설마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런 건가.
하고 말이야.
여자는 그렇게 자기 이름하나도 기억 안난 다는 하얀남자가
자기를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깨끗하게 지웠어.
-
"의사양반이 뭐래?"
"뭐라긴. 애 잘큰다고 칭찬해주지."
"오~ 아줌마 배가 그냥 나온건 아니였구나~
애기!! 너네 아빠가 밤마다 뛴 보람이 있다!"
"누가 아빠야?"
여자의 눈이 새초롬하게 남자를 째려봐.
남자는 아량곳하지 않고 말해.
"누구긴. 내가 아빠지."
"넌 삼촌이라고 해도 안 믿어. 형이라면 또 모를까."
"이거 왜 이래!!! 나 이래뵈도 스물넷이나 먹었거든?"
"스물넷이면 먹을 만큼 먹었.. 잠깐. 뭐라구?"
"아..."
"너 지금 뭐라구 했어?"
"아줌마!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 약국가야지."
말을 얼버무리며 약국을 찾는 남자의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어.
여자가 그 걸 놓쳤을 리 없지만, 남자는 태연함을 넘어선 뻔뻔함으로
약국에 돌아와서 세시간 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냥 연기 중이야.
"이 쯤되면 지치지 않아?"
"뭐가?"
"...너 기억나지? 이름부터 말해봐라?"
"내 이름 김개똥. 저기 비타민제 비어 있는데 채울까?"
"아니, 비타민제 주문해야 되. 개똥이라니, 장난하지말고"
"그럼 뭘 더 바래? 기억 안 난다니깐.
아참 내가 아까 창고에서 까스활명수 한박스 깨먹었다"
"...야!!!!!!!!!!!!!!!"
남자의 지겨운 말장난에 지친여자가 소리를 빽하니 질렀어.
"귀따가워!!! 머리울리는 것 같애."
남자가 오바스럽게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쥐면서 말해.
"까스활명수가 그렇게 아깝냐? 누가 아줌마아니랄까봐..."
"그거 말고!!!! 너!! 지금 너 그 새끼보다 더 미워!"
"그 새끼가 누군지는 몰라도 되게 기분나쁘네."
갑자기 굳은 얼굴을 한 남자가 여자에게 말해.
"내 이름이 중요해?"
그러면 여자는 당연하게
"응. 네 이름 중요하지."
라고 받아쳐.
무려 세시간 삼십분동안의 실랑이 끝에 배불뚝이 여자는
남자의 이름을 알아냈어.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
좋지 못한 기억력이 말썽이긴 했지만...
-
이제 그녀는 스물 넷의 윤원재를 알게 되었어.
정말 놀라운 건 그가 그녀와 같은 대학교 같은 과를 다녔었다는 사실이지.
"이보세요. 난 널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구."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아줌마."
남자가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여자는 기분이 퍽 상해.
정말 얼굴도 이름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걸.
뱃 속의 아이도 이 상황에 귀를 기울인 것 처럼
아무런 태동이 없어.
"정말이야. 난 정말 기억안나."
"이해해 그럴 수 밖에 없을 거야 아마.
아줌마랑 나랑 만난 건 다섯 손가락안에 들 정도니까."
"......"
"그렇게 보지마."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남자가 동그란 회전의자를 굴리며
말을 시작해.
"나 입학했을 때, 아줌마 졸업할 학년이였거든."
"어어."
"...물론 지금은 6년제지만 아줌마 졸업할 때만해도 4년제였으니까."
"음. 맞아. 난 그점에 있어서 굉장히 운이 좋았어."
여자가 웃어보이자 남자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
"신입생 환영회 때. 아줌마는 후배들 인사 받느라 정신없어서
새내기들 얼굴 다 못외웠을 텐데,
안타깝게도 난 아줌마가 내 흑장미 해준다고 나섰을때
홀딱 반했었나봐."
"뭐???!!!?!!"
"그만 놀래. 애떨어지겠다."
진지한 남자의 충고를 받아 들인 여자는
2년 전, 신입생환영회를 떠올려 봐.
그리고 이 남자가 그러니까 스물셋의 윤원재가
나를 사랑하는 모양이구나 라는 생각이 머릿 속에 미치자
견딜 수 없이 가슴이 메어오기 시작했어.
마치 6개월 전에 결혼식을 올린 그를 만났을 때처럼.
"애떨어진다고 해서 그래? 아... 임신하면 신경 예민해진다더니.."
여자의 눈에 고인 눈물방울에 남자가 걱정을 하면서
말을 덧붙이면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고개를 저어.
안심이 된 남자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
"...후. 그래서 내가 아줌마 꼬셔보려고, 아줌마 뒷조사를 좀 했는데
잘나신 의대생님이랑 3년은 사귀고 계셨더라구.
짝사랑이었는데, 배신감? 그런게 드는거야...
그래서 어떻게 했냐. 그래서 군대에 갔지.
남들보다 빨리 가서 빨리 돌아 왔고,
원래대로라면 나 한 달전에 복학해서 알약이나 만지고 있었겠지."
너무 간단명료한 남자의 말에 여자는 가만히
그냥 그렇게 있어.
눈물이 떨어지는 지 어쩌는 지 상관하지 않고
그렇게...
한순간 긴장이 탁 풀려서
그렇게 있어.
그런 여자를 양팔에 가두어 안고는 남자는 여자의 귓가에
가만히 속삭여.
"내 호적으로 들어오자. 아줌마. 아니 김희연씨. 내가 잘해줄께."
...
김희연.
남자의 입술에서 나온 여자의 이름에
여자는 이제 입을 틀어막고선 더 크게 울어.
"희연아."
.......
남자가 여자를 부르고 한참이 지나서
여자가 눈물을 스윽 닦아내
그리고 말하지
"...너 나 사랑해?"
지난 5년을 사랑했던 남자에게도 묻지 않았던,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 대답이 너무 겁이나서
그래서 차마 묻지 못 했던 질문을
윤원재에게 말하면
그 윤원재는 당연히 말하겠지.
"나 윤원재는 너 김희연을 사랑해."
.....
...
...
"근데 기억상실은 너의 뛰어난 연기라고 치고, 왜 그렇게 다쳐서 들어온거야?"
"그건 비밀."
그 날, 남자가 여자의 약국에 처음 들어갔던 날
남자가 여자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다쳤던 걸
여자는 아마 평생이 가도 모르겠지.
한밤중의 양아치들과 그렇게 투닥투닥 싸운 걸
여자는 아마 평생이 가도 모를거야.
-
두달 뒤.
핑크색 병원복도 위로 다급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져.
여자의 비명소리도 간간히 들리지.
"악악!!!!!!!!!!!!!!!!! 야 윤원재!!!!!!!!!"
"아줌마 시끄러워!!!! 알겠다고 알았다니깐!! 의사!!!! 의사양반!!!! 내 마누라 죽어!!!!!!!"
"죽긴 누가... 악!!!! 어떻게 해!!! 양수 벌써 많이 나온 것 같은데?"
"씨발!!!!!!!!!"
등에 업힌 여자의 다리 사이로 양수와 피가 섞여 흐르고 있었어.
"너 누가 욕하랬어?!"
"지금 그게 중요해? 나 강의도 빠지고 달려나왔거든?"
남자는 오늘 복학한 첫 강의를 듣다가
여자의 전화에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전화기 너머의
여자의 우는 소리에 놀라서
강의 도중 그대로 나와버렸어.
간호사들의 지시에 따라서 남자는 여자를 침대에 뉘이고
아파 죽겠다는 여자의 입술 위로 허리를 숙여 입술을 포개.
"아파 죽겠다는데 뭐하는 거야.."
"나올땐 애기랑 같이 보자. 사랑해."
그렇게 분만실에 들어간 여자는
양수가 너무 많이 쏟아지는 바람에 자연분만을 못하게 되었어.
수술동의서에 여자의 보호자인 남편 윤원재가 싸인을 하면서
눈에 고인 눈물을 의사 몰래 훔쳐낸지 1시간이 지났을 무렵
수술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말해.
"축하드립니다. 공주님 순산하셨구요. 산모와 아기 둘 다 건강합니다."
윤원재와 김희연의 아이가 세상에 나온 날,
윤원재가 엉엉 울면서 김희연에게 말했어.
"아줌마. 우리 다시는 아이 낳지 말자.
아줌마 죽을까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르지?"
첫댓글 원재가 참 귀여워요. 아쉬운건..다른 남자의 아이라는것..ㅜ_ㅜ. 아직도 보수적 사상에 젖어있는 사람
[☞] 원재 성격이 쓰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원래 설정은 어두침침하고 방황하는 10대 후반의 청소년이었는데 말이지요... 허허. 바뀐 설정이 성공한 것 같아서 기분 좋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다른남자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여자를 얼마나 사랑하면 ..ㅎㅎ
[☞] 둘이 잘 해내야 할텐데 말이죠~ 원재가 변하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아가한테도 상처주지 않고 알콩달콩 예쁘게 살거라고 믿어요!
정말 귀엽다 > <
[☞] 귀여운 원재 좋아요!!! 원재같은사람 한명만 있었음 소원이 없겠어요ㅋㅋ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 헤헤 모든 분들의 이상형을 보여드리고자 항상 애쓰고 있는 파란형광등입니다. 원재가 마음에 드신다면 가지셔도 좋아요!<이봐
아아...연상연하 커플이군요...ㅋㅋ
[☞] 예 연상연하 귀여운 커플입니다ㅋㅋㅋ
우엉엉.. 슬퍼요ㅠㅠㅠ 근데 기뻐.. 뭐야ㅠㅠ 어떡해.. 윤원재, 너 정말 좋아!!
[☞] 우리모두해피엔딩ㅋㅋㅋ 전 해피엔딩을 사랑합니다ㅋㅋㅋ 소설 속 주인공도 좋고 읽어주시는 독자분들도 좋은 해피엔딩ㅋㅋ<
꺄 ㅜ ㅜ 너무너무 귀엽다!! 나도 저런 남자 있으면 좋겠다 ㅎㅎㅎ
[☞] 홀릭님께도 저런 남자가 곧 생길 것 같은 신선한 예감< 헷,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윤원재 참 멋나는 사람이군요~~ 그에 비하면 희연의 그 옛 남자는 개쉑히00++ 아. 시험끝나고 보는 첫 소설이 파란형광등님 소설이라 참 조하요ㅋㅋㅋ 담 소설도 기대할게요. 건필하시구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윤원재. 네 멋있는 사람입니다. 참 순수하고 귀여운사람이에요. 저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싶을 정도로 판타지한 사람이기도 하구요. 작가의 로망에 따른 설정이 강한 인물이고, 그래서 제가 많이 아껴요. 원재는 사실 제 스타일~~ 너도님도 좋은 하루보내시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아는 그 형광등언니 많으시죠?? 그쵸!??! 아아아! 정말 오랫만이군여! 언니!ㅜㅜ 요즘 진짜 연락 끊기면 어떻게 하나..ㅜㅜ 걱정 많이했어요~ㅜ 저기억하시죠?ㅜㅜ 이번 소설 정말 굳굳굳~~ 입니다! 요즘 이것저것 할게 많아서 통 들어오질 못했는데..이렇게 올리셨는데 댓글도 못달아드리구..ㅜㅜ 죄송해요~ㅜㅜ 다음 소설도 기대 많이!! 할게요!
[☞] 너너!!!! 내가 아는 린하유 맞지?!!!!?!!!!!?!? 아잉 보고 싶었어ㅠㅜㅠㅜㅠㅜ 오늘 학교 안가는 날인거야? 언니는 점심시간에 잠깐 짬 내서 하고 있어!!! 아 니댓글보니깐 나 완전 감동받아서 T_T 보구싶었어!!!!!!!!! 소설 괜찮았나몰라~ 흐흐흐 다음 소설도 언니가 열심히써서 보일께~~~~ 자주자주 좀 들러~ 언니도 되도록 자주 올테니깐 알았지? 아 너무 반가워~~
너무재미있게읽고가요흑흑
[☞] 재미있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헤헷,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정말정말 재미있어용!!!!! 굿이예요 굿 !!
[☞] 빵긋님 댓글도 굿이에요 굿!!!! 감사해요~ 복받으실꺼에요~!!
단편인데도 너무 재밌었어요 원재 너무 멋있구ㅋㅋㅋ..!♥
[☞] 아휴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저 무진장 기뻐요~~~ 이번에 원재칭찬이 마구 쏟아져서 제가 기분이 다 좋네요~~
헉 파란형광등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기다렸어요! 잘읽고가요~!!
[☞] 네~ 너무 오래간만이라서 저 다 잊어버리셨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면서 왔는데, 기다려주셔서 감사하구요! 앞으로 이렇게 불쑥 찾아오면, 왔구나 하고선 반갑게 안아주세요!
감동입니다ㅠ_ㅠ.. 재밋어요
[☞] 감동을 드릴 수 있어서 저도 기뻐요!!
와우!! 알콩달콩 너무나도 귀여운 커플이에요! ㅜㅜ 마지막 원재의 말 ! 완전 ㅋㅋㅋㅋㅋ
[☞] 알콩달콩, 귀여워졌어요~~ 사실 시작할때는 암울한 커플이었는데, 어째 쓰다보니까 원재가 너무 귀여워져버려서ㅋㅋㅋ
우와.. 정말 알콩당콩 귀여운 이야기 같아요^^ 우리나라 미혼모 문제도 참 심각한거같애요(..) 남의 아기를 키울만큼 여자를 정말 사랑하나봐요.^-^ 저도 저런남친 있으면 좋겠어요 ㅠㅜㅠㅜ
[☞] 미혼모 문제, 되게 심각하죠. 여자나 남자나 둘 모두 조심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하잖아요. 학교다니면서 배우는 성교육이 무슨 장난도 아니고... 헤헤, 티없이맑은아이님도 원재같은 남친 생기실거에요~~
글 참 괜찮네요..ㅎㅎ 재원이 너무 귀엽고 멋져요~~
[☞] 칭찬 반갑게 받아서 더 좋은 글쓸 수 있게 노력 할겠습니다. 음... 재원이가 아니라요 원재요^^*
윤원재 넘흐머쪄여 ㅋㅋㅋ ~ 소설넘잼게봐써여 ^^*
[☞] 원재 칭찬 너무 많이 듣는데요? 원재 콧대가 하늘을 찌르겠어요~!! 소설 재미있게 봐주셨다니 이 글쟁이 기뻐서 하늘을 날아요~
와우...정말...글 너무 잘쓰세요~~~ 지금 형광등님 소설 다 찾아 보고있답니다 +_+ Feel 꼿혔어요..윤원재같은 남자 어디 없나요?...주인공여자 부럽...
[☞] 아휴~~ 여신루나님!! 영광입니다~ 다 찾아보시구, 댓글까지T_T 감동받아서 울고 있어요!! 저도 루나님한테 필꽂혔어용~~~~
잼있어요~~~>ㅁ < 윤원재 멋져요~~~+__________________+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저도 참 기쁘네요~~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