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천사의 기억 - Abbey (1)
글쓴이 전함의 지존 Tirpitz
"오랜만이군요."
그 말 그대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다. [리쉘] 신부는 자신의 손안엔 든 십자가와 책을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의 시선은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사원의 뾰족한 탑을 지나 서서히 그 암갈색 돌기둥을 따라 내려간다.
그 자리엔 검은 레인코트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키는 리쉘 신부보다 더 컸지만 웨스트 민스터 사원을 감싸고있는 창살에 건방질 정도로 한쪽에 기대고 있어서 그런지 그는 리쉘 신부와 거의 같은 키로 보였다.
아시아계 사람의 전형이라는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검은 눈동자. 흔히 다크 브라운(Dark Brown)이라고 하지만 이 남자는 완벽한 검은 색이다. 속임수? 아니다. 날씨 탓인가. 이곳 영국 날씨는 전유럽 최악이니 말이다.
"날씨가 최악이군요."
남자가 말했다. 리쉘 신부는 대답했다.
"영국이 다 그렇지. 영국 사람들도 이 말엔 화내지 않을걸세."
남자는 이 말을 듣자 주머니에서 손을 빼면서 시계를 보았다. 그의 시선은 문득 신부가 든 책으로 향하고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소소한 이야기]. 그 책 작가 상당히 재밌는 이야기를 발굴해 내서 돈 좀 벌고있다던데요. 신부님도 재밌게 보고 계신가 보군요."
"아, 이거 말인가? 우리 신자 중 한 명이 읽으라고 줬다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진후], 난 [요한네스 요넨] 중령 팬이라네."
이 말을 듣자 진후라고 불린 남자는 피식 웃었다.
"실제로 당시에 그 장소에 요한네스 요넨이라는 이름을 가진 군인은 없었습니다. 책에도 나와있듯이, 그는 가명을 썼으니까요. 그가 실제로 누구였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죠."
"알고있어. 하지만 [프릿츠 주교]는 실존인물이지. 하지만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하더군."
"그 장난꾸러기 주교는 요절만 안했어도 지금쯤 교황보다 유명했을 겁니다. 참고로 전 그 주교 팬입니다."
"푸훗, 그래. 그런데 진후, 요세 어떻게 지나나?"
"......잘 지내고 있죠. 신부님."
진후가 이렇게 대답했을 때 그의 등 뒤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띠랭....띠랭... "
진후는 돌아보았다. 그의 머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빅 벤Big ben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그는 무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종소리는 강한 바람을 타고 흩어지면서 댕댕거리는 소리보다는 디랭디랭거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 소리마저도 부서지며 회색 하늘로 퍼지고 있었다. 빅벤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이 소리에 맞추기라도 하듯이 퍼덕이며 날아간다.
"이런, 벌써 3시로군."
리쉘 신부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늦겠어."
"퍽!"
리쉘 신부가 이 소리를 듣고 돌아봤을 때 진후의 오른손은 빅벤을 향하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리기 위해 신부가 그의 손끝을 따라갔을 때 회색 하늘에 검은 점이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무슨.....?"
아니, 아무도 몰랐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무심히 진후 곁을 걸어서 지나간다. 진후가 설마 저 날아가는 비둘기를 향해 암기(暗機)를 날렸단 말인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진후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빙그래 웃으면서 다시 리쉘 신부를 쳐다보았다. 종소리에 가려져서 그나마 암기가 내는 작은 소리마저도 지워지기 때문에 가능한 공격이었으리라.
"21세기에 비둘기를 첩자로 쓴다는 낭만적인 소린 못들었네만."
리쉘 신부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진후는 보란듯이 검은 코트 자락을 날리며 웨스트 민스터 사원쪽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항상 '그럴 리 없다' 라는 생각에서 모든 비밀은 새나갑니다. 신부님."
진후의 말소리를 들으면서 신부는 그를 따라갔다. 철컥.... 진후의 검은 코드 자락에서 아주 희미한 금속소리가 들렸지만 신부는 못들은 척 했다. 대신 빠른 걸음으로 진후 옆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가뜩이나 할 일도 많은데 불러서 미안하네. 얼마전에 호출이 왔어. 로마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는 모양이야."
"바티칸이야 365일 심상치 않죠. 성공회와 신교들은 제멋대로고 정교회는 옆에서 부채질하고 있으니 그들도 속이 편하겠습니까? 분풀이로 성당 지하실이라도 파고 있나보죠."
"진후, 자네가 워낙 시니컬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있지만, 제발 국교회와 신교도들을 싸잡아서 하는 말은 그만하게나. 자네는 다 좋은데 그게 문제야. 어렸을 때 교화에 실패한 것은 내 잘못이지만 왠만하면 종교 하나쯤은 가지고 활동하면 안되겠나? 꼭 우리 성공회에 들어오라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 판치고 있는 종교들는 죄다 마약입니다 신부님. 전지전능하신 분이 만드신."
리쉘 신부는 진후의 걸음을 따라가려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서서는 두 팔을 양 옆으로 벌렸다.
"이보게나 진후. 우리 사원 앞에서까지 신을 모독하는 말을 해야겠나?"
진후는 대답대신 손을 흔들면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위로 커다란 장미창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성모독이라...."
진후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리쉘 신부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걸음을 따라 급히 사원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원은 그를 보자 미소를 지으며 길을 터 준다. 3시만 지나면 해가 져버리는 상황에서 들어가는 사람보다는 나가는 사람이 많을 시간이라 입구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후가 들어서는 이곳은 평소에는 출구로 사용되는 곳이다. 하지만 입구 지키는 경비원은 아무런 재재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을 알고있고 당연하다는 듯.
신부는 들어서자마자 저만치 거침없이 걸어가고 있는 진후를 따라가며 말했다.
"굳이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가?"
리쉘 신부의 말에 진후는 대답했다.
"배경이 멋있고 재밌으니까."
"..........."
어렸을 때부터 그랬지만 이 녀석은 이랬지. 리쉘 신부는 생각했다.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고 무슨 말을 해도 착한 방향으로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농담이고.... 여긴 마법이 통하지 않거든요. 적어도."
하지만 그렇다고 불량스런 녀석들과 어울리지도 않는 이상한 녀석이었다. 마치 뭐랄까... 중립을 지키는 모습이었지. 신부는 생각했다. 한동안 웨스터 민스터 사원에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던 그는 입을 열어서 조용히 말했다.
"교회 안에서 싸우려면 총과 성경책 뿐입니다."
"....진후."
리쉘 신부가 입을 열었지만 진후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사원을 둘러볼 뿐이었다. 그런 그의 태도는 이미 신부에게 익숙한 것이었기에 신부는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실은 로마 일도 있지만 자네의 요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그래. 얼마전에 윌리엄 경감이 내게 전화를 해서 심하게 컴플레인complain을 했네. 자네가 두 달 전에 자네의 그 절친한 친구들과 함께 대영 박물관에 있던 이집트 미라 관을 다 뒤집어 놓았다고 말이야. 대체 어떻게 했나?"
"앞으로도 내가 뒤집을 관들은 많이 있다고 전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진후는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이건 농담이 아니야. 지금 영국 경찰이 단단히 화났어. 봐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그 순간 리쉘 신부는 앞의 남자가 피식 웃는 것을 보았다. 곧 특유의 비웃음조로 말이 들렸다.
"안 봐주면 어쩔건지. 멍청한 영국 경찰이 저를 잡을수 있다고 보시는지? 4백명 정도 죽을 각오를 한다면 가능하죠."
신부로 향한 진후의 눈에 살기가 잠깐 지나갔다. 리쉘 신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리지. 로마에서도 자네들 움직임을 매우 불쾌하게 보고있어. 예전에 자네들이 뉴욕 페트릭 성당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부터 시작해서 베를린 대주교의 차량을 날리고 퀼른 대성당 입구에서 관광객들에게 물벼락 씌운 사건말이야. 제발 자네와 자네의 그 친구들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조심하게나. 로마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나보다도 잘 알잖나!"
"하루 이틀입니까? 거기야 항상 세상을 주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도 한마디만 하죠 신부님."
사원 중앙까지 걸어 가다가 다시 리쉘 신부를 향해 걸어오는 진후의 구둣소리가 조용한 사원에 울렸다.
철컥.
다가운 그의 코트 속에서 아까 그 소리가 들렸다. 진후의 암갈색 눈동자는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신부님과 신부님 친구들이야 말로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으면 합니다."
이 말을 해서였을까..... 리쉘신부는 순간 등골에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진후의 눈을 보는순간 몸을 숙였다. 진후의 차가운 눈동자와 그의 총구가 바로 이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진후의 총이 발사되었다.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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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또 다른 이야기인가요. 오랜만이십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