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터를 누빈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일어나자 세계는 긴장합니다. 국제전으로 격화될 가능성이 높은 이 전쟁에 각 나라 언론은 앞다투어 종군기자를 파견했습니다. 3년에 걸쳐 군인과 민간인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6·25전쟁의 참상은 그들에 의해 기록되고 전 세계에 알려집니다. 그 종군기자들 가운데 유일한 여성으로 마거릿 히긴스(1920∼1966·사진)가 있었습니다.
미국 뉴욕 ‘헤럴드트리뷴’에 입사한 히긴스는 처음부터 종군기자를 꿈꾸었다고 합니다. 2년 근무를 마치자마자 전쟁이 한창인 유럽 근무를 지원해 1944년에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 1945년에는 독일로 갑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해방을 목격했고 이어 뉘른베르크 전쟁 재판과 소련의 베를린 봉쇄를 취재할 수 있었습니다. 1947년에는 트리뷴의 베를린 지국장이 됩니다.
1950년 트리뷴의 일본 도쿄 지국장이 된 히긴스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틀 만에 한국으로 건너옵니다. 그리고 6월 28일 한강철교가 폭파되면서 다리를 건너던 수천 명이 그대로 죽는 것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어렵사리 뗏목을 구해 미군 본부가 있는 수원으로 간 히긴스는 전선에서 나가라는 워커 준장의 명령을 받습니다. 여성 숙소가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히긴스는 워커 준장보다 상관인 맥아더에게 항의했고 결국 취재를 계속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여성 종군기자들에게는 돌파구를 마련해 준 사건이었습니다.
히긴스는 6·25전쟁 내내 병사들과 함께 전투를 치르듯 전장을 뛰어다녔습니다. 한강철교 폭파, 피란민들의 죽음, 낙동강 전선의 치열한 공방전, 인천상륙작전 등과 같이 놓칠 수 없는 6·25전쟁의 모습을 기사로 만들어 전 세계로 보냅니다. 특히나 전세를 결정적으로 바꾼 인천상륙작전 현장을 낱낱이 기록한 공로로 그녀는 195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합니다.
6·25전쟁 이후 콩고 내전과 베트남 전쟁 취재에도 뛰어들었던 히긴스는 1966년 라오스 취재 도중 풍토병으로 사망합니다. 46년이라는 짧은 생이었습니다. 2010년 한국 정부는 최고 훈장 중 하나인 외교 훈장을 히긴스에게 추서했으며, 2016년에는 그녀를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했습니다. 6·25전쟁 대부분의 기간을 최전선에서 취재하며 인천상륙작전을 세계에 알린 공로를 인정한 것입니다. 2019년 개봉한 한국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에서는 종군기자 매기 역의 모델이 되기도 했습니다.
히긴스는 여성 기자가 흔하지 않던 1950년대,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제되고 차별받으면서도 세 번이나 종군기자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녀가 “총에 맞을까 봐 걱정해서는 결코 기삿거리를 따낼 수 없다”며 목숨을 걸고 기록한 6·25전쟁 초기의 주요 국면들은 ‘War in Korea(한국의 전쟁)’라는 책으로도 출간되었습니다. 자신의 직업적 삶을 개척해 나간 그녀 덕분에 6·25전쟁의 실상도 생생한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겁니다.
이의진 누원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