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버마) 아웅산 폭발사건은 국기(國基)의 큰 분수령이었다. 83년 10월9일
각하의 서남아 및 대양주 순방의 첫 기지국인 미얀마의 랭군에서 일어났던 참변...
그 충격은 아직도 국민들의 뇌리에서 생생하게 남아있다.
당시 (생각할 수없는 대사건)이 이역만리에서 터졌을 때 누구나 국가 안보를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위기의 순간이었다. 위기는 랭군의 사고현장이
더 긴박했다. 그 같은 위기 상항에서 각하는 어떠한 행동을 취했을까. 사건발생이
제법 많은 시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위기속의 국가원수)를 뒤돌아보는 것은
위기일수록 지도자의 판단이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대통령의 일행이 이날 공식스케줄은 오전 10시30분에 아웅산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 되도록 짜여 져 있었다. 수행원 숙소인 (인야 레이크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낸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외무장관을 비롯한 공식수행원들과 보도진은 먼저
호텔을 출발, 10시18분쯤 아웅산 묘소에 도착했다. 함병춘 비서실장, 이계철 대사 등
영빈관에 체류 중이던 공식수행원들은 이보다 좀 늦게 10시26분쯤 묘소에 도착했다.
각하는 10시22분 아웅산 묘소를 향해 영빈관을 떠났다. 대통령과 미얀마 외상이 동승한
승용차가 랭군시가지를 지나 아웅산 묘소까지 1.5킬로미터쯤을 남긴 지번에 이르렀을
무렵 아웅산 묘소에서는 폭발참사가 일어났다. 급보에 접한 미얀마 외상이 대통령차를
급히 회차 하도록 조치했다. 이때가 사건발생 2분 뒤인 10시 28분이었다.
아웅산 묘소에서의 폭발음은 대통령 탑승차 까지는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각하는 영빈관에
도착해서야 참사경위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물론 정확한 사상자의 수나 명단은 확인이
안된 상태였다. 다만 공식 수행원을 비롯, 현장에 있던 다수 인사들이 변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엄청난 보도를 듣는 순간 각하의 슬픔과 충격, 그리고 이 같은 만행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분노가 어떠했을까 하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위기 상항에서
최고지휘관에게 요청되는 것은 능동적인 상항 지배 능력이다.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의
급보를 접한 그 순간부터 오후4시30분에 랭군공항을 떠나기까지의 5시간50분 동안
각하가 취한 일련의 사건대처와 후속조치들은 바로 상항지배 능력을 십분 발휘한
최고 지휘관의 전형적 모습이었다는 것이 한 비서관의 회고다. 그 비서관은 각하의
사후 과정에서 생사고비의 전투를 여러 차례 겪은 지휘관에서만 볼 수 있는 위기관리
능력을 확연히 찾을 수 있었다고 애기했다.
각하는 영빈관에서 짤막한 사고발생 보고를 듣고는 손수 진주지휘에 나섰다. 대통령의
참모들인 비서실장, 외무부장관 등 고위 수행원은 한 사림도 없는 상항이었다. 각하는
영빈관에 대기 중이던 외교관계 비서관을 급히 불러 지시를 내렸다. 이때 각하의
지시내용은, 미얀마방문을 즉각 중단하고 서울로 돌아간다는 것과 서울서 비행기를 빨리
보내 희생자의 유해와 부상자를 후송할 준비를 갖추라는 것이었다. 이때가 사건발생
9분여 지난 오전 10시35분이었다.
그리고 곧 이어 국내에 있는 국무총리를 전화로 불러 국민들의 동요가 없도록
내각은 침착하게 대기할 것을 지시했다.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이루어진 기민한
사후 대처였다. 다음으로 각하는 호텔에 대기 중이던 민간 경제인들과 비공식
수행원들에게 랭군공항의 우리 특별전용기로 신속히 대피하도록 지시했다. 폭발사건이
북한측의 소행일 것으로 직감한 각하는 제2, 제3의 후속적 테러로부터 우리측
인사들을 보호하기위한 조치였다. 각하는 이어서 미얀마 다음의 방문 예정국인 인도를
비롯한 스리랑카, 호주, 뉴질랜드, 브루나이, 정부에 대해 사건의 경위와 함께 예정된
방문을 할 수 없게 된 사정, 그리고 방문문제는 추후에 다시 협의토록 하겠다는 뜻을
담은 전문을 급히 발송토록 했다.
첫댓글 좋은글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