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차까지 따라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쥬?
이 글을 쓰는 저는 더 죽겠시유!ㅎㅎㅎ
머리에서 쥐 한마리가 살짝 왔다 갔다 합니다요...
백두산 천지를 봤으니 나머지 일정은 그냥 들러리 정도 되지 말입니다.ㅎ
어제 서파에서 천지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고구려 역사의 현장으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오늘은 버스를 무려 8시간 정도 타야합니다.
엉덩이와 등짝이 잘 받쳐주어야 하는데 은근히 걱정됩니다.
왜 8시간이냐구요?
8시간이니 8시간이지요.ㅎㅎ
통화에서 압록강부근의 집안까지 내려가는데 2시간
거기 관광을 마치고 다시 통화를 거쳐 선양까지 오는데 6시간. 됐쥬?ㅎㅎㅎ
이제 2시간, 4시간 정도 버스 여행은 일도 아닙니다.
관광 가이드가 이동간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가관입니다.
일부 맞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중국에서 왜곡한 역사의 나열이었고
때로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도합니다.
한참 고구려 역사를 이야기하다가 주몽의 아내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를 떠나서 세운 나라가 발해랍니다.ㅎㅎㅎㅎㅎ
아마 농담이었겠지요?
그런데 진지하게 이야기 합니다.ㅎㅎ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가이드가 따라가야 하는데
역사를 잘 모르는 관광객은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을 듯합니다.
지금부터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다른 견해도 있음을
이야기 중에 조금씩 해보겠습니다.
지안(집안)
북한의 만포시와 압록강을 두고 마주한 도시로
역사적으로는 주몽이 졸본에 고구려를 세운(BC 37년) 후
그 아들 유리왕이 AD 3년에 이곳 국내성(지안)으로 천도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 고구려가 BC 37년에 세워졌다고 하면 신라보다 늦게 세워진 것이고
고구려의 역사가 700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인데
적어도 북부여의 역사부터 고구려의 역사로 해야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면 고구려가 900년 동안 존속하게 되는 것이지요.
고구려 광개토대왕 당시 60개 국가를 정복하여 영토를 넓였고
장수왕 때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고 그 주 무대가 지금의 하북성 일대인 것을 볼 때
지금의 국내성(지안)이라고 하는 곳은 너무 협소하고 한반도에 치우쳐져 있기 때문에
국내성은 지금보다 베이징 근처에 있었을 것이란 견해도 있습니다.
지안에 도착하여 환도산성이라고 하는 곳을 버스에서 그냥 지나가다 구경하고
시내로 이동합니다.
환도산성 아래에는 수많은 분묘들이 보입니다.
지안에만 만여기의 적석묘가 있다고 하는데 여기가 고구려의 집단 분묘지였을 것입니다.
환도산성을 지나서 광개토대왕 비로 향합니다.
중간에 지안박물관이 있었으나 중국의 입맛에 맞게 정리되어 있을 듯하여 패스!

광개토호태왕 비
전쟁기념관에 세워진 광개토대왕 모형 비를 보긴 했지만
여기에서 원본을 본다는 감격에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1876~80년 사이에 농부에 의해 최초 발견되어
일설에는 일본군 중위가 탁본을 해서 대본영에 가져다 주고
대본영의 지시로 광개토대왕의 일본 점령 부분을 지우고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해 넣기도 했습니다.


이 비각은 최초 1928년에 세웠다가 중간(1976년)에 철거하고 1982년에 다시 세운 것이랍니다.

비각 안으로 들어가서는 사진을 못담게 해서 밖에서만 담아야 합니다.

광개토호태왕 비의 의문점 들
의문점 하나,
높이가 무려 6.34(20척)이나 되는 비석이 발견되기 전에는 고려나 조선의 역사기록에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것으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시호를 붙였습니다.
※ 국강상 -> 광개토왕 무덤의 위치
광개토경 -> 국토를 광활하게 넓혔다.
평안 -> 백성을 평안하게 만들었다.
호태왕 -> 훌륭한 왕을 이르는 극존칭 (다 아는 이야기였습니다.ㅎㅎ)
이 근처에 아불란사라고 하는 대금황제성에 황제비가 있는데 이는 3~4m 높이의 비로써
광개토대왕 비의 절반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도 용비어천가, 동국여지승람, 강계읍지 등에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큰 비가 1876년 발견되기 이전에 전혀 기록이 없다는게 이상합니다.

의문점 둘,
비의 받침대가 없습니다.
우리가 묘지에 세우는 작은 비석에도 받침대를 사용하는데
무게가 무려 37톤이나 되는 비를 세우는데 두께가 겨우 15~20Cm 밖에 안되는
받침대를 사용한다는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됩니다.
그래서 발견된지 140년 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받침대가 3조각으로 깨져있습니다.

의문점 셋,
대게 일반인의 묘비에도 관석을 씌우는 법인데
하물며 태왕의 공적비에 관석이 없다는게 이상합니다.
상부를 보면 약간 뾰족하게 되어 있고 그 아래로 인위적으로 가공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관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그 관석이 엄청 컸기에 옮겨서 다시 올리기가 힘들어 버러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ㅎ

(사진 : 인터넷 퍼옴)
결과적으로 광개토대왕 비는 최초 위치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을
이곳으로 옮겨다 놨다는 추론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디서?
일부 역사학자들은 고구려의 주 강역이었던 하북성의 북경 근처가 아니겠는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옮겼을까요?
중국이 자기네들의 수도인 북경 근처까지 고구려의 영토였고
그곳에 고구려 태왕의 비가 있다는 것이 껄끄러웠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 중의 하나라고 하는 동북공정으로 역사왜곡을 시도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역사를 다시 확인하고 모든 것을 원위치로 되돌려 놔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광개토대왕 릉이 여기에 이처럼 허름하게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를 방문한 한국 관광객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을 사실인양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광개토대왕 릉일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추정일 뿐이지요.


저기 누구인지도 모를(?) 릉의 꼭대기에서 지안지역과 북한 산하를 바라봅니다.


내려 오면서 한 컷!

역사를 왜곡했다고 해서 이분들이 여기에 볼 일을 보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ㅎㅎㅎ


다른 설명을 할 때는 잘 보이지 않다가
사진을 담겠다고 하면 이렇게 순식간에 몰려 듭니다.ㅎㅎㅎ

장군총
광개토대왕 비에서 5분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장군총.
가이드는 장수왕 릉이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다만 추정일 뿐이고
장수왕 릉이라고 단정지을만한 유물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일본 녀석들이 다 도굴해 갔겠지요.
20대 장수왕 15년(427년)에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를 합니다.
장수왕은 98세까지 향수했기 때문에 장수왕으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지요.ㅎ
그런데 평양으로 천도한 장수왕이 왜 이곳에 묻혔을까하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분묘의 형식이 그 시대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결정적으로 광개토대왕 비와 릉이 곁에 있기 때문이라고 확정해버렸기 때문이겠지요.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다시 찾자고 다짐을 합니다.ㅎ



지안 근방에는 이런 적성묘가 많이 있습니다.
묘 아래 단에는 호석(또는 호분석)이라고 하는 무게가 3톤정도의 지지돌이
한 변에 3개씩 12개가 세워져 있습니다.
쌓아놓은 돌이 밖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이지요.
그런데 한 쪽 면의 호석 가운데 한개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 쪽 부분의 돌들이 밀려나고 무너질려고 하고 있는게 보이네요.
어떤 학자들은 호석이 12개이니 12지신상일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기록에서 밝혀졌답니다.


장군총 옆에 있는 배장무덤
배장무덤은 분묘 주인과 가장 가까운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가이드는 이게 장수왕의 애첩의 무덤이라고 단정합니다.
굳이 애첩이라고 폄하하는 이유가 불량합니다.

언젠가는 이 무덤의 주인이 정확히 밝혀질 그날을 기대합니다.

아쉬움을 담고 돌아서려는데 입구 한켠에 이런 간판이 보입니다.
고구려 마지막 왕, 멸망을 초래한 28대 보장왕의 박물관을 만든답니다. 이런!
그것도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라고 명시해 놨네요.
우리나라 정부와 국회, 역사학자들은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슴을 치고 통곡할 역사 왜곡이 저렇게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남의 나라 일이라고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는 듯....
대한민국의 한심한 모습을 여기서 보내요.

분하고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북한의 만포시와 접하고 있는 압록강으로 갑니다.
아! 압록강!
신의주를 넘는 철교 사진만 봤는데 막상 실제 와서보니 에게?
어제 내린 비로 강물은 흙탕물이 되어 있네요.
강폭이 대략 150 ~ 200m?
수영 잘하는 사람은 그냥 단숨에 넘겠습니다.
과거 GOP 근무 때 보던 북한의 땅과는 또 다른 느낌을 갖게 했습니다.
여기는 비무장지대도, 지뢰도, 경계서는 무장 군인도 없는데.....


조 정환이와 나만 남고 나머지는 배를 탑니다.
사진 찍어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ㅎㅎㅎ
좀더 가까이에 가면 뭔가 감흥이 다르게 날 듯도 합니다만......




배는 점점 강 가운데로 나아가고,
멀리 북한의 제련소의 굴뚝이 보이는 곳까지 갔다가 오는 코스입니다.
저기 국적을 표시하는 국기가 언젠가는 태극기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강건너 편을 바라보니
옛날에 김일성이가 다녀간 곳이라고 기와집과 최근 새로 만들어진 주택도 보이고
도로도 잘 조성되어 있네요.
간간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주민, 밭두렁을 왔다 갔다 하는 주민도 보이곤 합니다.
강가에 세워진 초소는 아마도 감시탑인 듯한데 감시요원은 보이지 않네요.
일부 모내기한 논도 보이고 대부분은 옥수수가 심겨진 밭이었습니다.
이 땅도 우리 땅, 저기도 우리가 손을 맞잡아야할 우리 민족들인데......





못내 아쉬움 속에서 인증샷을 하고 떠납니다.
다시 올 수 있을까?
아니면 다음번에는 저쪽에서 이곳을 바라볼 날이 올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근처 식당에서 삼겹살과 쇠고기로 허기를 채우며
이슬이 한잔으로 허퉁한 가슴을 달래봅니다.



그리고 4일차 일정을 끝내고
6시간의 버스에 다시 몸을 맡겨 봅니다.
중간에 노상방뇨(?)도 즐기고.....ㅎㅎㅎㅎ
To Be Continued.................
아! 더이상 To Be Continued 할게 없는데.....
그래도 인트로가 있었으니 에필로그는 해야겠지요?ㅎㅎㅎㅎ
첫댓글 여행갈때는 멋진 썬그라스 하나는 있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880년 2차 수신사로 김홍집이가 갈때 왜놈들은 고종의 아그레망이 없다고 외교 사절 대접도 안해주었지요. 그때 청나라 외교관 황쭌센이가 조선을 위해 해준말, 연작처당과 자강. 요즘 역사학 박사 받기가 지랄같다고 합니다. 소위 이런 역사를 놔두고 지놈의 역사 권위만 지키려고 하고, 상고사는 제쳐두고 현대사만 왜곡하는 지랄같은 역사한다는 놈들이지요. 역사 떠드는 놈들 대부분 문학박사입니다. 힘이 있어야 합니다. 광개토 장수왕 힘이 있었습니다. 연개소문 힘이 있어지만 그놈의 감투가 무엇인지 쪼개지고 허수아비 보장왕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제 썬그라스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ㅎㅎㅎ
다음에는 좀 더 괜찮은 걸로?ㅎㅎ
진정한 역사학자가 여기 계셨네요.
여기에 역사 이야기 코너를 하나 개설해보심이 어떠하실지....
@주창일 요즘 골프장 가도 고글 쓰고 오는데 자랑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맹탕 예초기 보호 안경 쓰고 다니거든요. 백두팀들 안경이 모두 좋은 것 같아요. 주박사야 사진 찍으려면 쓸수가 없겠지요. 역사코너 만들어서 인기 없으면 배너 길이만 차지해요. 만들지 마시고 좋은 글 올려주심 댓글 달께요.
잃어버린 역사 찾는데 큰 역할 했네요. 지식이 높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저 자신도 노력할 것입니다.
같이 갔으면 좋았을텐데요.ㅎㅎ
다음에 갈 일이 있으면 낑겨주소.ㅎ
내가 요청할 말이죠.^^
역사가로 다시 발돋음 하시는 군요
감사합니다
박환수 역사학자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ㅎㅎㅎ
역시 ! 하고픈 속마음을 소회하는군요. 고구려유적지 탐사여행을 별도로 추진함도 의미가 있을것 같네요.
수고하셨소이다 !
제 생각만 너무 나열했나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