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의 마지막 주, 바다 위로 지는 태양 앞에 선다. 하고많은 해가 뜨고 지지만 '마지막 태양'은 언제나 유별나다. 사람들과 왁자지껄하며 어울려 벌이는 마무리도 좋지만,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 해를 정리하는 조용한 시간도 필요하다. 매서운 한파가 귓전을 휘감아 몸이 움츠러들어도 바다를 바라보고 선다. 일몰 혹은 낙조(落照), 하면 서해다. 이번주는 서해에서 지는 해를 보고, 덤으로 뜨는 해도 보자. 수도권의 대표적인 어항(漁港)인 김포 대명포구의 낙조와 보기 드문 서해의 일출 포인트를 소개한다.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 달려 경기도 김포로 향한다. 김포는 염하강을 사이에 두고 강화를 마주 보고 있다. 염하강은 북쪽에서 흘러든 한강물과 서해의 바닷물이 뒤섞여 흐르는 강이다. 낯선 사람들에게 염하강은 그저 강화도와 김포 사이 바다로 보일 뿐.
북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서해를 만난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염하강이 서해와 만나는 지점이 목적지다. 조선시대 군영이었던 덕포진(德浦鎭)과 삼십여척의 어선이 남아 고기잡이를 하는 작은 어항 '대명포구'가 그곳이다.
- ▲ 대명포구가 일몰을 맞는다. 어둠이 내린 산언덕 위에 주황빛 점을 찍더니, 검푸른 저녁 하늘에 물감 번지듯 서서히 스며든다. 정박한 어선들이 아쉬운 듯 지는 해를 향하고 섰다.
- ▲ 대명항에 어둠이 내리고, 김포와 강화를 연결하는 초지대교가 불을 밝혔다. 밤 바다를 수놓는 알록달록한 조명이 어선과 어우러진다.
그런데 계단을 오르던 찰나, 눈앞에 황금빛 구릉지가 펼쳐진다. 저 멀리 흐르는 푸른 염하강에 반사된 햇살에 눈이 부시다. "왜 이곳에 왔을까"라는 후회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 없다. 혈전을 펼쳤던 공간이라기엔 너무나도 평화롭고 아늑해 도리어 유적지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다. 구릉지 위로 난 좁은 산책로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발아래로는 15개의 포대가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 둔덕을 덮고 직사각형 모양의 구멍을 내 포를 설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포대와 포대 사이는 돌담으로 쌓았다. 포가 설치된 자리에 몸을 웅크리고 들어가 네모나게 난 구멍 사이로 바깥을 바라본다.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은폐된 공간. 이제는 포성은 사라지고 관광객의 평화가 그 공간을 메운다.
포대 위를 걸어 강가로 향한다. 바람 속에도 흔들림 없이 서 있는 소나무와 잎을 모두 떨어낸 참나무와 도토리나무가 겨울 강변 정취를 더한다. 강 위로 갈매기가 난다. 철책이 설치돼 있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강변에 무리지어 있는 갈대는 바람에 흔들려 '쉬이, 쉬이' 소리를 낸다.
걸음을 옮길수록 강바람이 더욱 거세진다. 바람 소리, 갈대 소리 이중주에 어디선가 또 다른 소리가 얹어져 삼중주가 시작된다. 시내가 흐르는 '졸졸' 소리가 아니고, 급류가 바위를 거세게 훑고 내려가는 '콸콸' 소리다. 바람도 예사롭지 않다. 뼛속까지 시리다는 말이 이해된다. 고개를 오른편으로 돌려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보니 '손돌목'이라고 쓰여 있다. 동절기 이곳에서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부를 정도라니 맞게 찾아오긴 한 모양이다.
손돌목은 김포와 강화 사이 좁은 해협이다. 전설이 전해진다. 고려 고종이 침입한 몽골군을 피해 강화로 가는 피란길 뱃사공이 '손돌'이었다. 고종은 '손돌이 나를 죽이려 험한 강을 지난다'며 목을 베 죽이려 했지만, '손돌'은 '강화에 무사히 도착하려면 이 바가지를 따라가라' 말하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과연 물결이 거칠어지매, 강에 띄운 바가지를 따라가니 편한 물길이 이어져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했다. 고종은 이를 미안하게 여겨 후하게 장사를 치러줬다. 손돌은 죽어서도 손돌목 강가에 우직하게 누워 있다.
해가 머리 위에 올라앉았다. 겨울이라 해가 짧아 11시를 막 넘겼는데 벌써 대낮이다. 산책길 곳곳에 놓인 벤치에 앉아봄직도 하건만, 온몸이 꽁꽁 얼어 푸른 봄에 다시 오리라 기약한다.
덕포진을 빠져나와 조금 걸으면 '덕포진 교육박물관'이 보인다. 이곳은 오래전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김동선·이인숙 부부 교사가 차린 박물관이다. 시력을 잃어 버린 부인 이씨를 위해 남편 김씨가 만든 박물관이다.
- ▲ 햇살이 수면 위에 부서진다. 바닷물이 자리를 비운 한적한 대명항의 오후, 망둥어를 낚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유롭다.
- ▲ 치열한 전투의 추억을 안고 있는‘덕포진’. 살갗을 에는 강바람마저 넉넉히 안아주는 포근함은 덤이다.
드디어 대명항으로 향한다. 김포와 강화를 잇는 초지대교를 왼편으로 하고 건너편 강화 땅이 가깝게 보이는 좁은 바다를 볼 수 있다. 썰물 때라 항에 정박한 어선의 밑바닥이 다 드러났다. 물이 빠진 틈을 타 망둥어를 낚는 낚시꾼 서너 명이 눈에 띈다. '이것도 바다냐'며 고개를 젓기엔 아직 이르다. 대명항은 '낙조'가 예술이다.
먼저 싱싱한 해물로 배부터 채운다. 대명항 수산물 직판장은 평일 낮인데도 그리 한산하지 않다. 어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이곳 상점에서는 그날 잡은 생선과 해산물을 판매한다. 광주리마다 싱싱한 해산물들로 그득하다. 겨울철 대명항 별미는 '삼식이'와 '숭어' 그리고 숭어 새끼 '동아'다. 삼식이는 매운탕으로 끓여내면 그 맛이 더 일품이라 한다. 삼식이를 번쩍 들자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입을 쩍 벌려 웃음이 절로 나온다.
대명항 주변은 크고 작은 횟집으로 가득하다. 특별한 맛집은 없다. 신선한 생선이 있으니 대단한 비법도 필요 없다. 펄떡거리는 숭어 한 마리와 삼식이를 회로 떠 먹고, 나머지를 매운탕으로 끓여 맛본다. 쫄깃하고 달콤한 맛의 삼식이는 회로도 탕으로도 일품이었다. 바다의 신선함은 회로 먼저 즐기고, 매서운 겨울의 추위를 뜨끈한 매운탕으로 녹이니 다른 반찬은 필요 없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함상 공원을 거닌다. 지난 9월 문을 연 이곳에는 2006년 12월 퇴역한 운봉함이 정박해 있다. 운봉함 내부를 개조해 함정 내에서 이뤄지는 해군의 활동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공원에는 바다를 상징하는 공공미술작품들과 해상 초계기, 단정, 수륙양용차 등을 전시해 볼거리가 쏠쏠하다.
대명항 인근에는 차를 마시며 쉴 수 있는 공간은 없다. 하지만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일몰 전까지 남은 시간을 운치 있게 보낼 수 있는 산속 찻집이 있다.
김포시 월곶면 갈산리로 향하는 언덕배기 오른편에 있는 '산언덕'이 그곳이다. 1층과 다락방으로 이뤄진 2층 건물인 이곳은 언뜻 가정집처럼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후반 여주인이 손님을 맞는다. 테이블이라야 다락방을 포함해 고작 5개 남짓이지만 나무로 된 오래된 의자와 탁자 그리고 꽃·나무·한지로 꾸민 실내 인테리어가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차를 시키면 땅콩과 과일을 덤으로 내주는 주인의 마음씀이 정겹다.
일몰이 기다리는 대명항으로 다시 발길을 돌린다. 항구를 빠져나갔던 바닷물이 다시 제자리를 찾으니 바다가 그득해졌다. 하늘 끝자락으로 해가 점점 내려온다. 눈부신 황금빛을 띠던 해가 산머리에 닿더니 점차 붉은 기운을 입는다. 하루를 마감하는 마지막 조업을 마친 어선 한 대가 항구로 들어온다. 지는 해가 산 뒤로 사라지면서 지평선을 빨갛게 물들인다. 어선 위 높은 기둥 그림자가 항구에 진다. 코끝을 쨍하게 하는 바닷바람도 뜨겁게 느껴진다.
어둠이 내려도 얼굴을 감춘 해가 휘날리는 주황빛 옷자락은 여전히 남아 산등성이를 타고 흐른다.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저녁이 찾아오자, 초지대교에 불빛이 켜진다. 조명이 수놓는 밤바다를 바라보고 한참을 서 있으려는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항구 문이 곧 닫힙니다." 그렇게 2010년이 간다.
강변북로→행주IC→김포IC→48번 국도→누산IC에서 356번 지방도로→양곡우회도로사거리 대곶방향 우회전→덕포진→덕포진 교육박물관→대명초교 사거리 우회전→대명항, 대명항 수산물직판장, 김포 함상공원→대명초교 사거리 좌회전→석정리 방면→김포 농업기술센터 후방 200m 우측 카페 '산언덕'→대명초교 사거리→대명포구. 수도권에서는 당일코스다.
- ▲ 내 이름은 '삼식이'
덕포진 유적지: (031)989-9794
덕포진교육박물관: 어른 2500원, 중·고생 2000원, 초등학생 1500원, (031)989-8580, www.dpjem.com
대명항: 해가 지면 항구에서 나와야 한다. 문의 대곶면사무소 (031)980-5327
김포 함상공원: (031)987-4097, 지금은 무료, 내달부터 입장료를 받는다. 3000원.
김포 문화관광과: (031)980-2742, tour.gimpo.go.kr
겨울철 대명항에서 맛볼 수 있는 제철 생선은 '삼식이' '숭어' 숭어 새끼 '동아'. 대명항 수산물 직판장에서 구입해 인근의 횟집에 가져가면 회와 탕으로 조리해 준다. 못생긴 생선 '삼식이'는 탕으로 끓이는 게 제격. 순하네 횟집 (031)989-1187, 바다마을 횟집 (031)981-5044.
보너스: 오붓한 분위기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카페 산언덕 (031)981-0907. 찾기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