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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地名) 위치(位置)의 중요성: <적구(磧口)>
● 조선(朝鮮)사에서 말하는 삼국【三國 : 고구려(高句驪). 백제(百濟). 신라(新羅)】시절,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는 왕조(王朝)를 이어 온지 900 년 만에 당(唐)이라는 정체불명(正體不明)의 집단(集團)에 의해 나라가 멸망(滅亡)당했다고 역사서는 적고 있다. 여기에 삼국(三國)중의 한 나라인 “신라(新羅)”가 당(唐)이란 집단(集團)의 배후(背後) 지원(支援)세력으로 등장하여 결국 두 나라는 영원(永遠)히 역사(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는 한 뿌리로써, 나라는 2 개로 별도로 되어 있으나, 그 태생은 동일하며, 사실적으로 보면,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는 부자(父子)지간(之間)이다. 따라서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驪)를 넒은 의미로 보면, 한나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본인의 주장이다.】
● 당(唐)이 건국(建國)한 후 태종【太宗 : 이세민(李世民) : 고조(高祖)인 이연(李淵)도 혈통적으로 보면 돌궐(突闕)과 혼혈인이라고 한다. 따라서 태종(太宗) 역시도 돌궐(突闕)의 피가 흐르는 혼혈일 수밖에 없다.】시대에 벌어지는 당(唐)과 고구려(高句驪)의 전쟁사의 시작은 큰 사건이 아닌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곧 “고구려(高句驪)의 개소문(蓋蘇文)”이 자신의 주군(主君)인 “영류왕(營留王)”을 살해하고 “보장왕(寶藏王)”을 새로운 왕(王)으로 세웠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당 태종은 전쟁(戰爭)을 해야만 하는 <중국(中國)은 본 뿌리와 같고, 사이(四夷)는 가지와 잎과 같다.>라는 것에 그의 명분(名分)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에서 보면 가당치도 않은 것으로 신라(新羅) 조정(朝廷)의 이름일 수도 있다.】자신【自身 : 당 태종은 그의 아버지를 독살하고, 많은 형제를 죽인 후 제위(帝位)를 이었다고 하는 역사해설도 있다.】의 죄업(罪業)은 전혀 반성치 않고, 남의 나라 사건을 자신의 명분(名分)으로 삼으려한 것은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을 것이다. 당(唐)이란 나라의 위치(位置), 존재(存在)여부조차 의문이기 때문이다.
● 우선 당 태종이 고구려(高句驪)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전의 상황을 보면서 풀어보기로 하자. 고구려(高句驪)가 당(唐)의 침략(侵略) 의도를 미리 알고, 돌궐(突闕)에게 사신(使臣)을 보내, 화친(和親)과 함께 운명을 함께하자고 제의(提議)했다는 기록에 따라, 과연 당시 돌궐(突闕)이 어디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으며, 고구려(高句驪)와 손을 잡고 당(唐)을 견제(牽制)할 수 있었을까를 지형지리(地形地理), 방향(方向)등으로 알아보자. 일단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 말하는 “고구려(高句驪)”는 한반도(韓半島) 북부지방에 있었다고 설명한다. 과연 그럴까? 우선 지명(地名)의 본래 위치를 파악(把握)해 보면 좀 더 확실한 영토개념을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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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통감(資治通鑑) 193 唐紀 9 /太宗 /貞觀 4年 (공원 전 630년)
《二月,己亥,上幸驪山溫湯.甲辰,李靖破突厥頡利可汗於陰山.先是,頡利既敗,竄于鐵山,鐵山,蓋在陰山北.餘衆尚數萬;遣執失思力入見,謝罪,請舉國內附,身自入朝.上遣鴻臚卿唐儉等慰撫之,又詔李靖將兵迎頡利.頡利外為卑辭,內實猶豫,欲俟草青馬肥,亡入漠北. : 2월, 황제가 려 산【驪山 : 본인 주 : 장안 근교】온천에 행차하였다. 갑 진, 이정(李靖)이 돌궐(突闕)의 힐 리(詰利)가한을 음산【陰山 : <본인 주> : 여기에 나오는 음산(陰山)은 현 지도에 그려진 황하 서북(西北)안에 있는 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 신강(新疆)지방에 있는 산을 칭한다.】에서 깨뜨렸다. 먼저 힐 리(詰利)는 이미 패하여 철산【鐵山주석(註釋) : 음산(陰山)의 북쪽에 있다. <본인 주> : 현 지도에 그려져 있는 황하 서북에 있는 음산(陰山)이 아니라는 증거(證據)이다. 현 음산(陰山)의 북쪽에 철산(鐵山)이란 산은 없다. 따라서 이 철산(鐵山)은 현 신강(新疆)서북(西北)지방의 돌궐(突闕) 지방에 있었던 산의 이름이다. 】에 숨었는데, 나머지 무리가 항상 수만(數萬)이 있었다. 파견되었던 “집 실 사력(執 失 思 力)”이 입견(入見)하여 사죄하면서, 온 나라가 내부하겠다고 청하면서, 스스로 입조(入朝)하였다. 황제가 홍로 경 “당 검”등을 보내 위로하고 어루만져 날래었다. 또 조서를 받은 이정(李靖)의 장병들은 ‘힐 리“를 맞이하려 하였으나, 힐 리(詰利)는 밖으로는 천함을 하소연하였으나, 미리 마음속으로 예측하고, 풀이 푸르고, 말이 살찌는 것을 기다리고는, 막북(漠北)으로 달아나 들어갔다.》
《唐儉脫身得歸.靖斬首萬餘級,俘男女十餘萬,獲雜畜數十萬,殺隋義成公主,擒其子疊羅施.頡利帥萬餘人欲度磧,李世勣軍於磧口,頡利至,不得度,其大酋長皆帥衆降, 世勣虜五萬餘口而還.斥地自陰山北至大漠,此後方盡有隋恆安,定襄之地.露布以聞。당 검은 탈출하여 돌아왔다. 이 정(李 靖 :전 병부상서)은 만여 돌궐 병을 참(斬: 목을 베다)하고, 남자와 여지 포로 십여만과 여러 가축 십만 두를 획득하였다. 수(隋)나라의 ‘의성공주’를 살해하고 그 아들 “골 라 시”를 생포하였다(擒 :사로잡을 금). 돌궐의 힐 리(頡 利)는 장수 및 만여 사람과 적(磧)을 건너려 하였으나, 이 세적이 휘하병사들을 데리고 적구【<본인 주> : 磧 口 : 신 강성 이오(伊吾)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힐 리”는 적(磧)지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대추장과 우두머리들 모두 항복했다. 이 세적은 포로 5만 여구(인)를 데리고 복귀하였다.> 斥 地 自 陰 山 北 至 大 漠, ; 물리쳐 개척한 땅이 음산(음산(陰山))의 북쪽에서 대막(大漠)에 이르렀다. 此 後 方 盡 有 隋 恆 安, 定 襄 之 地. : 이곳(此)의 후방 즉 남쪽지방은 수나라의 항안 및 정양의 땅이다.】露 布 以 聞. : 베로 이슬(露)을 피한다고 들었다.》
● 위의 글 중에서 “적구(磧 口)” 가 있다. 당시 『‘이 세적’이 돌궐(突闕)을 치면서 “이곳 적구(磧 口)”에 주둔(駐屯)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적구 (磧 口)>는 바로 『현 신 강성 이오(伊吾)의 동쪽이다.』라고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주석(註釋)에서 설명하고 있다.
곧 《 詔 以 涼 州 都 督 李 大 亮 為 西 北 道 安 撫 大 使 ,於 磧 口 貯 糧> : <註釋> : 此 磧 ,即 伊 吾 東 之 磧.( 이곳 적(磧)은 곧 이오(伊吾) 동쪽의 적(磧)이다.》
현 신강(新疆)지방의 북쪽과 서북쪽에서 돌궐(突闕)기마(騎馬)가 쳐 내려오자, 당(唐)의 군대(軍隊)가 이들을 막으려고 주둔(駐屯)했던 곳이 “적구(磧口)”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돌궐)이 당(唐)에게 밀려 다시 도주한 곳은 이들의 근거지로써, 천산북로(天山北路)의 서북쪽지대이다.
당시 “힐리(詰利) 가한”과 “당 태종(太宗)”이 만났다는 곳이 “적구(磧口)”다. 이를 설명하면 『돌궐(突 厥)의 “힐 리(詰利) 가한(可汗)”과 “당 태종(太宗)”과 고구려(高句驪)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사자”가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사학(史學)은 설명하기를, “적구(磧口)”는 산서(山西) 서북지방에 있다.』고 한다. 얼마나 웃기는 희극인가?
결과론이지만 당시의 당(唐)나라의 영토는 그【신강의 이오(伊吾)】 동쪽지방이 아니라는 증거(證據)다. 여러 차례에 걸쳐 설명한 내용이나, 만약 『 ➊ 당(唐)이란 나라가 존재(存在)했다면, 그것은 제후(諸侯)로서의 국가요, 그 위치는 이곳지방의 남(南)쪽 일부와 서남(西南)쪽 지방이 될 것이며, ➋ 당(唐)이란 신라(新羅) 조정(朝廷)의 이름이었다면, 신라(新羅)의 영토에 대한 재 해설이 필요한 부분이다.』
『적구(磧口)』!!!!!!!!!!!!!!이곳이 신강(新疆)성 이오(伊吾)의 동쪽 적구(磧口)라는 것을 알면, 고구려(高句驪)가 반도(半島)지방이 아닌 대륙(大陸)의 왕조(王朝)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조선(朝鮮)의 땅이다. 이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기록은 조선(朝鮮)사를 새롭게 인식하고 해설해야 될 필연적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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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구(磧口)>의 위치에 관한 증거(證據)와 고증(考證)은 같은 정관(貞觀) 4년 조 기록에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한 지명(地名)의 위치(位置) 고증(考證)은 <적구(磧口)와 회원(懷遠)>의 두 곳을 확인할 수 있다. 【회원(懷遠) : 회원(懷遠)진 또는 회원(懷遠)현으로 수(隋), 당(唐)이 고구려(高句驪)를 칠 때 군량미(軍糧米)를 미리 저축(貯蓄)해 놓은 곳이다.】회원(懷遠)은 당(唐)이 서역(西域)지방의 이민족 침입에 군대의 양식을 비축해 놓은 곳이다. 이러한 “회원(懷遠)”을 하북(河北)성이나 그 동(東)쪽 지방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조선사(朝鮮史)의 비극이다.
《西突厥種落散在伊吾,伊吾,即漢伊吾盧之地,在大磧外,東至陽關二千七百三十里.是年置伊吾縣及伊州、伊吾郡於其地.詔以涼州都督李大亮為西北道安撫大使,於磧口貯糧,此磧,即伊吾東之磧.來者賑給,使者招慰,相望於道. : 서돌궐(西突闕) 종족 부락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이오(伊吾)”에 있다. 【주석(註釋) : 이오(伊吾), 곧 한(漢)의 이오 노(伊吾 盧)의 땅인데, 대적(大磧)밖에 있으며, 동쪽으로 양관(陽關)이 2,730 리 떨어져 있다. 시년에 이오(伊吾)현과 이주(伊州)를 설치하였는데, 이오(伊吾)군의 그 땅이다.】조서(詔書)를 받은 량 주 (凉 州)도독 “이 대량”이 서북도안무대사가 되어, 적구(磧口)에 양식(糧食)을 저축하였는데, 【주석(註釋) : 이곳의 적(磧)은, 곧 이오(伊吾) 동쪽의 적(磧)이다.】오는 자에게 공급하여 구휼하고, 사자(使者)들을 초대하여 위로하고, 길을 서로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
※ 적구(磧口) : 적(磧)지방으로 들어오는 입구(入口)라는 뜻임.
이오(伊吾)는 합 밀(哈密)로써 양관(陽關)은 남(南)쪽에 가깝다. 양관(陽關)주위에서 서쪽지방은 백용 퇴(白龍堆)지방이며, 또 그 서쪽은 “누란(樓蘭)”으로 “로프노르호수(포창해)”가, 정 서쪽으로 타클라마칸 사막이 시작된다.
● 이러한 곳에 있었던 “적구(磧口)”를 산서(山西)성이나 섬서(陝西)성 북방쯤에 있었다는 역사 해설은 역사왜곡(歷史歪曲)의 생생한 증거(證據)로 볼 수 있다. 이왕 지명(地名)의 고의적 이동에 관한 것이 나왔으니 <현 산서(山西) 대동(大同)>에 대한 지명(地名) 이동(移動)에 대해서도 알아보기로 하자.
● 資治通鑑 193 唐紀 9 / 太宗 貞觀 4年 :《大同道行軍總管任城王道宗引兵逼之,新志曰:黃河東壖有古大同城,今大同城永濟柵也.北逕大泊,十七里至金河. : 대동(大同)도 행군총관 ‘임성 왕 도종’이 병사들을 이끌고 닥쳐왔다. 【<주석(註釋)> : 신지(新志)에서 이르기를, 황하(黃河)가 영하(寧夏) 서북의 내몽고지방에서 동쪽으로 꺾이어 흐르는 곳에 있는 공지(壖)에 옛 대동(大同)성이 있다. 지금의 대동(大同)성 영제(永濟)책이다. 북쪽으로 곧장 가면 배가 정박할 수 있으며, 17 리에 금하(金河)에 이른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 『옛 대동 성(大同城)이 있다.』라는 뜻이다. 결국 현재의 역사해설에서 나오는 산서(山西) 동북방(東北方)의 “대동 성(大同城)”은 짝퉁이라는 증거(證據)며, 이것은 또 짝퉁이라는 것을 고증(考證)해주는 대목이다. 이곳에는 “대동 천(大同川)”이란 하천도 있으며, 이곳은 “천 덕(天德)군의 서남”이다.
● 【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모른 채 “조선사(朝鮮史)”를 해설한다면, 영락없이 “반도(半島)”지방에 쳐 박혀 있는 초라한 “조선(朝鮮)의 역사(歷史)일 뿐이나, 진실 된 조선(朝鮮)의 역사 강역(疆域)을 알고 나면, 영광(榮光)과 천하(天下)를 제패(制覇)했던 선조(先祖)들의 기개(氣槪)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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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견문록(번역본)에 의한 한마디! 동방견문록(김 호동 역주)을 보면, 176페이지에 이러한 말이 있더군요. 본문과 주석 편을 보면 ;
카 물【이오(伊吾) 또는 합밀(哈密)을 말한다.】에 대한 설명에서 – 그곳의 부인들은 미모(美貌)가 뛰어나고, 명랑하며, 자유 분망하고, 남편의 명령에 극도로 순종적이다. 나그네에게 아내가 동침(同寢)하는 것을 허락하는데, 이것은 모든 일이 순리적으로 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석 : 이러한 풍습에 대해, <홍호의 송 막(松漠) 기문에도 보인다.>고 설명한다. <간단하게 정리하였으며, 내용은 변함없음>
● 본인은 <송 막 기 문>의 기록 내용이 반도 동북방이 아니라, 중원(中原) 서북(西北)방의 <알타이산맥과 항 애 산맥 사이 또는 그 북쪽에 관한 것>이라는 주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연재하였다. 또한 금(金)나라의 도읍지에 대한 위치 역시 이 주위라는 것을 해설하였음에 비춰보면,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의 내용은 빛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사의 진실이 하나하나 밝혀지는 것에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2011년 10월 22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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