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깔아 놓은 가죽판, 그 밑은 사소한 메모에서부터 중요한 통지문까지 넣어 두는 곳이다. 서랍을 열어 확인하는 것보다 손쉽게 들쳐볼 수 있어 애용하는 장소다. 어제 들쳐보니 자동차 검사와 관련된 공문서가 보였다. 4월 5일 검사기간 만료, 그날을 기준하여 전후로 한 달 안에 검사를 하면 된다. 그러나 기한이 길다 보면 그날을 놓치는 경우가 참 많다. 날자를 놓치면 1일 거의 만원 가량 과태료가 발생하게 된다. 당장 오늘 해결하려고 마음을 먹은 후 전화를 걸었다. 토요일인데 혹시 휴무라면 하는 기우에서였다. 13시까지 근무란다. 단박에 준비를 끝낸 후 지하 3층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나는 오래전 검사장을 지정하면서 산 밑에 있는 자동차 정비센터를 찾아 정해 놓았다. 차를 맡겨 놓고 그 시간을 이용하여 등반을 즐기다 내려와 찾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간단하게 backpeack을 꾸렸다. 두유 하나, 견과류 두 종류 두 봉지, 아주 작은 초콜릿 3개, 물병에 담은 생수 한 통, 삶은 달걀 두 알, 그리고 아들이 끓여 담아준 홍차 보온병, 윈드재킷, 보온성 재킷, 장갑, 모자, 스틱, 손수건, 모자, 색안경, 카메라,... 우선 강변을 달려 검사장으로 접근하였다. 담당에게 이것저것 부탁을 하였다. 전조등 기본 전구가 끊어져 전구를 교체해야겠기에.. 그리고 전나무 숲으로 접근하였다. 겨우내 메말랐던 산 옷이 색을 입히고 있었다. 여리고 마음에 포근하게 담기는 연둣빛으로 야금야금 칠해 가고 있었다. 윤곽이 선명했다. 이 시기를 놓치면 도저히 볼 수 없는 그림이다. 금방 세월이 흐르면 연두는 초록으로 바뀌고 더 나가면 녹빛이 산그늘을 만들어 놓는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무성하다는 표현을 빌려 사용한다.
원근에서 보는 아름다움,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전나무 숲에 이르자 잠시 짐을 내려 놓고 행장을 다시 수습하였다. 신발 끈 중간을 잡아당긴 후 옭았다. 그리고 허리띠를 다시 동여메고 윈드재킷을 꺼내 입은 후 목부분 지퍼를 끝까지 끌어 올려 잠궜다. 모자를 꺼내 쓴 후 장갑과 스틱을 꺼내 스틱은 단을 조정한 후 단단하게 조였다. 마지막으로 색안경을 목에 걸고 양지바른 능선을 향해 오르기 시작하였다. 바람이 체온을 빠르게 빼앗아 가는 것을 느꼈다. 대단한 꽃샘 추위가 성가시게 굴었다. 볕이 잘 드는 양지와 음지에서 느끼는 감각은 전혀 달랐다. 음지는 겨울이었다. 양지는 아늑했다. 봄볕을 즐기려 남쪽방향으로 터진 유리창 안 온실같은 방에서 해바라기 하는 것 같은 포근함이 너무 좋았다. 사방이 터진 능선에서 칼바람을 맞으면 엄동을 느겨야 하였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 노래를 부른 시인의 황무지란 시어(詩語)를 떠올리며 몸을 움추렸다. 그러다 안부 봄볕이 가득한 곳을 만나면 장마끝에 추운날 옷장에서 긴소매를 꺼내 입혀주시던 어머니를 통해 얻은 그 따듯함을 느끼며 만개된 진달래 꽃구경을 하며 봄날을 소일하며 보냈다.
춘래춘불사춘(春來春不似春)의 꽃을 시샘하는 추위를 잊은채 소월의 영변의 약산 진달래를 떠올리며 분홍빛 꽃 그늘에 갇힌채 오랜 시간 앉아 있었다. 나는 지금 도취의 피안에 갇혔다. 봄 바람이 살랑 일더니 꽃잎 서 너장을 떨군다. 그리고 순간 파문이라는 단어가 떠르면서 금세 지어지더니 김수영 시인의 피안의 도취가 떠올랐다. 더듬거리며 조합해 나갔다.
도취의 피안
김수영
내가 사는 지붕 위를 흘러가는 날짐승들이
울고 가는 울음소리에도
나는 취하지 않으련다
사람이야 말할 수 없이 애처러운 것이지만
내가 부끄러운 것은 사람보다도
저 날짐승이라 할까
내가 있는 방 위에 와서 앉거나
또는 그의 그림자가 혹시나 떨어질까 보아 두려워하는 것도
나는 아무 것에도 취하여 살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번씩 찾아오는
수치와 고민의 순간을 너에게 보이거나
들키거나 하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나의 얇은 지붕 위에서 솔개미 같은
사나운 놈이 약한 날짐승들이 오기를 노리면서 기다리고
더운 날과 추운 날을 가리지 않고
늙은 버섯처럼 숨어 있기 때문에도 아니다
날짐승의 가는 발가락 사이에라도 잠겨 있을 운명------
그것이 사람의 발자욱 소리보다는
나에게 시간을 가르쳐 주는 것이 나는 싫다
나야 늙어가는 몸 위에 하잘 것 없이 앉아 있으면 그만이고
너는 날아가면 그만이지만
잠시라도 나는 취하는 것이 싫다는 말이다
나의 초라한 검은 지붕에
너의 날개소리를 남기지 말고
네가 던지는 조그마한 그림자가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나의 귀에다 너의 엷은 울음소리를 남기지 말아라
차라리 앉아 있는 기계와 같이
취하지 않고 늙어가는
나와 나의 겨울을 한층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의 눈이랑 한층 더 맑게 하여다우
짐승이여 짐승이여 날짐승이여
도취의 피안에서 날아온 무수한 날짐승들이여.
시인의 절박함이 지금 내가 있는 꽃 그늘과 상관 없는 일이었다. 칼끝을 이기는 것은 사랑이라 믿고 살아 온 지금 이 남자에겐 쓸때 없는 푸념에 불과하였다. 사랑의 실체를 보면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사랑을 안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진 마음이
생명을 불러 모았고
사랑이
꽃을 피었네
마음에 든 꽃은
지는 법이 없다.
지금 내가 이곳에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노래였다. 꽃에 멈추었던 힘을 내려놓자 시선에 파문이 생겼다. 잔잔하게 풍경 속으로 퍼져 나갔다. 흰 화선지에 연둣빛이 물들기 시작하였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물감 질은 수면 위에 조각된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다가왔다. 산 그림자의 반영이었다. 장딴지에 힘을 써 일어섰다. 반영으로 자맥질을 하듯 걸음을 던졌다. 호흡이 끊어질 듯 가파르고 허리에 납추가 달라붙듯 한 시간이 지나자 능선에 올라설 수 있었다. 소나무 기둥에 등을 붙들어 메고 섰다. 거북이 등처럼 생긴 껍질에서 오는 느낌은 아늑함이었다. 오래도록 볼 수 있어 좋았다. 그것은 소나무가 의지를 주어 마음 놓고 연둣빛 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정말 아름답다.
순수함이 가득한 빛, 혼탁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속임이 없는 순수는 정의로운 열정과 결합되어 미래를 개척해 나간다. 나는 지금 그곳을 보고 있는 것이다. 얼추 시간이 많이 흘렀다. 다음에 이곳에 와 보면 많이 변해 있을 것이다. 그때 가서 나는 다시 이 봄을 기다릴 것이다. 이 모습을 보려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리적으로는 그렇지만 자신의 마음에 담긴 것은 자신이 늘 꺼내 볼 수 있다. 사랑이 깃든 아름다운 것들 중, 마음에 담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작한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고요함이 참 좋다. 물 흐르는 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숲 속에서 새 생명들이 올라오는 움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더 자세하게 경청하기 위하여 나의 숨소리를 가만가만 죽여야 했다. 고요한 맑은 정적을 깬 것은 상춘객이었다.
유난하게 시끄러웠다. 길을 재촉하여 아래 전나무 숲으로 옮겼다. 그리고 더 머물다 처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숲에서 있었던 일을 적고 있는 중이다.
첫댓글 연둣빛 그늘에서
자연의 분홍색 연둣빛에 도취되어
혼자서 속삭이며~
소월의시, 김수영의 시까지 읇어가며
좋은 시간 보내고 오신 리더님!
멋지 십니다~
높은 산이 아니면
저도 갈 수있는데~ ㅎ ㅎ
날이 다시 겨울로 환생?? 감기 조심하시고요. 잘 보존하셔서. 변덕이 심한 이 봄을 이기시기 소원합니다. 늘 은총과 자비 안에서 편안하셔요. 알렐루야~~ 알렐루야~~